6화
시간이 더 흘러 정우현은 이따금 동네 아이와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밖에서 뛰어놀았다.
그러면서 하나 알게 된 것이 있었으니, 바로 그의 달리기가 무진장 빠른 것이었다.
하지만 속도를 내면서도 한순간 자기 또래 아이의 달리기치고는 지나치게 빠르다는 것을 깨닫고 일부러 천천히 달렸다.
‘너무 빠르면.’
그가 속도를 낮춰 달리며 생각했다.
‘지나치게 주목받을 거야. 당장 그래서 좋을 건 없을 것 같다. 어디 육상 대회에 나갈 것도 아니고.’
하는데 멀리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우현아!”
어머니였다. 어머니 황희진이 앞치마를 한 채 집 밖으로 나와 정우현을 부르고 있었다. 그녀의 품에는 동생인 정다현도 있었다.
“정우현! 밥 먹어야지!”
정우현이 엄마를 보고 즉각 빠르게 달려왔다.
“…와, 우리 아들 달리기 엄청 빠르네.”
“별거 아니에요, 엄마.”
“하하, 어쨌든 엄마는 아들이 밖에서 또 놀고 있으니까 괜히 마음이 더 좋네. 맨날 집에서 어려운 책만 잔뜩 보고 있어서 그런가.”
“예, 엄마, 이것저것 다 잘할게요.”
“그래, 우현아. 걱정은 안 된다만 뭐든지 억지로 하지 마. 재밌는 걸, 하고 싶은 걸 해.”
“알겠습니다.”
하고서 그가 싱긋 웃어 보였다.
“…옵…빠.”
엄마 품에 있던 동생이 정우현을 보며 작은 손을 뻗었다.
우현 또한 동생의 손을 쥐며 재밌게 해 주기 위해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소리 냈다.
“까꿍꾸르르!”
그러자 동생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까아아!”
정우현은 그간 자신이 가진 영유아 교육 지식을 활용해 동생을 돌보고 이런저런 놀이를 함께했다.
그러자 정다현도 또래 아기들에 비해 말문을 일찍 트는 등 발달이 다소 빨랐다. 물론 오빠 정우현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실상 그보다 중요한 건, 성인 때는 기억 못 하지만 유아기의 경험이 실로 한 사람의 인격을 형성하는 데 무척이나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오빠 정우현의 관심과 교육으로 인해 아기인 정다현은 평소 애타게 엄마를 찾는 것만큼이나 오빠를 좋아했다. 또한 정우현이 워낙 어른스럽고 교육에 능해, 동생은 그를 단순히 오빠라기보다는 거의 보호자처럼 따랐다.
이렇듯 정우현을 향한 동생의 마음은 갓난아기일 때부터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 * *
단풍잎이 붉게 물든 9월의 어느 날이었다.
정우현은 아름다운 바깥 풍경에도 눈길 한번 없이 사뭇 진지한 얼굴로 조용히 달력을 보고 있었다.
‘…9월 24일….’
누가 보면 화가 난 게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심각한 표정이었다. 평소 항상 명랑하고 온화한 그에게서 이 같은 얼굴은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등산하다가 낙상하셔서 돌아가신 날이 다가오고 있어.’
그가 마른 침을 한번 삼키고는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어머니를 불렀다.
“엄마!”
“응?”
“우리 이번 주 일요일에 놀러 가요!”
“…일요일?”
“네!”
어머니 황희진은 의아했다.
천재도 천재지만, 무척이나 어른스러운 아들 정우현이었다.
다른 집 자식들은 놀이공원이나 동물원 같은,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곳에 놀러 가자고 그렇게나 떼를 쓴다는데, 정우현은 그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저 집에서 책을 보고 이따금 동생을 돌보고 밖에서 운동만 하면 그만인 애가 갑자기 놀러 가자고 하는 것이다.
“…어디 가고 싶은데?”
“…영화관이요! <타이거 킹>이 그렇게 재밌대요!”
어디 갈지, 정우현은 당연히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아버지를 등산 가지 못하게 하는 게 목적이기에, 당장 생각나는 대로 답했다. 얼마 전 티브이에서 할리우드 애니메이션 영화 광고를 봤던 것이다.
“영화관? 그럴까?”
하고서는 어머니가 뒤늦게 무엇이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치고 말했다.
“아, 맞다. 아빠는 안 돼. 일요일에 직장에서 등산 모임 있다고 했어.”
“…등산이요? 무슨 일요일에 회사 사람들이랑 등산을 가요!”
생각해 보니 어이없었다. 아버지는 정말 등산을 좋아해서, 자진해서 산을 오르다 돌아가신 것도 아니었다. 휴일인 일요일에 단합회라는 명목으로 억지로 산에 끌려가다가 그렇게 됐다.
“…그러게 말이야. 엄마도 뭐라고 했는데, 어쩔 수 없대요. 팀장님이 무조건 다 가야 한다고 해서.”
‘…이런 쓰레기 같은 회사!’
정우현의 속마음이 불타올랐다. 하지만 애써 가라앉히며, 아이처럼 곧장 외쳤다.
“아, 안 돼요! 저 그 영화 진짜 보고 싶단 말이에요!”
“…으음, 그럼 다른 날 보면 안 될까?”
“안 돼요! 무조건 그날 봐야 해요!”
“…그럼 아빠 빼고 우리끼리 보자. 엄마가 우현이 좋아하는 돈가스도 사 줄게. 좋지?”
“아아안 돼요! 무조건! 무조건 아빠도 가야 해요! 우리는 한 가족이잖아요!”
하고선 정우현이 자리에 드러누웠다.
그러고선 발을 동동 구르며 떼를 쓰기 시작했다.
‘…아니, 생전 안 그랬던 애가 왜 그러지.’
그 모습을 어머니가 조용히 지켜봤다.
‘…그 만화 영화가 너무 보고 싶은가 보다. 가족 모두랑….’
“알았어. 아빠한테 얘기해 볼게.”
마침내 어머니가 말했다.
“근데 아들, 엄마도 장담은 못 해. 아빠 회사 일이라 엄마도 어떻게 할 수 없을 때가 있어. 무슨 말인지 알지? 넌 똑똑하니까 다 알 거야!”
순간 드러누워 있던 정우현이 언제 그랬냐는 듯 벌떡 일어서 크게 답했다.
“예, 엄마! 고마워요!”
“…하하.”
어머니는 그 모습이 어이없어서 조금 웃었다.
‘일단 엄마는 설득했다.’
정우현이 생각했다.
‘모처럼 애답게 생떼를 쓰긴 했지만, 이따 아버지가 오면 어찌 될지 모르겠다. 한번 봐야지.’
* * *
이윽고 아버지가 퇴근 후 집에 도착했고, 정우현은 곧장 작전을 펼쳤다.
“안 돼.”
아버지는 단호했다. 어머니와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전 직원 등산 모임이야. 이번에 매출이 너무 안 좋아서 새롭게 심기일전하자는 의미로 오르는 거라고.”
“…아이, 아빠아아아!”
“여보, 우현이가 그렇게 보고 싶다는데 좀 같이 가자.”
드러눕는 것도 소용없었다.
“아들, 그렇게 떼쓴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어. 아빠도 솔직히 쉬는 날 회사 사람들이랑 등산하기 싫어. 하지만 해야 해.”
“…하지만!”
“안 돼. 그 누구도 아닌 우리 가족을 위해서, 아빠는 산에 가야 하는 거야.”
그렇게까지 말하자 줄곧 정우현 편이었던 어머니도 말을 아꼈다. 남편의 사정 또한 공감했기 때문이다.
‘낭패다.’
역시 벌러덩 누워 있던 정우현이 생각했다.
‘이대로는 안 돼. 어떡하지? 집에 불을 지를까? 아버지 신발을 모두 숨겨 버릴까? 으음….’
하다가는 그가 즉각 제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알겠어요. 그럼 어쩔 수 없죠. 저는 제 방에 들어가서 쉴게요.”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부모는 갑작스러운 아들의 변화에, 심지어 그렇게나 떼를 썼던 아들이 한순간 외관상으로나마 평온한 모습으로 뜻을 받아들이기에 조금 놀랐다.
* * *
일요일 오전이 되었다.
아버지는 일찌감치 일어나 등산을 갈 준비를 했다.
한데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아들 정우현의 방이었다.
“…아아….”
신음이었다. 아들의 방에서 신음이 들렸다.
똑똑한 것 못지않게 건강하기도 해서 그 흔한 감기 한 번 걸려 본 적 없는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곧장 정우현의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들은 이불을 얼굴 끝까지 올려 덮고는 계속 앓는 소리를 냈다.
“…아들, 왜 그래?”
하고 이불을 들어 올려 보니, 얼굴이 새빨개진 아들이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우현아, 우현아!”
“…끄으으….”
아들이 말은 못 하고 계속해서 몸을 떨고 있었다.
남편의 큰 소리에 어느새 어머니도 정우현의 방에 들어와서는 마찬가지로 깜짝 놀랐다.
“…여보!”
“우현이가, 우현이가 아파!”
“…아아!”
아주 잠시 아버지가 잠깐 서 있다가는 순간 아들을 번쩍 안아 들었다.
그러고서는 외쳤다.
“병원에 가자!”
그런 그의 머릿속에 회사 등산 모임은 이미 지워진 지 오래였다.
등산, 아니 회사 따위보다는 아들이 훨씬 소중했기 때문이다.
* * *
당연히 정우현은 아프지 않았다.
아버지를 등산에 보내지 않는 방법, 그건 바로 꾀병밖에 없었다.
난생처음 작정하고 연기를 했다. 한데, 자신도 놀랄 정도로 정말 감쪽같이 해냈다. 정우현이 아픈 아이가 아니라면, 세상 모든 아이는 아플 수 없을 것 같아 보일 정도였다.
중간엔 그 자신도 진짜 아픈 게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연기에 흠뻑 몰입했다.
‘…연기를 해서 완벽하게 아버지를 속였다. …이런 것도 선물일까.’
물론 끝내 그는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집에 가도 좋다는 얘기를 듣고 아버지의 차에 몸을 실은 채 집으로 향했다.
실제 아프지 않은 환자들이 병원을 찾으면 으레 그렇듯, 의사는 딱히 이상 소견이 없다고 할 뿐, 그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우현아, 진짜 괜찮아?”
“…예, 괜찮아요.”
“…아깐 정말 아파 보였는데….”
운전하며 백미러를 통해 아들을 보는 아버지 정기석이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등산 못 가셨네요….”
다시 모르는 척 정우현이 답했다.
“…괜찮아… 우현이가 건강하면 그거로 된 거야.”
등산을 가지 못하게 된 건 조금 걱정으로 남기는 했지만, 아들이 아프지 않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훨씬 컸다.
아버지는 아침에 봤던 아들의 모습에, 정말 우현이가 어떻게 되어 버리지나 않을까 하고 별의별 상상을 다 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부디, 부디 우현이가 아무 탈이 없기만 하다면 그깟 등산을 가지 못한 것은 물론, 회사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했다.
“….”
정작 정우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마침내 아버지를 지켜 냈다는 벅찬 감정에 울음이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끝끝내 참고, 말없이, 고요하게 차창 밖의 빠르게 변화하는 풍경들을 감상했다. 형형색색의 풍경들이 전에 없이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