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7. 검주공적 (3)
(397/400)
397. 검주공적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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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7. 검주공적 (3)
2022.10.18.
주창은 씨익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일찍이 그에게 진 빚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당연히 가서 힘을 실어 주어야지.”
“허나 교주님! 무당과의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사옵니다.”
“무당이라. 무당이 전쟁을 멈추고 물러선 연유가 이것 때문이란 것을 총명한 그대가 모르지는 않을 터인데?”
검주배첩에서 천하제일인인 검주는 직접 자신의 이름을 걸고 벌할 자들을 검주공적이라 칭하며 하북팽가와 황보세가, 그리고 무림맹의 추격대를 거론했다.
이유는 그들이 감히 자신의 식솔들을 주살하려 했다는 혐의 때문이다.
그 때문에 무림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그로 인해 살풍대가 조선에서 정의대에 소속된 무당의 제자들을 살해한 이유로 마교와 국지전을 벌이고 있던 무당이 공세를 멈춘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무림맹의 추격대라고 명시해 놓기는 하였으나 그는 곧 검주가 무림맹, 더 나아가서는 정파 전체를 공적으로 선포하겠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이지 않더냐.”
주창은 무당이 공세를 멈춘 이유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마일은 자신이 모시는 교주의 총명함에 감복해야 할지 아닐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는 혼란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그때 만우를 가장 많이 경험해 본 투귀대 중 하나인 폭혈도 위문이 나섰다.
“제 아무리 검주라 하더라도 그렇게까지 하겠습니까.”
“검주를 겪어 보지 않았더냐?”
“어…….”
위문은 괜히 나섰다가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에 입을 조개처럼 다물고는 나왔던 자리로 되돌아갔다. 그 사이 정신을 수습한 마일이 입을 열었다.
“허나 그렇다고 하여 교주께서 중원 출타를 하셔도 안전하다는 뜻은 아니옵니다.”
“아니, 오히려 더욱 안전할 것이다.”
주창은 확언하듯 말했다. 마일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마일도 사실은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군사도 그리 생각하고 있을 터인데?”
주창은 마일이 일부러 자신을 중원으로 못 나가게 하려 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마일은 작게 한숨을 내쉰 뒤 고개를 끄덕였다.
“천마께서 중원에 출타하셔도 검주배첩을 소지하고 계신 이상 교주님을 공격한다는 것은 곧 검주에 대한 도전이니, 잠시간이긴 하나 무림에 평화가 찾아올 것입니다.”
“더불어 무당의 공세가 멈췄으니 피해를 수습하고 반격할 채비도 할 수 있을 것이고.”
지금 마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시간이다. 십만대산에 틀어박혀 있는 마교와는 달리 무당은 중원에서 무림의 태산북두인 문파의 영향력으로 마교의 자금줄을 끊고 있었기 때문이다.
십만대산은 험준하고 극히 척박하기 때문에 몇몇 장소를 제외하면 농사를 짓는 것조차도 불가능하여 자급자족이 불가능했다.
무당이 바로 그런 마교의 약점을 공략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반 상단이나 다른 흑도방파로 위장한 마교의 분타를 무당이 공격하여 없애거나 자금줄을 동결시키면서 표국의 표행을 막음으로 인해 물류의 운송도 막고 있었기에 이렇게 가다가는 둘 중 하나였다.
고사(枯死)하기 전에 대규모로 무인들을 동원하여 무당을 쳐서 어려움을 극복하거나 무당과 화친을 맺는 것.
허나 무당에 화친을 맺는다는 것은 사실상 마교가 무당에게 패배하였음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기에 애초부터 선택지에서 빠져 있었다.
하지만 이번 검주배첩으로 인해 무당이 공세를 멈춰 마교는 숨을 돌릴 시간을 번 것이다.
“그러나 무당에서 미친 짓을 한다 생각하고 교주님을 공격할 가능성도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군사란 모름지기 일 푼의 가능성도 고려해서 계획을 짜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최악의 사태까지 염두에 둬야만 한다.
“검주를 천하제일검이라 인정하고 선포한 것은 우리 신교이다. 허니 검주배첩에 응하지 않는다면 무림의 모든 이들이 신교를 겁쟁이라 손가락질하며 비웃을 것이다.”
“…….”
주창의 말도 일리가 있었고 마일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결국 안정을 택하느냐 모험을 택하느냐의 기로에 서 있을 뿐, 어느 쪽이 확실하게 맞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 지금 마교의 현실이었다.
“진혼대와 천마대의 공백이 크도다.”
주창은 검주에게 옥쇄한 진혼대와 천마대, 그리고 두 명의 대주를 입에 담았다. 비록 주창과 투귀대는 그들의 반대편에 서 있었으나 결과적으로는 같은 신교도일 뿐이다.
교주에 오른 주창의 입장에서 그 인재들이 일본국에서 검하고혼이 됐다는 것은 뼈아픈 손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감히 무당 따위가 신교에 맞서겠다고 저리 소란을 피우는 것이겠지.”
“송구하옵니다 교주.”
진혼대와 천마대는 사실상 마교 전력의 사 할에 해당한다. 그들을 이끄는 두 대주가 전부 무림십좌에 오른 화경의 고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혈세천마까지 더해 총 세 명의 화경의 고수를 잃은 마교는 무당파가 단독으로 무림맹의 도움 없이 싸움을 걸어올 정도로 세가 쪼그라들었다.
“송구할 것 없다. 본좌도 그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으니. 허나 그 때문에라도 이번 산동행이 반드시 이뤄져야 함이다. 그렇지 않은가 군사?”
주창은 마일을 쳐다봤다. 마일은 주창의 눈빛을 보고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마일로서도 알고 있지만 교주를 사지로 내모는 것일 수도 있기에 차마 자신의 입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군사!”
주창은 그런 마일을 다그쳤다. 군사의 입을 통해 이번 일이 입안되어야 한다. 대를 이어 마교의 지낭(智囊) 역할을 하게 된 마가(馬家)는 그만큼 마교도들이 신뢰하는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당당히 천마기(天魔旗)를 내걸고 새로운 천마대와 함께 중원으로 출타하시옵소서. 천마신교의 기상이 살아 있음을 만천하에 알리시고 교주님에게 도전해 오는 자들을 꺾으소서. 만일.”
천마신교는 마의 종주이다.
그렇기에 언제나 당당해야만 한다. 정파에는 무림맹이 있고 사파에는 사림곡이 있다면 천마신교는 마를 대변하는 최강자이기 때문이다.
설령 세 명의 화경의 고수를 전부 잃었다고 해도 천마신교는 천마신교란 것을 만천하에 알려야 한다.
강자존, 약육강식.
그 원칙이 살아 있음을 주창은 마교의 교주로서 전 무림에 입증하여야 한다. 그것을 보여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가 바로 이번 검주배첩이다.
반면 반대로 생각해 보면 주창이 패하기라도 한다면 천마신교의 기치는 땅바닥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얻는 것이 큰 만큼 잃는 것도 큰 법이다. 주창은 그것을 감당할 준비가 된 듯 보였으나 마일은 차마 그것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아 주창의 말에 한참을 고민했다.
하지만 이미 입은 열렸고, 마일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외쳣다.
“천마지존(天魔至尊) 만마앙복(萬魔仰伏) 신교천하(神敎天下)!!”
마일의 선창에 교주전을 가득 채운 수백 명의 마교도들이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리듯 부복하면서 소리쳤다.
“중원으로 갈 것이다.”
교주전의 지붕이 떠나가라 울려 퍼진 수하들의 머리 위로 단단하게 힘이 들어찬 주창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무림 전역이 떠들썩해졌다.
다른 이도 아닌 바로 검주, 천하제일인이 수백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무림의 질서를 자신의 이름 아래 새로이 하겠다면서 반포한 검주배첩 때문이었다.
검주공적.
검주는 자신의 이름 아래 황보세가와 하북팽가를 검주공적으로 지정하고 살생부를 작성했다.
그런 검주의 행동은 의외로 무림인들에게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았다.
“먼저 검주의 사람을 건드린 것은 그 두 곳이잖나.”
“그래도 생사마의는 공적인데…….”
“무림은 결국 강자의 말이 옳은 법이네. 이미 무림맹은 사림곡과 연합까지 했는 데도 검주에게 패배하였어. 그런데 무림공적 때문에 검주의 사람을 건드렸다? 그건 검주에게 도전한 것이네.”
“검주공적이라니. 무림에 파란이 일겠군.”
“오대세가니 뭐니 해서 안 그래도 꼴 보기 싫었는데 잘 됐군. 퉤. 무림맹도 그 썩은 물들이 한 번 물갈이 될 때가 되었지.”
“제갈세가를 무너뜨린 검주인데. 산동의 봉래라고 했지? 아주 재밌는 구경이 되겠어. 난 그곳으로 가야겠네.”
“나도!”
무림인이 둘 이상 모이는 곳이라면 이런 이야기가 빠짐없이 흘러나왔다. 개중에는 그간 오랫동안 이어진 정파의 폐해나 독단에 울분을 토하며 고소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고 이 판결이 어찌 흐를지를 기대하는 이들도 있었다.
산동.
지금껏 무림의 중심은 하북이나 하남, 혹은 호광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무림인들의 이목이 무림의 변방이라 알려진 산동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객잔에서 시끄럽게 떠들던 무림인 둘이 일어나자 한쪽 구석에서 술잔을 기울이던 주고후가 히죽 웃었다.
“산동이라. 본왕도 산동으로 가 볼까?”
“전하!”
유모 김 씨가 화들짝 놀라며 주고후를 쳐다봤다. 당장이라도 말릴 기세였기에 주고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농담일세. 그나저나 저 두 치들, 냄새가 나지 않은가?”
“눈치채셨습니까?”
김 씨가 놀랐다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주고후의 유모이자 때로는 그의 마지막 수신호위이기도 한 김 씨는 그 둘에게서 이미 수상한 점을 찾아냈지만 주고후도 눈치를 챌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가끔 보면 유모는 나를 너무 무시하는 것 같으이.”
“아닙니다 전하. 쇤네 어찌 감히.”
“손이 깨끗하더군.”
주고후는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김 씨도 고개를 끄덕였다.
“무공을 익히고 병장기를 다루는 자들의 손이 저리 깨끗할 수는 없지. 필시 무공을 익히기는 하였으나 무공으로 밥을 벌어먹고 사는 자들은 아니었네.”
“맞사옵니다.”
“떠들면서도 계속해서 주변을 주시하는 것을 보니 일부러 크게 떠드는 것이고, 본래 목소리가 큰 놈들은 시비도 잘 걸리기 마련이니 일찍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걸세.”
“정답이옵니다.”
“검주가 제대로 판을 벌일 생각인 듯싶은데.”
“일부러 소문을 퍼뜨려 무림인들을 선동하고 있다 보십니까?”
김 씨의 질문에 주고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검주의 사람이라.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 검주가 전 무림을 상대로 분노를 드러낼 정도라면 정인(情人)이라도 되는 모양이군.”
“하긴. 그도 사람이니…… 낭만적입니다 전하.”
“낭만이라. 그런가? 유모도 여인이군.”
“…….”
김 씨의 얼굴에 잠깐의 그늘이 스쳐지나갔다. 주고후는 김 씨가 죽은 자신의 남편을 떠올리는 것이라는 것을 눈치채고서는 못 본 척 술잔을 들었다.
싸구려 죽엽청이지만 야전을 돌아다니는 데 익숙한 주고후는 이 술을 즐겨 마셨다.
“백련관으로 곧바로 가시겠습니까?”
“그곳에 있을까? 그 동군영이라는 선비.”
“사절단의 책임자로 온 것이니 있을 것이옵니다.”
“가지. 일각(一脚)을 보내 본왕이 왔음을 알리고 사절단의 동군영 부사에게…….”
엽전 몇 개를 탁자 위에 올려놓으려던 주고후가 멈칫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 사이 유모 김 씨가 놀라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검주?”
“한왕 주고후.”
객잔 앞에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름 아닌 만우였다. 만우는 주고후를 슬쩍 본 뒤 주고후의 앞을 슬그머니 가로막고 선 유모 김 씨를 보고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귀하에게 용무가 있어서 왔소만.”
만우가 유모 김 씨를 쳐다보며 그리 말하자 주고후가 자신의 앞자리를 권하며 유모 김 씨에게 말했다.
“유모. 앉아.”
“예, 전하.”
김 씨는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지만 한왕의 명이었기에 주춤거리면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불안했는지 언제든지 출수할 수 있게 엉덩이를 의자 끝에 간신히 걸치고 앉았다.
“주변에 있는 친구들도 오라고 하는 것이 어떻소. 먼 길에 힘들었을 텐데.”
만우는 주고후를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구인 것처럼 대했다. 주고후 역시 그런 만우의 태도에 휘말리지 않고는 태연하게 응수했다.
“저리 있는 것을 더 편히 여기는 친구들이오.”
“하긴. 윗대가리와 같이 자리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겠지. 이해하오. 허나 살기 좀 그만 보내라고 하시오. 신경 쓰이니까.”
만우가 손을 훼훼 내저었다. 주고후는 이미 만우가 자신의 수신호위들을 전부 알아차렸다는 것에 속으로 감탄하면서 손을 들었다.
스윽.
그렇게 든 손을 흔들자 주고후의 주변에 있던 수신호위들이 뒤로 물러났다. 만우는 주고후가 먹고 있던 잔을 앞으로 끌어당겨서는 죽엽청을 따라 한 입에 들이켰다.
“번탑에서는 꽤나 인상적이었소.”
“고작 그 말을 하기 위해 본왕을 찾아오시었소이까?”
주고후는 나면서부터 왕가의 자제였고 이제는 황족이 되었다. 반면 만우는 한미한 출신으로 일신의 재주만으로 왕작에 올랐다.
그 둘이 마주보고 동등하게 술잔을 나누고 있다는 것 자체가 꽤나 이질적이었지만 정작 당사자인 만우와 주고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듯한 눈치였다.
“아니. 본주는 귀하에게 얻고자 하는 것이 있어 찾아왔소이다.”
“얻고자 하는 것이라? 검주배첩 때문이오?”
“들으셨군.”
“천하제일인이 무림의 오랜 질서를 깨부수려 한다는 것은 들었소이다.”
“무모한 것 같소?”
만우가 두 눈을 파랗게 빛내면서 주고후를 쳐다봤다. 주고후는 피식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그럴 리가. 아바마마께서도 고삐를 채우지 못하고 오히려 끌려 다니시는 듯한데. 무림이 아무리 크다 하여도 설마 중원의 하늘보다 클까.”
만우는 제법 신랄한 주고후의 평에 히죽 웃었다. 그래도 제 나라이고 제 아비인데 말하는 투가 퍽이나 재밌었기 때문이다.
“그것 때문에 본왕의 도움을 청하러 오신 것이오?”
“아니. 오히려 본주는 황제에게 이번 일로 이득을 볼 생각일랑 접어 두라고 인편을 보내었으니, 한왕에게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소.”
이번에는 주고후의 눈이 커졌다. 만우가 황제에게 보낸 것은 거의 반역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대단하군. 아바마마 앞에서 그리 무도하고도 산 자를 보지 못하였거늘.”
“이제 보았으니 되지 않았소.”
만우의 태연한 답에 주고후가 껄껄거리며 웃었다. 주고후가 그렇게 웃음을 터뜨렸을 때 만우가 끼어들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귀하의 유모요.”
“유모? 김 씨?”
주고후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가장 놀란 것은 주고후의 옆에서 만우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던 김 씨였다.
만우는 김 씨를 쳐다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닮았소. 사람 눈썰미란 게 이리도 허술하오. 이미 한 번 보았는데도 그때는 몰랐던 것이 이제야 보이니까.”
“무슨 말씀…… 이신지.”
김 씨는 만우와 눈이 마주치자 어쩔 줄을 몰라 하면서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를 경계하고 있기는 하나 만우는 감히 김 씨가 올려다볼 수 없는 신분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김 씨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하고 터져 나왔다.
“혹시 방매라고, 기억하시오?”
*****
“명이 시끄럽습니다.”
달그락
“그런가?”
임금은 하륜을 보면서 빙긋 웃어 보였다. 그와 마주한 하륜은 임금과 눈을 감히 마주치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역졸 만우가 강호무림에 파란을 일으키며 천하제일인을 자처하였고, 명천자께서 친히 그런 역졸 만우를 자미원으로 불러들여 무림왕(武林王)으로 봉작하였다 하옵니다.”
“그렇군.”
명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소란은 명과 조선을 은밀히 오가는 밀무역 상인들에 의해 소식이 전달됐다. 하륜은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한 임금의 표정을 보면서 고개를 조아렸다.
“참으로 조선에 흥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연경에 들어간 사행단이 명천자께서 하사하신 하사품을 수령하기 위해 남경으로 향하였으니, 이는 명천자께서 내리신 칙서에 더는 연연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겠지.”
임금은 다시 한번 더 빙긋 웃어 보이며 술잔을 들이키고는 수염에 묻은 술을 손으로 훑었다. 하륜은 입가를 우물거리더니 이내 임금에게 고했다.
“역졸 만우가 조선으로 귀국한다면 어찌 하실 생각이신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전하.”
“걱정되는가?”
“예.”
하륜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선의 신하인 하륜이 걱정하는 것도 당연했다. 역졸 만우가 무림왕이 되어 조선에 돌아오면 명나라의 왕작을 받은 이가 조선에 있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의 임금도 명나라에서 임명한 국왕이니, 역졸에 불과한 만우가 무림왕이 되어 돌아오면 비천한 출신에도 불구하고 임금과 어깨를 나란히 할 것으로 보일 것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는 곧 하늘 아래 태양이 두 개 떠 있게 되는 것이나 매한가지다.
“허면 넘어오는 사행단을 서해에서 수장(水葬)이라도 지내야겠군.”
“하지 못할 것도 없습니다 전하. 왜구가 극성이니 명나라에서도 조선 탓을 하진 못 할 것이옵니다.”
“이거 원. 농도 못 하겠군. 허헛.”
임금은 하륜의 진지한 태도에 고개를 내저으면서 술잔에 술을 따랐다. 금세 술잔 안에 찰랑거리며 반투명한 액체가 차올랐다.
“하륜.”
“하명하시옵소서, 전하.”
하륜이 앉아 있던 자세를 고쳐 바닥에 엎드렸다.
“가장 좋고 큰 배를 당장에라도 띄워 봉래로 보내 무림왕을 극진하게 모실 것이다. 과인이 이미 그를 조선을 수호하는 국검(國劍)으로 임명하는 교지를 함께 보내고자 하니 승정원의 승지를 딸려 보낼 것이다.”
“전하!”
임금의 입에서는 하륜이 말한 것과 정반대되는 내용이 흘러나왔다. 기겁한 하륜이 예법에 어긋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치켜들자 임금의 눈매가 엄정해졌다.
“왕명이니라.”
“…….”
하륜은 다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왕명이 나온 이상 그에 항거하는 것은 곧 반역이기에 하륜은 뒷목이 뻣뻣해지는 것을 느끼고는 이를 악물었다.
“과인이 왜 이러는지 궁금한가?”
“…….”
임금은 혈로(血路)로 가시밭길을 닦아 지금의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지금의 어좌에 앉기까지 임금은 두 형제의 목을 베었고 아비에게까지 버림을 받았다.
그러면서까지 자신이 세운 나라의 어좌에 앉은 임금이다. 그렇기에 모든 신하들이 그를 두려워했다.
절대왕권.
고려부터 이어지던 호족 가문들의 사병들은 모두 혁파되었고 왕권에 의해 모든 것이 통치되는 기반을 만든 것이 바로 임금이다.
한데 하륜의 눈에 지금 임금이 하려는 것은 자신이 쌓아 올린 탑을 애써 다 무너뜨리는 행위처럼 보였다.
“강호무림의 부귀영화를 마다하고 조선으로 돌아온 그자의 목적이 무엇인지 아는가?”
“…….”
하륜은 역졸 만우의 목적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저 그가 위험한 자란 것만을 생각했을 뿐이다.
임금이 전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짚자 하륜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광산군의 손녀를 보살피는 것이더군. 그래서 결국은 광산군의 손녀를 찾는 데 성공했고.”
“……그 말씀인 즉.”
“그자를 과인의 정적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외세에 대항할 수 있는 조선의 국검(國劍)으로 삼아야 하네. 더더욱 명의 천자가 무림왕으로 그를 봉하였다는 것은 천자마저도 그를 어찌하지 못하였다는 뜻이 아닌가.”
“외세에 맞설 수 있는 힘이란 말씀이십니까?”
“그래. 아직 이 나라는 연약하고 허약하지. 고려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기에 불안정하기도 하고.”
“전하께서 계시는 이상 조선은 강건하옵니다. 부디 그런 말씀은…….”
“듣기 좋은 말을 듣고자 함이 아니네. 그것이 과인의 작금의 조선에 대한 판단이니까. 그래서 그를 품어야 한다는 소리이네. 천하제일인을.”
“…….”
“천만금을 준다 하더라도 그런 이들을 움직일 수는 없는 법이지. 한데 그가 제 발로 과인으로 품으로 걸어 들어왔으니, 어찌 그 보물을 마다해야 한단 말인가.”
“허나 그자가 다른 마음을 먹기라도 한다면…….”
“정녕 그리 생각하는가?”
임금은 하륜을 정색하며 쳐다봤다. 하륜이 걱정하는 바는 알겠으나 미시적인 것에만 매몰되지 말고 거시적으로 보라는 듯 임금은 눈빛으로 하륜을 꾸짖었다.
“전하의 고언을 듣고자 합니다.”
“큰 힘에는 곧 큰 책임이 따르는 법이지. 어찌 초가삼간을 다 태우려 하는가. 그렇다고 하여 죽을 빈대가 아니거늘.”
“…….”
“구호탄랑의 고사를 알지 않은가.”
호랑이를 내몰아 이리를 잡아먹게 하다. 후한 말, 조조가 유비와 원술을 약화시키기 위해 유비를 움직여 원술을 치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조조를 제외한 유비, 원술, 여포의 세력을 약화시킨 일에서 나온 고사(古事)다.
“고작 그자만으로 가능하겠사옵니까?”
하지만 명나라는 이리가 아니다. 호랑이를 내몰아 용을 잡는 격이다.
임금은 하륜에게 말했다.
“산동에 사람을 보내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소상하게 알아오라고 하시게. 그 다음에 결정하면 될 일이나 과인의 말이 틀리지 않을 것 같은데 말이야.”
“명을 받드옵니다.”
하륜은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런 하륜에게 임금이 말했다.
“산동하가(山東河家)의 가주에게도 과인의 말을 전하시게. 언제든 조선은 산동하가를 위해 열려 있으니, 부담을 가지지 말라고.”
“……전하.”
하륜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임금은 그런 하륜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퍽이나 감격한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과인이 이 조선에 모르는 일이 있을 것 같은가?”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산동하가.
중원에 잘 알려지지 않은 산동반도 구석에 위치한 무가이지만 산동 안에서는 제법 이름이 알려진 그 무가의 주인이 바로 하륜의 혈족이었다.
과거 고려시절에 가별초의 부장이던 하륜 가문의 먼 방계가 가별초에서 죄를 짓고 도망쳐 나와 산동까지 흘러들어가 무가를 세웠으나 혹여나 자신의 존재가 하 씨 가문에 피해가 갈까 싶어 하륜의 마음의 짐이 되었던 곳이기도 했다.
한데 임금이 과거의 죄를 사하여 주었다.
“산동하가를 통해 검주에게 전달하시게. 조선에서 가장 날래고 빠른 배를 봉래에 준비해 둘 터이니 무사귀환하기를 바란다고. 옹주에게는 조선에서 가장 큰 객잔을 지어 줄 터이니 미련을 가지지 말고 돌아오라고 말일세.”
“예,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