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8. 무림왕이 나가신다 (4) (368/400)


368. 무림왕이 나가신다 (4)
2022.07.09.



“가라.”

“…….”

만우는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석미도의 시선에 피식 웃었다.


“장주에게는 이리 말하라. 과욕을 부리지 말라고.”

“전하.”

석미도는 속이 훤히 비쳐 보이는 하늘거리는 장삼을 입고 있었다. 그것이 큰 키를 가진 석미도와 잘 어우러져 마치 화폭에 나오는 선녀를 보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런 석미도에게 마음이 동하기에는 만우의 심장이 강철로 만들어져 있었다.

애심검.

만우 자신의 진심을 쏟아 만들어 방매에게 건네주었지만 그 검은 만우의 가슴 속에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러니 제 아무리 절색의 석미도가 유혹적으로 나온다고 해도 만우의 마음은 고요하기만 했다. 만우의 심검을 뚫을 수 있는 것은 그를 뛰어넘는 고수가 휘두르는 심검밖에는 없었으니까.


“석가장의 황금으로 이 세상을 살 수 있을지는 모르나 한 길 사람 마음속은 모르는 일이 아니더냐.”

만우는 석가장의 발칙한 작전에 분노하지 않았다. 석미도는 그런 만우 앞에서 볼을 붉혔다.


“너 역시 더 나은 짝을 만나…….”

“장주께서 시켜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전하.”

석미도가 한 발자국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러자 아찔한 석미도의 다리가 달빛 아래 고스란히 드러났다. 하지만 만우의 눈에는 파문조차 일지 않았다.


“소녀가, 소녀가 원하여 이리 나온 것이옵니다.”

원래 석소군은 만우를 석가장의 황금으로 품으려고 했었다. 하지만 만우가 천자로부터 왕작에 봉해진 후에는 그를 품으려는 것을 포기했다.

석소군의 철칙 중에는 모름지기 상인이란 정치와 가까워야 하면서도 멀어야 한다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치에 뛰어든 칼잡이가 요절을 면치 못 하듯, 그것은 황금을 손에 쥔 상인 역시 마찬가지다.

만우가 이름뿐인 왕작을 하사받았다고는 하나 그것을 품는다는 것은 곧 그로 인해 벌어질 수많은 소란과 혼란까지 끌어안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석소군은 만우의 위세만을 빌리고자 하였다.

검주와 석가장이 긴밀한 관계라는 것, 그것만 강호에 보여 주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니 석미도의 말처럼 그녀가 원하여 이 자리에 온 것이 맞았다.


“소녀는 석가장을 천하제일세가로 만들고자 하옵니다.”

석미도는 만우에게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섰다. 석미도의 입에서 나는 복숭아 향이 만우의 코에까지 느껴질 정도로 둘의 사이가 가까워졌다.


“하니 소녀는 전하가 필요하옵니다. 전하께서는 소녀를 취하셔서 부디 소녀의 소원을 들어주시옵소서.”

석미도는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는 반투명한 나삼의 옷고름에 손가락을 걸쳤다. 그 손가락을 조금만 움직여도 석미도의 아름다운 나신이 달빛 아래 드러날 것이다.


“거기까지.”

하지만 석미도는 더 이상 손가락을 움직일 수 없었다.


“가문을 위한 너의 그 정신은 갸륵하나.”

석미도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다는 듯이 두 눈을 크게 떴다. 만우가 지풍을 날려 석미도의 마혈을 가볍게 누른 것이다.

둥실!

거기에 그 상태로 석미도의 몸이 허공으로 둥실 하고 떠올랐다. 절정의 허공섭물이었다. 석미도가 만우에게서 저절로 바람에 밀린 것처럼 부드럽게 뒤로 밀렸다.


“본주를 이용하려 드는 것에 대한 용서는 이번 한 번뿐이다.”

석미도는 만우의 두 눈에 그 어떠한 동요도 떠올라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는 분함에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여인으로서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만우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수치까지 느껴질 법했다. 허나 석미도는 금세 자신의 감정을 가라앉혔다.

저 사람은 그냥 보통 남자가 아니다.

천하제일인.

천하에서 가장 강한 남자가 바로 눈앞의 남자인 것이다. 석미도는 어느새 마혈이 풀려 몸이 움직여지자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본주를 이용하려 했던 황보가 어찌 되었는지를 떠올려라. 또한 본주에게는…….”

말끝을 잠시 흐렸던 만우가 두 눈에 별빛을 띠우면서 석미도에게 말했다.


“이미 본주의 마음을 준 여인이 있으니.”

 

 

*****

만우가 마음을 준 여인, 방매는 골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마, 마음에 안 드십니까, 소저?”

방매의 잔뜩 찌푸려진 표정에 황보세가에서 나온 숙수인 황보택은 굵은 땀을 뻘뻘 흘렸다. 그도 그럴 것이 황보세가의 방계로 태어나 무공 대신 요리라는 길을 택한 황보택은 황보세가에서도 숙수 노릇을 주로 하던 사람이다.

그나마 황룡객잔이 생겨나면서 그곳의 음식들을 도맡아 하면서 대우가 조금 나아졌지만, 무림인들이 다수인 황보세가에서 그는 언제나 비주류에 속한 사람이었다.


‘가주님께서 그렇게 두려워하시는 모습은 본 적이 없어.’

그런 황보택에게 가주인 황보천은 하늘 위의 하늘이다.

황보세가에서 그 이상의 영향력을 가진 사람을 황보택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 황보천이 황보택에게 그리도 간곡하게 부탁을 하는 모습은 평생에 상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네가 우리 세가를 구해야 한다!]

촌수로 따지면 황보천과 홍보택은 사촌지간 정도 된다. 하지만 직계와 방계의 차이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황보택은 한 번도 황보천을 자신의 사촌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택아. 내 사촌동생아! 너만 믿는다! 그곳에 가거든.]

황보세가에서 소유하고 있던 황룡객잔이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갔다는 것도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얼마 전 황보천을 비롯한 황보세가의 무인들이 기세등등하게 출정했다가 패잔병이 되어 돌아왔다는 것은 황보택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황보택에게 황룡객잔의, 아니 이제는 발우수리 객잔이 된 그곳으로 파견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그것도 심지어 가주령이다.

대명의 모든 관리들에게 천자의 칙서라면 죽으라고 해도 죽어야 하는 것처럼, 황보세가의 식솔들에게 가주령 역시 마찬가지다.

꼬옥.

황보천은 황보택의 거친 손을 꼬옥 감싸면서 그에게 간곡히 말했다.


[가거들랑 절대로, 절대로 그곳 주인의 눈 밖에 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경이가 살고 내가 살고 황보세가가 산다. 부탁한다, 택아.]

그때가 심지어 황보택은 가주인 황보천을 처음으로 독대한 날이었다. 그래서 황보택은 두려움 반, 설렘 반으로 발우수리 객잔에 도착했다.


‘여긴…….’

그렇게 발우수리 객잔에 도착한 황보택은 한 번 더 놀랐다. 객잔 안에서 점소이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 무려 황실의 숨은 권력자인 환관들이었기 때문이다.

스스슥!!

샤샤샤샥!

황보택은 입을 쩍 하고 벌렸다. 물론 황룡객잔에서도 점소이들을 세가의 방계들 중 무공이 떨어지는 이들로 이용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들 중 그 누구도 저 환관들처럼 저리 미끄러지듯 소리도 거의 내지 않고 다니는 이들은 없었다.

황실에서 천자를 위해 황실을 미끄러져 다니던 환관들이 발우수리 객잔의 점소이가 되어 이곳저곳을 청소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그렇게 범상치 않은 첫 인상을 받은 황보택은 발우수리 객잔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다는 이를 보고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여인.

그것도 이제 갓 스물이 넘었을까 싶은 어린 여인이 이 객잔의 주인이라며 황보택을 맞이하였기 때문이다.


“누가 오셨니?”

“언니, 숙수님이 오셨어요.”

“정말?”

그리고 이 객잔의 주인이 언니라 부르는 여인이 나오는 순간 황보택은 헤 하고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호선.

하얀 장삼을 나풀거리며 나른한 표정을 지은 호선이 황보택을 보고 반가운 표정을 짓자 황보택은 한 눈에 호선에게 반해 버린 것이다.


“잘 부탁드려요.”

“저, 저 역시…… 예, 잘 부탁을…….”

황보택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하지만 방매는 짝 하고 박수를 치며 황보택에게 말했다.


“일단 요리 솜씨부터 볼게요. 괜찮으시죠?”

그런 방매의 뒤에서 방긋거리며 웃는 호선을 본 황보택이 콧구멍을 크게 벌름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가주가 시켜서 온 발우수리 객잔이지만 이제 황보택에게는 이곳에 있어야만 할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황보택은 가진 바 모든 능력을 동원하여 방매와 호선 앞에 음식을 대령했다. 황실 숙수에게서 직접 배워 온 황보택의 화려한 요리 기술이 발휘된 것이다.

하지만 황보택의 예상과는 달리 객잔주의 표정이 별로 밝지 않았다. 황보택은 자신도 모르게 초조해져서는 손톱을 물어뜯었다.


‘왜지? 어째서?’

황실 최고 숙수들만이 할 수 있는 만한전석까지는 아니지만 황보택은 요리에 재능이 있었다. 황보세가에는 황보택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많은 재능을 가진 이들이 꾸준히 배출되었고 황보택도 그중 하나다.

황보택이 황실 숙수로부터 음식을 배운 후 세가 주변 음식점들의 매출이 떨어졌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였다. 세가의 식솔들이 나가지 않고 세가 안에서 황보택이 해 주는 음식을 더 선호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자신의 음식을 먹은 방매의 표정이 좋지 않다니.


‘이상은 없는데.’

새끼 돼지를 구워 만든 애저부터 시작해 화려하고 먹기 좋은 황실의 요리들과 각 지방에서 유명한 주루 등지에서 소문난 음식들을 재해석하여 황보택의 방법으로 풀어 낸 요리들까지.

황보택이 내놓은 요리들은 눈으로 보기에도, 코로 맡기에도, 입으로 먹기에도 사람을 즐겁게 만들어 주는 식(食)의 정수였다.


“너무 맛있어요.”

“……예?”

방매의 입에서 나온 말에 황보택은 결국에 순간적으로 머리가 핑 하고 돌았다. 그건 황보택이 걱정하던 꾸지람이 아니라 바로 칭찬이었기 때문이다.


“그, 그러면 된 것입니까?”

“아니, 너무 맛있어요. 그게 문제에요.”

“그게 무슨 소리야?”

호선도 황보택의 음식이 입에 맞았던 것인지 방매를 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황보택은 호선이 자신을 위하여 나서 주었다는 것에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이 요리들. 원가가 어떻게 되죠?”

“원가라 하시면…….”

“엄청 비싸죠?”

“싸, 싼 편은 아닙니다.”

황보택은 아직도 무엇이 문제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황룡객잔은 부자들을 위한 객잔이었다.

황보세가에 연을 대기 위해 상경하거나 연경을 거쳐 가는 고위 관료들, 무림맹이나 구파일방, 오대세가에서 연경에 들르는 무림인들이나 혹은 자미원 근방에서 머무는 황실 인원들을 대상으로 주로 영업을 하는 곳이었다.

그러니 가격이 비쌌다.

황보택이 내놓은 요리 중 하나만 해도 일반 평민으로서는 일 년에 한 번 먹을까 말까한 금액이다.

더군다나 그런 평민들은 아예 받지도 않았다.


“내가 원하는 곳은 많은 사람들이 오는 곳이에요. 많은 사람들이 거쳐 가면서 그 사람들이 무언가를 남기고, 그것으로 또 다른 사람들이 모여드는.”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그러한 객잔.

애당초 방매가 꿈꾸던 객주가 그런 모습이었다. 방매는 기본적으로 매분구고 보부상이다. 그녀가 매분구와 보부상이 된 이유는 많은 사람들을 거쳐 가면서 부모님에 대한 정보를 모으기 위함이었다.

그러니 방매가 꿈꾸는 객주 역시 그러했다.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면서 작은 정보가 쌓여 큰 흐름을 만들어 내는 것.

어찌 보면 하오문이나 개방과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었지만 객주는 주로 보부상이나 장물아비들처럼 정처 없이 천하를 떠돌아다니는 이들이었기 때문에 더 다양하고 넓은 폭의 정보가 모이는 곳이다.


“더 싸고 맛있는 음식. 그걸 개발해야 돼요.”

황보택은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황보택이 지금까지 요리를 시작한 이래 그러한 요리를 생각해 본 적도, 만들어 본 적도 없었다.

그에게 황보세가에서 요구한 것은 황실 요리에 버금가는 그런 고급 요리였지 소면이나 만두 같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실 수 있으시겠죠?”

방매가 그런 황보택에게 물었다. 황보택은 멈칫거렸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황보택이 걸어왔던 요리의 길이 아니라 다른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하실 수 있으실 거야. 이렇게 대단한 요리를 하셨는데. 그렇지요??”

그때 호선이 황보택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황보택은 그런 호선의 시선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해, 해 보겠습니다.”

“진짜요?”

방매도 황보택의 요리 솜씨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황보택이 해 보겠다고 하자 방매가 의욕 넘치는 표정으로 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면 뭐 해요. 앉아 있지 말고 시장조사 하러 나갑시다. 시장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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