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9. 검주 대 무림 (2)
(399/400)
399. 검주 대 무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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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9. 검주 대 무림 (2)
2022.10.25.
“그럼 부탁드리오. 어떻게든 저 장원 안에 웅크리고 있는 국연을 추포해야 하오.”
“마교에서 도착하기 전에 말이오?”
팽중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달포가 넘게 매일 같이 부딪치고 깨지면서도 장원 안으로 들어가려고 황보영근과 팽중이 이토록 노력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마교의 중원 진출 때문이었다.
생사마의 국연은 마교의 일원이니, 자칫하면 정마대전으로 번질 수 있는 위험성이 충분했기 때문이다.
“무당에서 마교를 견제하고 있다고는 하나, 상대는 무려 마교이니 그전에 우리가 서둘러 국연을 사로잡아야 하오.”
활인문에서도 사람을 봉래로 파견했다고 했다. 황보영근과 팽중은 무림의 모든 이목이 봉래로 쏠린 이상 반드시 이번 일을 해내야만 한다.
그래야 검주로 인해 바닥까지 떨어진 무림맹과 정파의 위상을 조금이나마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려하게 등장해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던 모산파는 정작 전투가 재개되자 신비문파라 불리며 가려져 있던 그 진면목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다.
“으아아악!!”
“무슨 도, 도술이!!!”
“저희로써는 도저히 상대가!!!”
모산파의 도사 수십 명이 나삼선녀, 호선의 도술 하나를 막겠다고 자신만만하게 달려들었으나 상대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영물로 등선을 할 뻔했던 호선의 도술이 제 아무리 주술과 도술을 익혔다고 한들 인간 수준에 불과한 모산파의 도사들을 압도하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이다.
쿵!!!
기세등등하게 등장했던 화령도사가 채 한 식경도 버티지 못하고 모산파 도사들과 함께 호선의 도술에 휘말려 10장을 날아가는 것을 본 황보영근과 팽중은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이내 황보영근과 팽중은 결사의 의지를 다졌다.
둥-! 둥-! 둥-!
그런데 그때 봉래포구가 시끄러워지더니 포구 쪽으로부터 무림인들이 달려오며 장원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그중 하나가 바다 쪽을 가리키면서 크게 소리를 질렀다.
“천마기(天魔旗)가 떴다!!!!”
“천마신교다!!!”
“마교가 도착했다!!!”
천마신교에서는 검주배첩이 돈 뒤 중원의 모든 문파와 가문에 천마신교의 이름으로 서신을 돌리며 당당하게 선포했다.
천마신교는 검주배첩에 응하여 산동으로 향하고자 한다며 가는 길에 있는 문파와 세가들에게 협조를 요청한 것이다.
지금껏 역사를 돌이켜 보면 십만대산의 마교가 침묵을 깨고 중원에 그 모습을 드러냈을 때에는 언제나 피바람이 불었다.
허나 이번에는 달랐다.
기습적인 중원 침공이 아니라 확실한 명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천하제일인 검주 만우를 가장 먼저 천하제일검이라 칭송한 것이 마교이다 보니 검주와 마교 사이에 친분이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음을 중원의 모두가 다 알고 있었다.
강자를 숭상하고 강함을 추앙하는 마교에서 먼저 나서서 검주를 천하제일검이라 떠받들었다는 것에 중원이 화들짝 놀랐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런 천마신교를 공격한다는 것은 곧 검주배첩을 부정하는 일이며, 검주배첩을 부정하는 것은 곧 천하제일인 검주를 부정한다는 뜻이다.
즉, 검주와 척을 지겠다는 뜻이란 소리다.
때문에 천마신교의 앞을 가로막는 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예전의 검주라면 모를까 지금의 검주는 연경에서 황제를 만나고 제갈세가를 멸문시킨 뒤 사림곡주와 그 정예들을 혈혈단신으로 몰살시켰다.
그전에 검주가 중원으로 들어오는 것을 우려한 무림맹과 사림곡, 황실 동창의 협공을 용접곡에서 단신으로 돌파했던 것이 알음알음 소문으로 떠돌았기에 그 누구도 감히 검주에 반기를 들지 못했다.
대신 그들은 산동 봉래로 몰려들었다.
천마신교와 다툼을 벌이기보다는 중지를 모아 무림의 질서를 새로 쓰려는 검주에게 대항하기 위해 정파가 물밑에서 서로 접촉하면서 연합한 것이다.
“어찌 합니까.”
황보영근이 팽중에게 이를 악물며 속삭였다. 팽중은 천마신교의 등장에 이를 악물었다.
생사마의 국연을 천마신교가 보는 앞에서 생포하려 한다는 것은 곧 천마신교에 대한 도전이다.
황보세가와 하북팽가는 무림맹, 나아가서는 정파를 대표하는 두 세가이니 마교가 그들을 공격한다면 이는 곧 마교가 정파를 공격하는 행위가 되는 셈이다.
그렇게 된다면?
정마대전이다.
“무림맹에서 따로 언질을 준 것이 없냐는 소립니다.”
황보영근은 팽중에게 연달아 속사포처럼 속삭였다. 팽중은 그런 황보영근에게 말했다.
“기다리라는 소리만 했소. 증원군을 보낼 것이라고는 하였으나 이후의 기별은…… 아니. 같이 저들을 쫓지 않았소. 황보세가에서는 별 다른 기별이 없었소?”
황보세가는 관과 연줄이 끈끈했다. 하지만 황보영근도 별도로 들은 것이 없었기 때문에 입을 조개처럼 다물었다.
그 사이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더욱 커지더니 포구 쪽에서 오는 길이 활짝 열렸다. 동시에 사람들의 머리 위로 검붉은 기가 펄럭였고 그 기에는 선명하게 천(天) 자가 수놓아져 있었다.
천마기.
천마신교의 교주인 천마가 가는 곳에 반드시 나부낀다는 천마기였다.
“교주가 이 자리에 오다니.”
“크으…….”
황보영근과 팽중은 그것이 부정할 수 없는 천마기란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는 침음성을 흘렸다.
그 둘이서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지금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산파의 도사들도 당했으니 장원 안으로 진입한다는 것은 무리요. 자칫하면 정마대전이 발발할 수도 있다는 뜻이외다.”
황보영근이 차분한 목소리로 팽중에게 말했다. 그러자 팽중은 분한 것인지 두 주먹을 꼭 쥐고 부르르 떨었지만 이내 두 팔을 축 늘어뜨렸다.
황보영근과 팽중이 각자의 가문에서 어느 정도 발언권이 있다는 것은 똑같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중차대한 일의 결정을 자의로 내릴 정도는 아니다.
그렇기에 팽중이 황보영근을 쳐다보며 물러서자고 말을 하려는 순간이었다.
파라라락!
“무당파다!”
“경천권(驚天拳)이다!”
“무당일검(武當一劍)!!”
“태극검수들도 있어!!”
황보영근과 팽중의 뒤에서 강렬하면서도 정순한 기파가 뻗어지는가 싶더니 흑백이 뒤섞인 도복을 차려입은 무당파의 도사들이 나타났다.
주변의 무림인들이 수군거리는 소리에 놀라 뒤를 쳐다본 황보영근과 팽중은 기겁하며 서둘러 인사를 올렸다.
“후배 황보영근이 무당파의 장문인을 뵙사옵니다.”
“후배 팽중이 무당파의 장문인을 뵙사옵니다.”
그러자 무당파의 도사들 중 하얀 수염을 배까지 기른 백발의 노인이 황보영근과 팽중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무량수불. 황보세가와 하북팽가의 기둥께서는 수고가 많으셨소.”
경천권(驚天拳) 자월진인이었다.
그는 비록 무림십좌에는 아슬아슬하게 들지 못했지만, 당대 무당파의 장문인으로 권각의 달인이다.
무림십좌가 정해진 후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으니 세간에서는 경천권이 새로운 화경에 들지 않았을까 추측을 할 정도였다.
태산북두라 불리는 소림과 무당이었지만 소림에서는 불존이 나온 반면 무당에서는 단 한 명도 무림십좌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였으나 무당을 향한 세간의 신뢰는 굳건했다.
그런데 지금 봉래에 그중 하나인 무당파의 장문인이 무당일검으로 유명한 진해진인과 화산의 매화검수와 견줄 수 있다는 최정예인 태극검수들을 이끌고 자리에 나타난 것이다.
“두 후배들은 개의치 말고 무림의 질서를 세우기 위해 하던 것을 계속해서 하시오. 저 간악한 마도의 무리들은 우리 무당에서 맡을 터이니.”
“무당에서!”
황보영근과 팽중이 놀라며 자월진인을 쳐다봤다. 무당에서 마교와의 전쟁을 각오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기밀이었으나 팽가주와 황보세가주는 알고 계셨을 것이외다. 우리 무당은 살풍대의 발치에 짓밟힌 두 제자들의 영전에 마교주를 바치기 전까지는 멈추지 않을 것이외다.”
자월진인의 눈가에 살기가 스쳐지나갔다. 황보영근과 팽중은 조선으로 파견되었던 정의대에서 두 명의 무당파 제자가 희생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중 하나인 유검(乳劍) 청문이란 아이가 자월진인이 눈여겨보던 자식 같은 아이였음을 알고 있었다.
“과거의 마교라면 모를까, 작금의 마교라면 무당으로써 능히 자웅을 겨룰 수 있음을 알았으니 두 후배께서는 걱정하지 마시오.”
자월진인이 껄껄거리며 웃었다.
“마교주가 나이가 어리다고는 하나 화경의 고수라 들었습니다. 한데…….”
황보영근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진해진인을 쳐다봤다. 동년배인 황보영근과 팽중은 진해진인과 면식이 있었다.
진해진인은 그들의 예상이 맞다는 듯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장문인꼐서 지고한 경지에 도달하셨습니다. 무량수불.”
“오오오오!!”
“허면!!”
“무량수불. 원시천존이 보우하사, 십단금(十段錦)의 대성을 이루셨습니다.”
진해진인이 그리 말하자 황보영근과 팽중은 두 말 할 것 없이 무당파에게 마교를 부탁하기로 했다.
“늦었소이다!!!”
그런데 무당파가 전부가 아니었다.
“사천당가!!!”
“당가다!”
“암존(暗尊)!!!”
“무림십좌다!!”
인파가 다시금 소란스러워지더니 다른 방향에서 녹색의 무복을 입은 이들이 사천당가의 깃발을 치켜들고는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 사람들의 시선이 가장 많이 쏠린 것은 바로 한 노인이었다.
허리가 구부정하고 두 눈을 뜬 듯 감은 듯한 데다가 삐쩍 말라 툭 쳐도 쓰러질 것만 같은 그 노인이 바로 무림십좌의 삼존 중 하나인 암존(暗尊) 당천기였기 때문이다.
당가의 독과 암기는 강호에 정평이 나 있었다.
게다가 당가인들은 전부 다 끈질기고 독한 것으로 소문이 나 있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그들과 척을 지려고 하지 않았다.
한 번 그들과 척을 지게 되면, 언제 어느새 독과 암기에 중독되어 죽을지 모르기에 매일 매일 피가 마르는 삶을 살아가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당가와 암존이 봉래에 모습을 드러냈다.
“후배가 존장을…….”
“되었다! 너희 둘이 황보와 팽가라는 것쯤은 알고 왔으니!”
암존은 황보영근과 팽중이 인사를 하려는 것을 허공섭물로 잡아 세웠다. 그 둘이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암존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자월진인을 쳐다봤다.
“경지에 오르셨군.”
“원시천존께서 도우셨습니다.”
“복수의 힘이 도운 것이겠지. 헐헐헐.”
암존의 말에 진해진인이 눈썹을 찡그렸지만 자월진인은 웃는 얼굴 그대로였다. 암존이 괴팍한 것은 소문이 자자했지만 실제로 보고 들으니 소문이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아미와 공동에서도 곧 있으면 도착할 것인데 봉래가 너무 좁구만.”
암존의 말에 황보영근과 팽중은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암존이 말한 아미와 공동이란 구파일방 중 하나인 아미파와 공동파임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둘은 무당파처럼 정의대서 희생된 제자들이 속해 있는 문파였다. 그러니 마교에 대한 원한이 클 것임은 안 봐도 뻔했다.
“저곳인가? 생사마의 그 늙은이가 있다는 곳이?”
“무량수불.”
암존은 곧바로 관심을 장원 쪽으로 옮겼다. 그리고는 장원을 살펴보다가 눈썹을 치켜뜨더니 신음성을 흘렸다.
“쉽지 않겠군. 누가 설치했는지는 몰라도 진법이 아주 수준급이군.”
당천기의 입에서 수준급이란 소리가 나왔으면 웬만해서는 뚫지 못한다는 뜻이다. 독과 암기와 더불어 기관진식과 진법에 가장 능통한 곳이 바로 당가였기 때문이다.
“설마 신선이라도 저 장원에 있는 겐가?”
암존이 황보영근과 팽중을 쳐다보며 물었다. 하지만 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신선이라니, 그런 소리를 들은 적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법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 평범한 기운이 아니라 선기(仙氣)란 것을 암존은 느끼고 있었다.
“내 검주란 어린놈이 천하제일이라 불리며 독왕과 제갈세가를 단신으로 쓸어버렸다는 소리에 예까지 오기는 했지만.”
암존의 두 눈이 푸르스름하게 빛이 났다. 저 푸르스름한 빛이 녹빛으로 바뀌면 당가의 독공이 발휘되며 주변은 죽음의 땅이 될 것이다.
“그전에 여흥거리로 나쁘지는 않겠군. 자월진인, 어찌하겠소?”
당가는 마교와 직접적인 원한 관계가 없다. 허나 암존과 당가가 봉래까지 온 이유는 만우 때문이다.
독왕 중백약.
그의 존재 때문에 당천기는 독과 암기의 대명사인 당가의 가주임에도 불구하고 독왕이 아니라 암존이라 불려야 했기 때문에 제갈세가와 연합한 독왕을 혈혈단신으로 격살하였다는 만우가 대단히 궁금했기 때문이다.
“생사마의를 부탁드리오.”
“흘. 알겠소이다.”
암존과 당가 무사들이 장원 쪽으로 움직이자 자월진인은 하늘 높이 펄럭이는 천마기를 향해 손날을 들어 올려 보였다.
“무당의 자월이 무림의 동도들에게 알리외다!!”
쩌렁쩌렁!!!
허나 그대로 마교와 자웅을 겨루기에는 주변에 구경꾼들이 너무 많았다. 자칫하면 대량의 살상이 벌어질 수도 있었기 때문에 자월진인은 사자후를 터뜨렸다.
“간악한 마교의 무리들이 무당의 제자들을 살해한 바!”
채재쟁!!!
무당일검, 진해진인과 태극검수들이 검집에서 검을 뽑아드는 소리가 청명하게 울려 퍼졌다. 그러자 주변에 몰려든 구경꾼들이 움찔했다.
“무림의 은원에 따라 무당에서는 간악한 마교의 수장에게 그 혈채를 받을지언즉.”
자월진인이 이렇게 모두에게 선포하듯 말하는 것은 이 일의 명분은 무당에게 있음을 알리려는 뜻이다.
“동도 여러분께서는 안전한 곳에서 무당의 징벌의 증인이 되어 주시길 청하는 바이오!”
괜히 애멀게 휩쓸려 다치거나 죽지 말고 멀리 물러나라.
이 말을 들은 구경꾼들은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 두 고래의 싸움에 얽혀들어 등이 터지고 싶은 새우들은 그 자리에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제 몸이 귀한 것은 누구에게나 다 똑같기 때문에 구경꾼들이 두말 하지 않고 해산해서는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갈라진 인파 속에서 마교 고수들의 면면이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군중들 사이에서 흥분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검천마!”
“새로운 천마라더니, 젊군!”
“투귀대의 고수들이다!”
“나찰사화!!!”
마련검을 허리춤에 찬 검천마 주창이 가장 앞에서 마교의 교도들을 이끌었고 그 뒤를 주창의 심복인 일산 웅풍과 폭혈도 위문, 그리고 나찰사화 옥령이 뒤따랐다.
가히 천하를 오시할 능력이 건재한 마교의 위풍당당한 등장에 군중들이 감탄하는 사이 그 안에서 의뭉 섞인 목소리도 같이 흘러나왔다.
“나찰사화 곁에 선 고수는 누구지?”
“처음 보는 얼굴인데…….”
“새로운 고수인가? 방천화극?”
“무슨 여포라도 되는 모양이지?”
여포는 자신에 대해 의뭉 섞인 목소리로 떠들어대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히죽 웃었다. 나찰사화 옥령을 따라 마교의 빈객이 된 여포가 손에 들린 방천화극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간악한 마교는 무당의 심판을 받을지어다!!!”
꽈르릉!!
그 순간 검천마를 향해 자월진인의 쌍수에서 벼락같은 일장이 뿜어져 나왔다. 겉으로 보기에는 일장인 듯 보였으나 무림 전체를 뒤져 봐도 자월진인의 일장을 가볍게 여길 수 있는 고수는 존재하지 않았다.
십단금.
면장과 태극권, 그리고 태극혜검과 함께 무당의 사대신공으로 알려진 장법으로 일 장에 열 번의 초식을 담아 쏟아내는 강맹한 장법이라 하여 그 경지에 오른 것을 일필순금(一疋純錦)이라 부른다고 알려져 있었다.
즉, 단순한 일장으로 보이는 저 안에 십단금의 열개 초식이 전부 다 녹아들어 있다는 뜻이다.
“처음으로 이름을 알리기에는 적합한 무대겠군!”
마교 쪽에서 나선 것은 검천마가 아니라 바로 여포였다. 이는 여포가 청한 것으로 옥령을 위해 여포가 본격적으로 무림에 모습을 드러내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부탁드리오.”
“크핫핫핫!!”
적토마는 없으나 여포는 여포였다. 여포란 이름을 처음으로 썼던 후한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여포란 이름은 작금에 와서도 그 빛을 잃지 않았다.
꽈앙-!!!!
어마어마한 폭음과 함께 족히 이십 장은 떨어져 있던 무림인들이 귀를 틀어막았다. 개중에 내공이 심후하지 않은 이들은 픽픽거리며 자리에 쓰러질 정도로 강맹한 충격파가 그들을 휩쓸었다.
“내가 바로 인중여포(人中呂布)니라!!!”
여포의 방천화극은 십단금을 받아 내고도 굳건하게 버텨 냈다. 그 다음부터 여포가 수십 근이 넘어가는 방천화극을 수수깡처럼 휘둘러 자월진인을 압박해 나가자 무림인들 사이로 경악이 퍼져 나갔다.
“장문인을 도와…….”
그 모습에 무당일검인 진해진인이 나서서 전선을 확대하려는 찰나 여포와 자월진인이 격돌하고 있는 틈으로 검 한 자루가 뚝 하고 떨어져 내렸다.
푸다다닥!!
어디서 날아왔는지 알 수 없는 한 자루의 검에 여포와 자월진인은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화들짝 놀라서는 푸덕거리면서 뒤로 삼 장씩 물러났다.
갑자기 검이 날아온 것에 놀랄 수는 있었으나 그 정도 되는 고수들이 저 정도로 놀랄 만한 일인가 궁금해하던 군중들의 눈이 다음 순간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쿠구구구궁!!!
우르르!!
검이 꽂힌 자리에서 심후한 공력이 피어오르더니 다섯 장 이내의 지반에 쩌적 하고 금이 가더니 풀썩하고 아래로 일 장이나 훅 하고 꺼져 버린 것이다.
주르륵.
그 사이 갑작스런 검의 난입과 그에 실린 경력을 눈치채고 대경하여 각자 뒤로 물러났던 여포와 자월진인의 목덜미에서 식은땀이 주륵 하고 흘러내렸다.
‘고수.’
‘어마어마한 고수다!’
섬전처럼 날아든 한 자루의 검이었으나 초인의 경지에 발을 내딛은 화경의 고수인 여포와 자월진인은 그 찰나의 순간에 검의 특징을 기억했다.
일렁이는 듯한 붉은 검병과 푸른 검신을 가진 독특한 생김새를 가진 검이었는데 그런 검을 쓰는 고수가 있다는 것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최소 화경.’
‘나와 동수이거나 그 이상.’
하지만 저 검의 주인은 최소한 여포, 자월진인에 버금가는 고수거나 그들보다 한 수 더 위의 고수였다.
남들이 보기에는 그냥 휙 하고 검이 날아든 것 같았지만 그 검이 날아든 시기는 절묘하게 여포와 자월진인의 빈틈이 드러난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그 둘이 맞붙지 못하고 화들짝 놀라 닭이 홰를 치듯 뒤로 물러선 것이다.
자신들도 모르는 빈틈을 노리고 날아든 검이 맨 땅이 아니라 몸을 노렸더라면 지금쯤 그들은 최소한 팔 하나쯤은 잃었을 테니까.
둥-! 둥-!
그렇게 여포와 자월진인이 1장 깊이로 생긴 구덩이 한 가운데 꽂힌 검을 힐끗거리고 있는 사이 어디선가 긴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단순히 어느 한 방향에서 나는 게 아니라 전 방향에서 울려 퍼진 북소리에 몇몇이 고개를 돌려 성벽을 쳐다봤다.
으레 이런 커다란 북소리는 성문이나 성벽 위에서 울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황족?”
“고관대작이라도 오는 건가?”
그 북소리의 의미를 아는 이들이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 소리를 들은 이들 중 누군가가 소리쳤다.
“천하제일인! 무림왕 검주!!”
“검주? 드디어!?”
“천하제일인이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커지기 시작했다. 보글거리면서 끓어오르는 것 같았던 그들의 관심이 활화산처럼 폭발하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로 하지 않았다.
한 달.
봉래에 모인 수만 명이나 되는 이 무림인들은 단 한 명, 천하제일이라 불리는 검주를 보기 위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마교나 무당, 당가가 만우에 대한 관심을 뛰어넘을 수는 없었다. 웅성거리는 사람들 틈으로 갑주를 걸친 이들이 주변의 무림인들을 밀쳐 길을 만들면서 걸어 나왔다.
“물렀거라!!”
“한왕 전하와 무림왕 전하의 행차시다!!!”
창!!!
갑주를 걸친 군졸들이 외친 소리로 황족과 천하제일인의 등장을 알아챈 무림인들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천하제일!
무림인으로 태어나 강호에 출도한 이들 중 그 천하제일을 꿈꾸지 않은 자가 어디 있으랴.
허나 현실은 구파일방의 제자로 들어가더라도 구할 구푼 구리의 사람들이 이루지 못하는 허황된 그 목표를 이룬 이가 코앞에 있는 것이다.
“여포 공!!”
마교의 교주, 검천마 주창이 여포를 불러들였다. 여포는 방천화극을 어깨에 척하고 걸친 채 자월진인에게 말했다.
“자리가 이래서 아쉽게 되었소.”
“무량수불.”
자월진인은 여포를 보면서 표정을 굳혔다. 검천마만이 자신의 상대라고 생각했는데 과연 마교의 저력은 무시무시해서 여포 같은 고수를 숨겨 두고 있었단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실력을 겨뤄 봤으니 이것도 인연일 터, 장문인께 내 한 가지 충고를 드리겠소.”
여포는 저 멀리서 느껴지는 강렬하기 짝이 없는 기파를 느끼고는 자월진인을 쳐다봤다. 자월진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부디 현명한 판단을 내려 검주가 일으킬 폭풍에 쓸려나가지 마시오. 승부를 보지 못한 것이 아쉬우니.”
“…….”
자월진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여포는 무당파에게 검주가 새로 내세운 질서에 순응하라 말한 것이다. 이는 정파와 무림맹의 기둥인 무당파에게 있어 몹시 모욕적인 말이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들어먹지 않을 것 같군. 쯧. 어찌하여 중원인들은 이리도 오만하고 독선적이란 말이오. 강자에게 꼬리를 마는 것은 살아남기 위해 당연한 것이거늘. 동이족이니 오랑캐니 하면서 눈앞에 있는 것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데 무경(武經)을 어찌 보려 하시오.”
“……담아 두겠소. 무량수불.”
여포의 눈빛은 진실되었기에 자월진인은 화를 내는 대신 도호를 읊으며 눈을 감았다. 여포가 입맛을 쩝 하고 다시고는 멀어졌다.
“공동파다!!”
“아미파도 왔어!!!”
“재밌어지는구만!!!”
그 사이 검주와 한왕뿐만 아니라 아미파와 공동파까지 봉래에 도착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한날한시에 굵직한 세력들이 도착하여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진흙탕 같은 미래를 그려 나가고 있다는 것에 자월진인은 두 눈을 부릅떴다.
“장문인! 명을!”
진해진인과 태극검수들이 자월진인의 결정을 기다렸다. 자월진인은 핏발이 선 눈으로 진해진인과 태극검수들을 찬찬히 훑어보고는 심호흡을 크게 내쉬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마교 고수들을 붙잡아 천참만륙을 내어 제자의 영전에 바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전에 자월진인은 무당파라는 거대한 세력의 장문인이다.
‘검주가 한왕과 함께 나타났다.’
그 말인즉슨 지금의 검주는 무림인 검주가 아니라 무림왕 검주라는 뜻이다. 그리고 마교는 검주와 모종의 밀월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무당파가 검주를 무시하고 마교를 공격한다?
그것은 곧 검주에게 명분의 빌미를 주는 행동이며 최악으로는 무림인이 아닌 왕족인 검주가 그것을 황실에 대한 도전으로 몰아갈 수도 있다는 뜻이다.
‘검주가 일으킬 폭풍.’
수많은 이해득실 관계가 얽힌 칼자루를 검주가 쥐고 있었다. 강호무림이라는 거대한 세계가 고작해야 검주 하나에게 휘둘리는 것에 분통이 터졌지만 자월진인은 여포가 말한 폭풍의 고리 역시 검주에 있음을 직감했다.
“무량수불. 대기한다.”
자월진인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
스윽.
저벅, 저벅.
만우는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발걸음을 내디뎠다. 오히려 만우로 인해 무림인들의 이목을 한 몸에 받게 된 동군영만이 불편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온몸을 뒤틀었다.
“이보시게 만우.”
다그닥 다그닥.
동군영은 말 위에 올라타 있었고 그 말의 고삐를 만우가 붙잡고 있었다. 그러니까 바꿔 말하자면 만우는 천하제일인이에 무림왕이라 불리면서도 사행단의 역졸이라는 역할에 충실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만우를 주변의 무림인들이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으저적, 으적!
만우가 한 발자국씩 내딛을 때마다 땅이 푹푹 하고 가라앉으면서 땅바닥에 족적이 새겨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력의 수발이 얼마나 절륜한 것인지 만우가 걸을 때마다 어마어마한 공력에 의해 저절로 족적이 새겨지면서도 주변에는 그 여파가 하나도 미치지 않았다.
그렇기에 만우를 쳐다보는 수천, 수만 쌍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 누구도 그런 만우에 대해 떠드는 이는 없었다.
“왜 그러십니까요, 나으리.”
동군영의 얼굴은 체한 것처럼 시퍼래져 있었다. 굳이 동군영의 소심증이 아니더라도 이런 상황에서는 모두가 다 동군영 같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만우만 모르는 듯했다.
“어찌 이러시는가. 정녕 내가 심장을 부여잡고 거품을 물어봐야 봐주겠는가?”
“무슨 말씀을 하시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요, 나으리. 산동에 장원이 하나 있으니 그곳을 가겠다고 미리 말씀을 드리지 않았습니까요?”
“그런 이상한 존대일랑 집어치우시게 만우!”
동군영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 만우에게 애걸했다. 만우가 씩 웃으며 앞을 쳐다보자 저 멀리 방매의 얼굴이 만우의 두 눈에 들어왔다.
방매는 절체절명의 상황에 혜성처럼 등장한 만우를 보면서 놀란 듯 두 눈이 왕방울만 하게 커져 있었다.
“똥구녕아.”
“동군영일세.”
만우는 동군영이 원하는 대로 부르는 호칭부터 바꿔 주었다. 동군영이 발끈했지만 만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 똥구녕.”
“이…….”
“남경 고관대작들의 배웅을 받으며 일찍이 남경을 빠져나왔고, 조선으로 돌아가기 위해 가장 빠른 뱃길로 가려는 것뿐인데 무엇이 그렇게 불안하다는 거지?”
“……지금 만우, 자네의 눈에는 주변의 이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소리인가?”
그것도 보통의 양민이 아니라 병장기를 들고 다니는 무림인들이 수만 명이 몰려 있었다. 게다가 서당 개도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만우를 따라다니면서 귀동냥으로 들은 게 많아 마교니 무당이니 하는 것들을 동군영도 알아들었다.
“게다가 만우 자네가 부르지 않았는가! 대체 어찌하려고. 강호무림 전체와 전쟁이라도 벌일 셈이야?”
“조선으로는 보내 줄 테니 걱정하지 말…….”
“누가 그게 걱정된다고 했는가! 만우 자네가 걱정되니 하는 말일세!”
만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는 동군영을 쳐다보자 동군영이 어깨를 들썩이면서 씩씩거리고 있었다.
“나를?”
“그래. 만우 자네를! 천하제일인이니 검주가 아닌 만우 자네를 말이야!”
뒤에서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바로 불존과 황보경이었다. 그 둘은 가장 가까이 있어 동군영의 말을 들었고 제정신이냐는 얼굴로 동군영의 뒤통수를 쳐다봤다.
검주를 걱정하다니.
“하, 하, 하하하핫!!!”
만우가 경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다른 사람도 아닌 동군영이 자신을 걱정해 준다는 것에 가슴 한 켠이 따스해져 왔기 때문이다.
만우 스스로도 그런 따스함이 느껴지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지만, 분명한 것은 별로 나쁘지 않은 기분이라는 것이다.
“내 말이 장난 같은가?”
“아니. 그래서 웃은 게 아니야. 정말로, 정말로 말이지.”
동군영이 얼굴이 빨개져서는 소리치자 만우가 웃음을 그치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동군영을 응시했다. 그와 함께 만우가 비어 있는 오른 손을 척하고 들어 올렸다.
덜그럭!
그러자 검에 의해 무너진 지반이 덜그럭거리더니 그 안에서 기천검이 솟아올랐다.
절정의 허공섭물에 사방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허공섭물이란 것은 최소한 화경, 제대로 사용하려면 현경에 올라야만 가능하다 알려진 기예다.
그것을 숨 쉬듯 자연스럽게 펼쳐 내는 만우의 신위에 사방의 무림인들은 경외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슈아아악!
텁!
만우의 비어 있는 오른손으로 기천검이 빨려들듯이 날아와 잡혔다. 그러자 자월진인과 여포의 얼굴이 동시에 구겨졌다.
만우가 가볍게 날린 검에 마치 불장난을 하다가 들킨 아이처럼 퍼더덕거리면서 물러났던 것 때문이다.
하지만 만우는 그 둘 대신 동군영의 얼굴에 자신의 두 눈을 고정했다.
“누가 본주를 걱정해 준다는 것이 낯선 일인지라, 하지만. 고마워 똥구녕.”
“고마우면 똥구녕이라고 말을 말던가!”
“하하핫!!”
만우가 허리춤에 기천검을 꽂고는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만우와 사행단, 그리고 한왕의 앞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길이 주욱 하고 생겨났다.
“그래, 똥구녕 말대로 조심은 하지. 하지만 걱정해야 할 것은 본주가 아니라.”
만우가 손을 들어서는 좌우로 흔들었다. 그러자 장원의 주변을 포위하고 있던 황보세가와 팽가, 그리고 당가의 무인들이 화들짝 놀라면서 길을 텄다.
그리고 무당과 마교 역시 마찬가지였다.
만우의 손짓 하나에 그들은 전부가 각자 자신의 미간으로 검이 날아오는 듯한 느낌을 받고는 자신들도 모르게 물러났으니까.
“저들이겠지. 그래도 저들 중 똑똑한 치들은 있을 거야. 그렇지?”
만우는 동군영이 탄 말고삐를 잡아채며 무당과 마교 사이를 지나쳐 황보세가와 하북팽가, 그리고 당가 앞을 유유히 지나쳤다.
개중에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만우를 보는 이도 있었고, 시기나 질투와 불신이 섞인 눈으로 쳐다보는 이들도 있었지만 만우는 그들에게 눈길조차도 돌리지 않았다.
이미 기세만으로 제 풀에 놀라 한 발자국씩 물러선 그들은 보이지 않는 기 싸움에서 이미 만우에게 패배했다.
“대장님!”
문형일이 반갑게 만우를 불렀고 마익후가 많은 말을 하진 않았지만 우묵한 눈으로 만우를 응시했다.
“고생했다. 나 대신에 너희들의 노고가 컸다.”
“아닙니다 대장님.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괜찮다 대장.”
문형일과 마익후는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만우는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어도 둘이 가장 고생했을 것임을 예상했다.
발우수리 객잔에 남겨 놓은 이들 중에 중원의 지리에 정통한 이는 살마은 문형일과 마익후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둘은 방매와 간장을 지키면서 동시에 길잡이의 노릇까지 같이 했어야 한다. 아마 이 둘이 없었더라면 봉래까지 오는 길이 아마 배는 더 힘겨웠을 것이다.
“그런데 설마 겨우 황보와 팽가한테 얻어맞은 거냐?”
만우가 문형일의 얼굴에 말라서 눌러붙은 피딱지를 보면서 이죽거렸다. 그러자 문형일은 손등으로 스윽 하고 코 밑을 닦았다.
“그게, 꽤나 준비를 잘 해 와서.”
“받아라.”
만우는 품에서 목함을 꺼내 문형일과 마익후에게 각자 하나씩을 집어던졌다. 문형일과 마익후가 엉겁결에 손을 뻗어 그것을 받자 만우가 말했다.
“황실의 내의원에서 가지고 나온 공청석유와 대환단이다. 쓸 만해지려면 본주가 직접 영약까지 구해 줘야 하다니.”
문형일의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거의 감정의 표현이 없는 마익후도 이번에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전에 만우의 뒤에서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꺼억.”
“고, 공청석유.”
“나한테 줄 줄 알았는데.”
불존과 황보경은 소리 없이 경악하고 있었고 필두와 감령은 부럽다는 듯 입맛을 쩝쩝하고 다셨다.
“이래서 선점이 중요한 거야. 젠장.”
“얼씨구. 대장 죽이겠다고 달려왔다가 잡힌 놈이.”
“넌 아니냐?”
하지만 문형일과 마익후를 향해 시기를 드러내진 않았다. 만우와 가장 오래 된 것이 그 둘이란 것을 알고 있었기에 당연한 수순으로 감령과 필두는 받아들였다.
“이, 이걸 제게 주시는 겁니까 대장님?”
문형일이 바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만우를 쳐다봤다. 문형일의 눈가가 붉어졌다. 만우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본주가 원해서 따라온 건 아니나 너희 둘이 고생한 건 맞으니까. 뭐, 난 쓸 데도 없으니 둘이 쓰라고.”
꽈악.
문형일은 목함을 소중하게 품에 안은 채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길이 도통 보이지 않아 낙담하고 있던 화경의 꿈을 이 영약이 있다면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훨씬 더 감동스러운 것은, 만우가 자신들의 노고를 알아주었다는 것이다.
만우가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강함을 동경하고 매료되어 기꺼이 수하가 되기를 자처하였던 지난 시간들이 만우의 한 마디에 모든 보상을 받는 것만 같았다.
“좋겠다.”
“대장님이 다음번에는 황실에 언제 들어가시려나?”
감령과 필두가 입맛을 쩝쩝 다시면서 문형일과 마익후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그들이 재회의 회포를 간단하게 풀고 있는 사이 호선이 나삼을 잡고는 만우에게 고개를 숙였다.
“은공.”
“너.”
만우의 눈이 드물게 크게 뜨였다. 호선은 가히 상전벽해라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로 성장하여, 웬만해서는 놀라는 일이 없는 만우를 놀라게 했을 정도였다.
“선주가 제법…… 아니. 아주 많이 커졌군.”
“한 번 가 본 길이기에 그런 것 같아요. 게다가…….”
호선이 고개를 돌려 이쪽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어찌 해야 할 지를 고심하고 있는 정파 세력들을 쳐다봤다.
“인간들 덕분에 선기를 자주 쓰다 보니 더 자극이 된 것도 같고.”
“기연이구나.”
“그런가 봐요.”
호선이 교태 섞인 웃음을 지어 보이며 입을 가리고 웃었다. 지금 호선이 걷고 있는 길은 예전에 이미 한 번 가 봤던 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름길부터 시작해 호선이 모든 것을 훤히 다 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추격전 아닌 추격전을 겪으면서 두 달이 넘게 선기를 꾸준히 쓰게 된 것이 오히려 호선의 선주에 영양분을 공급한 셈이다.
“불살(不殺)은 저희 같은 영물들에게 있어 최고의 보약이니까요.”
“그렇군.”
만우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불살(不殺), 즉 살생을 금하는 것은 영물이건 도인이건 같아 선경에 들기 위해서는 무조건 행해야만 하는 하나의 도(道)이다.
즉, 호선은 쫓아오는 추격자들을 죽이지 않고 살려 줌으로써 선주의 성장에 필요한 자양분을 가득 확보한 셈이다.
“허나 자만하지는 말라. 저들만 하더라도 네가 고전을 면치 못할 터이니. 이 세상에 손쉽게 얻는 게 어디 있어.”
만우는 자월진인과 당천기를 가리켰다. 상대도 화경의 고수라면 호선도 불살만을 고집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불살이 한 번 깨지면 지금껏 애써 모아 놓은 선기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흩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반작용이 더욱 심해지기 때문에 애써 구한 선주가 다시 깨질 수도 있었다.
“아. 혹시나 묻는 건데.”
만우가 호선에게 물었다.
“남경에서 만난 색목인 중에 선기를 쓰는 자들이 있었다. 혹여나 잃어버린 네 선주가 색목인들에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쪽에서 온 인간들이라. 그럴 수도 있겠네요. 등선하다가 잃어버린 선주가 반드시 중원에만 떨어졌으리란 보장은 없으니까요.”
그런 생각을 왜 지금까지 못했는지 자기 자신을 나무라는 호선을 뒤로하고 마침내 만우는 방매 앞에 섰다.
“다친 곳은?”
“없어.”
“힘들었던 건?”
“그것도 없어.”
마주는 방매가 생사마의 국연을 어찌하여 보호하였는지 그 연유를 묻지 않았다. 그건 방매가 알아서 내린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정파에서 무림공적을 명분 삼아 방매를 공격하였지만 그에 대한 죗값은 천하제일인인 자신이 받아 내면 되는 일이다.
“네게 선물이 있다.”
“선물?”
방매는 여전히 씩씩했다. 만우를 만나자 두 볼이 발그레해졌지만 남자처럼 패랭이 모자에 보부상 차림을 한 것도 여전했다.
추격을 당하는 길이 힘들었는지 떠나기 전보다 약간 야윈 듯했다.
“응. 너를 위한 선물.”
“나…… 를 위한 선물? 내 생각을 한 거야?”
“그럼.”
만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방매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하지만 이내 방매는 다시 씩씩한 방매로 돌아와 두 눈을 반짝였다.
“무슨 선물? 비싼 거야? 이왕이면 비싼 거면 좋겠다. 한양에 돌아가면 장사 밑천으로 삼…….”
슥.
방매의 두 눈이 파르르 떨렸다. 만우의 뒤에서 걸어 나온 김 씨 때문이다. 김 씨는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걸어 나왔지만 이미 격해진 감정이 김 씨의 눈빛과 호흡에서 그대로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