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5. 반역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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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5. 반역자 (1)
2022.09.06.
주고후는 유모 김 씨의 걱정스런 시선을 느끼고는 피식 웃었다. 유모 김 씨는 언제나 주고후만을 걱정했다.
“안 무서웠어, 유모?”
“예?”
“거짓말 하려하지 말고. 검주 만우. 천하제일인 말이야.”
“…….”
유모 김 씨가 그 자리에서 몸을 날려서는 무릎을 꿇었다. 아무리 주고후를 위한 것이었다고는 하나 그것은 주고후가 내린 명령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주고후가 그것에 대해 벌을 내린다 하더라도 유모 김 씨는 억울해할 수 없었다.
그의 유모가 된 순간부터 유모 김 씨의 생사여탈권은 주고후의 손에 들어 있는 셈이었기 때문이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쇤네를 벌하신다 하여도 드릴 말씀이 없사옵니다.”
“누가 주모를 혼낸다고 했나? 그러니 일어나지. 무릎 상하겠어. 이제 유모도 나이를 생각해야지.”
유모 김 씨의 행동에 주고후가 피식 웃으면서 유모 김 씨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하지만 김 씨의 몸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평범한 중년 여인인 듯 보이나 사실은 유모라고 해도 그 근본은 주고후의 가장 지근거리에 있는 수신호위가 바로 김 씨다.
황실무학 중에는 황족을 보필해야 하는 여인들을 위한 무학들도 있었다.
그런 김 씨는 주고후도 일으킬 수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김 씨의 실력이 주고후보다 윗줄이라는 뜻이다.
“책하려는 것이 아니야. 그러니까 일어나. 명령이야.”
“예, 전하.”
김 씨는 명령이란 소리를 듣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고집이 얼마나 쇠심줄처럼 질긴지 잘 알고 있는 주고후였기에 혀만 한 번 쯧 하고 찰 뿐 더 이상 그녀를 탓하지 않았다.
“어땠어?”
“……무시무시하였사옵니다.”
다시 한번 더 주고후가 묻자 김 씨는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주고후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먼 단상 위에 기라성 같은 정파의 고수들과 같이 있는데도 그만 돋보이더군.”
천하제일인의 존재감은 그곳에서 빛이 났다. 검주의 곁에 있던 고수들이 무려 남궁세가와 무당파, 소림사의 고수들이었음에도 그들을 병풍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 검주의 존재감이었기 때문이다.
“한데 전하.”
김 씨는 그런 주고후에게 물었다.
“검주에게 관심이 있으셨던 것이 아니옵니까?”
호광 비무대회의 우승자는 남궁세가도, 소림사도, 무당파도 아니었다.
천하제일인 무림왕 검주 만우.
그가 출전시킨 세 명의 고수들이 돌풍을 일으키며 그 비무대회의 모든 화제를 싹 쓸어가 버린 것이다.
그중 압도적인 장면은 비록 패배하였지만 동군영이 소림의 동량인 강무의 이마에 피를 터뜨린 것과 맨 마지막에 척사영이 남은 모든 출전자를 상대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일수에 쓰러뜨린 것이었다.
그때 보여 준 척사영의 좌검우도에서 피어오른 무수한 검화(劍花)와 도화(刀花)는 무림의 새로운 화경의 고수의 탄생을 알렸다.
그들을 수하로 거느린 자가 바로 검주 만우다.
김 씨는 한왕 주고후가 무림인들을 포섭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주고후가 비무대회 직후 곧바로 검주를 만나겠다 하지 않은 것에 의문을 표했다.
“왜? 막상 그러겠다고 했으면 또 따라다니면서 말렸을 거면서.”
“…….”
김 씨는 그런 주고후의 말에 뭐라 반박하지 못했다. 분명 그랬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천하제일인인 검주를 만나는 일이다.
그곳에서 혹시라도 검주가 주고후를 해하려 한다면 김 씨로써는 검주의 바지 자락도 붙잡지 못할 정도의 실력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냥.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주고후는 그런 김 씨를 보면서 피식 웃어 보이고는 말했다.
“나도 무공을 대충이나마 익혔다곤 하지만.”
주고후는 온갖 영약과 황실 고수들의 지도 편달 하에 지금의 실력을 가지게 되었다. 애초에 주고후에게는 무예에 대한 그리 뛰어난 재능이 없다는 증거다.
전장에 나서 병사들을 통솔하고 지휘하는 능력과 직접 검을 쥐고 휘두르는 것은 엄연히 다른 별개의 재능이다.
허나 주고후가 매료된 것은 전장의 분위기를 단신으로 쇄신시킬 수 있는 절대적인 무력을 지닌 무림인이었다.
주고후는 그들이 자신의 편에 선다면 소수로도 거뜬히 다수를 제압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부지런히 무림의 명숙들과 명사들을 만나고 다니며 자신의 영향력을 넓히고 있었던 주고후지만 그런 그의 생각을 바꿔 준 이를 이번 비무대회에서 만났다.
“생각나 유모? 동군영이라는 조선에서 온 선비.”
“예.”
어찌 그 사람을 김 씨가 기억하지 못하겠는가.
그를 위해 검주가 직접 남궁과 소림, 무당의 세 고수들을 협박하는 것까지 김 씨는 직접 바로 옆에서 지켜보았다.
또한 그 대단하다는 검주가 내공조차 익히지 않은 선비의 치열한 사투를 단 한 시도 눈을 떼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다는 것도.
“그 선비의 혈투를 보고 나니 깨달았어. 아니, 나뿐만이 아니라 그곳에 있는 모든 무림인들이 깨달았을 거야.”
주고후는 자신의 주먹을 쥐고는 들어 올려 보였다.
주고후는 눈을 감고 단전부터 시작해 느껴지는 자신의 내공을 느껴 보았다. 이 장엄한 내공이 있지만 주고후는 스스로에게 확신이 들지 않았다.
“강자에게 도전하려는 향상심이 과연 나에게는 얼마나 있었는지.”
조금이라도 높은 언덕을 만나면 주고후는 그것을 돌파하여 넘는 것이 아니라 편하게 갈 수 없는 방법이 없는지 주변을 먼저 둘러보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 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스스로의 부족함을 자각하고 인지하는 것이 바로 발전의 기본이니까.
“과연 내가 그 선비라고 해도, 내공 한 줌 없는 상태에서 소림승을 상대로 그 정도로 처절하게 싸울 수 있었을까?”
“전하. 그것은…….”
“처지와 상황이 다르다는 말은 하지 마 유모.”
주고후는 김 씨에게 말했다.
“그 선비는 천하제일인의 후광을 업고 있는 자였으니까. 나와 비교해 과연 그 선비의 상황이 부족하다고 생각해?”
아무리 한왕 주고후가 황제의 핏줄이라고는 하나 상대는 천하제일인의 비호를 받는 이였다. 그러니 둘의 입장이 다르다고는 할 수 없었다.
“피가 끓었어. 그 선비의 혈투를 보면서. 그 선비에게는 상대를 꺾고 이기겠다는 의지가 아니라.”
동군영에게 주고후가 봤던 것은 반드시 상대를 꺾겠다는 투쟁심이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더 활화산 같이 뜨겁게 타오르는 그 이상의 것을 주고후는 동군영에게서 느꼈다.
“자신을 넘어서겠다는 그 향상심, 그게 있었으니까.”
자신과 싸워 이긴다.
무공을 익히는 자나 학문을 익히는 자들은 자신이 더 나아지기 위해 자신보다 너 나은 사람을 목표로 삼아 정진하지, 자신과 싸우려 들지 않는다.
그러나 동군영은 비무대회 위에서, 소림승을 상대로 자신과 싸우고 있었다.
자신과 싸우기 위해 동군영은 높아 보이기만 하는 소림승이란 벽에 망설이지 않고 온몸을 부딪치며 깨지고 굴렀다.
그리고는 그 벽을 깨부수면서 자기 자신을 넘어섰다.
역설적이게도 동군영의 혈투는 치열하고 뜨거웠지만 동시에 차갑고 외로워 보였다. 허나 주고후는 그것을 보면서 느꼈다.
“그 선비를 보면서 느꼈어. 사람이 강해지는 것은 초절정의 상승 무학 따위가 아니란 것을. 강호무림을 내가 손에 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나를 강해지게 만드는 것이 아니란 것을.”
핏줄이, 배경이, 익힌 무공이 세고 좋다고 하여 그 사람 자체가 강해지는 것이 아니다.
허나 주고후는 자신이 이 제국의 패권을 손에 쥐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아니라 자신을 더 빛나게 해 줄 주변에만 눈을 돌려 왔다.
이미 만들어진 것, 이미 있는 것, 이미 유명한 것.
그것들에 억만금을 들여 자신이 손에 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주고후 자신이 그처럼 되는 것이 아니고 그처럼 강해지는 것도 아니고 그처럼 유명해지는 것도 아니다.
“전하.”
“어때. 이제 좀 장성한 것 같나?”
김 씨는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주고후가 그 사이 한 뼘 더 성장한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더 이상 아이가 아닌 어른인 주고후지만 정신적으로 한층 더 성숙해졌다.
“그것들이 자연스레 날 따를 수 있도록 내가 강해져야겠어. 그러니까.”
하지만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유모 김 씨는 그 점을 간과했다.
한왕 주고후는 정신적으로 성숙해졌다고 해도 그 근본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호북성으로 가자.”
“호북…… 예?”
김 씨가 깜짝 놀라서는 주고후를 쳐다봤다. 주고후는 히죽 웃으면서 팔짱을 척 하고 꼈다.
“그 선비의 곁에 붙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 같아. 아니 그런가 유모?”
“저, 전하!!”
“가자! 호북성으로!”
주고후는 더 이상의 반문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성큼성큼 만우와 사행단이 떠난 방향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런 주고후의 뒤로 황망한 표정의 김 씨가 얼른 따라붙었지만 주고후는 그런 김 씨를 쳐다보지도 않고 품에서 피리를 꺼내 길게 불었다.
삐이이이-!!!
피리 소리가 길게 뻗어 나간 뒤 한 다경도 지나지 않아 주고후를 태우기 위한 절정 고수들로 이뤄진 가마꾼들이 가마를 들고서는 모습을 드러냈다.
“공자님 말씀을 가슴에 새기기 위하여 호북성으로 간다!”
배워 때에 맞추어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
김 씨의 한숨이 깊어지는지도 아는지 모르는지 주고후가 낭랑하게 외친 출발 신호에 가마꾼들이 발을 놀렸다.
*****
제갈세가의 제갈명공이 직접 만우를 찾아왔다는 것에 가장 놀란 사람은 다름 아닌 감령과 필두였다.
무림에서 잔뼈가 굵은 그들은 한 때 각기 녹림과 장강에서 최고의 자리인 대채주와 총채주까지 올랐던 입지전적한 산적과 수적 출신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오대세가 정도 되는 가문의 가주란 양반들이 얼마나 뻣뻣한 목과 무거운 엉덩이를 가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제갈세가의 가주가 자신을 처절하게 패배하게 만든 장본인을 맞이하기 위해 직접 찾아온다?
“냄새가 나는데?”
감령은 코를 킁킁거리면서 필두에게 말했다. 필두도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제갈세가 특유의 고아하고 고풍스런 분위기가 나는 침실을 슥 둘러보았다.
만우와 사행단은 제갈명공의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마치 황제처럼 호북성 융중에 입성했다.
융중에는 제갈 씨 집성촌이 거대하게 형성이 되어 있었고 그와 관련된 상권과 이권으로 인해 사람들이 모여들어 삼만 명이나 사는 곳이 되었다.
그 가운데 융중의 모든 것이나 다름없는 제갈세가가 있었는데 그곳에서도 제갈명공은 만우를 비롯한 사행단 모두를 상전 모시는 것처럼 극진히 모셨다.
“안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하지?”
“말이 많군.”
“많아야지. 까딱했다가는 목이 날아가는 일이 허다한 곳이 무림인데.”
감령은 피식 웃었다. 지난 몇 년간 조선에서 나름 평온한 시간을 보냈던 감령과 필두다. 검주를 따라 왜에도 다녀오는 등 많은 일을 겪었으나 한시도 긴장의 끈을 늦출 수 없는 무림에서의 시간에 비교한다면 그 시간은 휴식이나 다름없었다.
“머리 잘 쓰는 걸로는 어딜 가도 꿇리지 않는다는 놈들이 제갈세가 놈들이야.”
“안다.”
수시로 무림맹에서 녹림 산적과 장강 산적들을 토벌한다면서 무림인들을 일으킬 때마다 늘 전략과 전술은 전부 제갈세가에서 나왔다.
굳이 총군사인 제갈명공뿐만이 아니라 무림맹의 요직 곳곳에 제갈세가의 사람들이 임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대장 때문에 잃은 게 많은 양반이잖아.”
“무림의 원한은 백 년이 지나도 늦지 않는 법이라 했지.”
“그러니까!”
감령이 딱 하고 자신의 허벅지를 쳤다. 감령과 필두는 고풍스럽게 꾸며진 귀빈 전용 침실로 안내를 받은 지 한 시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짐을 풀지 않았다.
왠지 푹신한 침상마저도 마치 바늘이 빽빽하게 꽂힌 것처럼 뭔가 불편했기 때문이다.
정파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오대세가의 분위기가 감령과 필두에게 맞지 않는 것도 분명 한 몫을 했다.
소위 말하는 정파인이라면 감령과 필두를 보자마자 무기를 빼들고 죽이겠다며 달려들어도 하등 이상하지 않은 곳이 바로 강호무림이었기 때문이다.
“대장님이 모르실까?”
하지만 필두가 쉬이 긴장을 풀지 못하는 감령을 향해 말했다. 감령은 그런 필두의 질문에 어깨를 으쓱했다.
“알아도 들어올 양반이지. 피해 가면 간단한 걸 지금까지 피해 간 적이 있었어?”
“없지.”
이제 둘도 만우의 기질에 대해서는 익숙해졌다. 그간 만우의 뒤를 따라 그 둘의 능력만으로는 도저히 헤쳐 나갈 수 없는 수많은 일들을 겪었기 때문이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감령과 필두 입장에서는 도저히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는 일이 만우에게만 가면 너무나도 쉽게 해결됐다는 것이다.
그것도 피하거나 꼼수를 부리지 않고 늘 정면에서 닥치는 모든 것들을 깨부수고 나아갔다.
“이번에도 대장님이 무슨 생각이 있으시겠지.”
그래서 필두는 깊숙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감령이 벌러덩 드러눕는 필두를 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