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7. 호광 비무대회 (1)
(377/400)
377. 호광 비무대회 (1)
(377/400)
377. 호광 비무대회 (1)
2022.08.09.
주왕 주숙의 번탑(繁塔)은 이제는 폐하여 평민이 된 황제의 동생이 번왕으로 임명되었을 때 기거하던 곳이다.
허나 명나라의 이대 황제인 건문제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각 일족들의 영지를 삭감해 중앙에 편입시켰다. 그때 주왕 주숙을 폐하여 평민으로 강등시키면서 그는 번탑의 허리를 베었다.
소위 말하는 왕기(王氣)를 없애기 위해 번탑의 허리를 자른 것이다.
그 이후로 번탑의 주변에는 땅을 파 호수를 만들고 너른 숲을 만들어 사냥터로 사용이 되었다. 오늘은 그곳에 사냥감이 될 짐승들 대신 사람들이 북적였다.
호광 비무대회.
호북, 호남에 하남까지 장강을 따라 이어지는 비옥하고 너른 세 지역을 통틀어 호광성이라고 부른다. 그 지역에서 벌어지는 비무대회가 열리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무림에서도 한 손에 꼽히는 거대 문파와 거대 세가인 소림과 무당, 남궁과 제갈세가가 주도하여 열리는 이 비무대회는 호광성 유력 문파들의 친목을 가지고 그 세를 외부에 과시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예년과는 달리 오늘은 더욱더 사람들로 인해 붐볐다.
거대 문파 소속의 무인들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군소 방파의 모든 무림인들이 호광 비무대회를 구경하러 사냥터로 몰린 것이다.
무림왕 천하제일인 검주 만우.
금년에는 불참을 선언하여 힘이 빠질 뻔한 비무대회에 때마침 개봉시에 방문한 검주 만우가 제갈세가를 대신하여 참석한다는 것에 천하제일인을 보러 수많은 사람들이 몰렸다.
원체도 개봉시가 큰 대도시이긴 하였지만 그중에서도 무림인들이 이렇게 많았나 싶을 정도로 개미떼처럼 새벽 이른 아침부터 도처에서 무림인들이 개봉시의 번탑 사냥터로 몰려들었다.
“거의 오천 명은 몰려든 것 같은데.”
“오천 명!”
그 어마어마한 숫자에 설미수가 두 눈을 크게 치켜떴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무림인들은 즉시 전력이 될 수 있는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중원 전체도 아니고 고작 세 개 성에서 모여든 인원이라니, 설미수는 이들이 조선을 향해 진격하는 모습을 떠올리고는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한데 은공께서는 저들에게 천하제일이라 소리를 듣고 있다는 거지.’
설미수는 새삼스럽게 대단하다는 눈으로 만우를 쳐다봤다. 명나라 사람들이 스스로를 대국이라 부르며 얼마나 콧대 높은지를 수도 없이 겪어 본 그였기 때문에 만우를 보는 눈에 여러 감정이 깃든 것은 당연했다.
“그럼 나리. 우리 동구녕 나리께서 어찌 준비하고 계시는지 가 보시렵니까?”
“가도 되겠습니까, 은공. 동군영 그 사람이 많이 긴장하고 있을 텐데.”
“뭐.”
만우는 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만우는 걱정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는 설미수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도 지난 시간이 헛된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예?”
“생각보다 잘 버티고 있다는 소리지요. 네.”
만우는 턱밑을 손가락으로 긁으며 어젯밤을 떠올렸다.
*****
“내가 정녕 비무대회란 곳에 나가 무림인을 상대로 싸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동군영은 멋대로 만우가 자신의 출전을 정해 버린 것에 화를 내기도 하련만 오히려 만우에게 찾아와 솔직하게 말해 달라고 했다.
승산.
만우는 그런 동군영을 눈에 이채를 띈 상태로 쳐다봤다.
“왜. 내가 원망스럽지 않으십니까, 나리?”
“원망?”
동군영은 무재라고 볼 만한 점이 딱히 없었다. 만약 동군영 정도의 무재를 지닌 자가 강호에 몸을 담는다면 결국 낭인으로 온 평생을 떠돌아다니다 그렇게 부평초처럼 스러져 갈 것이다.
그 정도로 동군영의 무재는 평범, 그 자체다.
반면 강호무림에서 이름 좀 날린다 싶은 이들은 최소한 수재는 되었다. 백 명 중에서 일 등이어야 중견 문파나 방파에 들어갈 수 있고, 재능이 천 명 중 일 등 정도는 되어야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동군영이 내일 검을 맞대야 할 이들이 바로 그 천 명 중 한 명꼴로 나온다는 무공의 천재들이다.
그런데 갑자기 이제 검을 배운 지 이 년이 조금 넘은 동군영을 그 천재들과 덜컥 붙여 버렸으니 동군영이 화를 낼 만도 한데 동군영은 화를 내지 않았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것이라 짐작은 했네.”
“호오.”
만우는 제법 의연한 동군영의 반응에 의외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정말로 의외였기 때문이다.
“검을 쥐고자 하였을 때 그건 내 소심함을 고치기 위함이었으니 말이야.”
“그랬습니까?”
“자네만 쳐다보면서 손가락을 쪽쪽 빨고 있기도 내 스스로가 너무 무력했고.”
그 소심증을 고치지 못해 장원을 해 놓고도 춘추관에서 서기 노릇이나 하던 동군영이다. 그런 스스로를 왜 고치고 싶지 않았겠는가.
스스로는 의지가 박약하여 할 수 없었던 일을 만우라는 존재로 인해 억지로라도 할 수 있었기에 동군영은 힘들긴 해도 불만을 품진 않았다.
“그런 것치고는 너무 발전이 느립니다요.”
“애당초 활도 제대로 못 쏘는데. 검이라고 빨리 늘까.”
동군영은 소탈하게 웃어 보였다. 조선의 선비들은 마음을 수양하기 위한 방편으로 활쏘기를 즐겨했다. 그리고 동군영은 그 활쏘기에도 별 재능이 없었다.
“그래도 열심히 하였네.”
“그러게.”
그것은 만우도 인정하는 바였다. 그간 만우가 동군영을 살펴보는 데에 게을러진 것은 맞았다. 허나 그렇다고 하여 동군영까지 게을러지지는 않았다.
얇았던 팔과 어깨는 굵어졌고 하체와 허리에는 힘이 생겼다. 만우가 시킨 검의 기초를 그가 보지 않는 와중에도 꾸준히 닦아 온 것이다.
“그걸 봤기 때문에 난 나리를 대회에 내보내려는 거야.”
만우의 말투가 바뀌었다. 그나마 형식적으로 쓰던 존대를 내려놓은 것이다. 양반과 역졸이라는 신분이 아니라 검을 가르치는 사승 관계로 대하겠다는 뜻이다.
“알고 있네. 더불어 안전하게 실전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하지. 아니 그런가?”
“맞아.”
만우는 동군영이 그렇게 솔직하면서도 정확하게 스스로를 판단하고 있었다는 것에 눈을 치켜떴다. 검을 쥔 이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를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는 눈이다.
그걸 가지지 못한 자들은 단명한다. 자신의 실력을 과신한 나머지 불나방처럼 뛰어들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무 생각 없이 내보낸 건 아니야. 나리가 상대할 건 무당파의 삼대제자들이니까.”
“……감 통사에게 검을 휘두른 그 어린 도사 말인가?”
“그래. 걔가 삼대였지.”
감령과 필두, 문형일은 형식적이나마 사행단의 통사, 즉 역관들이다. 동군영은 매섭던 어린 도사의 검격과 독기 어린 눈빛을 떠올리고는 잠시 안색이 시커멓게 죽었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안전하겠지. 아니 그런가?”
“음. 뭐, 비무를 하다 보면 불구가 되거나 죽는 경우가 없지는 않지.”
만우의 말에 동군영의 안색이 이제는 하얗게 변했다. 한 마디를 할 때마다 얼굴색이 확확 바뀌는 동군영을 보는 재미가 제법 있었다.
하지만 더 하다가는 동군영이 졸도라도 할 기색이었기 때문에 만우는 픽 하고 웃었다.
저놈의 소심증은 고쳐진 것 같으면서도 그대로였다.
하긴, 사람의 천성이 쉽게 바뀌면 그게 어디 사람의 천성이겠는가.
그래도 제법 의연해지고 의젓해졌으니 그것 하나는 칭찬해 줄 만했다.
“그런 경우는 없게 만들어 주지. 동구녕 나으리.”
만우가 확언을 했다. 그러자 하얗게 탈색이 되었던 동군영의 얼굴에 다시 핏기가 돌아왔다. 만우를 믿는다는 뜻이다.
만우는 자신이 동군영의 그런 믿음을 받는다는 것이 생소했다. 중원을 유람하던 만우는 추종자들은 있었지만 누군가를 책임지진 않았기에 신뢰를 받을 필요도 없었다.
허나 조선에서는 달랐다.
동군영이, 방매가, 더 나아가서는 사행단과 더 크게는 임금까지 만우를 신뢰하고 있었다. 뭐 임금이야 머릿속에 꿍꿍이가 있을 테지만 어쨌든 만우를 믿고 명나라 황제의 칙서를 입맛대로 해석해서 조천사를 보낸 것이 아닌가.
사람은 늘 그렇게 변화하는 법이다.
그래서 만우는 평소 같으면 하지 않았을 테지만, 오늘만큼은 그 감정에 취해 한 마디를 더했다.
“혹시라도 팔이나 다리를 하나쯤은 잃더라도 복수는 확실히 해 주지 나리.”
물론 그게 동군영을 위해 했다고 하기에는 썩 무리가 있는 말이었지만 말이다.
*****
“호광 비무대회? 검주가?”
“예, 가주님.”
제갈명공은 둔기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설마하니 검주가 그 비무대회에 참가할 것이라고는 미처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호북성으로 행로를 잡았다는 것에 제갈명공은 검주를 설득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다 해 놓고 있었다. 최악의 상황에는 가맥만이라도 유지하기 위해 탈출하여 미래를 대비할 결사대까지 편성하고 있었다.
그렇게 비장한 제갈세가와는 달리 검주는 그들을 비웃듯 호광성 비무대회에 참석했다.
그것도 제갈세가가 비운 자리에 덜컥 검주 본인이 앉아 버린 것이다.
“우리는 안중에도 없단 말인가.”
제갈명공은 제정신을 차리고는 허탈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호북성 융중을 바로 코앞에 두고 개봉에 주저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제갈세가가 검주에게 있어 큰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언제든지 가더라도 제갈세가 따위는 멸문시켜 버릴 수 있다는 천하제일인의 자존심이랄까.
문제는 그것이 불쾌하게 느껴져야 하는데, 제갈명공의 가슴 깊숙한 곳에서는 안도감이 차올랐다는 것이다.
더 시간을 벌었다는 안도감, 그리고 어쩌면 검주의 분노가 큰 희생 없이도 풀릴 것 같다는 안도감.
이건 오대세가의 일축을 담당하는 제갈세가가 아니라 완전한 패잔병의 심리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한 개의 그림자가 제갈세가의 가주전에 찾아들었다. 제갈명공이 뒤늦게 누군가 있음을 눈치채고 기관진식을 발동시키려는 순간 그림자가 크게 소리쳤다.
“사림곡의 곡주이자 독왕께서 보내셔서 왔습니다.”
“……독왕?”
독왕 중백약이 보낸 사신이 실의에 빠진 제갈세가를 찾아왔다.
*****
“천하제일인이 왔다면서?”
“진짜야 그 거짓말?”
“당연히 참말이지!”
“천하제일인이라니.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 출신도 아니고, 마교나 사림곡 출신도 아닌데 거짓말은!”
번탑 사냥터에 모여든 무림인들은 천하제일인의 등장에 다들 반신반의하는 표정을 지었다. 천하제일인이라 함은 가진 무공으로 무림의 정점에 이른 자라는 뜻이다.
자존심이라면 목숨까지도 거는 무림인들이 즐비한 강호에서는 절대로 쉬이 불려지지 않는 별호이기도 했다.
그런데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 출신도 아니고, 마교나 사림곡 출신도 아닌 무림십좌의 말석인 검주가 천하제일인이 되었다?
“그거 모르는가? 맨 처음에 천하제일검이라는 말이 어디서 나온지? 마교에서 나왔어 이 사람아.”
“마교?”
“그래! 마교의 전 교주인 혈세천마와 곡왕, 마존이 검주 하나 잡겠다고 일본국으로 넘어가 함정 파 놓고 있다가 검주에게 싸그리 쓸려 나갔으니까 마교 놈들이 벌벌 떨면서 그리 부른 것이지.”
“그랬다고?”
마교의 무인들은 모든 무림인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나 그들의 강함까지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강자존(强者存)만 추구하는 마교에서 만우를 천하제일검이라 부른다는 것은 혈세천마의 죽음이 사실임을 인정하는 셈이다.
실제로 최근에 마교에서는 혈세천마의 아들이 새로운 교주로 추대가 되었다고 하였으니 말이다.
“실제로 보면 알겠지. 응?”
“하긴. 그러려고 온 것 아닌가.”
번탑 사냥터에 모인 이들 대부분은 새로이 천하제일인이 된 만우를 보기 위해 직접 이 자리까지 온 것이었다.
천하를 유람한 검주 만우에 대한 몇몇 이야기는 유명하였으나 실제로 그가 무림의 전면에서 이처럼 부각이 된 적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대부분이 뼛속까지 한족이었기에 동이족인 검주가 어느 정도길래 천하제일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는지를 확인하겠다는 심보도 없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맛있는 당과 팝니다!”
“간이의자 사세요!!!”
“개봉시에서 제일 인기 있는 기루의 자리 팝니다!”
오천 명이 넘는 무림인이 한 곳에 모이니 당연히 상인들도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번탑 사냥터가 사람들로 인해 간만에 북적이고 있는 와중에 허리가 잘려 반으로 두 동강이 난 번탑 부근에서 커다란 북 소리가 울려 퍼졌다.
둥-!!!!!
북소리는 곧 호광 비무대회가 열린다는 신호였기 때문에 무림인들이 빠르게 번탑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전대 황제에 의해 허리가 잘려 나가 그 위로 풍파가 스며든 흔적이 역력한 번탑이지만 워낙 웅장했던지라 반으로 잘렸음에도 사람을 압도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좌우로 이십 장이 넘는 정사각형의 비무대가 펼쳐져 있었다. 번탑 바로 아래에는 높은 단상이 세워져 있었고 그 위에 거대한 의자 네 개가 놓였다.
이번 호광 비무대회에 참가한 남궁세가, 소림사, 무당파의 자리가 하나씩이었다. 원래라면 나머지 하나도 제갈세가의 자리였을 테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검주 만우.
오천 명이나 되는 무림인들을 몰려들게 한 장본인인 천하제일인이 앉을 자리가 바로 그 자리였다.
“오오오오!”
만우는 아직 등장하지도 않았지만 사람들은 그것만 보고도 환호성을 내질렀다. 무공 하나에 목숨을 거는 무림인들에게 천하제일(天下第一)이란 별호는 그들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는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