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2. 남경무쌍 (1)
(392/400)
392. 남경무쌍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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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2. 남경무쌍 (1)
2022.10.01.
“객잔주와 마교의 생사마의라는 무뢰배의 직접적인 행적은 찾지 못하였사옵니다. 허나 황보세가와 하북팽가 무리들의 이동 경로를 밟아 나가면 예상 목적지를 찾는 데는 무리가 없사옵니다.”
“그렇다면, 산동인가?”
“예.”
산동이면 조선으로 가기 위한 뱃길이 있는 곳이다. 그렇다는 것은 유사시에는 곧바로 조선으로 넘어갈 방편을 구하거나 그곳에서 만우를 기다리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즉, 발우수리 객잔을 버리고 그곳으로 향했다는 것은 그만큼 황보와 팽가의 공세가 거셌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역시, 머릿수에는 무리였던가.”
황제가 빙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황제는 마치 일이 그렇게 흘러가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처럼 말하였다. 주순은 그런 황제의 웃음이 당연하다는 듯 상체를 바짝 낮추고는 말했다.
“폐하의 혜안은 이 자미원에서 천리 밖을 내다보시니, 소장은 경탄하고 경외할 따름이옵니다.”
“금칠은 되었다.”
황제는 주순의 아부에 피식하고 웃었다.
“검주 쪽의 피해는?”
“전무하옵니다.”
“호오…….”
“소장이 판단하기로는 검주의 수하들이라면 충분히 발우수리 객잔에서 황보세가와 하북팽가의 공세를 농성하여 막아 낼 수 있다 사료되었습니다. 허나 퇴각을 결정하고 퇴로를 연 것은 그들의 결정이었나이다.”
“버틸 수 있었는데도 퇴각을 결정하였다?”
“예, 폐하. 그 이유는…….”
주순은 말끝을 흐렸다. 황제는 그런 주순을 보면서 빙긋 웃었다. 검주의 수하들이 왜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인지 황제는 진즉에 눈치채고 있었다.
“짐 때문이로구나.”
“……예, 폐하.”
“허면 그들 중 짐의 의중을 꿰뚫어 본 자가 있다는 말이렸다?”
황제의 의중.
그것은 바로 무림을 상호불가침 따위가 아니라 대명의 황제인 자신의 밑에 신민으로 귀속시키고 거느리겠다는 뜻이었다.
명나라 안에 강호무림이라는, 관이 침범할 수 없는 성역 따위를 정복욕이 강한 황제가 용납할 수 있을 리 없었으니 말이다.
선황의 유지라는 그럴 듯하고 허울 좋은 명분이 있어 지금까지는 감히 나서지 못하였으나 그것을 뛰어넘는 더 큰 명분으로 덮으면 된다.
무림인이 황족을 공격하였다, 같은 그러한 명분.
“그런 무지렁이들이 어찌 폐하의 어진 혜안을 엿들어 보겠나이까. 객잔주가 검주의 여인이니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무리하지 않고 물러났을 수도 있지 않겠사옵니까.”
주순의 말에 황제는 크게 웃었다.
“되었다. 농이니. 그렇다면…….”
황제가 눈을 가늘게 좁혀 떴다. 주순은 황제가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숨소리도 크게 내지 않고서는 하명하기를 기다렸다.
그러기를 잠시, 머릿속의 생각을 정리한 황제가 주순에게 말했다.
“남진무사 순은 들으라.”
“존명!”
주순이 온몸의 근육을 바짝 긴장시키면서 고개를 숙이고는 대답했다.
“동창에 알려 사람을 보내 검주의 귀에 황보와 팽가가 움직여 연경에서 소란이 일어났음을 알려라.”
황제가 피식 웃었다. 황제는 일부러 검주의 귀에 들어가도록 정보의 흐름을 조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제는 숫제 얕은 기대감마저 들기 시작했다.
자신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천하제일인인 검주 만우가, 자신의 여인이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알면 과연 어떻게 나올 것인가.
그리고 자신의 여인이 그가 방관자로 남고자 하였던 무림의 세력들에 의해 노려졌다는 것을 알게 된 그 후에, 검주 만우는 과연 어떻게 나올 것인가.
황제가 무림을 자신의 백성으로 끌어안고자 하기 위해 선택한 계략은 구호탄랑(驅虎呑狼)이요 이이제이(以夷制夷)다.
호랑이를 끌어들여 늑대를 쫓아내고, 오랑캐로써 다른 오랑캐를 몰아내어 그 늑대와 오랑캐를 사로잡는 것.
그것을 위해 황제는 일부러 검주 만우의 반을 황족으로 만들었다.
과연 만우는 어떻게 움직일까.
“그리고 금의위는 들으라.”
“존명!”
남진무사이자 금의위를 이끄는 실질적인 수장으로서 주순이 고개를 숙였다.
“금의위는 황보세가의 가주인 황보천과 하북팽가의 가주인 팽우에게 사람을 붙여 일거수일투족을 감시케 하고 짐이 하명한다면 즉시 그 둘을 추포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다하라.”
“존명!”
어좌(御座)의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앉은 황제는 어떻게 사태가 흘러갈 것인지 기대되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희미한 웃음을 흘린 채 자신의 앞에 놓인 중원전도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무림에 이름이 알려진 유구한 세력들이 표기되어 있었는데 황제는 그 세력들을 보면서 나지막이 웃음을 터뜨렸다.
“선황처럼 그리 무를 수야 없지. 짐이 어찌 세운 명인데.”
*****
달그락 달그락 달그락
불존과 황보경, 두 화경의 고수가 끄는 마차는 남경의 성문 앞에서도 단박에 모든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하지만 개봉시와 다른 점은 성문의 수문장과 위사들이 그 마차를 수상하게 여겨 검문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을 밀치며 길을 열어 주었다는 것이다.
“비켜라!”
“무림왕 전하시다!”
“길을 터라!!!”
우르르르!!!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수문장과 위사들이 길을 터 준 덕분에 만우가 탄 마차는 그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고 열린 길 사이로 덜그럭거리며 굴러갔다.
이로 인해 확실해진 것은 두 가지다.
고작 그 며칠 사이에 만우에 대한 이야기가 중원 전역에 퍼졌다는 것과 앞으로 대단히 귀찮아질 것이라는 것.
“임택평.”
“예, 전하!”
만우가 부르자 임수미의 간호를 하던 임택평이 군기가 바짝 들어서는 곧장 대답했다. 원래도 만우 앞에서 긴장을 잘 하던 임택평이지만 최근 며칠간은 그 강도가 더 심해졌다.
“하오문인가?”
“아닙니다. 부끄럽지만 하오문은 휴업 상태라 해도 과언이 아니옵니다.”
“휴업?”
만우가 고개를 돌려 임택평을 쳐다봤다. 그러자 임택평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제갈세가의 천안각을 들여다보려고 했다는 이유로 전방위적인 압박이 들어온 터라…… 거기에 저와 수미를 비롯한 간부진들이 제갈세가에 당하는 바람에…….”
“그러니까, 약해서 문을 닫았단 소리네?”
만우는 돌려서 말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폐부를 깊숙이 찌르고 들어왔다. 임택평은 아프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그게 사실이었다.
“예, 전하.”
“그러면 내각대학사의 몸종을 찾아보라는 것은?”
“그것은 대답해 드릴 수 있습니다!”
임택평은 곧장 대답했다. 어차피 임수미를 구출해 주는 목적으로 그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주기로 합의를 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상대는 천하제일인이다. 괜히 이 알량한 정보를 손에 조금 쥐고 있다는 이유로 밀고 당기기를 하려다가 죽고 싶진 않았다.
“해 봐.”
“만우, 잠깐만 기다리시게.”
그 와중에도 마차는 달그락거리면서 남경의 대로를 활보했다. 그에 동군영과 설미수는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본래라면 동군영과 설미수는 조선의 사행단이었기에 남경에 들어오면 거쳐야 할 절차가 많았고 만날 사람이 많았다.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서는 그런 절차를 거쳐야 하지만 이미 연경에서 그 모든 것을 하고 내려온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은 그런 절차들을 다 건너 뛴 셈이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모든 것을 건너 뛸 수는 없다.
황제가 윤허했다고는 하나 실질적인 실무는 황제가 하는 것이 아닌 그 아래 대신들이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사행단에게 벌어진 일은 마치 보고 체계를 무시하고 곧장 최고 높은 곳으로 직통으로 보고가 올라간 셈이기 때문에 자칫하면 그 아래 실무자들이 억하심정을 품을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황제에게 말해드릴깝쇼?”
그런 설미수와 동군영의 우려에 만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그에 그 둘은 세차게 손사래를 쳤다.
“그리해서는 아니 되네. 그렇게 해서 해결되는 일이 아니야.”
“그렇습니다, 은공. 사람 감정이란 것이 복잡한 것이어서…….”
만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만약 윗대가리들이 시키는 대로 수하들이 잘 들어먹는다면 만우가 겪었을 그런 수많은 무림의 사건들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때로는 시키지도 않은 일들을 충심이라는 명목으로 하는 바람에 얼마나 많은 세력들이 만우와 끝장을 봤던가.
그런 세력보다 몇 백배는 더 큰 명나라의 조정이면 설미수와 둥군영이 저리 나오는 것도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아니었다.
“그럼 마차를 드릴 테니 따로 가십쇼. 전 이자와 함께 볼일을 보고 갈 터이니.”
“볼일이라면…… 내각대학사가 거론되던데, 맞사옵니까?”
설미수가 그리 묻자 만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설미수와 동군영 때문에 할 말을 끝까지 하지 못했던 임택평이 입을 열었다.
“전하.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전 내각대학사 댁에 들어갔던 공녀가.”
방매가 어릴 적 방매의 어미가 공녀로 끌려갔다고 했으니 그때면 전 내각대학사가 맞을 것이다. 만우가 임택평을 쳐다봤다. 어서 끝까지 말하라는 뜻이다.
“공녀가?”
“실종…… 된 것 같습니다.”
“……실종?”
“그, 그것이 전 내각대학사인지라, 황위가 바뀌면서 사람들이 싹 물갈이가 된 턱에…… 특히나 전 내각대학사의 집안이 멸문을 당하면서…….”
“멸무우운?”
만우의 고개가 모로 돌아갔다. 만우의 눈빛이 심상치 않자 임택평은 덜덜거리면서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 그것이…….”
“흔적도 찾지 못할 정도로 멸문이라고?”
“예. 지금의 황상께서 황위에 오르실 때 워낙 많은 대신들을 쳐 낸지라…… 그리고 특히 하필이면 그 공녀가 들어갔던 대학사의 집안이 쫄딱 다 멸문당하는 바람에.”
“그게 누군데. 그, 멸문이라고 해도 친척이나 혈족은 살아 있을 거 아니야. 응?”
만우가 임택평을 향해 눈을 부라리며 물었다. 하지만 임택평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 명도 살아남은 사람이 없습니다.”
“단 한 명도? 이게 어디서 말도 안 되는…….”
그러다 문득 만우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이름이 있었다. 황제에 의해 십족이 멸(滅)을 당하는 최악의 수모를 겪은, 수천 명의 피가 흘렀던 명의 학자.
방효유.
“방효유?”
“……제가 말씀드린 적은 없는 것이옵니다.”
황제의 치부이자 약점이기도 한 그 이름이 임택평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것을 들은 만우는 이마를 턱 하고 손바닥으로 짚었다.
“이런 젠장할.”
방매의 어미를 찾아준다고 했던 만우의 장담이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순간이었다.
*****
설미수와 동군영은 명나라의 대신들을 만나기 위해 황제의 칙서를 가지고는 감령과 필두의 호위를 받으며 만우와 갈라졌다.
비록 무림왕이 된 만우가 없다고는 하나 황제의 칙서가 있는 이상 명나라의 대신들은 절대로 설미수와 동군영을 홀대할 수 없을 것이다.
황제의 칙서를 가진 그 둘을 홀대한다는 것은 곧 반역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방효유의 몸종…… 방효유의 몸종…….”
하지만 만우의 표정은 심각했다. 방매에게 자신이 방매의 어미를 찾아보겠다고 얼마나 호언장담을 했던가.
이미 과거에 벌어진 일이라고는 하지만 만우는 최소한 방매 어미의 생사는 확실하게 알아 갈 생각이었다.
허나 방효유 정도의 거물이 아닌 고작해야 방효유의 몸종일 뿐이다. 그것도 끌려온 공녀 출신이니 일개 몸종에 대한 흔적을 대체 어디서 찾아야만 한단 말인가.
“방법이 없나?”
임택평은 임수미를 등에 들쳐 업은 채 만우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임택평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며 만우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했다.
“그것이…….”
“없군.”
만우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건 임택평의 잘못이 아니다. 비록 이 사실을 알았음에도 만우에게 이제야 알려 준 것을 탓할 수는 있다고 해도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 준 것만 해도 임택평은 제 할 일을 다 한 것이다.
명백히 거래 관계였던 임택평에게 이런 것으로 화를 낼 정도로 만우가 소인배는 아니었다.
“그래도 괘씸하긴 하네.”
만우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임택평은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너도 아는 거 없어?”
그런데 그때 만우가 임택평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말했다. 그에 임택평이 고개를 갸웃한 순간 임택평의 등에 업혀 있던 임수미의 입이 벌어졌다.
“소녀, 검주께 도움이 될 이를 알고 있사옵니다.”
쩍쩍 메마른 듯 쉬어 버린 목소리였지만 임택평의 두 눈이 커졌다. 임수미, 그녀가 어느새 정신을 차린 채 눈을 뜨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미야!!!”
*****
“허어.”
설미수는 단연코 장담하건대 자신이 사행단으로 명을 오고 간 이래 이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에 모든 것을 걸 수 있었다.
“어르신. 무슨 문제가 있으십니까?”
동군영이 그렇게 한숨을 내쉰 설미수에게 물었다. 그러자 설미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군영아. 그저 놀라워서 그런 것이다.”
“어떤 것이 놀라우신 겁니까?”
설미수는 손을 들어 자신이 앉은 고급스런 목재로 만들어진 의자의 팔걸이를 쓰다듬었다.
“흡사 꼭 지방 관청에 와 있는 것만 같구나.”
“예?”
이번이 사행길의 초행인 동군영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게 당연했기에 설미수는 쓰게 웃어 보였다.
“우리 조선은 소국이다.”
“예. 예로부터 중원은 대국이지 않았사옵니까.”
“그래. 그래서 조선은 살아남기 위해 고려, 그 전의 전부터 중원을 사대(事大)하여 왔지.”
작은 나라가 큰 나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큰 나라를 상국(上國)으로 모시는 것은 당연히 있어 왔던 일이다.
“허니 소국의 사신이 어떤 대접을 받을지 뻔하지 않더냐.”
“아.”
동군영은 그제야 설미수가 왜 그리 놀란 것인지를 깨달았다.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척일이 풍성한 수염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면서 혀를 쯧 하고 찼다.
“군자국(君子國)이니 뭐니 불려도…… 대륙의 오만함이란 어째 시간이 지나고 황조가 바뀌어도 달라진 것이 없구려.”
척사영은 그 옆에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곡산척가는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을 수호하기 위해 생겨난 무가다.
물론 그 시조나 다름없는 선조인 척준경이 무력으로 정계에 진출한 경우라고는 하나 그 이후로 곡산척가에서는 무신(武臣)을 배출한 적이 없다.
허나 그렇게 지킨 땅에 세워진 왕조가 그저 땅 덩어리가 크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나라에게 소국으로 무시를 받는다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 불쾌할 수밖에 없다.
“정치와 외교란 것이 그러한 것이니, 어찌하겠습니까.”
“탓하는 것이 아니올시다. 그저 답답하여. 헛헛.”
“그래도 태상가주님 같은 분들 덕분에 조선이 그 기상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이겠지요.”
“헛헛헛.”
설미수가 하는 말이 입 바른 소리란 것을 알면서도 척일은 기분 좋은 듯 웃음을 터뜨렸다. 동군영은 그런 설미수에게 물었다.
“어떤 일들을 겪으셨던 것입니까?”
설미수가 겪었던 일들이 동군영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허나 설미수의 목소리에 배인 씁쓸함이 그가 겪었을 수많은 고초들을 말해 주는 듯 했다.
“남경에 들어선 후로 우리가 탄 마차가 단 한 번이라도 멈춰 선 적이 없지 않은가. 단 한 번도 어딘가에서 기다린 적도 없고.”
“원래 그런 것…… 아니었습니까?”
“아니지.”
설미수는 씁쓸하게 웃었다. 나라에 힘이 없는 설움이랄까. 아니면 소국이라서 대국으로서의 체면을 차리겠다는 것인지는 몰라도 한 번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는 최소한 두 시진 이상을 기다리는 것은 기본이었다.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서는 사흘이면 짧은 것이었네.”
“…….”
동군영은 설마 그럴 줄은 몰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행단의 우두머리인 정사로 사행길을 이끄는 것만 해도 극도로 피곤한 일인데, 그렇게 수많은 기다림을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얼굴 한 번 볼 수 있었다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몇 주간을 험난한 길을 온 데다가 기다리느라 지칠 대로 지친 사람이, 제 집에서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잔 쌩쌩한 사람과 마주보고 앉아 외교적인 협상을 한다?
그건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하라고 등 떠미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어르신.”
“고생이라니. 녹을 받고 살아가는 사람인데 당연한 일이지.”
설미수는 수염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면서 헛헛하고 웃어 보였다.
“그리고 이런 경험도 다 해 보고. 얼마나 좋은가. 콧대 높은 명나라 조정 대신들이 이렇게 발 빠르게 움직이는 것을 보시게.”
그게 다 황제의 칙서가 발휘하는 힘이었다. 황제의 칙서를 받은 이상 단 한 시라도 지체했다가는 불경하다는 이유로 동창에 의해 적발당해 화를 입을 것이기 때문이다.
원래였다면 황제가 하사한 하사품을 받아가는 데도 한 세월이 걸렸겠지만 오늘만큼은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무림왕 검주 만우.
바로 그 무림왕이 자신과 함께 동행하였다는 것에 이들은 지금껏 설미수가 단 한 번도 보지 못 했던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은공 덕분이네.”
“만우, 이리도 대단한 사람이었을 줄은 몰랐습니다.”
동군영도 그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대단한 사람일 것이라 생각했지만 명나라에 오니 조선에서 느꼈던 것보다 그것이 더 피부로 크게 느껴졌다.
그 대단하다던 명나라의 천자로부터 무림왕의 직위를 받은 것도 모자라 천하제일인이란 명성을 전 중원에 떨치다니.
황보경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는 그가 끄는 마차를 직접 타고 오면서 똑똑하게 느낀 동군영이다.
그런데 그런 황보경에게 마차를 끌게 할 정도로 만우가 대단한 사람인 것이다.
“좋은 경험을 하는 게야. 은공이 아니었다면 어찌 이런 경험을 해 볼 수 있겠는가. 안 그래?”
설미수는 그간 사행길에 오를 때마다 쌓였던 울화들이 모두 쓸려 내려가는 듯한 통쾌함을 느끼면서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는 찻물을 후룩 들이켰다.
*****
“제갈세가?”
“예, 전하.”
임수미는 아직 독 기운이 남아 있어 어지러운 듯 머리를 잠시 부여잡았지만 그래도 한층 더 나아진 얼굴로 만우의 말에 공손히 대답했다.
“호오…….”
“작금의 천자는 무수히 많은 피로 지금의 황위를 찬탈하였습니다.”
“수미야!”
임택평이 화들짝 놀라서는 주변을 살폈다. 혹여라도 듣는 귀가 있을까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임수미가 입에 담고 있는 사람이 천자이니, 그 천자가 황위를 찬탈했느니 어쨌느니 하는 것들이 다른 사람의 귀에 흘러 들어가면 당장 동창과 금의위에서 뛰쳐나올 것이 눈에 훤했다.
“괜찮아. 안 흘러나가니까.”
만우의 말에 임택평의 눈이 커졌다. 안의 소리가 바깥으로 흘러나가지 않는다는 것은 임택평이 말로만 들었던 기막(氣幕)이 둘러져 있다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급히 객잔에 잡은 방은 좁고 허름했어도 안의 소리가 바깥으로 흘러나갈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됐다.
“더 해 봐.”
“예, 전하. 그렇게 제 조카를 몰아내고 황위를 찬탈하였다는 것은 천자에게 있어 큰 약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더욱더 철혈의 통치를 하고자 하였으나 그런 천자도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이들이 있습니다.”
“눈치?”
“명문가. 명의 초창기부터 공신으로 인정받아 명문가로 그 세가 성대한 남경의 문벌(文閥)들에게 황상이 황위를 선양 받지 못하고 찬탈하였다는 것은 언제든 반역이 일어날 수도 있는 명분이 되옵니다.”
“그래서?”
“황상은 그 반역의 명분을 혹여라도 주게 될까 싶어 자신과 직계를 제외한 이들을 쳐 내거나 그들의 힘을 축소하고 영향력을 위축시켰습니다.”
“번탑?”
“예, 전하. 그게 예이옵니다.”
황위 계승권이 있는 방계들을 쳐 내어 자신의 황권을 확고히 한 뒤 반역의 명분을 약화시킨다. 만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것과 방효유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이지?”
“황상이 방효유의 십족을 멸한 이유는 방효유가 황상을 모독하였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실은 방효유가 그만큼 거대한 명성을 지닌 학자였기 때문이옵니다. 황상이 가장 경계하는 남경의 문벌들을 동원할 수 있을 만큼 말입니다.”
“음…….”
아직도 만우는 임수미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만우의 기색을 알아챈 것인지 임수미는 말을 빨리하였다.
“그리하여 문벌들을 와해시키기 위해 그 구심점이 되는 방효유를 무리하여 죽이고 십족을 멸하였으나 그 문벌들이 가만히 있을 리 있겠사옵니까.”
“그래서 제갈세가가 나섰다?”
“제갈세가가 무림의 세가라고는 하나 그들이 공직에 나서지 않은 것은 문벌들과 손을 잡았기 때문이옵니다.”
제갈세가는 학식과 지식을 숭상하는 무림의 세가다. 무림에서 드물게도 무(武)보다 문(文)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는 곳이 바로 제갈세가인 것이다.
허나 이미 문(文)만으로는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무(武)를 추구하기 시작한 경우가 제갈세가다.
어쨌건 남경의 문벌들은 제갈세가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문벌들에게 빚을 씌워 두면서 동시에 명나라의 천자에게도 비수가 될 수 있는 무기를 쥐기 위해 제갈세가에서 나섰다.
“아마 제갈세가는 그 즈음부터 작금의 천자의 강호무림에 대한 야욕을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임수미는 그리 말했고 만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이제 그런 가정은 더 이상 문제가 될 수 없었다. 만우가 제갈세가를 멸문시켜 버렸기 때문이었다.
“……한 놈은 살려 둘 것을 그랬나.”
만우가 중얼거리자 임수미가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만우에게 말했다.
“제갈세가에서는 가문의 구명줄로 삼기 위해 이미 한 쪽에 다리를 걸쳤습니다.”
“……그게 네가 천안각에서 본 것이었구나.”
“예. 다행히 전하 덕분에 쓸모가 있게 되어 간신히 명은 유지하였으나 하마터면 그대로 귀신이 될 뻔하였사옵니다.”
“수미야…… 아이고…….”
자신이 죽을 뻔했다는 것을 정작 당사자는 태연하게 말하는데 임택평은 가슴을 치면서 슬퍼했다. 만우는 임수미를 쳐다봤다.
“그게 누구냐.”
“그자는.”
임수미는 한 번 끊은 뒤 심호흡을 크게 했다. 그리고는 만우를 쳐다보며 또랑또랑하게 목소리에 힘을 줬다.
“한왕 주고후이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