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 반역자 (2)
(386/400)
386. 반역자 (2)
(386/400)
386. 반역자 (2)
2022.09.10.
“그게 다야?”
“그럼?”
“왜. 너 보기랑은 다르게 쪼잔해서 욕 많이 먹었잖아. 그랬던 필수교어는 어디 간 거야?”
“이 산강아지가. 왜 그때 이야기를 꺼내는데?”
필두가 누운 채로 인상을 팍 하고 썼다. 만질만질한 필두의 머리를 푹신한 이불보가 감쌌다. 마치 구름에 둘러싸인 듯한 필두였다.
“그건 내가 수적질할 때 이야기고. 이제는 손 털었잖아.”
“음…… 만약 애들이 찾아오면?”
“…….”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그렇게 대답하고 싶었지만 감령의 기습적인 질문에 필두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안 그래도 중원에 들어서고, 만우에 대한 소문이 퍼져 나가면서 혹시나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생각은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강수로십팔채.
가장 비옥한 땅이며 교통의 중심지이기도 한 그 장강을 지배하는 지배자인 수적들.
그 수적들의 왕이 바로 필두다.
물론 그런 필두가 조선으로 향하게 된 것은 자의가 아닌 만우란 인간의 타의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랬던 여정에서 필두는 처음으로 평온함이란 것을 느꼈다.
그래서 버렸다.
장강수로십팔채의 모든 수적들이 진심으로 필두를 믿고 따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곳에는 분명히 그런 이들도 있었다.
그랬던 그들을 필두는 일방적으로 버렸고, 잊으려 했다.
만약 그들이 자신을 찾아온다면?
“흐흐흐.”
필두는 불연듯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히죽 웃어 보였다. 감령의 질문에 중대한 허점이 있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그래서 필두가 감령을 쳐다보자 감령도 히죽 웃고 있었다. 감령 역시도 필두와 비슷한 처지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런 질문을 했다는 것은 감령 역시 그 질문에 대해 내린 결론이 필두와 비슷하다는 뜻이다.
산과 강,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환경에서 살아온 둘이나 감령과 필두는 그 누구보다도 비슷했다.
“수적 놈들한테 그딴 의리가 있다고? 아마 총채주를 해치웠다는 명예를 노리고 칼 들고 찾아오는 게 더 빠를 거다.”
“흐흐흐. 역시. 도적놈들이 그렇지.”
의리?
수적과 산적에게 그딴 게 있을 리가 있겠는가.
그런 게 있다고 한들 그런 경우는 지극히 드물었다.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낭만적인 사람이란 뜻이다.
감령과 필두는 절대로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 장담했다.
실제로 그 둘이 대채주와 총채주이던 시절에도 시시때때로 대채주와 총채주의 자리를 노리고 암살자를 보내오던 놈들이 수두룩했으니까.
그게 지겨워서 조선에서 처음으로 맛 본 진정한 평화에 감령과 필두가 두 눈을 뜬 것이다.
“개소리 집어치우고. 하마터면 감성적이 될 뻔했군.”
필두가 침상 위에서 다시 상체를 일으켰다. 감령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었다.
“대장이 알면서도 제갈세가 한복판까지 들어온 거라면.”
“둘 중에 하나지.”
필두가 감령의 말을 이었다.
“제갈세가가 납작 엎드려 잘못을 빌면 그걸 못 이기는 척 받아주고 그냥 넘어가던가.”
“그런 걸 보면 또 냉혹하지는 않은 양반이란 말이지.”
감령이 사족을 붙였지만 필두는 감령의 사족은 가볍게 무시했다.
“오늘 제갈세가가 문을 닫던가.”
필두의 말에 감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눈으로 바닥 아래를 쳐다보면서 필두에게 말했다.
“요것도?”
“응.”
감령과 필두가 쳐다본 바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감령과 필두는 둘 다 표면으로 보이는 바닥이 아니라 그 너머를 뜻하고 있었다.
“미쳤네. 제갈세가에 들어와 있는데.”
“그래서 대장을 따라가는 게 짜릿한 거야.”
제갈세가에 들어와 이렇게 무방비하게 있는다?
언제 이렇게 내키는 대로 강호를 활보해 보겠는가. 비록 그것이 호랑이를 등에 업은 여우라 손가락질을 당할지라도 누구든 한 번은 이렇게 살아 보고 싶을 것이다.
“어쨌든 모든 건 그럼 대장한테 맡긴다는 거지?”
“뭐, 우리가 나선다고 달라질 것이 있나?”
“아니지.”
“그럼 뭐 우리가 할 일은 없지.”
만약 그 둘이 할 일이 있었다면 만우가 알아서 어떻게든 연락을 해 올 것이다. 그리고 만우는 절대로 그들에게 무리한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만우 홀로도 무리라고 느낄 만한 것이 없는데 무엇하러 감령과 필두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겠는가.
“언제 우리가 제갈세가에 들어와 이런 대접을 받아 보겠어. 그러니까, 즐기자고.”
필두는 손을 뻗어 바깥의 대기 중인 하인을 부를 수 있는 줄을 당겼다.
딸그랑!
그 줄과 연결된 종이 가벼운 소리를 냈고 이내 문이 달칵하고 열리더니 조심스러운 자세로 시종이 들어와 허리를 넙죽 숙였다.
“술상 좀 봐왔으면 좋겠는데. 진미(眞味)들로.”
“예, 대령하겠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넙죽 허리를 숙이고는 돌아나가는 시종을 보면서 감령이 필두를 쳐다봤다. 그런 감령과 눈이 마주친 필두가 어깨를 으쓱하면서 피식하고 웃었다.
“제대로 된 술이나 있을랑가 모르겠다. 이 먹물 냄새 나는 샌님들 사는 곳에.”
*****
만우는 향기로운 찻잎의 향이 은은하게 번져오는 것을 느끼면서 피식 웃었다.
“꽤나 고상한 취향이군.”
“마시면 머리를 맑게 해 주는 탓에 즐겨 마시고 있습니다.”
“같은 무게의 황금만큼이나 값비싸다지?”
만우는 찻잔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는 찻잔에 대고 손가락을 지그시 누르자 찻잔 안의 찻물이 부글거리며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삽시간에 찻물이 전부 다 증발해 버리고 그 안에 남아 있던 찻잎들이 바싹 마르더니 이내 푸스슥 하고 부서져서는 가루로 변해 버렸다.
“아, 본주가 조심성이 조금 많아서.”
그렇게 실력행세를 한 번 한 만우가 제갈명공을 보면서 씩 웃어 보였다. 제갈명공은 그런 만우를 보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었지만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만우는 방금 찻잔 안에 손가락을 담근 것이 아니라 찻잔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그런데 찻장은 멀쩡한데 안의 찻물만 저렇게 홀라당 증발해 버렸다는 것은 만우의 경지가 제갈명공으로서는 감히 상상도 못 할 정도의 경지에 올라서 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내 지략이 쓸모가 없던 것도 당연하군.’
제갈명공은 그런 만우의 시위를 보면서 속으로 씁쓸하게 웃었다. 만우는 찻잔을 손가락으로 땡 하고 튕기고는 제갈명공을 쳐다봤다.
“그래. 본주가 왜 이곳까지 왔는지도 짐작한 것 같은데.”
“……예.”
제갈명공은 침을 꿀꺽하고 삼켰다. 이미 불존과 황보경이 어떤 취급을 당하고 있는지를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기 때문이다.
“소림과 황보에서는 봉문을 피하는 대신 불존과 황보경을 우마(牛馬)로 내어주었지. 그대는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지?”
“…….”
제갈명공은 바싹 마른 입술을 이로 질겅거렸다. 그러더니 이내 제갈명공이 만우에게 말했다.
아니, 정확히는 말을 하려고 했다.
“그 전에.”
만우가 제갈명공보다 선수를 치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본주가 데려가야 할 사람이 하나 있는 걸로 아는데.”
“……예?”
만우는 하오문주인 임택평의 부탁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원래는 무림맹에 갇혀 있다고 말해 주었던 임택평의 정보와는 달리 임수미는 이곳, 제갈세가에 사로잡혀 있었다.
제갈명공이 낙향을 하면서 임수미를 제갈세가로 끌고 갔기 때문이다.
“하오문.”
만우가 하오문이라는 세 글자를 입에 담자 제갈명공의 얼굴이 딱 하고 굳었다.
“원래 무림맹에 하옥되어 있다고 하여 본주가 임택평의 징징거리는 투정도 들어 줬는데, 덕분에 일이 번거롭게 됐군.”
만우는 스윽 하고 다리를 꼬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손톱을 손질하는 것처럼 제갈명공의 얼굴이 아니라 두 눈을 자신의 손톱에 고정했다.
그런 만우의 태도는 이 자리에서 누가 명백하게 우위에 있는지를 보여 주고 있었다.
부들부들.
그런 만우의 무례함에 제갈명공의 찻잔을 쥔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오대세가의 한 축인 제갈세가의 가주로서 이런 취급을 당해 본 적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
만약 제갈명공이 서책보다 병장기를 더 가까이 했다면 아마 모욕을 참지 못하고 질 것을 알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 만우에게 결투를 요청하였을 것이다.
허나 제갈세가는 명예보다는 실리를 추구하는 곳이다.
지금 백 번을 엎드린다 해도 군자의 복수는 십 년, 아니 백 년이 지나도 늦지 않는 법이라고 했으니 지금 이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는 것이 바로 실리이기 때문이다.
“하오문주의 딸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알고 있을 텐데.”
검주 만우가 하오문의 명예 호법이라는 것. 과거에도 무림십좌의 말석을 차지하고 있는 검주가 하오문의 명예 호법이 되었다고 했던 것은 꽤나 화제가 되었었다.
허나 동이족과 밑바닥 인생들이 붙어먹었으니 대단할 것도 없다는 반응이 주류를 이뤘다.
어차피 무림맹에는 개방과 천안각이 있었기 때문에 하오문에 크게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의 일이 지금에 와서는 크게 회자되고 있었다.
그때의 검주와 지금의 검주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자리에 있었고 그렇다는 것은 무림의 전부가 천하제일인이 호법으로 있는 하오문의 눈치를 보는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내어드리겠습니다.”
제갈명공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제갈명공에게 또 다른 선택지란 존재하지 않았다. 천하제일인을 앞에 두고 감히 협상을 한다?
그것도 가문의 봉문 여부를 논하고 있는 자리에서?
그럴 바에는 그냥 임수미를 내어주고 만우에게 아주 약간의 여지라도 사는 것이 훨씬 더 이득이다.
“고맙군. 덕분에 일이 줄어들었어.”
만우는 피식 웃었다. 이로써 하오문을 통해 만우는 방매의 어미를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아니, 어쩌면 이미 하오문에서는 그 정보를 확보해 놓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허면 본주에게 제갈세가가 내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이지?”
원하는 것을 얻은 만우가 너그러운 목소리로 제갈명공에게 말했다. 제갈명공은 찻잔을 만지작거리다가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사림곡에 대한 정보입니다.”
“사림곡?”
“독왕 중백약. 그자가 얼마 전 제갈세가를 찾아왔습니다.”
제갈명공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
“돈극.”
“예, 곡주.”
돈극은 어둡던 표정을 밝은 표정으로 바꾼 뒤 자신을 부른 중백약의 부름에 고개를 숙였다.
독왕 중백약.
일패 혈세천마가 사라진 뒤 자신이 최강이라 자부했던 중백약의 모습은 그가 용접곡에서 모습을 보였을 때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만우에 의해 잃은 오른손의 소매가 펄럭였고 양 볼은 움푹 들어가 있었지만 두 눈빛만 살광으로 가득했다.
복수.
중백약은 만우에게 용접곡에서 그렇게 처참하게 당한 뒤 복수의 칼날만을 갈아 왔다.
그의 장기이자 독공 중 으뜸인 독황신공에서 제 아무리 대단한 현경의 무인이라도 고꾸라뜨릴 수 있는 단초를 잡아 냈기 때문이다.
무공으로는 이른 시간 내에 빠르게 강해질 수 없었지만 독왕에게는 독이 있었다.
그 어떠한 무공으로도 따라잡을 수 없는 전설 속에 나오는 바로 그 독, 그 독을 완성시키면 중백약은 상대가 제 아무리 천하제일에 다다른 현경의 고수라고 할지라도 얼마든지 이길 수 있다고 자부했다.
그래서 그는 수라가 되었다.
“제갈세가의 준비는?”
“완료되었습니다.”
“허면 기다리면 되겠군.”
중백약은 그리 말하면서 자신의 가슴팍에 손을 얹었다. 그 안에 든 새끼 손가락만 한 자기병에는 뚜껑을 여는 즉시 사방 10장 이내의 모든 생명체를 죽을 수 있는 극독 중의 극독이 들어 있었다.
독황(毒皇).
이름조차도 독 중의 황제인 독황이라 불리는 이 독은 독황신공과 함께 전해져 내려오는 중백약만이 알고 있는 비전의 독 제조법이었다.
태어난 지 백일이 되지 않은 갓난아기 백 명의 피, 초경을 하기 직전의 가장 순수한 여아 백 명의 피, 백 명의 여인이 순결을 잃는 순간의 피.
거기에 각기 반 년, 1년, 2년을 거쳐 특수한 방법으로 썩힌 천 명분의 시독(屍毒)을 일정 비율로 섞어 독황신공으로 연성을 하면 새끼손가락만 한 병에 들어갈 만한 양의 독황이 탄생한다.
이 사실이 강호무림에 알려진다면 그 즉시 사림곡을 비롯한 독왕 중백약은 무림공적으로 낙인이 찍힐 것이다.
허나 자신의 오른손을 앗아간 검주에 대한 독왕의 복수심은 그런 낙인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오직 돈극.
돈극만이 그런 중백약의 밀명을 받아 그 역시도 피를 뒤집어쓴 수라가 되었을 뿐이다.
‘허나 문제는.’
돈극은 그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의 모든 것은 독왕을 위해 바쳤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존재했다.
‘정녕 독황이라고 하여 검주를 꺾을 수 있다는 말인가.’
독황의 독기가 과연 검주에게 통할 것인가. 다른 것도 아닌 현경의 경지에 오른 무인에게.
하지만 이미 중백약은 논리적으로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복수귀가 되었다. 악마의 길을 걷기 시작한 중백약에게 그 이상의 선택지는 없다.
“조금이라도 제갈세가가 수상한 움직임을 보인다면 고하라.”
중백약은 제갈세가조차도 완전히 믿지 않았다. 제갈세가 것들이라는 것이 오대세가 중 하나라고는 하나 쉽게 굴복하는 이들이 모인 학자들의 근본을 가진 가문이란 것을 꿰뚫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갈세가와 검주를 한꺼번에 지워 버릴 것이다.”
달달달.
독황의 독기로 인해 독왕 자신도 병 들어가고 있었다. 돈극은 그런 중백약을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봤지만 이내 고개를 숙였다.
“존명.”
그렇게 밤이 깊어져 갔다.
*****
“전하. 임가 여식을 데려왔사옵니다.”
“들여보내라.”
만우는 떡하니 침상 위에 드러누워서는 손가락을 한 번 튕겨 방 안의 초에 불을 붙였다. 그와 함께 문 밖에 드리워져 있던 그림자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끼익.
“넌 들어오지 말고.”
“예, 전하.”
제갈명공이 만우의 시중을 들기 위해 붙여 준 것은 제갈세가의 직계 중 하나다.
혜화(慧花) 제갈연.
무림오화 중 하나이자 제갈명공의 딸인 혜화를 제갈명공은 만우의 시중을 위해 붙인 것이다.
그러나 만우는 제갈연이 자신의 주변 삼십 보 이내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제갈연은 안에 들어오지도 못 한 채 문 밖에 서 있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허면 나가 보겠습니다.”
제갈연은 최대한 꾸밀 수 있는 최대한으로 화려하고 아름답게 꾸몄다. 그런 제갈연은 과연 혜화라는 말이 튀어나올 정도로 아름다웠으나 만우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독과 가시를 잔뜩 품은 독.
무림에서 여자와 노인, 아이를 조심하라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또한 만우는 겉으로는 순종적이어도 머리를 잘 굴리고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지 속내를 들여다볼 수 없는 제갈 씨들을 믿지 않았다.
그런 만우의 태도에 제갈연의 얼굴이 슬쩍 굳었다.
제갈연은 제갈의 피를 물려받은 여인답게 두뇌가 명석하고 여러 가지 지식에 밝았다. 그 때문에 그녀는 자신을 검주의 시중을 위해 들여보낸 아비를 원망하지 않았다.
최선과 실리.
그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자신뿐이란 것을 제갈연 역시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대가 무림오화라 칭송 받을 정도의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여인이라면 검주도 경계심을 낮출 것이다.
혹여나 제갈연이 검주와 통정을 할 수 있다면, 봉문을 피해 가기 위해 검주의 눈치를 봐야만 하는 제갈세가 입장에서는 쌍수를 들어 환영할 일이다.
혼맥이야 가문의 성세를 위해 오대세가 정도 되는 가문에서 당연히 하는 선택이니까.
무림왕이자 천하제일인인 검주와 제갈세가가 이어질 수 있다면 지금의 위기는 곧 기회로 뒤바뀌는 셈이다.
‘눈길 한 번 주지 않다니.’
그런 생각을 가지고 결연한 의지를 품은 채 만우의 시중을 맡은 제갈연이다. 청백지신을 버릴 생각까지 하고 있었는데 그런 그녀의 다짐이 무색하게도 그녀는 만우의 눈길 한 번 받지 못했다.
무심(無心).
제갈연을 쳐다보는 만우의 눈에서는 어떠한 감정의 편린조차도 없었기 때문이다.
‘고자새끼.’
그렇게 중얼거린 제갈연은 자신을 지나쳐 들어가는 임수미를 보면서 두 눈을 번뜩였다.
[잊지 말아라.]
임수미를 데려오기 전에 제갈연과 임수미 사이에서는 은밀히 모종의 대화가 오고 갔다. 그렇기에 제갈연은 임수미에게 그것을 잊지 말라며 눈빛으로 신호를 주었다.
[네 년의 선택에 따라 네 년과 보잘 것 없는 쓰레기들이 모인 하오문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다.]
임수미는 제갈세가에 구속이 되어 있으면서 모진 고초를 겪었는지 조선에서 봤을 때보다 훨씬 더 말라 있었고 혈색이 좋지 않았다.
허나 오히려 그것이 남성의 보호 본능을 일으켰다. 무화(無花)라 불린 임수미의 빼어난 용모는 그녀가 모진 고초를 겪었다고 해서 어디론가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검주를 믿지 말아라. 제 아무리 검주라 한들 네 아비 옆에 붙어 있을 제갈세가의 검보다 빠를 성 싶더냐?]
제갈세가는 하오문 전체를 인질로 사로잡았다. 의심이 많고 신중한 제갈세가다웠다. 그들은 토끼처럼 도망갈 수 있는 굴을 여러 개 파 두었다.
모든 것은 유비무환인 법이다.
무엇이 답인지 모를 때는 더더욱 선택지를 많이 만들어 둬야만 한다는 것이 제갈세가의 철칙이었다.
끄덕.
임수미는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만우가 있는 침실에 들어섰다. 촛불이 흔들거리며 어둠을 몰아내고 있는 중에 침실 한 가운에 만우가 가부좌를 튼 채로 침상 위에 앉아 있었다.
“흐으.”
만우는 촛불에 반사되어 주홍빛으로 물든 임수미의 마른 얼굴을 보면서 뜻 모를 웃음을 흘렸다. 그런 만우를 향해 임수미가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