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다만, 검사에 있어 조금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데요.”
하고 김은정 박사가 조금 무거운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아이한테, 아직 한글이나 숫자는 가르쳐 주신 적 없으시죠?”
“…예, 그럼요, 말하는 것만으로 신기해서 아직은 따로… 아, 그림책을 펼쳐 주기는 하는데 그건 잘 보지는 않더라고요.”
“그렇다면 지능 검사에 있어 문자와 기호로 표시된 부분은 제하고….”
하는데 정우현이 무언가를 보고 읽기 시작했다.
“…구욱내 최고의… 아도옹 지능 거엄사….”
박사 앞에 있던 심리 센터 안내지의 한글을 읽은 것이다.
“…아니!”
부모도 아들 정우현이 한글을 읽는 건 처음 봤다.
“….”
박사의 얼굴이 놀라움을 넘어 창백해졌다.
정우현은 그간 말을 하면서도 글이나 숫자를 읽는 모습은 부모에게 보이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워낙 놀라움의 연속이라 조금은 절제할 필요를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가 보라고 한 그림책에도 일부러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한편 그냥 아기들 보는 책이라 재미없기도 했고.
근데 더 이상 능력을 숨겨선 안 될 것 같았다.
누구보다 기대하고 있는 어머니를 위해서는 물론, 아버지 또한 자신을 위해 휴가까지 내고 병원에 함께 왔는데 제한된 검사를 받고 싶지 않았다.
“…지금 애가 한글을 읽은 건가요?”
박사가 정우현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며 부모에게 물었다.
“…그런 것 같은데요?”
어머니 역시 놀라워하며 천천히 답했다.
“빠아르고 정화악한… 거엄사를 통해… 내 아이의….”
정우현이 보란 듯이 계속해서 안내지를 읽었다.
“…따로 가르친 적 없으시다고요?”
“…예, 분명.”
하고 어머니가 고개를 돌려 남편을 바라봤다.
“당신이 혹시 가르쳐 줬어?”
“…아니. 난 집에 오면 피곤해서 우현이랑 조금 놀다가 금방 곯아떨어지는 거 알잖아.”
“….”
박사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러고서는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당장 시작하죠. 제한된 검사 말고, 정식으로 하겠습니다.”
* * *
다섯 가지 영역을 통한 지능 검사가 시작됐다.
정우현은 지난 삶에서는 성인이 되어서도 지능 검사 같은 건 한 번도 받아 보지 않았다. 그래서 조금 긴장이 됐다.
이윽고 문제지 같은 것들이 나왔고, 즉각 검사를 실시했다.
검사는 다섯 가지의 영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크게 언어, 공간, 추론, 기억, 속도였는데 정우현은 이게 검사인지 놀이인지 모를 정도로 흥미를 갖고 빠르게 과업을 완수했다.
퍼즐을 맞추고 단어를 짝짓고 기호를 쓰는 등 놀라운 속도로 그 모두를 마쳤다.
그러고서 검사실에서 나올 수 있었다.
한편 정우현이 지능 검사를 받는 과정을 넋을 잃고 본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김은정 박사였다.
“…아들!”
검사실에서 나온 정우현을 보고 어머니가 즉각 불렀다.
“…네에?”
“어땠어? 어렵지는 않았어?”
“…아, 아니요…. 재밌었어요오…!”
“그래? 하하!”
“우현아.”
모처럼 아버지가 낮은 음성으로 아들을 불렀다.
“네에…?”
“아빠는 네가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다. 그냥 지금처럼 건강하기만 하면 돼. 그러니까 이렇게 병원에 오고 무슨 검사받고 이런 게 싫으면 언제든지….”
“아이, 여보, 왜 그래, 우리 우현이 잘하고 있는데.”
하고 어머니가 남편의 말을 끊으려 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니? 힘들거나 피곤하면 언제든지 말이야….”
“…괘엔찮아아요….”
정우현이 말했다.
“재미있어요오…. 하나도 안 힘들고오오…!”
그렇게 가족끼리 이런저런 대화를 하고 있는데 드디어 박사가 나왔다.
“하아… 하아….”
그녀는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박사님?”
어머니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예, 있지요.”
“…어떤?”
역시 한껏 긴장된 표정으로 답하는 아버지다.
“…이 아이는 천재예요!”
“아아!”
“아니, 천재라는 말로도 부족해요…. 정말… 이런 아이는 처음이에요. 어쩌면 전 세계의…! 모든 역사를 통틀어도 이런 아이는 없을 거예요! 전무후무하다는 얘깁니다…!”
박사의 말을 듣고 정우현은 가만히 생각했다.
극락을 거절한 우현에게 염라대왕이 분명 특별한 능력을 준다고 했었다.
서고 걷는 연습을 할 때는 의식적으로 생각하지는 못했다. 다만, 어른의 정신을 갖고 아기가 되었으니, 의지 또한 어른처럼 강하기만 한 줄 알았다.
하지만 오늘에야 그 특별한 능력이 뭔지 알 것 같았다. 김은정 박사의 말 그대로 단순히 천재라고 표현하기에도 부족한 엄청난 능력이었다.
그것은 실로 재능이라기보다는 이능(異能)이라고 하는 게 더 옳았다.
“…그렇게 대단한 거예요? 우리 아기가?”
어머니가 재차 다시 물었다.
아들이 천재임을 세상 누구보다도 빨리 알아차렸던 그녀였지만, 권위 있는 사람의 입을 통해 직접 확인을 받으니 새삼 느낌이 달랐다.
“…예! 제가 여기서 무슨 말을 한다고 해도, 우현이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할 겁니다. 아마도 이 아이의 능력이야말로 우리 같은 사람들이 연구하고 알아내야 할 전인미답의 영역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하면서 그녀는 애써 흥분을 가라앉히려는 듯 심호흡을 몇 번 하고서 말을 이었다.
“사실 이 지능 검사의 결과를 상세하게까지 분석하고, 각 부문의 점수와 상호 관계 및 이에 따른 아이의 개별 특성을 파악하자면 며칠 걸립니다. 하지만 저는 이 아기 정우현이 검사를 받는 모습을 가만히 관찰했습니다. 근데 놀라운 모습을 보이더군요. 모든 문항을, 말 그대로 순식간에 넘어갔어요. 마치 아주아주 쉬운 게임을 하는 것처럼요.”
그러면서 그녀가 다시 고개를 내려 정우현을 바라보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혹시나 하고 제가 직접 결과지를 확인한 겁니다. 근데… 그리 상세하게 분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만점이니까요. 160점 만점을 받은 겁니다….”
“…아아.”
“심지어 단순히 만점이라는 정량(定量)적인 요소를 받기까지 소요된 시간을 함께 고려하는 등 정성(定性)적인 요소까지 감안하면, 아이의 점수는 현재로서 우리의 지표로는 측정할 수 없는 수준으로 판별됩니다….”
이런저런 어려운 어휘가 나왔지만, 부모는 박사의 말뜻을 대강 알 것 같았다.
그냥 아들 정우현이 천재라는 것이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천재.
“…그래서 저… 아니, 우리 한국대학교 심리 센터 기관은 이 아이 정우현에 관해 공식적인 연구를 하길 원하는 바 모쪼록 부모님께서 협조해 주시길….”
“아니요.”
순간 어머니가 전에 없이 당찬 목소리로 박사의 말을 잘랐다.
“검사해 주신 건 고맙고, 좋은 말씀 너무 고맙지만. 우선은 이대로 돌아가 좀 생각 좀 해 볼게요.”
아들이 천재임을 공식적으로 확인받고 싶었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그렇다고 해서 아직 어린 우현이를 어디 단체나 기관에 벌써부터 맡겨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은 아들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득이 될지 몰라도, 정작 아들에게는 득이 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엄마로서 자식을 보호하고자 하는 본능에 의한 감이었다.
“…아, 그렇습니까?”
박사가 아쉽다는 듯 답을 했다.
“예, 어쨌든 아직 두 살짜리 아기잖아요. 이것저것 할 시간은 많고요, 뭐든지 그리 급히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저희 아들입니다. 어디까지나 우리가 생각해 보고, 어떤 길이 아들의 미래를 위한 가장 현명한 길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아버지도 모처럼 아내의 말에 적극 동감하며 말을 이었다.
이에 박사가 천천히 답했다.
“…아쉽지만, 부모님들의 뜻이 그러하니 어쩔 수 없네요. 대신.”
하고서 그녀가 순간 다정한 목소리로 싱긋 웃으며 정우현과 눈을 마주치고 말을 이었다.
“우현아… 선생님 보고 싶으면 언제든 부모님한테 말하렴, 선생님이 맛있는 것도 잔뜩 사 주고, 놀이공원이나 동물원에도 같이 놀러 가고 그럴 게, 알겠니?”
“…네에, 알겠습니다아.”
그러고서 박사는 다시 고개를 들어 부모에게 말했다.
“말 그대롭니다, 언제든 생각이 바뀌면 다시 오시길 바랍니다. 또한 저희 기관의 이름으로.”
하고선 박사가 뒤를 돌아 직원을 부르고 말을 이었다.
“아이에 관해 다양한 지원을 하려고 합니다.”
“…지원이요?”
어머니가 생각도 못 했다는 듯 되물었다.
“예. 아이는 천재입니다. 천재는 그에 맞게 빠르게 발달을 시켜 줘야 해요. 집에 있는 애들 그림책 같은 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공부를 시키세요. 한글이랑 숫자를 읽을 줄 아니, 먼저 초등학교 교과 과정을 시작으로 한 단계 한 단계 고등학교 교과 과정으로 나아가세요. 그렇게 해서 빠르게 성인 수준의 학습을 하는 겁니다. 그래야만 아이도 지능에 걸맞게 성장하고 한편으로는 자기실현을 할 수 있어요. 즉 정신적으로 건강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군요.”
부모가 다소 어두운 표정이 되었다. 단계적으로 각종 학습을 시켜야 한다고 하니, 당장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고 조금 막막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우리 기관의 이름으로 아이의 학습에 관한 모든 지원을 아낌없이 하려고 합니다. 책부터 해서 각종 영상 등 시청각 자료, 필요하면 학습용 놀이 장난감도 사용할 수 있고요, 하여간 아이의 발달을 위해서라면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을 테니.”
하는데 직원이 종이 한 장을 가져왔다.
“여기에 계좌 번호와 집 주소 좀 적어 주세요. 도서 발송 및 교육비 등 각종 지원을 해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아버지 정기석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니요, 박사님. 말씀이나 마음은 너무 고맙습니다만, 이렇게 도움을 받자고 병원에 온 게 아니거든요. 비록 근근이 먹고 살기는 하지만 저희, 거지 아닙니다. 괜찮아요.”
이에 박사가 오히려 더 굳은 표정으로 답했다.
“아니요. 오히려 제가 부탁드리는 거예요. 부디 저희 지원을 받아 주세요. 실례지만 부모님께서는 우현이의 재능을 객관적으로 파악하시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 작은 대한민국 땅에서, 아니 전 세계를 통틀어서 이런 아이는 나오지 않아요.”
그러면서 더욱 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아이를 우리 기관, 아니 국가 차원에서 키워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그러지 않는다면 이 아까운 재능을 낭비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러니까 부디 지원만큼은 그냥 받으세요, 부탁드립니다.”
“….”
박사가 이렇게까지 말하자 어머니가 고심하더니 천천히 답했다.
“…그럼.”
겸손이든 체면이든 어떤 이유든 간에 더 이상 그녀의 청을 거절하는 것은 오히려 아들 정우현을 위한 일이 아닐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그러자 줄곧 굳은 표정이었던 김은정 박사가 드디어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