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4. 남경무쌍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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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4. 남경무쌍 (3)
2022.10.08.
[동쪽에서 준동한 악마가 이 땅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은빛 물결은 전부 침음할 지어니, 그를 막아야 하느니라.]
유럽 전체를 좀 먹었던 십자군 전쟁이 끝난 지 고작 삼십 년이 지난 후 시작된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전쟁으로 인해 유럽 전역이 신음했다.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교황의 권위가 크게 손상되었다고는 하나 본래 종교란 사람들에게서 떼어 놓으려야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이었기에 손상된 종교의 권위는 전쟁이 시작되면서 다시금 크게 세를 확장했다.
전쟁고아들.
전쟁으로 인해 가장 많은 피해를 보는 것은 결국 힘이 없는 백성들이고, 전쟁으로 인해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차고 넘치자 종교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며 민심을 회복하고 세를 확장한 것이다.
직호모, 지코모 로레단 역시 그로 인해 간신히 전쟁의 화를 피해 살아남은 아이 중 하나다.
그렇게 전쟁 통에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지코모는 이탈리아 베니치아를 중심으로 활발한 세를 떨치는 유력 귀족 가문인 로레단 가문에 입양되었고, 그곳에서 착실히 로레단 상단 수업을 받으며 상인으로서의 기량을 키워 나갔다.
그러나 지코모는 로레단 가문이 아니라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하느님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기로 맹세하였다.
그런 지코모에게 묵시록의 때가 당도하였다며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히 따르는 하느님의 종, 추기경이라 하는 자가 찾아온 것은 지코모에게 있어서는 운명이었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그 대가를, 그리고 배불리 먹이고 이리 살려 준 것에 대한 은혜를 보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추기경은 지코모에게 동쪽의 악마는 제 손으로 하느님의 말씀과 질서를 끊어 낸 자이기에 그가 유럽에 도달하는 순간 거대한 혼란의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묵시록이 시작될 것이라 말하였고 지코모는 그런 추기경 앞에 맹세했다.
악마를 제 손으로 처단하겠다고.
그러자 추기경은 지코모에게 신께서 내려 주신 성물(聖物)이라며 철퇴 하나를 내밀었다.
멸마(滅魔)의 철퇴.
쥐는 것만으로도 하느님께서 내려 주신 힘이 절로 솟아나고 하느님께서 보우하사 그 어떠한 악마와 싸운다 하더라도 지지 않을 것 같은 용기가 솟아오르는 신물(神物)이었다.
그와 함께 지코모는 추기경이 내어준 이단심문관들과 함께 긴 여로를 거쳐 명나라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지코모에게 있어 한 가지 고민거리가 있다면, 묵시록에 나온다는 그 악마가 대체 누구인지, 그것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추기경은 악마가 근처에 있다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지만 그럼에도 지코모는 꾸준히 악마를 찾아다니며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다.
권력을 쥔 명나라 조정의 대신들, 돈이 많은 대상들, 역사가 깊은 가문의 가주들, 그리고 내로라하는 강호무림의 강자들까지.
허나 그럼에도 신물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지코모는 실망하지 않았다. 하느님과 그의 아들인 예수가 한 말을 적은 성경을 입에 담은 추기경이 거짓을 말했을 것이라고는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들려온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 무림왕(武林王) 검주(劍主) 만우의 소식.
그가 중원보다도 더 동쪽에 있는 군자국 조선에서 왔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지코모는 강렬한 확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제야 신물은 비로소 반응했다. 그에 지코모, 아니 직호모가 기다리고 기다렸던 그 순간을 위해 악마를 멸하기 위한 철퇴를 뽑아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하느님의 종인 추기경이란 자도, 직호모도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간과한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만우, 그 자체였다.
주륵!
철퇴에 직격당한 만우의 머리에 피가 튀었다. 하지만 보기에도 흉흉하기 짝이 없는 철퇴에 무방비로 머리를 직격당해 놓고 피만 튀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만우는 그 말이 안 되는 일을 말이 되는 일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스윽.
뚝, 뚝.
만우의 머리에서 솟아오른 피가 만우의 이마를 타고 볼을 따라 흘러내렸다. 만우는 눈앞이 자신의 피로 인해 붉게 물들자 헛웃음을 지었다.
“허, 허허헛.”
대체 이게 얼마 만에 보는 피던가. 아마 만우가 화경에 오르고 나서는 피를 본 적이 거의 없는 것 같았다. 그것도 피륙에 이렇게 터져서 피를 본 적은 더더욱 없었다.
“호신강기를 깨?”
하지만 만우도 꽤나 놀란 상태였다.
현경에 이른 만우의 피륙이라도 상하게 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검기지경(劍氣之境) 이상의 고수는 되어야만 한다.
한데 그런 만우가 사전에 낌새라도 눈치채고 이제는 수발이 숨 쉬 듯 자유로워진 강기(强氣)로 호신강기(護身强氣)를 치면 같은 강기가 아니고서는 만우에게 상해를 입힐 수 있는 존재는 없다.
딱 하나.
내공, 흔히 말하는 자연지기(自然之氣)보다 더 정순하고 깨끗한 선경지기(仙境之氣)라면 가능하다.
그렇기에 호선이나 기린, 불가살이 같은 신수(神獸)나 성수(聖獸)에게 만우가 고전을 한 것이다.
“한낱 무구 따위에 선기가 실렸다고?”
만우는 자신의 호신강기를 깨고 피륙에 상처를 입혔다는 것에서 저 철퇴가 범상치 않은 물건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범상치 않은 물건이 자신에게 위해를 가할 정도란 것도.
“역시! 악마로구나!!!!”
직호모가 철퇴를 회수하면서 뒤로 펄쩍 뛰어서는 물러났다. 만우는 내공 한 줌 느껴지지 않는 직호모가 거의 날아가듯이 뒤로 물러서는 것을 보고는 눈을 가늘게 좁혀 떴다.
“대체 무슨 원리지?”
만우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고작 철퇴 하나를 쥐었다고 내공 한 줌 없는 자가 마치 절정 고수처럼 움직일 수 있다니.
하지만 만우는 그에 놀라고만 있을 수 없었다.
직호모가 큰 소리를 내자마자 곧바로 송화루 전체에서 자욱한 선기(仙氣)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만우는 그것이 직호모의 호위들이 발출한 것이란 것에 두 눈을 크게 치켜떴다.
“무슨!”
그들은 마치 무림인들이 내공심법을 익혀 내공을 몸속에 쌓는 것처럼 몸속에서 선기를 발출하고 있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어디선가 음률이 울려 퍼지더니 그 음률이 음공(音功)의 일환처럼 선기와 공명하면서 만우를 짓눌러 죽이겠다는 것처럼 주변의 압력을 올려 버린 것이다.
쿵-! 쿵-! 쿵-!
그리고 그 사이로 직호모의 호위들이 동작을 맞춰서 내는 발 구름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만우는 주변이 찌르르 하고 울리면서 공기 자체가 자신을 압박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눈치챘다.
“이런 진법이라.”
만우는 오랜만에 알싸한 위기감을 느꼈다. 직호모는 내공 한 줌 없이도 선기를 품은 철퇴를 손에 든 것만으로 만우의 머리에서 피가 흐르게 만들었다.
그러니 지금 만우가 느끼고 있는 이 압력 역시 내공과는 전혀 별개로 자신의 육신에 무언가 상해를 가할 수 있다는 소리인 것이다.
“간만에.”
쿵쿵!
만우는 자신의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위기 상황에 등골이 오싹거렸지만 만우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직호모는 그런 만우의 미소를 보며 팔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 것을 느꼈다. 그러자 처음으로 멸마의 철퇴를 손에 든 후에 한 번도 가져 보지 못한 감정이 솟아났다.
공포.
멸마의 철퇴에 직격당하고도 머리가 부서지기는커녕 피를 조금 흘린 것이 전부이고, 이제는 숫제 흥분된다는 듯 웃고 있는 만우에게서 직호모는 공포를 느낀 것이다.
‘헛된 생각이다. 난 그저 하느님의 말씀을 따를 뿐. 하느님께서 나를 보우하사!’
하지만 직호모는 그런 본능이 보내오는 경고신호를 무시하고는 하느님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러자 잠깐 느꼈던 공포가 씻은 듯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전부 쳐라! 천하제일인이라고는 하나 결국 그도 피를 흘리는 인간에 불과하니!!!”
또한 천하제일인이니 뭐니 하면서 중원 전체를 뜨겁게 달아오르게 만들었던 소문의 주인공인 만우도 결국 신의 힘만은 피해 가지 못했다.
그것이 곧 만우 역시도 아직은 인간이라는 소리였기에 직호모의 독려에 이단을 징벌하는 것을 만평생의 과업으로 생각하는 이단심문관들이 몰래 숨겨 놓은 육중한 롱소드를 탁자 밑에서 꺼내들며 우렁차게 소리쳤다.
“신을 위하여!”
“신을 위하여!!!”
직호모가 웃고 있는 만우를 향해 철퇴를 겨누며 이단심문관들과 함께 소리쳤다.
*****
덜그럭.
“……뭐?”
임택평은 지금 자신이 무언가를 잘못 들은 줄 알고는 재차 물었다. 하지만 그렇게 재차 묻는다고 해서 임택평이 두 귀로 들은 사실이 달라지지 않는다.
“미친! 대체 어떤 놈들이?”
하오문 남경 분타는 연경의 총분타에 버금가는 가장 큰 하오문의 지부 중 한 곳이다. 황제가 연경으로 천도를 할 것이라는 소문 때문에 연경으로 총분타를 옮기기 전까지는 남경의 분타가 하오문의 본부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임택평의 부재 시 남경 분타를 관리하는 남득은 하오문에서 임택평이 가장 신뢰하는 심복 중 하나다.
남득은 하오문에 입문한 후에도 고작 송화루의 문지기 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나 남득의 신중한 성격은 임택평의 신뢰를 사기에 충분했기 때문에 임택평은 남득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황보세가의 현무단과 하북팽가의 군상단이 자취를 감추었다고 합니다.”
“……황실은?”
임택평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지금 남득이 보고하고 있는 소식이 사실이라면 말 그대로 무림에 한 바탕 혈풍이 몰아칠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천하제일인이 연루된 일이니 말이다.
“남진무사가 직접 발우수리 객잔 주변을 통제하고 있는 것을 보니 황실에서도 뒤늦게 파악한 듯싶습니다.”
“그것 말고!”
임택평은 두 눈을 부릅떴다. 임택평이 묻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황보세가와 하북팽가를 상대로 황실이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은 것이냐?”
무림왕 만우.
황제는 파격적으로 황족도 아닌 일개 동이족 출신의 무림인인 만우에게 무림왕의 작위를 내렸다. 혈통도, 가문도,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일개 칼잡이인 만우를 천하제일로 인정하고 무림왕의 작위를 내린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만우의 정인에게 황상이 황보세가가 운영하고 있던 연경의 황룡객잔을 하사했다는 소문이 이미 중원 전체에 돌았다.
그런데 황보세가와 하북팽가가 형식적이라고는 하나 왕작을 받은 무림왕의 정인을 습격했다는 정황이 보이는데 황실이 움직이지 않았다?
무림왕으로 친히 칙서를 받은 만우의 정인을 공격했다는 것은 곧 황실의 권위에 도전하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즉, 반역인 것이다.
“움직이지 않았다 합니다. 듣자하니 하북팽가와 황보세가에서 생사마의를 명분으로 삼아 황실에서도 끼어들지 못했다 합니다.”
남득의 말에 임택평은 이마를 턱 하고 짚었다.
“야단났군. 왜 생사마의가 하필이면 그곳에 나타났다는 것이냐. 마교는 어쩌고. 무당과의 전쟁에서 그 정도의 여유가 있을 리 없는데.”
혈세천마가 건재하던 시절의 마교라면 무당파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데 그 정도 여유를 부려도 충분히 납득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교의 세는 크게 기울었다.
일본국에서 마교가 교주인 혈세천마와 두 명의 무림십좌 고수인 곡왕과 마존, 그리고 대다수의 천마대와 진혼대를 잃은 후 급격하게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혈세천마의 뒤를 따라 차기 교주에 등극한 혈세천마의 아들, 마얼 주창이 화경의 고수로 밝혀졌으나 이미 마교는 셋이나 되는 화경의 고수를 잃었다.
그러자 무당파는 그동안 참았던 분노를 드러냈다.
혈세천마의 명에 조선으로 향한 살풍대가 정의대 소속의 무당파 도사 두 명을 주살한 일로 무당이 마교를 먼저 공격한 것이다.
그런 와중에 생사마의가 정파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연경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미 생사마의는 그 악독한 술수로 인해 무림공적으로 낙인이 찍혔기에 하북팽가와 황보세가가 움직일 수 있는 명분이 충분했다.
“발우수리 객잔에서 생사마의를 감싸고 내놓지 않았다 합니다. 그래서 황보세가와 하북팽가의 공격이 시작되었다는 것이 현재 정황입니다.”
“무림의 일이다?”
“예.”
임택평은 인상을 썼다. 황보세가와 하북팽가의 논리가 맞는 것 같으면서도 이걸 듣고 난 후의 만우의 반응이 걱정이 됐기 때문이다.
“아니. 대체 그 두 세가는 머리에 뭐가 들은 거야. 학습 능력이 없는 거야? 아니면 뭐, 검주를 꺾을 방법이라도 있던가?”
작금의 검주 만우는 명실공이 천하제일인이 되었다. 거기에 황실의 인정을 받아 무림과 관, 불가침의 영역에 있는 그 두 곳에 한 발씩을 걸친 거물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북팽가와 황보세가는 퀴퀴한 그 명분을 들어 검주의 정인을 공격했다.
“대체 왜.”
“무림의 질서를 흩트린 것은 하북팽가와 황보세가에게 생사마의를 넘기지 않은 검주의 정인에게 있다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그게 전부라고?”
당장 만우의 수중에 황보세가 최고의 기재이자 최강의 무인인 황보경이 잡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보세가에서는 생사마의를 친다는 명분으로 만우의 정인을 공격했다.
명분이고 뭐고에 앞서 무림에서 가장 앞서는 것이 바로 힘이라는 것을 황보세가에서 모르는 것일까?
과연 명분이 있다고 하여 분노한 검주의 화를 황보세가와 하북팽가가 피해 갈 수 있을까?
“기존 무림의 질서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사람이 검주이거늘.”
만약 만우가 기존 무림 질서에 순응하려 하였다면 무림십좌의 말석이라 실력이 폄하되지도 않았을 것이며 동이족이라고 무시 받지도 않았을 것이다.
허나 그에 순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만우는 늘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도 무림십좌의 말석이라 무시를 받고 그의 실력을 계속해서 의심하는 사람들이 나왔던 것이다.
그런 만우가 이제는 명실공이 천하제일로 인정을 받았다.
허나 그렇다고 하여 만우가 이제 와서 명분이니 그런 것을 따질까?
“피바람이 몰아칠 수도 있음이다.”
“황보세가와 하북팽가가 손을 잡고 무림맹의 이름으로 무언가를 추진하고 있다고 합니다.”
“…….”
하북팽가와 황보세가는 바보들이 아니다. 그들이 만약 바보였다면 그 자리에까지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그들에게도 믿는 구석이 있다는 소리다.
“글쎄. 과연 그것이 검주에게 통할 듯싶으냐?‘
“…….”
남득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얼마 전까지라면 고민하지 않고 통할 것이라 대답하였겠으나 지금의 만우는 홀로 제갈세가를 멸문시켰고 사림곡의 독왕과 그 정예들을 몰살시켰다.
혈혈단신으로.
임택평과 임수미가 살아 나왔다는 것 자체가 그 소문이 진짜임을 확인시켜 주었기 때문에 만약 그렇다면 검주 만우는 최강이다.
천하제일인.
그 무게가 오롯이 느껴졌기에 남득은 입을 꾹 다물었다.
“괴검, 괴권과 옥면산군과 필수교어도 검주를 따르고 있다.”
“허면…….”
“녹림과 장강이 검주를 지지한다면 어찌 되겠느냐?”
남득의 눈이 커졌다. 옥면산군과 필수교어라면 각기 녹림과 장강의 총채주와 대채주다. 그들이 동원할 수 있는 녹림과 장강의 무인들만해도 수천이 그냥 넘는다.
즉, 만우 홀로 무림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그림에서 세력이 나눠지는 것이다.
“그리고 검주 곁에는 조선에서 온 화경의 고수들과 일본국에서 온 고수도 포진하고 있고.”
척일과 척사영, 그리고 슌스케 이야기다. 남득은 생사마의가 황보세가와 하북팽가의 합공에도 잡히지 않고 탈출한 것이 바로 그들 때문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석소군도 검주에게 잘 보이려 애를 썼다고 하였지.”
거기에 만우는 석가장의 가주인 석소군이 직접 마중을 나올 정도다.
“무림왕인 검주가 관을 동원하면 어찌될 것 같으냐?”
거기에 검주는 더 이상 예전의 무림십좌의 말석에 이름을 올린 그 검주가 아니다. 만우는 마음만 먹는다면 무림왕이란 이름으로 관까지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이 충분하다 못해 차고 넘쳤다.
“답은 하나로,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문주.”
남득은 단호하고 비장한 표정으로 임택평을 쳐다봤다.
“저희 하오문, 검주 쪽에 줄을 서야 합니다. 반드시.”
남득인 내린 답에는 변수란 것이 보이지 않았다. 대세는 뚜렷했다. 그저 기존에 무림에 버티고 선 썩어 가고 있는 고인 물들이 눈 가리고 아웅을 하는 것이다.
밑바닥에서 그런 눈치 하나는 비상하게 발달한 남득의 말에 임택평이 씩 웃었다.
“검주의 정인이 도주하고 있는 지역의 하오문도들에게 전서구를 띄워 전력으로 그들을 도우라 명하라. 지금의 투자가.”
임택평은 이번 일에 하오문의 사활을 걸기로 마음을 먹었다.
“미래에 우리 하오문의 성세를 불러올 것이다.”
확신에 가득 찬 임택평의 말에 남득이 고개를 숙였다.
“예, 문주!”
하오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여인은 본래 음기(陰氣)를 안고 태어나 양기(陽氣)가 강한 무공을 익힐 수 없다고 알려진 것이 무림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내놓은 정설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언제나 변수라는 것이 있고, 그 변수는 늘 틀에 박혀 있던 고정관념을 깨는 법이다.
벽력손가의 가주, 벽력신검 손향이 바로 그러한 인물이었다.
무림의 세가나 문파 중 구할 구푼은 전부 다 남자가 가주인 경우가 많았다. 무공이란 것 자체가 여성보다는 남성에게 초점이 맞춰진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공이라는 신체의 불리함을 넘어설 수 있는 힘이 있기에 수많은 여고수들이 무림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늘 최고라 불리는 무림십좌의 자리에는 지금껏 여성이 이름을 올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강호무림은 강자존, 약육강식의 비정한 세계이다.
그렇기에 무림인은 모든 것을 무공으로 증명하여야 한다. 강함이야 말로 절대적인 기준이며 절대적인 가치인 곳이 바로 강호무림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벽력손가의 가주, 손향은 여성의 몸으로 벽력손가의 최고수임을 증명하였기에 가주의 자리에 올랐다.
여인의 몸으로 초절정 고수의 반열에 오른 손향에 대해 무림의 호사가들은 벽력신검을 쥐었을 때를 한정하면 그녀를 능히 무림십좌의 반열에 올려도 된다 하였으나 손향은 무림십좌의 일석을 차지하지 못했다.
벽력신검, 개인의 무공이 아니라 신병이기(神兵利器)에 기대야 한다는 것이 무림인들로부터 혹평을 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동제일고수로 손향을 꼽는 이들이 있을 정도로 손향은 희귀한 여성 가주이자 벽력손가라는 유서 깊은 가문의 최고수였다.
그런 손향은 손칙의 보고를 받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송화루로 갔다?”
“예, 가주. 어찌 할까요.”
올해로 마흔이 넘은 손향은 그간의 연륜이 담긴 우묵한 눈으로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온갖 모진 풍파와 세간의 의심을 받으면서 굳건해진 손향의 정신력이지만 예상 밖의 상황에 손향은 침음성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광신도(狂信徒)라 하였지.”
“예, 가주.”
“내공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자들이니 이것을 무림맹에 고한다 하여도 반응이 없을 것은 뻔한 일인데…….”
놀랍게도 벽력손가에서는 직호모와 그의 상단에 대해 깊은 의구심을 가지고 있는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상단임에도 불구하고 진귀한 것들을 남경까지 들어와 팔지는 않고 계속해서 창고에 쌓아만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벽력손가에서 처음으로 직호모에게 접근했던 것은 서역에서 들어온 대상이 진귀한 물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동의 유서 깊은 명가라고는 하나 벽력손가에서 추진하는 사업을 위해서는 조정 대신들에게 반드시 줄을 대야만 했다.
그 줄을 대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뇌물을 가져다 바치는 것이었기 때문에 까다로운 조정 대신들의 비위를 맞춰 줄 진귀한 물건을 찾고 있던 벽력손가의 감시망에 직호모와 그 상단이 포착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허나 직호모는 단박에 거절했다.
적당한 거래처를 찾고 있지만 벽력손가는 그 거래처가 아니라면서 첫 만남 자리에서 퇴짜를 놓은 것이다.
그렇게 무례하게 퇴짜를 맞아 분개하였으나 벽력손가는 명문이라는 자부심이 있었기에 그 이상 그들에게 접촉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벽력손가를 깔 정도라면 어느 정도의 거래처를 찾고 있는지 주시하였으나 직호모의 상단은 그 누구와도 거래를 하지 않았다.
심지어 벽력손가처럼 무가(武家)가 아닌 남경에서도 내로라하는 귀족 집안의 거래 제안도 무시했다는 것이다.
‘거래를 하지 않는 상단이라, 그게 말이 되는가?’
모든 상단과 장사치들은 이윤을 최우선적으로 따진다. 하지만 직호모의 상단은 그것을 역행하였다. 그렇기에 벽력손가에서는 그들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는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다른 목적으로 서역에서 들어온 집단이라면 벽력손가는 강동을 오랫동안 책임 진 명문으로서 저들의 목적을 알아낼 책임이 있다고 느꼈고, 손향은 가문의 정예들을 몰래 상단 안으로 들여보내 염탐하게 하였다.
그리고 단 한 명만 살아 돌아왔다.
일류까지 포함된 고수들, 그중에서도 경신법과 잠행술에 일가견이 있다는 이들을 들여보냈지만 그들 모두가 연락두절이 된 것이다.
간신히 살아 나온 이도 불과 이틀 만에 죽어 버렸다.
그의 몸에서는 손향이 처음 보는 요사스런 기운이 들끓으며 막대한 고통을 주고 있었다.
그건 손향으로서도 처음 본 수법이었는데 간신히 살아 나온 수하의 몸속에서 뼈가 빠르게 자라나면서 서서히 그 뼈들이 살을 뚫고, 장기들을 뚫으며 결국 죽음에 이르게끔 한 것이다.
결국 손향은 그 수하에게서 아무것도 듣지 못한 채 수하의 목숨을 제 손으로 끊었다.
그 수하는 죽기 전에 딱 한 마디만을 하고 죽었다.
[이매망량을 믿는 광신도들.]
벽력손가에서는 평소에 친분이 있던 조정의 대신들에게도 도움을 요청해 보았지만 그들은 이런 일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손가씩이나 되어 그런 일도 알아서 처리하지 못한다고 비웃음만을 샀을 뿐이다.
그에 가주인 손향이 직접 나서겠다며 팔을 걷어붙이고 있던 것을 가신들이 모두 매달려 말리고 있던 찰나에 무림에 위명을 떨치는 천하제일인, 검주가 남경으로 오고 있다는 소문이 손가의 귀에 들린 것이다.
단신으로 제갈세가를 무너뜨리고 독왕 중백약과 사림곡의 정예들을 몰살시킨 천하제일검!
그라면 손바닥을 뒤집듯 손쉽게 직호모와 그 상단에 대한 비밀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 가신들의 읍소에 결국 손향은 자신의 뜻을 꺾었다.
하지만 설마 벽력손가보다도 한 발 앞서 직호모가 검주를 데려갈 줄이야.
완전 뒤통수를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검주가 검밖에 몰라 그를 검치(劍痴)라 한다 하기에 벽력신검이라면 버선발로 뛰어올 줄 알았거늘…….”
“속하의 불찰이옵니다. 허나 직호모가 기다렸다는 듯 검주에게 말한 것을 미루어 볼 때.”
“그들이 목적이 검주다?”
“예, 가주.”
손칙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가주가 친히 내린 명령을 수행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이리라. 그러나 손칙의 예측은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일리가 있다고 해도 근원적인 질문에는 답이 되지 않았다.
“왜?”
직호모는 누가 보더라도 중원인이 아닌 색목인이었다. 금발의 벽안을 한 직호모가 대체 왜, 어떤 연유로 동이족 출신의 검주에게 관심을 쏟는다는 말인가?
“풀어 놓은 귀를 통해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엿들어 본 결과 구라파, 그중에서도 특히 영길리(잉글랜드)와 불란서(프랑스) 지역 왕가(王家)들의 전쟁이 심화되고 있다고 하니…….”
“겨우 검객 하나를 위해서 그 먼 길을 왔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손칙은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예측이 이번에는 너무 멀리 갔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하지만 그때 바깥이 소란스러워지더니 우당탕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가, 가주님. 헉, 헉.”
밖에서 들려온 소란에 손향은 입꼬리를 끌어내렸다. 지금 손칙과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상황에 방해를 받았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냐.”
손향의 말에 문을 급히 연 총관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급한 일입니다. 지금 문중에 그자가 도착하여 문을 열어 달라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자? 무슨 말이더냐?”
벽력손가에 드나드는 사람만 해도 하루에 백 명이 넘는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이들이 손향을 만나고자 연통을 넣었다.
“검주, 아니, 무림왕 전하께서 벽력손가에 찾아오셨습니다!”
하지만 총관의 말에 손향은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