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9. 무림의 태산북두 (1)
(369/400)
369. 무림의 태산북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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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9. 무림의 태산북두 (1)
2022.07.12.
만우와 사행단은 성대한 배웅을 받으며 석가장을 떠났다. 그리고는 방향을 호북성으로 잡았는데 만우는 자신의 위상이 달라졌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대협! 풍소세가의 풍인태라 하옵니다!”
“전하! 제녕 동평릉현의 현령을 맡고 있는…….”
“대협의 명성은 사해를 진동시키니, 어찌 와 보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소인의 작은 성의이니…….”
천하제일인이자 무림왕이 된 만우를 보기 위해 몰려든 무림인들부터 시작해 만우에게 뇌물을 주기 위해 바리바리 값비싼 물건들을 싸 가지고 온 관리들과 석가장처럼 만우의 이름 한 번 빌려 보겠다고 와서 굽실거리는 상인들까지.
호북성 융중으로 가는 길의 사행단은 마치 사람들을 흡수하는 듯했다.
“……빌어먹을.”
그러니 당연히 만우의 신경 역시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오는 족족 엉덩이를 뻥 차 버려서 내쫓고 있기는 하지만 쉴 새 없이 비슷한 놈들이 줄 지어 나타났기 때문이다.
“몇 놈의 모가지를 확 따 버리고 소문을 내버려?”
만우의 흰자가 희번덕거렸다. 그런 만우의 상태가 심히 좋지 않음을 눈치챈 설미수가 만우의 소맷자락을 덥석 붙잡았다.
“으, 은공. 조금만 참으시옵소서.”
“참으라굽쇼? 이걸요? 흐흐흐.”
만우의 손에 들리면 하찮은 젓가락도 천하명검이 된다. 그랬기에 설미수는 만우의 손에 들려 있던 젓가락과 숟가락부터 빼앗았다.
“전부 은공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빈객들이 아닙니까. 한데 은공께서 저들을 푸대접하신다면 은공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퍼질까 두렵습니다.”
“어차피 제 소문은 별로 좋은 게 없었는뎁쇼.”
천하제일인이니 무림왕이 됐다고 이제 바리바리 선물을 싸 들고 와서 눈치를 보는 꼴이라니. 무림십좌이던 시절만 해도 만우는 동이족이라 손가락질을 당하며 얼마나 모욕적인 일을 많이 당했던가.
물론 그 모욕을 준 이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만우가 손수 징벌을 하였지만 그래도 그 기분 나쁜 기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생생하게 되살아날 뿐.
“그, 그럼…….”
“됐습니다요, 나리. 괜히 소인을 말리려 하지 마시고 안에 들어가 계시지요.”
만우가 두 팔을 걷어붙이는 것을 보면서 설미수는 속으로 저들의 명복을 살포시 빌어 주었다. 그리고 그렇게 마차 밖에서 푸닥거리를 하는 요란한 소리가 들린 후에야 만우는 한층 밝아진 얼굴로 다시 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출발하자!”
“예, 예 대협.”
왠지 모르게 마부석에 앉은 슌스케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 같이 느껴졌다. 설미수는 굳이 창문 틈 사이로 바깥을 보지 않으려 애를 썼고 황보경과 불존이 끄는 마차가 다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마차는 한참을 달려 하남성 개봉에 도착했다. 개봉은 연경이나 남경에 뒤지지 않는 대도시 중 하나로 사는 인구만 무려 수십만에 달할 정도로 엄청난 크기를 자랑했다.
“벌써 개봉이라니.”
감령과 필두가 기가 질린 얼굴로 마차 위에서 혀를 내둘렀다. 이게 다 만우가 불존과 황보경을 쥐어짰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화경의 고수 둘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경공을 써 댄 이유는 만우가 더 이상의 날파리 같은 인간들이 들러붙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기 때문이다.
그런 날파리 같은 인간들이 들러붙고 나면 만우의 신경이 한층 더 예민해졌기 때문에 그 불똥을 피하고 싶었던 황보경과 불존은 밤낮으로 내달렸다.
화경의 고수가 경공으로 마차를 끌어 대는데 그 속도를 따라잡을 수 있는 날파리들이 없는 것은 당연했다.
“한양에서 동래의 두 배 거리인데.”
“고생이구만. 대장한테 걸려서.”
필두가 불쌍하다는 표정을 지은 반면 감령은 쌤통이라는 듯 낄낄댔다. 그런 둘을 황보경이 고개를 돌려 노려보았지만 감령은 오히려 눈을 부라렸다.
“뭘 봐!”
“너 이…….”
으득!
황보경이 뭐라고 하려는 찰나 마부석의 문이 덜컹하고 열렸다. 그리고는 그곳으로 만우의 찌푸려진 얼굴이 불쑥 튀어나왔다.
움찔.
이제 그런 만우의 모습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위축되는 것은 거의 생리적인 현상 수준이 되었다.
“뭐야? 왜 시끄러워?”
“아닙니다, 대협. 아미타불.”
그래도 이해하는 것은 같은 처지인 불존밖에 없다고 대신 나서서 온화하게 합장을 했다. 하지만 원래 불존은 소림승 중에서도 오만한 편에 속해 있었기에 그를 원래 아는 사람이 봤다면 놀랐을 것이다.
불심을 수십 년간 수행한 고승처럼 저런 인자한 표정의 불존을 본 적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야. 들어갈 때 조용히 들어가라. 응?”
개봉은 수십만 명이 사는 커다란 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들어가는데 검문과 검색이 심할 수밖에 없었다.
워낙 수가 많아 어떤 이들이 오고 나가는지 검문검색이 철저했기 때문이다.
“돈 댓 냥 쥐어 주면 그냥 들어갈 수 있습니다 대장.”
“들었지?”
하지만 반대로 검문검색하는 데 시간이 하루 종일 걸릴 정도로 드나드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그냥 무사통과할 수 있는 개구멍 역시 크다는 소리다.
검문검색을 하는 병사들 역시 사람이기에 하다 보면 피곤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피곤하던 찰나에 주머니에 녹봉 외에 몇 푼이라도 더 들어오면 사람이란 것이 인심이 후해질 수밖에 없다.
그것을 산적질을 하며 살아왔던 감령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항상 경비가 삼엄하다고 소문난 곳일수록 그렇게 뒷주머니에 돈을 찔러 주는 방식이 잘 통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을 체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괜히 무림왕이니 뭐니 말 꺼냈다가는 알지?”
만우의 서늘한 눈빛에 황보경과 불존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보경은 만우가 다시 쏙 하고 얼굴을 집어넣고는 창문을 닫자 중얼거렸다.
“사람이 마차를 끄는 게 더 눈길을 잡아끄는 거 아닌가?”
사람의 시선을 받기 싫다면서 왜 자신들을 우마로 쓰는 것인지.
하지만 만우가 두려웠기에 황보경과 불존은 그 말을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황보경과 불존의 마음 수양이 한층 더 깊어졌다.
*****
검주가 개봉에 모습을 드러냈다.
천하제일인이자 황제에게 무림왕이라는 봉작까지 받아 강호무림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인 만우가 개봉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소식은 채 한 시진이 지나기도 전에 개봉을 넘어 인근의 또 다른 대도시인 남양까지 퍼졌다.
그리고 채 두 시진이 지나기도 전에 이 소식은 우한의 남궁세가에까지 도달했다.
“검주? 천하제일인? 무림왕?”
따분한 남경을 벗어나 뱃놀이도 즐기고 유람도 즐길 생각으로 바깥에 나왔던 주고후는 남경에서는 전혀 듣도 보도 못한 소문이 우한에 돌고 있자 흥미를 보였다.
“본왕이 강호무림에 대해서는 늘 흥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주고후는 좋게 말하면 호방하고 호탕한 성격이고 나쁘게 말하면 다혈질적인 성격이었다. 그런 성정 때문인지 천자는 주고후에게 어릴 적부터 병기술과 체술을 가르쳤다.
천자 역시 험한 북방에서 늘 선봉에 서 군을 이끌었기에 일신상의 무력이 다른 장수들에 비해 꿇리지 않았지만 주고후의 재능은 그보다 한 수 위였다.
그러니 주고후가 선봉장이 되어 정변의 난을 승리로 이끈 것이다.
하지만 정국이 안정되고 혼란이 가라앉자 주고후는 가슴에 구멍이 난 것 같은 공허함을 느꼈다.
말을 타고 달리고 싶어도 그는 이제 천자의 차남이자 한왕이다. 거물이 된 주고후가 선봉에 설 수 있는 전장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모순적이게도 주고후는 자신의 무용으로 인해 천자의 총애를 받았으나 정작 그 전공으로 인해 한왕에 오르고 난 후에는 더 이상 전장에 서지 못하게 된 것이다.
투쟁하고 경쟁하는 것은 주고후에게 있어 삶의 원동력이다.
전장에서의 원동력을 잃었으니 주고후가 눈을 황좌를 위한 경쟁으로 돌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본왕에게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무존?”
“전하.”
그래서 주고후가 눈독을 들이기 시작한 것이 바로 강호무림이다. 중원 안의 또 다른 세계인 강호무림의 일면을 정변의 난을 통해 보았던 주고후는 그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적통을 가진 적장자인 주고치와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불리한 간각을 뒤집을 수 있는 변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내려진 육체의 한계를 무공으로 초월하는 무림인들이야말로 주고후가 생각하는 차이를 만들어 내는 변수에 손색이 없었다.
남경에서 무한까지는 거대한 강줄기인 장강(長江)이 흘렀다. 그 장강의 거대한 물줄기가 도도히 흐르는 곳에 남궁세가에서는 정자를 하나 지었고 그곳의 이름을 세검정이라 불렀다.
검을 씻는 정자.
검을 씻는다는 것에는 단순히 검을 닦는다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남궁세가의 무인들은 늘 혹독한 수련을 받았거나 지친 일이 있으면 이곳에 와서 검을 닦았다.
검에 담긴 자신의 마음이 씻겨 내려가길 바랐기 때문이다.
“전하께서 미천한 소생에게 이리 관심을 보여 주시는 데에는 감읍할 따름이나.”
무존(武尊) 남궁무는 무림십좌의 일인이자 남궁세가의 최고수이며 무림에서 알아주는 검의 달인이다. 남궁무의 창궁무애검법은 남궁이 그렸던 창천을 그렸다.
남궁세가의 미래를 책임져야 할 후기지수인 남궁태의 창천검이란 별호는 원래 남궁무가 후기지수인 시절에 쓰던 별호였다.
“소생은 정치에 뜻이 없나이다.”
“이 사람 참. 본왕이 궁금한 것은 그저 강호무림에 관한 것이오.”
주고후는 남궁무를 보면서 슬쩍 웃었다. 그가 무존을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무존의 성정 때문이다. 그는 맞는 것은 맞는 것이고 아닌 것은 아닌 것이었다. 그 명확함이 주고후는 좋았다.
반면 한왕이 되어 남경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자 주고후를 보겠다면서 찾아온 먹물 냄새나는 글쟁이들은 이리저리 꼬아 말하는 것을 좋아했다.
천성 자체가 호방하고 솔직한 주고후와 조정 대신들은 별로 궁합이 맞지 않았다.
“아무리 전하시라도 강호무림에 발을 담그시는 순간,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으실 것이옵니다. 허니 관심을 두시지도 마시옵소서.”
남궁무는 용정차가 담긴 찻잔을 기울여 입에 찻물을 머금었다. 남궁무와 주고후의 인연은 무림의 은원이 그렇듯 우연하게 맺어졌다.
정변의 난 때 남궁세가의 검으로 난에 참여하였던 무존이 주고후의 목숨을 구해 주었던 것이 이리 인연이 된 것이다.
“허나 무존은 궁금하지도 않으시오?”
주고후는 남궁무가 검객이라고 해서 칼잡이라고 무시하지 않았다. 그는 전장에 서 왔기 때문에 남을 죽인다는 행위 자체가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을 위해 평생을 검을 쥐고 연마하는 무림인들이 주고후의 눈에는 골방에 틀어박혀 글만 읽어 대는 조정의 대신들보다 백배는 더 대단하고 나은 사람들이었다.
주고후는 무림인들을 동경하고 있었다.
“천하제일인이란 소리가 들리는 이외다. 심지어 아바마마께서 그 자에게 무림왕이라 봉작까지 하셨다지?”
주고후는 큭큭 소리를 내며 웃었다. 왕위를 내린다는 것은 그것이 이름뿐이라도 한다 해도 천자에게도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은 일이다.
한데 제 핏줄도 아닌 생판 남, 거기에 동이족이기까지 한 검주란 자에게 무림왕이란 왕위를 하사했다?
“아바마마의 마음에 들었거나 아바마마가 감당하지 못할 사내란 말이외다. 그 검주라는 자는.”
주고후는 턱을 쓰다듬었다. 수염이 손끝에서 까칠하게 만져졌다.
“저번에 무림에는 이런 말이 있다 무존이 알려 주지 않았소. 강호는 넓고 고수는 모래알처럼 많으니 기인이사 역시 많다고.”
“예, 전하.”
무존의 표정은 덤덤했다. 하지만 주고후는 무존과 검주 사이의 비화를 알고 있었다. 강호무림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그 안의 비사 역시 들어 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기 먼 남쪽에서는 천하제일검이라 불린다하오. 그 검주라는 자.”
“…….”
남궁세가의 독문병기는 바로 검이다. 검가(劍家)라 하면 전통적인 강호인 무당이나 화산에 결코 부족하지 않는 곳이 바로 남궁세가다.
한데 천하제일검이란 별호가 무당이나 화산, 심지어 남궁도 아니고 동이족 오랑캐 출신의 무림인에게 갔다?
그것 자체가 검가의 입장에서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거기에 무존은 그 천하제일검이란 소리가 어디서 나온 것인지 알고 있었다.
천마신교.
그 콧대 높은 마교 놈들이 검주를 천하제일검이라 불렀다는 것을 무존이 모를 리 없다.
“검주란 자가 무림을 유람하던 시절 한 번 본 적이 있으시오?”
결국 주고후가 묻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 말이었다. 무존이 찻잔을 내려놓고는 눈을 들어서는 주고후를 빤히 쳐다봤다.
“무엇이 알고 싶으신 겁니까, 전하.”
“무엇이긴.”
주고후는 뒤로 비스듬히 눕듯이 제 팔에 몸을 기대면서 씩 웃어 보였다.
“누가 이겼소?”
“…….”
주고후의 질문에 무존의 눈이 과거를 더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