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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3. 남경무쌍 (2) (393/400)


393. 남경무쌍 (2)
2022.10.04.



“에…… 에…… 에이취!”

주고후는 크응 하고 콧물을 들이마셨다. 그러자 걱정스런 표정의 김 씨가 주고후에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괜찮으시옵니까 전하.”

“아, 갑자기 나왔네.”

“고뿔이 드시려는 것 아닙니까?”

김 씨의 걱정에 주고후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주고후는 무공을 익힌 몸이다. 그런데 고뿔이라니.


“아무리 본왕이 걱정돼도 그렇지.”

“안 되겠습니다. 그간의 여독이 쌓여 고뿔이 드실 수도 있는 노릇이니 남경이 들자마자 어의를…….”

“됐어!”

주고후가 팩 하고 고개를 돌렸다. 김 씨는 그런 주고후를 보면서 안절부절못했지만 주고후가 쳐다보질 않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나저나 남경이라.”

주고후가 저 멀리 모습을 드러내는 남경의 거대한 성벽을 보면서 턱을 쓰다듬었다. 그때 김 씨가 주고후에게 말했다.


“전하. 쇤네는 그냥 남경 바깥에 있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왜?”

주고후가 고개를 갸웃하자 김 씨는 난처하다는 듯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에 주고후가 헛기침을 큼 하고는 외쳤다.


“물러나라!”

존명!

가마꾼 넷이 주고후의 말에 일언반구하지 않고서는 곧바로 멀어졌다. 그들이 이 안에서 나누는 이야기를 듣지 못할 정도로 멀어졌다는 것을 확인한 주고후가 김 씨에게 말했다.


“유모.”

“예, 전하.”

“혹시 본왕에게 피해를 끼칠까 그러는 겐가?”

“……예. 전하.”

김 씨가 고개를 들어 주고후를 쳐다봤다. 주고후의 유모인 김 씨이지만 그녀에게 말 못 할 비밀이 있다는 것은 그녀도, 주고후도 알고 있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주고후는 김 씨를 여전히 그의 곁에 두었다.

직계 혈통을 가진 귀족도 아니고, 김 씨는 조선에서 공녀로 명나라에 오게 된 불쌍한 운명일 뿐이었으니까.

지금보다도 더 어렸던 주고후는 막다른 길에 몰렸던 김 씨의 손을 잡아 주었다.


“제갈세가는 멸문당했어. 유모도 봤잖아.”

“허나 전하…….”

“본왕도 잘 알지. 비밀이란 것이 절대적이고 영원할 수 없다는 법이니. 허나 그 때문에 대체 언제까지 그리 두려워하며 살 생각이란 말인가 유모.”

주고후는 불안해하는 김 씨를 달랬다.


“남경의 문벌들과 본왕이 유모의 편이야. 허니 걱정은 그만 줄여도 돼. 제 아무리 아바마마라 할지라도.”

주고후는 김 씨의 주름진 손을 꼭 잡았다.


“유모는 내 어미 같은 사람이니 절대로 내주지 않을 것이야.”

김 씨가 주고후의 행동에 감읍해서는 조용히 흐르는 눈물을 느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



“주고후라.”

만우는 임택평, 임수미 부녀와 결별했다. 만우가 얻고자 하는 것과 알고자 하는 것을 다 얻었으니 굳이 동행할 필요성이 사라진 것이다.

물론 제갈세가의 압박이 있었다고는 하나 임수미는 분명 만우를 해하려고 했다.

타의에 의한 행동이기는 하나 만약 하나라도 잘못 됐다면 제갈세가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만우는 그 안에서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만우는 임수미를 용서해 주었다.

제갈세가에 쌓인 원한이라면 자신보다 임수미가 훨씬 더 클 텐데, 제갈세가의 남은 잔당들의 씨를 말리기 위해서는 하오문이 적격이었기 때문이다.

만우는 후환을 남겨 둘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었네. 것 참.”

만우는 호광성 비무대회부터 시작해 주고후와 만났던 여러 횟수들을 떠올리면서 헛웃음을 지어 보였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하더니 그리 찾아 헤맨 방매 어미의 단서를 쥐고 있는 자가 바로 곁에 있었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동행할 걸 그랬나.”

심상치 않은 열기를 품고 있는 주고후의 눈빛이 께름칙해 그를 밀어냈던 만우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고나니 약간의 귀찮음을 감수할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었다.

그래도 임택평을 통해 남경의 하오문 분타에 알려 주고후를 찾는다면 곧바로 알려 달라고 했기 때문에 이제 만우에게 필요한 것은 느긋한 인내심이었다.

척, 척, 척, 척.

그런데 그때 만우가 뒷짐을 진 채 느긋하게 거닐고 있던 저잣거리가 소란스러워지더니 길거리의 행인들이 양 옆으로 비켜서면서 길을 터기 시작했다.

쓸데없이 눈에 띄고 싶지 않다는 듯 그림자라도 밟을까 싶어 부리나케 비켜서는 행인들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웬 잡것들이.”

만우는 자신에게로 걸어오는 수십 명의 기척을 느끼고는 아미를 찌푸렸다. 만우가 생각한 것보다 자신의 소문이 중원 전체에 자세하고 빠르게 퍼졌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색목인?”

그런데 행인들을 기겁하게 한 그 주인공이 중원인이 아닌 금발의 벽안을 한 색목인이란 것을 발견한 만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명나라와는 다른 복식을 입고 금발에 벽안, 그리고 하얀 피부를 가진 색목인을 필두로 한 이들 몇과 그들을 호위하는 것으로 보이는 한족과 색목인들이 섞인 이들이 만우에게로 다가온 것이다.


“무림왕 전하십니까.”

색목인의 입에서 유창한 한어(漢語)가 튀어나오자 만우가 흠칫하고 놀랐다. 하지만 이내 만우는 평정심을 되찾았다.

사실 색목인을 보는 것이 이런 내륙에서는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곳은 명나라의 중심인 남경이다.

거기에 둔황이나 만주의 북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이런 색목인을 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랬기에 만우도 중원을 유람하면서 여러 색목인들을 본 적이 있었다.

그러니 한어를 잘 하는 색목인이 갑자기 튀어나온다고 해서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형일이만 해도 그런데.’

당장 만우를 추종하는 괴검, 문형일만 해도 천축국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알고 찾아온 것 아닌가?”

만우가 뒷짐을 진 채로 대답하자 순간적으로 색목인을 호위하는 무사들의 기세가 폭발적으로 솟구쳤다. 만우는 자신을 쿡쿡 찔러오는 투지를 느끼고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만!”

하지만 그런 무사들의 투지는 색목인이 소리치자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소인은 서역에서 먼 길을 거쳐 명에 온 이태리(伊太利)의 대상…….”

“잠깐!”

하지만 만우를 찾아온 손님은 그 색목인 대상(大商)만이 아니었다. 만우는 다른 쪽에서 또 다시 한 떼거지를 우르르 끌고 등장장한 이들을 보면서 눈가를 좁혔다.


“당대의 천하제일인을 뵙게 되어 영광이옵니다!!”

사나워 보이는 전사들을 대동하고 나타난 이태리의 대상이라는 색목인의 위세에 비해서 전혀 꿇리지 않는 무림인들을 대동한 이가 앞으로 나서서는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무림말학 벽력손가의 뇌섬검(雷閃劍) 손칙이 무림왕 전하께 인사드리옵니다.”

“벽력손가? 벽력신검(霹靂神劍)?”

만우가 눈에 이채를 띄며 아는 체를 하자 검은 머리를 곱게 쓸어 넘겨 이마를 훤히 드러나게 한 손칙이 치렁거리는 귀걸이를 찰랑거리며 포권을 취해 보였다.


“보잘것없는 가문의 허명을 전하께서 알고 계시다니, 가문의 흥복이 아닐 수 없사옵니다.”

벽력손가는 중원의 남부에서 위명을 떨치는 정사지간의 문파로 소문에는 후한시대 영웅들의 이야기의 배경이 되었던 삼국지의 오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칭제까지 했던 손 씨 가문의 후예라는 소문이 있었다.

허나 그런 소문에 대해 벽력손가에서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야기만 무성할 뿐이었다.

허나 그것 말고도 벽력손가가 유명한 이유는 또 있었다.

벽력신검(霹靂神劍).

벽력손가는 무림문파라는 정체성을 넘어서 무공보다 가보이자 신검인 벽력신검을 수호하는 것으로 유명세를 떨쳤기 때문이다.


“몇 번 들어 본 적이 있었지. 검신이 뇌정(雷精)으로 이루어져 있어 벽력신공(霹靂神功)을 익힌 자가 아니면 손도 댈 수 없다 알려졌다지?”

“역시, 검으로 천하제일을 일궈 내신 전하답게 검에 대한 지식이 해박하시옵니다.”

손칙은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로 만우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스스로가 검주라 불릴 정도로 검공(劍功)에 대한 관심이 많은 만우는 중원에 소문난 검가(劍家)를 직접 다 찾아다녀 보았다고 자부했다.

검공(劍功)보다 더 나아가서 검 그 자체에 대해 애정이 많았기에 중원을 유람할 때 만우는 취미로 검을 수집하기도 했었다.

물론 화산파에 가끔 들려 신세를 지는 것을 제외하고는 한 군데 진득하게 머물러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수집한 검을 오래 가지고 있지 않고 처분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 번 가 보고 싶었지. 허나 벽력신공을 익히지 않았다면 쥘 수 없다 하여 포기를 하였지만.”

“찾아오셨다면 좋은 인연이 되었을 것을, 안타까울 따름이옵니다.”

“글쎄, 과연 좋은 인연이었을까?”

만우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러자 손칙은 어색하게 웃었다. 만우가 검주로 천하를 유람하던 시절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들어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나 다행이라면 그것은 가정에 불과한 일이고, 만우와 벽력손가 사이에 특별한 연관성은 없다는 것이다.


“한데 이제 와서 본주에게 무슨 볼 일이지?”

만우가 그런 손칙에게 묻자 그는 흘깃 곁눈질로 이태리의 상인을 쳐다보고는 다시 만우를 쳐다보며 말했다.


“천하제일인께서 이 누추한 남경까지 와 주신 것도 인연이라 생각되어 천하제일인을 모시는 영광을 누리고자 이리 무례함을 알면서도 무릅쓰고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또한 천하제일인께서 검에도 관심이 있다고 하시니, 가주께서 천하제일인께라면 기꺼이 가보인 벽력신검을 보여드릴 수 있겠노라고 하신지라 의중을 여쭤보기 위하여 왔사옵니다.”

손칙은 매우 공손하고 예의가 발랐다. 하지만 만우는 그가 이태리 상인을 쳐다봤을 때의 눈빛을 놓치지 않았다.

손칙은 이태리 상인이라 하는 그자를 견제하고 있었다.


“전하! 소인의 말씀도 들어주시겠사옵니까?”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이태리 상인도 더 이상은 그냥 듣고만 있을 수 없다는 듯 끼어들었다. 그러자 단박에 손칙에게서 살기가 일어났다.


“이방인은 벽력손가의 일에 끼어들지 마시오! 이곳은 남경이니, 장사치가 감히 끼어들 일이 아니오!”

손칙은 이태리 상인을 장사치라 폄하하면서도 말에 있어서는 예의를 잃지 않았다. 만약 이태리 상인에게 별 힘이 없다면 손칙은 아마 대번에 그를 무시했을 것이나,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이태리 상인에게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다.


‘상인이라면.’

그것도 머나먼 서역에서 온 상인이 이 남경에까지 왔다는 것은 그만큼 거래하는 물건의 규모나 그 값어치가 귀하다는 뜻이리라.

그러자 만우는 이태리 상인을 쳐다봤다.


“석가장인가?”

“예, 전하. 그렇사옵니다.”

이태리 상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손칙의 표정이 변했다. 거북스럽다는 손칙의 표정에 만우는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지. 석가장이라면 벽력손가도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지.”

남경의 토박이 가문인 벽력손가는 명나라의 수도인 이곳 남경에서 어마어마한 규모의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었다.

또한 남경뿐만이 아니라 벽력손가의 손길이 뻗치는 곳은 강동(江東)이라 불리는 중원의 남서쪽의 대부분이었다.

장강을 끼고 발달한 남경이기에 장강이 끼치는 곳 전체에 벽력손가의 영향력이 미쳤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벽력손가가 오나라 손 씨 가문의 후예라는 소문이 돈 것이었고 말이다.


“해 봐. 이름은?”

하지만 벽력손가의 호통은 만우의 허락에 의해 무산이 되었다. 만우가 허락하자 이태리 상인은 기뻐하면서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입을 열었다.


“소인은 서역과 명나라를 오가면서 작게 무역 중개를 하고 있는 지코모 로레단(Giacomo Loredan)이라 하옵니다.”

“……어려운 이름이군.”

만우는 지코모 로레단이라고 몇 번 우물거리다가 말을 삼켰다. 서역식의 이름은 현경에 오른 만우라고 해도 발음하기가 어려웠다.


‘마익후.’

마익후도 원래 그런 발음이 아닌 것을 중원식으로 바꾼 이름이었다. 만우는 마익후를 떠올리고는 지코모에게 물었다.


“직호모라 불러 주시옵소서 전하.”

“직호모. 그래. 혹시 나마(羅馬)라고 아나?”

마익후는 자신이 그곳에서 왔다고 처음 만났을 때 이야기했었다. 마익후는 무공을 배운 색목인이기 때문에 어딜 가든 항상 눈길을 사로잡았었다.


“아, 제가 온 이태리의 도시이름입니다. 로마라고 하지요. 어찌 아십니까?”

“그래 로마, 그렇게 불렀었지.”

만우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직호모에게 말했다.


“내 수하가 그곳에서 왔다고 하더군.”

“수하…… 괴권?”

만우는 자신에 대해 많은 조사를 한 것처럼 보이는 직호모를 보면서 두 눈을 크게 떴다.


“언젠가 한 번 꼭 만나 뵈었으면 합니다.”

“인연이 된다면. 그건 그렇고, 본주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옆에서 손칙이 불안한 표정을 짓고는 직호모와 만우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고 있었다. 손칙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직호모를 견제하고 있었고 만우를 꼭 벽력손가로 데려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오늘 처음 본 손칙의 사정을 생각할 이유는 조금도 없는 만우다.


“저희도 전하께서 검을 매우 좋아하신다 하여 벽력신검에 밀리지 않는 검을 서역으로부터 가져왔나이다.”

손칙이 옆에서 발끈했지만 만우는 자신의 취향을 정확히 알고 그것을 노린 직호모를 보면서 나지막이 웃음소리를 냈다.


“검이라. 서역의 검?”

중원의 검이라면 질리도록 보아 왔지만 서역의 검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안 그래도 직호모를 호위하는 전사들의 검이 중원의 것과는 달라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만우였다.


“예, 전하. 소인이 가져온 검은 소인이 온 서역, 구라파에서 모르는 왕과 귀족이 없는 검이옵니다.”

상인의 말 중 절반은 걸러서 들어야 한다는 것은 고금의 진리다. 허나 만우의 관심이 그쪽으로 기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무슨 검이길래?”

“신왕검(神王劍), 혹은 왕국수호검(王國守戶劍)이라 불리는 검, 구라파의 가장 끝자락에 있으나 강성한 국력을 자랑하고 있는 영길리(英吉利:잉글랜드) 윤돈(倫敦:런던)에서 입수한 검인 왕자지검(王者之剑:엑스칼리버)이옵니…….”

“푸흡!!!!”

만우의 입에서 바람 새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



“안 갈수가 없지.”

“현명한 선택이십니다. 전하.”

결국 만우가 향한 곳은 벽력손가가 아닌 남경제일루, 송화루였다. 직호모는 과연 서역에서 온 대상이란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송화루 전체를 빌린 터라 늘 사람으로 북적거리던 송화루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 얼씬도 하지 않았다.


“한데 상인이라는 것을 감안해도 호위들이 너무 많은 듯싶은데?”

허나 그렇다고 해서 송화루에 사람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직호모가 데려온 휘하의 상인들과 잡부들, 그리고 호위들로 인해 송화루에는 평소보다 사람이 더 많은 듯싶었다.


“제가 워낙 신중한 성격인지라. 또한 석가장의 석소군 가주가 저희 로레단 상단을 위해 붙여 준 이들도 있사옵니다.”

“그건 알고 있고.”

“역시 전하십니다!”

만우는 마치 입 속의 혀처럼 매끄럽게 아부를 하는 직호모를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색목인이 저리도 유창하게 한어를 구사한다는 것도 놀라웠는데, 그런 직호모의 화술은 만우가 지금껏 만나 본 웬만한 중원인보다도 더 나았다.

말로 천 냥 빚도 갚는다는 상인답게 화술이 매우 뛰어난 것이다.


“중원이 아니라 흡사 서역에 온 것 같군.”

만우는 송화루 내부를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직호모는 대상답게 먼 서역에서 오면서도 서역의 음식을 먹고 싶었던 것인지 직접 색목인 숙수들까지 데려왔다.

그 때문에 송화루에서는 만우가 한 번도 맡아 보지 못한 이질적인 향기로 가득했다. 그 외에도 주변에 삼삼오오 둘러앉은 이들이 먹는 것들도 생소했다.

면이나 밥이 아닌 흰 만두 같은 것들을 전부 다 허여멀건한 국에 찍어서 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 한 번 전하를 꼭 구라파로 모실 수 있다면 삼생에 걸쳐 영광으로 삼겠나이다. 소인이 온 위니사(威尼斯:베니스)는 매우 아름다운 곳입니다.”

“그곳에도.”

만우의 머릿속에는 늘 의동생으로 남은 간장이 했던 말이 남아 있었다.

세계제일검(世界第一劍).

중원인들은 광오하게도 천하(天下)를 중원이라 부르고 그 나머지를 세외라 부르며 경시하지만 만우는 그런 중원인들의 오만함에 감화되지 않았다.

어차피 그 대단한 천하 아래서 중원인도 아닌 그들이 동이라 부르는 조선에서 온 자신이 천하제일인이 되었으니까.

중원은 결코 천하의 중심이 될 수 없었다.

허니 중원을 벗어나 바깥으로, 서쪽으로 계속해서 나아간다면 그곳에는 만우 자신을 즐겁게 해 줄 무인이 있을지 만우는 그것이 궁금했다.

어찌 되었건 간에 만우의 근본은 무인이고, 본디 무인이란 강자를 찾아 헤매기 마련인 족속이기 때문이다.

그리 하여 자신의 무(武)를 완성시키는 것은 만우에게도 역시나 인생의 목표 중 하나였다.

또한 세계제일검이 되면, 그에 맞는 세계제일의 검을 만들어 주겠다고 간장이 약속하지 않았던가.


“강한 무인이 있나?”

직호모는 만우가 한 질문에 빙긋 웃어 보였다. 벽안(碧眼)이 휘어졌고 직호모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예.”

“흠.”

만우의 눈에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만우는 직호모의 말을 순순히 믿지 않았다. 애당초 상인의 말이기도 했고, 무공 한 자락 익히지 않은 직호모였기 때문이다.


“그곳에도 늘 소모적인 일들이 일어나곤 합니다 전하. 전쟁이 있고, 전투가 있고 무엇보다도 주군을 섬기며 주군의 명예를 위하여 일생을 투술에만 전념하는 이들이 있사옵니다.”

“명예?”

“예. 전쟁은 언제나 많은 피와 물자를 필요로 합니다. 허나 지배자들의 명예란 때로는 누구에게나 다 손해라는 것을 알면서도 전쟁을 일으키고 사람들의 피를 흐르게 하지요. 그래서 구라파의 귀족들은 절충안을 찾아내었습니다.”

“생사결(生死決)이군.”

“예.”

“한데 직접 그 귀족이란 자들이 나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명예를 위하여 싸우는 자들이 있다?”

만우가 흥미를 드러냈다. 중원에서도 명예를 위해 휘하의 호위들을 내보내 생사결을 치루는 경우가 없지는 않다.

허나 그렇다고 하여 직호모가 말한 것처럼 전문적으로 생사결만을 위해 사람들을 양성하진 않는다. 허나 구라파에는 그런 일이 흔한 모양이었다.


“예. 그리고 그들을 기사(騎士)라 부르옵니다.”

“기사라.”

“그들은 한 명의 주군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칩니다. 주군의 명예가 곧 자신의 명예이며, 아녀자를 보호하고 약자를 보호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자들이옵니다.”

“흐음…….”

약자를 보호한다?

강호무림의 강자존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사고방식이다. 만우가 고개를 갸웃하자 직호모는 만우를 송화루 깊숙한 곳으로 이끌며 말을 이어 나갔다.


“저희 로레단 가문에도 유명한 기사들이 여럿 있사옵니다. 저도 풍문으로 들은 것이지만 유명한 기사들은 무거운 철갑옷을 입고 하루에 천 리를 갈 수 있다고 하오며 홀로 능히 천 명의 병력을 상대할 수 있다 하옵니다.”

“호오.”

전쟁과 전투가 즐비한 곳에서는 강자가 탄생할 수밖에 없다. 무공도 본래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나약한 인간의 발버둥에서 시작된 것이니, 서역이라고 해서 그것이 다를 리 없기 때문이다.


“이쪽으로 오시면 되옵니다.”

“그래. 들어가자.”

만우는 서역에 대한 호기심이 커지자 이제는 직호모가 가져온 그 남사스런 이름의 검에 대해서 관심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오죽하면 신검이라면 중원에서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벽력신검 대신 이 검을 보러 왔겠는가.


“왕자…… 아니 엑스칼리버는 영길리(잉글랜드)의 신왕검이라 불리는데 재밌는 이야기가 깔려 있습니다.”

“엑스…… 음. 힘든 이름이군.”

“그중 하나가 바로 검이 왕이 될 자를 뽑았다는 것이옵니다.”

“검이 사람을 정하였다?”

“예. 전설에 따르면 신왕검 엑스칼리버는 원래 돌에 박혀 있었는데, 왕이 될 자만 뽑을 수 있었다고 하옵니다.”

달그락.

그렇게 말하면서 직호모는 커다란 나무로 된 목함을 힘겹게 들어 올려서는 커다란 탁자 위에 올렸다. 만우는 단단하게 봉인이 된 그 거대한 목함을 보면서 흥미를 보였다.


“그렇게 뽑은 신왕검은 결투 중에 부러졌으나, 왕의 최측근이었던 마법사 묵림(默林:멀린)이 말해 준 대로 호수에 사는 요정족의 여왕에게 가져가 신왕검을 부활시켜 완전한 신왕검이 되었다고 합니다.”

달칵!

직호모는 대단히 조심스럽게 목함의 자물쇠를 풀었다. 통짜 쇠로 만들어진 커다란 자물쇠가 퉁 하고 열리자 직호모는 목함의 뚜껑을 조심스럽게 밀어 올렸다.


“영길리를 개국한 왕의 사후, 윤돈(런던)에 매장되었던 검을 로레단 상단에서 비밀리에 입수하여 이번 상행에 명의 천자께 조공품으로 바치고자 하였으나.”

화악!

목함 안에서 눈부신 빛이 쏟아져 나왔다. 만우는 그 빛에 섞인 익숙한 기운에 눈을 가늘게 좁혀 떴다.

선기(仙氣).

신왕검(神王劍)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왕자…… 아니 엑스칼리버는 그저 목함 안에 놓여진 것만으로도 선기가 섞인 빛을 품고 있었다.


“오늘 이리 전하를 만난 것은 전하께 이 검과의 인연이 이어진 듯하옵니다.”

직호모는 씩 웃으며 만우를 쳐다봤다. 곧 이어 만우가 감격스런 표정으로 자신에게 고마워하기를 기대하는 표정으로 직호모의 눈이 만우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직호모는 무언가 잘못 됐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신왕검? 왕국수호검?”

만우의 입가에는 놀라움의 미소가 아니라 어느새 비릿한 냉소가 맺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딴 쓰레기가 신왕검이라. 서역의 수준을 보지 않아도 알 만하구나.”

뎅-!

만우가 손가락을 튕겨 자칭 엑스칼리버라고 한 신왕검의 검신을 두드렸다. 그러자 그 순간 신왕검의 검신에서 강한 선기가 뿜어져 나오는가 싶더니 곧 이어 신왕검의 검신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쩌저적!!!

절대로 깨질 일이 없는 전설 속의 신검이 만우가 손가락으로 일으킨 진동 한 번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콰앙!!!

그와 동시에 만우의 머리에 직호모가 꺼내든 철퇴가 묵직한 굉음으로 직격하자 철퇴에서 뿜어져 나온 선기가 주변을 날카롭게 할퀴면서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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