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9. 호광 비무대회 (3)
(379/400)
379. 호광 비무대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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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9. 호광 비무대회 (3)
2022.08.16.
“전하! 다시 한번 재고하여 주시옵소서!!”
한왕 주고후는 눈만 내놓고 입 아래의 얼굴을 다 가리는 적빛 면사를 드리운 채 옆에서 자꾸만 귀찮게 하는 수신호위를 쳐다봤다.
“불가하다.”
“허나 전하께옵서는 그 옥체를 보중하셔야 하옵니다!”
“왜. 본왕이 다쳐서 너희들에게 화가 돌아갈까 겁나더냐?”
주고후는 자신을 극구 말리는 수신호위에게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그런 주고후의 주변으로는 각양각색의 무림인들이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1번부터 64번까지! 일차전이오!!!”
주고후가 수신호위의 만류에도 굳건하게 버티고 앉아 있던 곳은 바로 비무대회 출전자 대기실이다. 한왕이나 되는 작자가 개봉의 태수에게 알리지 않고 몰래 들어온 것도 모자라 몰래 비무대회에까지 참가서를 덜컥 집어넣어 버린 것이다.
예선이라고 해 봤자 강호 기준으로 이류 정도만 되면 통과할 수 있는 것이기에 주고후는 거뜬히 통과했다.
무예와 강호에 관심이 많은 주고후가 무공을 익히지 않았을 리 없었다.
전쟁의 선봉에 서기를 좋아하는 차남을 위해 황제가 직접 나서서 무공을 구해다 줬을 정도이니 그 정도는 거뜬했던 것이다.
거기에 황제의 총애를 받는 차남이니 오죽 좋은 무구들을 가지고 있겠는가.
검기가 아니면 잘리지도 않는다는 천잠사로 짠 무복은 물론이거니와 주고후가 쓰는 청강검은 항마(降魔)의 기운이 서려 있는 보검으로 그 예기가 그냥 휘두르기만 해도 검풍의 절삭력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진 검이었다.
그러니 예선에서 하는 허수아비 서른 개 한 번에 자르기나, 바위 가르기 등등 주고후에게 있어 어려울 만한 고비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 것이 아니옵니다!”
수신호위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모든 번왕들에게는 금의위에 소속된 최정예들이 수신호위로 몇 씩 서게 된다.
이는 번왕의 선택이 아닌 의무였는데, 번왕의 호신을 위해서이기도 하나 황제가 번왕의 권력을 감시하고 경계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피로 연결된 혈연이라고는 하나 본래 권력은 피를 나눈 형제와도 나눠 갖지 않는 법이다.
“뭐, 본왕이 다치지 않기를 기도하라. 그대의 의도가 무엇이건 간에 이 몸에 생채기 하나라도 나면 너희들의 모가지는 그대로 댕강이 아니더냐.”
주고후가 낄낄거리면서 웃었다. 호위는 그런 주고후를 보면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황족이 다치기라도 한다면 가장 큰 잘못은 그들을 호위하는 이들에게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주고후의 말대로 그의 몸에 작은 생채기가 하나라도 나면 호위의 죽음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전하아!”
“유모도 날 말리지 못했다.”
주고후는 듣기 싫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유일하게 주고후를 제어할 수 있는 유모 김 씨도 그 뜻을 꺾지 못했다.
무림인들과 직접 손속을 겨뤄 보고 싶다는 주고후의 의지를 꺾지 못한 것이다.
“만일 내가 태수를 찾아갔다면 이곳에는 오지도 못 했을 터.”
주고후는 지금은 황족의 직위가 박탈된 자신의 숙부인 주왕 주숙이 살았던 번탑을 보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모든 황족들에게 이곳에 오는 것은 금기가 다름없었다.
하지만 하필이면 번탑에서 무림대회가 열린다고 하니 반드시 무림대회를 구경하고 싶었던 주고후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정체를 감추고 들어오는 것밖에는.
“바로 이차전을 시작하겠소! 64번부터 128번까지 모두 나오시오!!!”
“시작한다. 어서 나가거라.”
주고후는 자리에서 검을 챙겨들고는 일어났다. 그의 가슴팍에는 111번이란 숫자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툭!
“아, 미안합니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 주고후와 어깨가 부딪쳤다. 어깨를 부딪친 이가 그런 주고후에게 얼른 사과했다.
“괜찮…… 응? 이거 같은 조인가 보오?”
주고후가 괜찮다고 말하려다가 자신에게 부딪친 남자의 가슴팍에 달린 번호를 보고서는 먼저 말을 걸었다.
“112번이시니. 절반을 가려내기 위해 8명씩 묶어 편을 갈라 겨룬다고 하지 않았소? 그러니 같은 조요.”
“아, 그렇습니까?”
주고후는 못 미덥다는 표정으로 철검을 품에 꼭 끌어안은 서생 같은 인상의 남자를 쳐다봤다. 아니나 다를까 잔뜩 긴장했는지 이마에 땀이 잔뜩 맺혀 있었다.
“아. 난 고후라고 하오.”
주고후는 자신의 성을 빼고 이름만 말했다. 그러자 주고후와 부딪친 남자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저, 전 동군영이라고 합니다.”
“동군영?”
주고후의 얼굴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발음이 비슷한 단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군영은 익숙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게 생각나는 것도 실례가 아니니 개의치 마십시오.”
주고후는 동군영을 보면서 그가 무림인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저것은 서생들이나 쓰는 말투와 몸가짐이었기 때문이다.
“나리!”
그때 슌스케와 척사영이 동군영을 찾아왔다. 그 둘은 각기 다른 번호였기에 가장 첫 번째 비무 때 서로 부딪칠 염려는 없었다.
하지만 그들을 본 주고후는 눈을 크게 떴다.
‘저 여인은?’
주고후의 실력은 일류와 절정 그 사이이다. 무예를 좋아하나 무공에 대한 재능은 떨어져 황실의 무공을 익혔음에도 그 정도에서 그친 것이다.
허나 왕족으로서 그 정도만 익혀도 차고 넘친다. 왕족이 직접 무공을 써야 할 정도의 위험이 닥친다면 그때는 살아날 방법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허나 가진 기물들까지 이용한다면 주고후는 능히 절정 고수와도 맞설 수 있었다. 주고후에게 부족한 것은 공력에 대한 친화력이지, 전투에 대한 감각 그 자체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고후는 척사영을 보자마자 곧바로 얼마 전에 만난 누군가가 떠올랐다.
무존 남궁무.
무림십좌의 일인이자 남궁세가의 최고수인 그 남궁무와 비슷한 느낌이 척사영으로부터 느껴졌다.
‘이자들은 전부 눈이 없는 것인가?’
주고후는 척사영을 보자마자 그렇게 느꼈는데 소위 말하는 무림인이란 이들은 척사영의 비범함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했다.
“꼭 유념하십시오.”
그 사이 척사영과 슌스케가 동군영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고는 고개를 돌렸다. 주고후는 척사영과 눈이 마주치자 자신도 모르게 흠칫했다.
‘놀랐다? 이 한왕이?’
대업을 위해 적의 대군 앞에 선봉으로 나섰을 때도, 적의 군세에 놀라 본 적이 없는 주고후다. 하지만 척사영 앞에서는 주고후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리 젊은 여인이.’
화경의 고수들은 겉모습만 보고 나이를 짐작할 수는 없다. 하지만 주고후는 척사영의 눈을 보면서 그녀의 나이가 많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세월은 그 사람의 눈에서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 없는 법이다.
척사영은 주고후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자 그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동 선비님을 부탁하오.”
“어떤 사이인지 물어도 되겠소?”
척사영은 한눈에 주고후의 실력을 가늠했다. 저 정도면 이 오합지졸이 모인 예선전쯤은 손쉽게 올라올 수 있는 실력자다.
“나의 은인이 아끼는 분이오.”
“은인…….”
“허니.”
척사영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단상 위로 올라갔다. 주고후는 척사영의 모습에 매료된 듯 그녀의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고개를 휙 돌려 동군영을 쳐다봤다.
“동 선비.”
“예? 예.”
동군영은 갑자기 주고후가 자신을 부르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주고후는 그런 동군영에게 말했다.
“내 동 선비의 안전은 보장해 주곘소이다. 허나 내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오.”
“부탁이요?”
동군영은 일단 그렇게 말하는 주고후를 먼저 경계했다. 이 세상에 대가 없는 호의란 없다는 것을 만우를 따라다니면서 동군영도 배웠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내민 호의를 저의와 상관없이 홀라당 집어먹어도 탈이 나지 않기 위해서는 만우 같은 절대적인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방금 저 여인. 저 여인과 한 번만 더 만나게 해 주시오.”
주고후는 척사영의 뒷모습을 보면서 다짐했다. 저 진주가 아직 진흙 속에 묻혀 있을 때,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겠다고 말이다.
그렇게 된다면 아마 자신의 대업을 이루는 데 있어 아주 든든한 한 축이 되어 줄 테니까.
“흐음. 뭐, 그런 것이야 어렵지 않지만.”
동군영은 주고후가 척사영에게 한눈에 반했다고 착각했다.
“아마 본 모습을 보면 그런 생각은 드시지 않을 거요.”
척사영은 괴물 그 자체다. 적어도 동군영은 그런 여인을 자신의 반려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주고후는 그런 동군영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
“애들 장난 같은데.”
만우는 하품을 쩌억 하면서 지루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비단 만우의 얼굴에만 떠오른 것이 아니었다.
이건 비무대회가 누구에게나 기회가 돌아가도록 공평하게 진행되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요식 행위에 불과하다.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땅에서 솟아난 고수가 없는 다음에야 지금까지의 호광 비무대회의 승자는 늘 제갈세가까지 포함한 네 곳에서 나왔다.
거기다 빠르게 사람 수를 줄이기 위해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는 예선전이었기에 마치 도떼기시장 한 가운데에 앉아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지금만 참고 기다려 보면 나중에는 볼만할 거예요.”
남궁영이 혹여라도 만우가 대환단을 풀겠다는 말을 번복하고 변심할까 걱정되었는지 만우에게 말했다.
만우는 그런 남궁영을 돌아보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기대하지. 남궁세가에서 본주의 눈을 즐겁게 해 줄 만한 후기지수가 나오기를. 지난번에는 영 별로였어서.”
“…….”
남궁세가 최고의 후기지수는 창룡단의 단주인 남궁태다. 그것을 꼬집은 만우의 화법에 남궁영의 표정이 슬쩍 굳었다.
“꼭 그렇게 말을 해야만…….”
“아. 차라리 이게 더 재밌겠네.”
따악!
만우는 손가락을 딱 하고 튕겼다. 그러자 준비된 단상 위의 의자에 앉아 있던 세 명의 고수가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섰다.
하지만 만우는 그것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만우가 자신의 잠행을 이토록 쉽게 들통 나게 했다는 것에 은신을 쓰고 있던 이가 더 놀란 표정이었다.
“웬 놈이냐!”
진해진인이 청강검에 손을 올리면서 갑자기 나타난 괴한을 향해 윽박질렀다. 그보다 한 발 더 먼저 만우가 손을 들어올렸다.
“내 손님.”
“전하.”
만우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 괴한이 곧바로 그 자리에서 만우를 전하라고 부르며 머리를 바닥에 박아 절했다.
“흐음.”
만우는 검은 천으로 온몸을 꽁꽁 싸맨 괴한을 보면서 턱을 손가락으로 긁적였다.
“불편해 보이는데.”
“사정상 모습을 보이면 안 되기에 이리 무례를 무릅썼나이다.”
“무림왕 앞에서도?”
무림왕은 명예직이라고는 하나 한왕, 주왕처럼 황제의 친족에게만 내려지는 번왕의 직위 중 하나다.
하지만 괴한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사옵니다.”
“그런 게 어디 있어?”
“제가 모시는 분께서 내리신 명이옵니다.”
“흠.”
그 말인즉슨 저 괴한이 모시는 자가 같은 번왕급이거나 황제라는 뜻이다. 황제에게 저런 괴한이 붙어 있다는 것은 본 적이 없으니, 같은 번왕급을 모시는 자일 것이다.
“쟤 때문이지?”
만우는 앞뒤를 자르고는 비무장으로 시선을 던지면서 말했다. 괴한은 만우가 쳐다보고 있는 이가 주고후임을 눈치채고는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그렇사옵니다.”
“실력 괜찮아 보이는데. 해 보라고 해. 무공을 익힌 황족이라. 그것도 꽤 신선한데.”
“그…….”
괴한이 주변에 선 고수들을 슬쩍 살폈다. 이 이야기가 다른 이에게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은 모양이다. 만우는 그런 괴한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어차피 아무것도 듣지 못해. 본주가 허락하기 전까지는.”
괴한은 그제야 만우와 자신의 주변에 소리를 차단하는 기막(氣幕)을 둘렀다는 것에 두 눈을 크게 뜨고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보아하니 강호의 도리에 대해서는 잘 모르나 본데. 그러고 다니다가는 칼 맞아서 죽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못해.”
“아.”
만우는 동시에 괴한이 강호무림에 대해서 잘 모르는 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그게 아니고서야 초절정 고수가 즐비한 곳에 잠행을 써 가며 들어오진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게 발각이 된다면 무림인들은 가차 없이 칼을 뽑아 그자를 죽일 것이다.
모습과 기척을 숨긴 채 지근거리까지 접근한다는 것은 그만큼 상대가 언제라도 자신의 목숨을 노릴 수 있다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후환을 남기느니 그 자리에서 죽인다. 그렇게 잠행을 한 이가 자신을 죽일 생각이 있건 없건 그건 상관없었다.
“그런 실력을 가지고 있으면 그냥 말려도 될 텐데.”
만우는 한눈에 괴한의 경지가 주고후보다 한 수 위라는 것을 파악했다. 최소 절정 고수 수준이었다.
하지만 강호의 도리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을 보니 황실 무공을 익힌 자였다.
“누가 보면 여인인 줄 알겠어.”
만우는 유난히 가는 괴한의 목소리에 피식 웃었다. 그에 괴한이 잠시 움찔했지만 이내 만우에게 말했다.
“부디 제 주군을 말려주시옵소서. 저러다 자칫 상처라도 나신다면…….”
“난다면?”
“이 비무대회를 연 모든 이들은 물론이거니와 주군께 상처를 입힌 이의 십족까지 멸하는 비극이 벌어질 것이옵니다.”
“아. 그래. 십족을 멸했다 하였지. 방효유라고 하였나?”
만우의 말에 괴한이 파르르 놀랐다. 그 이름은 황제 앞에서 꺼내는 것조차 금지였고 대학자인 그의 저서를 들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사형에 처해질 수 있었다.
만우가 그런 괴한의 반응에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있지도 않은 황제가 무서운 모양이긴 하군.”
“대명의 황제이십니다. 무림왕 전하라고는 하나 말씀에 예를…….”
“가져가라 그래. 무림왕. 필요 없어.”
만우는 그렇게 말하면서 진짜로 황제가 하사한 왕패를 휙 내던졌다. 발치에 왕패가 데구르르 굴러가자 괴한이 입을 쩍 벌렸다.
“이거 한 개 줘 놓고 또 속이 시커먼 게 다 보이는데, 시간이 없어서 그냥 넘어가 준 거야. 그러니까 다시 가져가라고 하든가.”
“…….”
바깥에 선 세 명의 초절정 고수들은 완전히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안에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들리지는 않았지만, 그들도 만우가 내던진 것이 왕패임은 알아봤다.
그들이 미친 놈 쳐다보듯 만우를 쳐다봤지만 그는 콧방귀를 흥 하고 꼈다.
스으윽!
괴한이 감히 그것을 주울 생각도 하지 못했기에 만우가 허공섭물로 왕패를 들어올렸다. 그러자 기막 밖에서 지켜보던 초절정 고수들이 헉 하는 소리를 냈다.
“그쪽이 모시는 분이 누구인데?”
만우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괴한에게 물었다. 그러자 괴한, 아니 유모 김 씨가 그런 만우에게 말했다.
“황제폐하의 차남, 한왕 주고후이십니다.”
“호오. 차남?”
만우가 두 눈에 이채를 띄고는 비무대 위를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