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8. 연경에서 날아온 비보 (1)
(388/400)
388. 연경에서 날아온 비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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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8. 연경에서 날아온 비보 (1)
2022.09.17.
거대한 산이 튀어나온 것 같은 토룡의 등장이었지만 튀어 나오면서 흩뿌린 토사(土砂)는 만우를 둘러싸고 있는 호신강기를 뚫지 못하고는 퉁퉁거리면서 흘러내렸다.
키에에엑!!!
거대한 토룡이 그런 만우를 보면서 기괴한 울음소리를 터뜨렸다. 수만 겹의 주름이 꿈틀거리고 오므렸다 폈다를 반복하는 거대한 입에는 수만 개의 이빨이 촘촘히 수십 겹으로 박혀 있었다.
허나 만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영물도 되지 못한 환상이로구나.”
신수(神獸)와도 조우를 한 만우에게 토룡은 징그럽기만 할 뿐 놀래킬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이것이 기관진식이 만들어 낸 환각임을 알고 있는 이상 더더욱 그러했다.
취에에엑!
쐐애애액!!
그런 만우를 향해 토룡이 거대한 동체를 움직여서는 달려들었다. 만우는 그 토룡으로부터 느껴지는 예기에 입꼬리를 씩 하고 끌어올렸다.
기관이다.
기관진식 중 설치해 놓은 기관이 발동하면서 그에 진법으로 인한 환각이 덧씌워진 것이다.
스윽.
만우의 손에는 그 흔한 검 한자루 없었지만 기천은 검공(劍功)이 아니다.
기천(氣天)은 애당초 하나의 병장기에만 구애받는 무공이 아니다. 그저 만우가 검을 애용했던 이유는 검이란 무기 자체가 편하고 좋았기 때문이다.
콰가가가각!!!
만우의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온 기천의 기운에 일렁거리는 푸른 창천이 토룡의 전진을 막아 세웠다.
기천의 2초식, 기면(氣面)이 토룡과 충돌하면서 강렬한 굉음이 울려 퍼졌고 기면을 갉아먹는 듯한 소리가 요란스레 울려 퍼졌지만 만우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고작 이 정도로 본주를 막으려 했다니.”
만우는 오히려 실망한 듯한 기색이었다. 실제처럼 느껴지는 환각에 비해 기관의 위력이 너무나도 떨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토룡은 한 마리가 아니었다.
푸확!
푸화아아아악!!!
토룡의 수가 세 마리, 네 마리를 넘어 열 마리까지 되자 이제는 사막이 아니라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라고는 온통 토룡이 전부였다.
티디디딩!
하지만 그마저도 만우의 기면에 모조리 막혔다. 그렇게 되자 슬슬 따분함을 느낀 만우가 하품을 살짝 하면서 입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생문(生門)을 찾지 못하면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이 진법이라고 했지.”
만우는 고개를 돌려 한 곳을 응시하면서 말했다. 진법이라 함은 매개체를 통해 자연의 기를 끌어 모아 그 안에 인위적인 흐름을 더해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환각이나 환청 등은 그 균형이 인위적으로 흐름을 통해 맞춰지면서 부여하는 부가효과 중 하나다.
그런 진법은 흔히 말하기를 생문(生門)을 찾는다면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지만 사문(死門)으로 들어간다면 필히 죽어서 나올 수밖에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허면.”
만우는 육안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허공을 응시했다. 그러나 만우의 두 눈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곳 그 너머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경악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제갈명공이 있었다.
“사문(死門)으로 안내하거라. 이대로 끝내기에는 본주도, 네놈도 아쉬움이 미진히 남을 것 같으니.”
콰지직!!
만우가 손을 들어 수직으로 내리긋자 달려들던 열 마리의 토룡들이 거인이 위에서 짓밟은 지렁이 꼴이 되어 체액을 퍽퍽 터뜨리며 모래 속으로 침몰했다.
“아니 그러냐?”
만우가 제갈명공의 두 눈을 보면서 히죽 웃어 보였다.
*****
“곡의 무인들을 투입하라.”
“존명!”
독왕의 명령은 무리한 것이었지만 돈극은 그것에 토를 달지 않았다. 보랏빛 독무가 제갈세가의 기관진식을 만나 뿌옇게 들어찬 장원을 쳐다보는 독왕의 눈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복수를 위해 골수까지 혈귀가 들어찬 것인지는 모르지만 지금의 독왕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검주를 쓰러뜨리는 것뿐이다.
“무인들을 투입하여 검주 놈의 일행을 도륙하라 전하라.”
“……존명.”
이어진 독왕의 명령에 돈극은 멈칫했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렇게 되면 제갈세가와 맺어 놓은 합의가 깨지고 전략 자체가 어그러지는 일이지만 독왕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
검주의 일행들은 만약에 만약, 마지막의 마지막을 대비하여 검주를 협박하기 위해 잡아 놓은 인질들이다.
그 인질들을 공격한다는 것은 검주를 협박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 사라진다는 뜻이다.
‘아니, 오히려 그로 인해 검주가 흔들릴 수도 있으니 한쪽만 옳다고 볼 수 없는 일이다.’
돈극은 애써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사림곡의 군사로 곡주에게 제대로 된 진언 하나 할 수 없다는 것에 회의감이 느껴졌지만 돈극은 꾹 참았다.
독왕의 복수심과 다친 자존심.
그것들을 고치지 않고서는 사림곡의 미래는 어둡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마교의 혈세천마와 곡왕이 죽은 후 무림십좌의 일왕이 된 독왕은 사림곡의 미래 그 자체다.
그러니 복수심과 다친 자존심을 회복하고 난 다음에 독왕이 원래대로 돌아와야만 한다.
‘피가 얼마나 흘러야 할지 알 수가 없구나.’
돈극은 그리 한탄하면서 손에 쥐고 있던 흑선을 휘둘렀다. 그러자 제갈세가 주변에 몸을 웅크린 채 대기하고 있던 사림곡의 정예들이 일제히 몸을 일으켜서는 제갈세가의 담을 넘었다.
“오늘 저곳에서 검주는 살아나오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독왕은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돈극을 한 차례 쳐다본 후 몸을 일으켰다.
“곡주께서도 들어가실 생각이십니까?”
돈극이 그런 독왕을 말리려 했지만 멈칫했다. 자신을 쳐다보는 독왕의 두 눈에서 시퍼런 살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검주 제까짓 놈이 현경지경이라고는 하나 애지중지 하는 일행이 모조리 몰살을 당한다면 흔들릴 수밖에 없을 터.”
독왕은 바로 그 틈을 노리려 하고 있었다.
사람인 이상 흔들릴 수밖에 없는 미세한 틈이 드러난다면 독왕은 검주건 검주 할애비건 무조건 죽일 수 있다 자비하는 독황을 손에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검주를 죽이지 못하면 우리에게 뒤는 없다.”
살기등등한 목소리로 그리 중얼거린 독왕의 신형이 보랏빛 독무 속에 잠기듯 사라졌다.
“하아…….”
그런 제갈세가의 장원을 내려다보는 돈극의 입에서는 한숨만이 더욱 깊어졌다.
*****
만우를 중심으로 한 주변의 환경이 다시 한번 더 뒤바뀌기 시작했다. 만우와 눈이 마주친 제갈명공이 다급한 표정으로 지시를 내림과 동시에 사막지대이던 주변이 뒤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이번엔 또 어디란 말이냐.”
아마 만우가 말한 대로 제갈명공은 진법을 뒤바꾼 것이리라. 만우를 아예 진법 속에 매몰시키기 위해서일 가능성이 높았다.
제갈세가가 그리도 자랑하는 기관진식을 정면에서 짓밟아 버린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제갈세게에게 큰 절망을 선사해 줄 것이기 때문에 만우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재밌는…….”
하지만 바로 그때 만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만우는 어두워진 깊은 숲 속에 있었는데 그곳이 어디인지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숲 속에서 땅이 들썩거리더니 썩다 만 시체들이 하나둘 씩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등장에 숲 그 자체를 쳐다보고 있던 만우의 시선이 돌아갔다.
살점이 덜렁거리고, 백골과 썩어 문드러진 피부가 붙어 있는 그 시체들의 수가 수십을 넘어 수백을 넘기기 시작했다.
만우는 천천히 자신을 향해 걸어오다가 이내 뛰기 시작하고, 더 나아가서는 경공으로 달려드는 시체들을 보면서 손을 들어올렸다.
“같잖군.”
그들은 전부 만우가 무림을 유람하고 독보하면서 상대한 고수들과 만우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이들이다.
구어어어어!!!
와르르르!!
이곳은 진법의 안이다. 그러나 만우는 짙은 불쾌감을 느꼈다. 만우의 기억 속에 있는 이 배경이 환각으로 나타났다는 것 자체가 진법이 만우의 정신에 영향을 끼쳤다는 뜻인 것이다.
제갈세가의 기관진식을 정면에서 깨부수기 위해 정신의 빗장을 열었다고는 하나 불쾌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만우의 손가락 한 번에 기천의 1초식 기선의 묘리가 담겼다. 그러자 기천의 기운이 달려오던 죽은 자들을 산산조각 냈다.
그렇게 죽은 자들이 다시 흙으로 돌아가자 만우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만우가 선 곳으로부터 별로 멀지 않은 곳에 기억 속 선명한 그 장면이 되풀이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피를 흘린 채 누워 있는 김약항, 그리고 그 옆에 무릎을 꿇고 앉은 어린 시절의 만우.
그 모습은 만우가 김약항과 함께 중원에서 유배를 다니다가 김약항이 결국 죽음을 맞이하던 바로 그 순간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었다.
어린 티가 역력한 만우는 구슬 같은 눈물을 계속해서 흘려 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약항의 손이 턱 하고 떨어졌다.
만우는 어린 시절의 자신이 어르신이라 외치면서 목을 놓아 우는 것을 보고는 팔짱을 꼈다. 과거의 이 기억을 자신에게 보여 주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한 번 두고 보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다음 순간, 죽은 김약항의 시신이 되살아나서는 울고 있는 만우의 목을 움켜쥐었다.
그르르륵!
순식간에 부패하기 시작한 김약항은 놀란 만우 위에 올라타 목을 조르기 시작했고, 만우는 컥컥거리면서 그 아래 깔려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그 순간 어린 만우의 목을 졸라 대던 김약항의 고개가 두둑 소리를 내면서 몇 바퀴를 돌더니 만우를 척 하고 쳐다봤다.
[너 때문이다.]
만우는 그런 김약항을 보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네놈은 나의 아무것도 지켜주지 못했다. 내 아들, 내 손자도, 향이도!]
만우는 그런 김약항이 어린 만우의 목을 조르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어린 만우는 이미 목숨이 경각에 달한 듯 흰자가 드러나면서 팔다리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방금 죽은 김약항이 시신이 되어 다시 되살아난다는 것은 어린 만우에게는 충격적일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너 때문이다, 너 때문이다, 너 때문이다!!!! 내 은혜를 원수로 갚은 네놈 때문…….]
하지만 그래서 뭐.
“어쩌라고?”
썩어문드러진 김약항의 머리통이 툭 하고 떨어졌다. 아니,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어린 만우의 목도 툭 하고 떨어졌다.
“조금 그럴듯한 환각과 환청을 만들어 내던가. 애당초 본주가 이것이 진법인지를 알고 있는데.”
고오오오오!!!
만우의 전신에서 기천의 기운이 노도처럼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드드드드거리는 진동과 함께 세상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본주의 기억을 건드리면 본주가 절망이라도 할 줄 알았나?”
쩌저저적!!!!
하늘에 금이 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실제 하늘이 아니었다. 기관진식이 붕괴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만우의 전신에서 푸른 창천이 넘실거리면서 진법의 공간 자체를 파괴하기 시작했다.
“허나.”
만우의 두 눈에 시퍼런 불꽃이 튀었다. 제갈세가가 펼쳐 놓은 진법은 만우에게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하나 한 가지는 영향을 미쳤다.
“본주를 불쾌하게 만든 것이 목적이었다면 그 목적은 달성했다고 쳐 주지. 대신.”
만우가 손날을 뻗어서는 그대로 허공을 향해 찔렀다. 그러자 진동을 일으키면서 금이 쩍쩍 가고 있던 하늘에 구멍이 뻥 하고 뚫리더니 그 너머로 경악한 제갈명공의 얼굴이 육안으로도 보였다.
“그 대가는 제갈세가의 멸문이다.”
콰장창창!!!!
제갈세가가 펼친 최후의 기관진식인 구원이 만우의 손끝에서 피어오른 기천의 수강(手剛)에 의해 갈가리 찢겨졌다.
*****
불존과 황보경은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채로 뒤에서 영문을 모르고 있는 설미수와 동군영을 보호했다.
“이게…….”
“아미타불. 제갈세가의 진법이오.”
황보경은 침을 꿀꺽 삼켰다.
강호와 무림에 대해서 귀가 따갑게 들어 왔던 황보경이다. 허나 그는 황실에 일찍이 투신하여 북진무사의 자리에까지 올랐기에 무림을 경시하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었다.
황실무공의 근원도 무림에 같은 뿌리를 둔 것이라고는 하나 그가 보기에 강호무림의 무림인들은 무뢰배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의 본가인 황보세가도 그 근본은 무림세가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들은 강호무림에서 한 발을 빼 황실에 한 발을 걸침으로써 지금의 성세를 구가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태산북두니 뭐니 하면서 소림과 무당만을 최고로 쳐 주는 정파의 행태에 불만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요란한 빈 수레밖에 없는 빛 좋은 개살구들.
하지만 그랬던 황보경도 전각 바로 바깥에 펼쳐진 제갈세가의 진법을 느끼고서는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능히 소림의 백팔나한진에 필적할 만한 진법이외다. 아미타불.”
불존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소림의 백팔나한진이라면 백팔 명의 무승들로 펼쳐지는 소림 최후의 진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많은 마두들을 무릎 꿇렸던 그 백팔나한진의 기세와 지금 제갈세가 안에 펼쳐진 진법은 크게 차이가 없었다.
“우리를 해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오. 아미타불.”
하지만 제갈세가가 펼친 진법은 전각 안에까지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황보경은 아무리 화경에 도달한 자신이라고 해도 진법 안에 발을 딛는 순간 무사히 빠져나올 수 없을 것임을 느끼면서 불존을 쳐다봤다.
“이리 대단한 진법을 펼쳤다면 그 목표는…….”
“검주. 아미타불.”
황보경의 말에 불존이 대답했다. 이 정도의 진법이 펼쳐질 만한 상대는 지금 제갈세가 안에 검주밖에 없었다.
검주와 제갈세가 사이에 다시금 어떠한 갈등에 불꽃이 지펴진 것이다.
“빌어먹을. 무사히 빠져나갈 방법이 있겠소?”
황보경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면서 불존에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