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7. 반역자 (3) (387/400)


387. 반역자 (3)
2022.09.13.



“전하.”

“연경의 소식이 감옥에 갇힌 네 귀까지 들어간 것이군?”

“예.”

임수미가 흐릿하게 웃었다. 만우는 임수미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는데 그 시선이 버거웠는지 시선을 슬쩍 돌렸다.


“네 아비가 하도 징징거리더구나. 그래서 내 니 아비의 청대로 널 구해 주는 대신 한 가지를 받기로 하였다.”

“그것이 무엇이옵니까.”

“하오문에 얻을 것이 정보밖에 더 있겠나?”

만우가 짧게 웃었다. 임수미는 그런 만우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만우는 그런 임수미의 전신을 슥 훑은 뒤 고개를 끄덕였다.


“기틀은 잘 잡혔군.”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였습니다.”

“허나 그 기틀만으로도 천안각에 들었다지. 기관진식 때문에 잡혔다 들었다.”

임수미는 기천의 기틀을 몸 안에 받아들인 것만으로 절정의 수준에 이르렀다. 아마 그 정도면 하오문의 역사상 보유한 가장 높은 경지의 무인이라도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임수미는 고개를 숙였다.


“다 소녀가 못나는 바람에 그리 된 것이옵니다.”

“그 말도 맞지.”

만우는 부정하지 않고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임수미가 턱을 움직여 어금니에 있던 작은 단환을 으득 하고 씹었다.

그 상태로 임수미는 자신의 몸 속에 퍼져 나가는 약 기운을 느끼며 만우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전하. 소녀는 아비와 하오문을 지키고자 할 따름이니, 부디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임수미가 말할 때마다 그녀의 입에서 씹어 먹은 약기운이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임수미가 깨문 단환이 그녀의 공력을 먹이로 삼아 맹렬하게 작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동시에 임수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난 임수미는 눈에 초점이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그 상태로 임수미는 옷을 스르륵 벗은 다음 그 자리에 굳은 것처럼 앉은 만우에게로 다가왔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임수미의 나신이 촛불에 은은하게 빛을 냈다.


“하아아…….”

임수미의 입에서 흘러나온 달뜬 호흡에 실린 약 기운이 만우의 콧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끄아아악!!”

임택평의 입에서 고통과 절망 어린 절규가 섞여 나오며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그러자 그런 임택평을 고문하고 있던 전문 기술자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요즘은 길거리에 빌어먹고 다니는 개들도 사람처럼 비명을 지르네?”

임택평은 눈가에 핏줄이 터져 시뻘게진 얼굴로 숨을 몰아쉬었다. 하오문주인 임택평이 지금 이 몰골이 된 것은 쥐도 새도 모르게 자신을 납치한 제갈세가 때문이었다.


‘오대세가…….’

하오문주인 임택평은 문도들이 모아 오는 방대한 정보를 통해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힘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자신의 오만함이었다는 것은 쥐도 새도 모르게 제갈세가의 무인들에게 납치당한 이후에 뼈저리게 깨달았다.

수십만 문도들이 속한 하오문이라는 거대한 방파의 주인이라고 생각해 온 자신도 이 오대세가의 사람들에게는 언제든지 잡아올 수 있는 부처님 손바닥 위의 손오공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임택평은 뜨끈하게 타고 흐르는 자신의 몸 속에서 나온 핏줄기들을 느끼면서 입술을 앙 깨물었다. 제갈세가가 자신을 납치한 이유가 뻔했기 때문이다.


‘수미가 위험하다. 놈들은 수미를 검주를 쓰러뜨릴 약점으로 사용하고 있는 게야!’

임수미가 제갈세가에 감금당한 뒤 임택평은 늘 무림맹 주변을 맴돌았고 임수미가 제갈명공과 함께 제갈세가로 호송되어 온 다음에는 제갈세가 주변을 맴돌았다.

그러면서 제 아무리 제갈세가라고 해도 철저한 보안으로 임택평 본인의 위치를 찾을 수 없을 것이라 무시했던 것이 이 비극의 발단이었다.

제갈세가에서는 임태평이 필요하자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무인들을 보내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몸을 던졌던 수하들과 문도들 수백을 몰살시켜 버리고는 임택평을 붙잡아 세가의 비처로 데려온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임수미를 이용해 검주를 쓰러뜨릴 생각을 제갈세가가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림곡과 손을 잡다니. 제갈세가가!’

정파의 기둥이라 불리는 제갈세가가 정파와 반대편에 서 있는 사파, 사림곡의 독왕과 손을 잡았다는 것을 임택평은 이곳에 끌려오고 나서야 깨달았다.

자신에게 고문을 가하고 있는 이 고문 기술자의 고문법은 사림곡에서 사용하는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정보로만 들어 알아 오던 것과 직접 몸으로 체험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만큼 그 차이가 심했지만, 임택평은 비명을 내지르면서도 버텼다.

이런 고문에서 정신을 잃는다는 것은 죽음이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온다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잘 버텨. 응? 역시 길거리에서 굴러먹던 똥개들이 잘 버틴단 말이야.”

이 고문 기술자들은 임택평을 같은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그리고 놈들은 자신이 받는 이 고문을 임수미에게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보여 주었다.

자신을 쳐다보는 딸의 눈이 절망으로 물드는 것을 본 임택평은 차라리 죽으려고 했지만 스스로 죽을 수도 없었다.

숙련된 고문 기술자란 고문 대상자가 절대로 죽지 않게 만드는 수법을 수십 개는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가 뽑혔고 산공약을 억지로 먹였으며 사지를 분질러 놓았다.

그 상태로 임택평이 할 수 있는 것은 짐승처럼 더러운 비처의 바닥을 기는 것 밖에는 없었다.

제 아무리 대가 굵은 사람이라고 해도 이 정도 고문을 받으면 정신이 날아갈 법도 하지만 임택평은 그런 면에서는 절정, 초절정 고수들보다 탁월했다.

정신력.

하류 인생의 집합체라 불리는 하오문주의 삶을 살아 온 임택평의 정신력 하나만큼은 발군이었다. 거기에 지금은 딸을 살려야 한다는 부성애까지 더해져 임택평은 생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다.


“크흐흐흐. 이것도 어디 한 번 버티나 보자꾸나.”

사림곡에서 개발한 갖은 고문용 약을 실험하기 위해 들뜬 고문 기술자가 임택평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임택평은 그런 고문 기술자를 보면서 배에 힘을 단단히 주고 버티기로 했다. 놈은 임택평에게 알아 낼 것이 딱히 없음에도 계속해서 고문을 이어 나갔기 때문이다.

고문 그 자체를 즐기는 광인이다.

크아아아아악!!!

이내 임택평의 끔찍한 비명소리가 미처 안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그 안에서 맴돌다가 사라져 갔다.

*****



“연이 아가씨는 실패하셨습니다.”

“임수미, 입장합니다.”

“안에서 특이한 반응이 없습니다.”

제갈세가의 무인들이 끊임없이 대화와 소통을 하면서 들어온 정보들을 수집해서 이후에 대한 전략을 짜기 시작했다.

특히나 제갈명공은 검주가 머무르고 있는 전각을 백여 명의 인력을 들여 예의주시를 했는데 그 안에서 별다른 특이점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초조하게 턱을 문질렀다.


“매혼향(埋魂香)이 퍼지기까지 얼마나 걸리지?”

매혼향은 사림곡에서 은밀하게 개발한 새로운 독으로 혼이 팔릴 정도란 뜻의 매(賣)가 아니라 혼을 묻어 버린다는 매(埋)를 썼다.

그 독에 당하면 혼 자체가 분쇄되어 버려 껍질만 남은 인형이 된다고 할 정도의 강력한 독인데 그것을 미혼약과 함께 섞은 것이다.

임수미에게 복용시킨 미혼약은 복용한 사람뿐만이 아니라 호흡을 통해 전파되는 새로운 형태의 미혼약으로 이 역시도 중백약이 검주를 죽이기 위해 자신의 밑천을 다 털어 준비해 온 독 중 하나였다.

부처님이라고 할지라도 남자라면 당해 낼 수 없을 것이라 장담한 바로 그 미혼약. 그 미혼약에 매혼향을 섞어 넣었으니 검주가 임수미와 통정을 한다면 제 아무리 현경의 고수라고 할지라도 독에 중독될 것이라 독왕은 자부했다.


‘믿는 수밖에.’

제갈명공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만약 검주가 자신의 딸인 혜화 제갈연에게 관심을 보였더라면 이런 선택지까지 오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미 한 번 손을 맞춰 본 독왕보다는 검주가 훨씬 더 신뢰가 갔으니까.

거기에 제갈세가에 천하제일인이란 날개가 붙으면 제갈명공은 전화위복이 될 수 있다 믿었다.

허나 그런 기대가 무색하게도 검주는 제갈연을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그렇다면.’

검주의 요구를 들어주며 제갈세가가 굴복할 것인가, 아니면 검주에 맞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봉문을 당할 것인가.

둘 중 하나의 선택지밖에 없는 셈이다.

그 두 가지의 선택지라면 제갈명공은 후자를 선택했다.

명예라는 것은 한 번 꺾이면 두 번 다시 회복되지 않는다. 만약 제갈세가가 검주에게 굴복을 한다면 그것은 곧 제갈세가가 스스로 제 발로 오대세가의 지위에서 내려오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게 악명을 얻게 된 순간 빛이 나던 제갈세가의 광휘는 사라지고 몰락의 길을 걸을 것이다.

어떤 왕조건 간에 전성기와 쇠퇴기가 있듯, 제갈세가도 그런 순환을 따르는 것에 불과하겠지만 적어도 제갈명공은 그 자신의 손에서 그 시작점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소림과 황보와 우리는 다르다.’

소림이나 황보세가는 제갈세가와는 상황이 달랐다. 그렇기에 그 둘은 불존과 황보경이라는 최고수를 검주의 우마로 내어 주었음에도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천년소림과 황실에 끈이 닿아 있는 황보세가와는 달리 제갈세가는 무림맹 그 이름 하나로만 오대세가의 반열에 들은 가문이었기 때문이니까.


“진식을 작동시켜라!!”

“예 가주!”

제갈명공은 심호흡을 크게 하고는 제갈세가의 최후를 대비하여 제갈세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미리 깔아 놓았던 제갈세가 최후의 진식을 발동시켰다.


“진법 구원, 개진(開陳)!”

“와룡대(臥龍代)에 알려 진법이 작동되었음을 알리고 미래를 부탁한다 이르라!”

최후를 각오한 제갈명공의 두 눈이 푸르스름하게 불타올랐다. 가주가 보이는 비장함에 감화된 제갈세가의 무인들이 마지막을 각오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쿠구궁-!

진법 구원의 발동에 제갈세가 전체에서 작은 진동이 시작됐다.

파아아앗!!!

제갈세가의 준비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진법의 발동과 동시에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제갈세가의 무인이 신호탄을 위로 쏘아 보냈고, 그 신호탄과 동시에 제갈세가의 장원 내에 독무(毒霧)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독왕 중백약과 사림곡에서 준비한 독무가 뿌옇게 피어오르며 무서운 속도로 만우의 전각과 사행단이 머무르고 있는 전각이 독무에 휩싸였다.

*****

임수미는 격렬한 환각과 흥분을 느끼며 자신의 눈앞에 변함없이 앉아 있는 검주를 쳐다봤다. 이로 인해 임수미는 이제 선을 넘었다.

천하제일인이 된 검주의 무공의 기초를 알려 준, 대가였다고는 하나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이에게 임수미는 비수를 들이민 것이다.

거기에 임수미는 자신의 깊은 무의식 속 기저에 깔려 있던 욕망을 매혼향을 통해서 깨달았다.

임수미는 만우를 동경했다.

하오문이라는 거대한 세력으로도 일궈 낼 수 없는 만우의 일신에 담긴 무위는 임수미로 하여금 그의 강함을 동경하게 만들었고 그 동경은 강렬한 욕망으로 임수미의 무의식의 기저에 남았다.

저 남자를 가지고 싶다, 저 남자를 정복하고 싶다.

비단 남자만 여자를 정복하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다. 여자도 남자를 정복하고 싶어 한다. 그 남자가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여자의 정복욕은 더욱 커진다.

하지만 임수미의 의식은 그런 무의식적인 욕망을 눌러 왔다.

그녀는 하오문주 임택평의 딸이고, 그녀의 어깨에 수십만의 하오문도들의 미래가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수십만의 생명이 달린 거대한 조직의 미래를 이어 받아야 한다는 그 중압감이 으레 인간이라면 가질 욕구를 애써 눌러 온 것이다.

하지만 매혼향은 인간의 아주 기저에 깔린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주로 색욕과 관련된 것이지만 인간 본연이 가지고 있는 그 색욕에도 각자의 이유가 있기는 마련이다.

그래서 임수미는 매혼향에게 집어삼켜지면서 그것을 깨달았다.

무화라 불리며 무림의 수많은 남성들의 동경 어린 시선을 받아 온 그녀이지만 그녀 역시도 한 명의 여자였다는 것을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때 깨달은 것이다.

임수미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해졌다. 매혼향에 이성이 마비된 임수미는 이제 생리적인 욕구에 충실해지기로 한 것이다.

사뿐.

임수미는 그대로 걸어서는 나신이 된 채로 만우의 무릎에 걸터앉았다. 만우는 여전히 앉은 자세 그대로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매혼향을 듬뿍 들이마신 만우다. 매혼향은 독이 아닌지라 만독불침의 경지에 도달한 독인(毒人)이라고 해도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 매혼향 속에 교묘하게 숨겨진 미혼약은 사람의 본성에 충실하게끔 만든다. 그에 임수미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만우의 옷자락에 손을 얹었다.

스륵.

임수미의 기다란 손가락이 만우의 옷자락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바로 그때, 석상처럼 가만히 앉아 있던 만우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이더니 임수미의 손목을 덥석 하고 붙잡았다.


“하아아.”

매혼향과 미혼약에 이성이 달아난 임수미였지만 그 와중에도 본능적으로 놀랐다. 사람인 이상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그 와중에도 느꼈기 때문이리라.


“푸후우우우!!!”

바로 그때 만우의 입에서 자욱한 보랏빛 독연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만우가 임수미에 의해 들이마신 매혼향과 미혼약이 다시 몸 속에서 빠져나오고 있다는 증거였다.

번쩍!

그와 동시에 만우의 안광이 벼락처럼 되살아났다.


“짜릿하네.”

만우는 나신인 채로 자신의 무릎 위에 앉아 손목이 붙잡힌 임수미를 보면서 씩 웃었다.


“이건 위험했다.”

만우는 솔직하게 인정했다. 그때 무릎 위에 앉은 임수미가 숨을 헐떡이면서 만우의 어깨에 기대어 오기 시작했다.

무림오화 중 무화인 임수미다. 그런 임수미가 무려 나신으로 만우의 앞에서 몸을 배배 꼬고 있었지만 만우의 눈은 고요한 하늘을 담아 놓은 것처럼 한 치도 흔들리지 않았다.

육욕이 없는 것은 아니나 이것이 뻔히 약에 의한 반응인 것을 아는 다음에야 만우한테 그것이 동할 리 없다.


“근데 네가 왜 그랬냐는 것이지.”

만우는 임수미를 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약에 의해 이성이 날아간 임수미가 만우의 질문에 대답을 해 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허나 무림에서 화산 다음으로 만우와 인연이 깊은 곳이 바로 하오문이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임수미는 연경 하오문의 총지부장으로서 만우와 가장 많이 조우했다. 그렇기 때문에 만우는 임수미를 잘 안다 자부했다.


“임택평이가 안 보인다 했더니.”

그에 만우는 왜 임수미가 이렇듯 제갈세가의 의도에 따라 선을 넘은 것인지 곧바로 이해했다. 임수미가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만우는 제갈연이 은밀하게 보내는 신호를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갈연은 만우가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곧바로 달려올 정도로 몸이 달아 있었다. 아마 제갈명공은 그 잘 돌아가는 머리를 써서 이번 위기를 기회로 탈바꿈할 결정적인 빈틈을 노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경우에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이 바로 혼맥이고.

천하제일인과의 혼맥.

지모 대신 무력이 부실한 제갈세가에 창공 드높은 곳을 날 수 있는 봉황의 날개를 달아 주는 격이다.


“제갈세가의 운명을 그리 결정했다 본주가 받아들여도 되는 것이겠지.”

허나 그것이 수포로 돌아가자 제갈세가에서는 매혼향과 미혼약을 머금은 임수미를 만우에게 들여보냈다.


“기관진식도 벌써 깔려 있고.”

거기에 만우는 공력을 끌어올려도 머무르고 있는 침실 바깥의 기감을 전혀 느낄 수 없다는 것에 제갈세가가 자랑하는 기관진식이 발동되었음을 깨닫고는 웃었다.

그렇다는 것은 제갈세가가 이 자리에서 자신들이 멸문을 당하든, 만우를 죽이건 간에 건곤일척의 승부수를 걸었다는 뜻이다.


“퉤엣.”

만우는 몸 속에 남아 있던 매혼향의 찌꺼기를 입 밖으로 토해 냈다. 그러자 보랏빛의 걸쭉한 매혼향과 미혼약이 침과 섞여서는 튀어 나왔다.


“이 정도로 강한 미혼약이라니.”

무림을 독보하면서 별의 별 독을 다 겪어 본 만우다. 허나 설마 제갈세가에서 미혼약이라는 비열하고 더러운 짓까지 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방심했구나.”

만우는 재미있다는 듯 히죽 웃어 보였다. 설마하니 이렇게 한 방을 얻어맞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현경에 도달했다고는 하나 이 정도로 강력한 미혼약에는 취약할 수도 있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독이 아니기 때문에 현경의 기감과 육감으로도 위험이 닥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제갈세가의 한복판에 제 발로 들어왔기 때문에 완전히 방심한 것은 아니라고는 하나, 확실히 무림의 그 누구도 자신을 해할 수 없다는 자신감에 만우 자신도 모르게 느슨해져 있었던 모양이었다.

무림을 홀로 독보하던 그 시절보다 월등하게 높아진 경지 때문이다.


‘허나.’

그러나 만우는 결국 그 위험을 알아채고는 극복했다. 미약하나마 만우의 정, 기, 신 중 비정상적으로 발달한 정(精)이 아니었다면 만우는 제갈세가가 의도했던 대로 이 계략에 빠졌을 것이다.

원영신.

현경에 도달한 만우의 기와 신과는 달리 그보다 한 발 더 앞선 원영신이 만우가 미혼약에 당한 순간 원영신의 효능 중 하나인 마음장상(馬陰藏相)을 발휘한 것이다.

마음장상이란 남자의 경우 정(精)이 새나가지 않는 것이고 여자의 경우에는 생리가 끊어지는 것이다.

즉, 바란다면 바라는 대로 육신의 선천이 빠져나가지 않는 경지란 것인데 그 말인즉슨 반대로 그 어떠한 것도 몸 속으로 허하지 않는 이상 침투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 독이 아닌 미혼약이라 해도 마음장상이 발동한 이상 미혼약은 만우의 정신에 그 이상의 영향을 줄 수 없다.

그 때문에 간신히 제정신을 유지한 만우는 침투한 매혼향과 미혼약을 공력을 크게 일으켜 밀어냈다.

찰나의 순간에 당했다면 모를까 알아차린 이상 그것을 몰아내는 것은 만우에게 있어 어려운 일이 아니다.

허나 만우는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면서 웃었다. 이게 바로 무림이다.

절대적인 힘에 의해 모든 것이 지배되는 듯 보이나 그 절대적인 힘이 완벽할 수 없는 인간의 손아귀에 들린 이상 절대강자란 존재하지 않는 곳.

만우는 미혼약이 점점 더 몸 속에 퍼져 나가는 것인지 만우에게 달라붙으려고 하는 임수미의 수혈을 짚었다.

우웅웅!!!

그와 동시에 만우는 공력을 일으켜 한 순간에 임수미의 몸 속에 들어온 매혼향과 미혼약을 밀어냈다.

이용을 당한 도구에게 죄는 없다.

그 도구를 휘두른 자에게 죄가 있을 뿐.

또한 하오문은 이대로 그냥 없애 버리기에는 만우에게 필요할 일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임수미를 살렸다.

사아아아!!!!

그렇게 임수미의 전신 모공으로 보랏빛 액체가 끈적거리면서 흘러나오고 있는 순간 만우가 있는 침실로 독무가 뿌옇게 차오르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제갈세가에서 보유하고 있기에는 지나치게 강한 미혼약과 매혼향의 출처에 궁금해하고 있던 만우였다.

고오오오오!!!

하지만 그 보랏빛 독무는 만우를 중심으로 2장 이내의 공간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만우의 몸에서 스멀거리면서 일어난 푸른 창천, 기천의 기운이 독무를 막아 섰기 때문이다.

치지지직!!

그러나 독무도 보통의 독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기천과 독무가 격렬하게 부딪치면서 독연을 연신 뿜어 댔다.

그에 만우가 손가락을 까닥여 독연 한 줄기를 코로 들이마신 뒤에 내뱉으면서 콧잔등을 찡긋했다.

만독불침에 달한 현경지체를 가진 만우다.

허나 그런 현경지체인 만우가 콧잔등이 시큰거리는 정도로 강한 독성을 지닌 독무를 사용했다. 그러자 만우는 절로 한 사람이 떠올랐다.


“독왕.”

무림십좌 중 죽은 일패 혈세천마와 곡왕 부고야를 제외하면 최강자가 된 독왕 중백약이다.

용접곡에서 만우에게 오른 손을 잃고 도주한 독왕이 제갈세가와 손을 잡은 것이다. 만우는 적어도 제갈세가가 한 가지에 있어서는 거짓을 고하지 않았다는 것에 피식 웃었다.

아니, 제갈세가는 애당초 그 어느 쪽과도 손을 잡지 않았다.

그저 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다가 만우 대신 독왕의 손을 붙잡았을 뿐이다.


“네가 깨어나면 벌써 할 일이 생긴 셈이군.”

만우는 제갈세가와 사림곡이 손을 잡고 자신을 담그(?)려고 했다는 일을 전 무림에 퍼뜨리는 데 중추가 될 하오문의 임수미를 보면서 히죽 웃어 보였다.


“아. 이럴 때가 아니지.”

만우가 두 눈에서 안광을 폭사했다. 그러자 만우의 전신에서 기천의 기운이 쭉 하고 뽑혀져 나오더니 치열하게 힘겨루기를 하던 독무를 싹 잡아먹고 그 범위를 넓히기 시작했다.


“제갈세가의 기관진식이라.”

만우는 자신의 기감을 꽁꽁 자물쇠로 잠가 놓은 것 같은 답답함을 느끼며 히죽 웃었다. 진법과 기관진식으로는 천하제일이라는 제갈세가의 기관진식이 안 그래도 궁금하던 참이다.


“한 번 볼까.”

만우는 임수미를 한 쪽 어깨에 들쳐 맨 채 침실에서 걸어 나왔다. 그러자 장원을 가득 채운 보랏빛 독무가 만우에게로 일제히 몰려들었다.

치이이익!!

하지만 그 독무는 기천의 기운을 끌어올린 만우의 반경 1장 이내를 넘지 못했다. 만우는 자신의 기감을 교란시키고 있는 진식의 한 가운데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휘오오오!!!

그러자 만우를 중심으로 주변의 환경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만우는 그것을 보면서 흥미롭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기관과 진식을 합쳐 부르는 것이 기관진식이다.

허나 대부분은 그 둘 중 한쪽으로 치우쳐져 있기 마련이었다. 딱딱 맞아떨어지는 기계를 중심으로 한 기관이나 진법을 중심으로 한 진식은 둘 다 만만히 볼 학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허나 제갈공명의 후손임을 자처하는 제갈세가의 뛰어난 두뇌는 양쪽을 통달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렇기에 무림의 수많은 방파들 중 기관이나 진법에 특화된 문파는 있어도 양쪽에 다 통달한 곳은 제갈세가가 유일했다.


“이게 기관진식의 정수인가?”

그런 제갈세가가 최후의 보루로 제갈세가에 설치해 놓은 기관진식이다. 그러니 만우는 마치 다른 세상에 들어온 것만 같은 이 느낌에 감탄했다.

단지 한 발자국 기관진식 안으로 들어섰을 뿐인데 제갈세가가 아니라 다른 세상에 들어온 것만 같았다.

쨍쨍!

거대한 바람이 휘몰아치는가 싶더니 만우의 주변이 끝도 보이지 않는 모래벌판이 펼쳐진 사막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꼭 돈황(敦煌)에 온 것 같군.”

흔히 말하는 서량(西凉) 지역에 바로 돈황이 있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삭막한 평야지대와 너른 사막지대, 그리고 마적들이 들끓는 곳.

중원을 유랑하며 만우는 그곳에 한 번 가 본 적이 있었다. 만우는 자신을 내리쬐는 이 뜨거운 햇빛이 꼭 그곳에서 느꼈던 햇빛 같다는 것에 감탄했다.

눈을 현혹하는 풍경이라고는 하나 정말로 돈황에 다시 돌아온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기의 흐름도 느껴지지 않고.”

기관과 진식을 아주 교묘하게 적절히 섞어 사용한 것인지 기의 흐름도 느껴지지 않았다. 만역 진법만으로 만들어 낸 환각이라면 반드시 기의 흐름이 느껴지게 되어 있는데 그조차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 진법의 매개체가 기관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허나 환각뿐만이 아니라 피부로 느껴지는 열기와 불어오는 열풍까지 흡사 현실인 것만 같았다.


“이러니 최고라 불린다는 것인가.”

하지만 만우는 전혀 불안해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되레 만우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뜨거운 모래가 만우의 발목을 덥석 붙잡으며 모래 먼지가 풀풀 피어올랐다.


“제갈세가에 앉아 천하를 경험하는 것이 가능하겠구나.”

유희.

만우에게 있어 이런 제갈세가의 기관진식은 유희에 불과했다. 허나 그런 만우의 예상을 깨부수겠다는 듯 모래사막이 들썩이더니 그 안에서 거대한 토룡(土龍)이 흉측한 수천 개의 이빨을 부딪히면서 튀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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