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6. 무림왕이 나가신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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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6. 무림왕이 나가신다 (2)
2022.07.02.
“받아.”
방매는 뚱한 표정으로 만우가 내미는 것을 쳐다보았다. 만우는 손에 든 천으로 둘러싼 투박한 검을 내밀었다.
“웬 검?”
방매는 뚱한 표정을 지었으면서도 만우가 주는 것이라 하니 냉큼 받아들었다. 그런 방매의 모습에 만우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내 검이니까. 올 때까지 잘 가지고 있어.”
“……오긴 온다는 거지?”
“그럼. 그냥 너 놓고 혼자 돌아갈까?”
방매가 의외의 걱정을 하고 있었다는 것에 만우는 피식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방매는 그런 만우를 흘겨보았다.
“조선에서는 몰랐는데, 여기 오니까 그럴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으니까.”
“안 그래.”
여자의 육감이 때로는 화경의 고수조차 화들짝 놀라게 할 정도란 식의 농을 풍문으로 들어본 적은 있는 만우다. 하지만 방매에게는 그런 여자의 육감 같은 것이 하나도 없는 모양이었다.
“내 꿈은 조선으로 돌아가 평범하게 사는 거거든. 중원이나 무림처럼 복잡하고 시끄러운 곳이 아니라.”
온갖 은원 관계로 인해 바람 잘 날이 단 하루도 없는 곳이 바로 강호다. 지난 오년 간 그 강호를 유랑한 만우에게는 평화와 휴식이 간절했다.
문제는 조선에서도 평화와 휴식을 그리 즐기지만은 못 했다는 것이지만.
“객주가 되어 여객을 운영해 보고 싶어 했잖아. 여객이나 객잔이나 이름만 다르지 똑같으니까 경험 쌓는다고 생각해.”
“그럼…… 도와줄 거야?”
방매가 용기를 내서는 만우에게 말했다. 만우는 뒷머리를 벅벅 긁고는 괜히 퉁명스럽게 말했다.
“네가 하는 거 보고.”
“야. 넌 싸우는 것만 잘하지 그것 말고 다른 건 젬병이거든?”
방매가 발끈했다. 만우는 그런 방매를 보고 피식 웃고는 돌아섰다.
“그럼 간다.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까 많이 배워 둬. 어려운 것 있으면 호선이나 형일이한테 말해서 같이 풀어 나가고.”
“멋없기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방매는 만우가 준 검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 만우는 방매의 품에 안긴 자신의 애심검을 보고는 두 볼을 슬쩍 붉혔다.
‘미쳤지.’
주고 나니 후회가 물밀듯이 몰려들었다. 자신 앞에서 방매가 검에 새겨진 글귀를 확인하면 창피해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만우는 설미수와 동군영이 기다리는 곳으로 뛰어갔다.
“그 검, 나 간 다음에 한 번 뽑아 봐.”
“간 다음에? 지금은? 응?”
방매가 소리쳐 물었지만 만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만우는 기다리고 있던 설미수와 동군영에게 두 눈을 크게 치켜뜨고는 재촉했다.
“어서 갑시다요, 나리들.”
“만우, 방매랑은…… 으헉.”
“으, 은고오오옹…….”
만우는 허공섭물로 설미수와 동군영을 마차 안에 욱여넣었다. 그리고는 만우가 눈을 희번덕거리면서 뒤를 딱 하고 쳐다보자 척일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직접 발로 타겠네. 흘흘.”
“저도 그리하겠습니다, 은공.”
척일과 척사영은 사람을 허공섭물로 들어 마차에 욱여넣는 만우를 보고서는 혀를 내둘렀다. 그렇게 척일과 척사영까지 올라탄 다음에는 감령, 필두가 지붕으로 올라탔고 슌스케가 마부석에 앉았다.
‘마부라니. 내가 마부라니.’
슌스케는 마부석에 앉은 자신의 변화에 두 눈을 감고는 감격에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이제 더 이상 자신은 우마(牛馬) 따위가 아니었다.
그래 봤자 마부이지만 그래도 짐승인 것과 사람인 것은 자존감에서 아주 큰 차이가 난다.
“가자!!!!”
슌스케가 소리를 치자 말이 서 있어야 할 자리에 마구를 멘 채로 멍하니 서 있던 황보경과 불존이 슌스케를 돌아봤다.
그러나 슌스케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그들이 화경의 고수이고, 슌스케보다 윗줄의 고수란 것은 세상 쓸모없는 것이 돼 버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우.
만우 앞에 모든 만민은 평등했다.
“가자고!”
슌스케가 이제는 왜어보다 익숙해진 조선말로 황보경과 불존에게 소리쳤다. 황보경과 불존은 자신들의 처지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북진무사 황보…….”
황보경이 결국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우물거리며 입술을 연 순간, 마부석으로 이어진 창문이 벌컥 하고 열리면서 누군가의 얼굴이 불쑥하고 튀어나왔다.
“뭐야! 왜 안 가! 빨리 가라니까!!!”
방매가 혹시라도 자신이 떠나기 전에 검신을 확인할까 두려워진 만우가 성난 눈으로 황보경과 불존을 노려봤다.
“그, 그것이…….”
“끄라차차차!”
“이요오오옵!”
슌스케가 말을 더듬는 찰나 황보경과 불존이 만우의 얼굴을 보고서는 우렁찬 기합을 내면서 공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슌스케는 그런 둘을 비난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떤 기분인지 다 안다는 듯, 마차를 매단 채 달려 나가는 그 둘을 안쓰러운 눈으로 지그시 쳐다보았을 뿐이다.
*****
방매는 황당한 눈으로 거의 빛의 속도로 멀어져 가는 마차의 뒤꽁무니를 쳐다봤다. 그리고는 이내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더니 자신이 품에 안고 있던 검을 들어올렸다.
“이게 뭐라고.”
벽을 깨기 위해 노력하는 화경의 고수에게는 그 어떠한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보물이 새겨진 검이다. 이걸 그냥 들어 보이는 것만으로도 보는 눈이 있는 무림 고수라면 절로 고개를 조아리며 사라질지도 모르는 고절한 무학이 담긴 검이다.
하지만 방매의 눈에는 그저 평범한 철검처럼 보였다.
“검을 빼 보라고 했지.”
방매는 만우가 말한 대로 검집에서 검을 빼들었다. 철검이라고는 하나 간장이 형님인 만우를 위해 노력을 들여 만든 것이기 때문에 서늘한 예기가 검집 사이로 훅 하고 새어 나왔다.
스르릉.
검집에서 검을 빼내자 방매의 얼굴이 훤히 비칠 정도로 맨들맨들한 검신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다 검신 위에 새겨진 글귀를 발견한 방매의 입꼬리가 슬금슬금 올라가기 시작했다.
애심(愛心).
방매는 그 우둘투둘한 음각 위를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바람 같은 만우의 기질을 그대로 담은 글씨체였지만 방매는 오히려 그게 더 마음에 들었다.
“날…… 날 좋아한대. 히히.”
방매가 검을 끌어안고는 행복하게 웃었다.
*****
“……뭘 그렇게 보십니까요.”
만우는 마차에 속도가 어느 정도 붙자 안도의 한숨을 내뱉다가 자신을 뭉근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설미수와 동군영의 시선을 느끼고는 슬쩍 물었다.
“험, 아닙니다, 은공.”
“그냥 궁…….”
“동구녕 나으리.”
만우가 오랜만에 동군영을 동구녕이라 불렀다. 심지어 만우는 동군영의 말을 도중에 끊기까지 했다. 만우는 살벌하게 웃으며 동군영을 지그시 쳐다봤다.
“생각해 보니 근래 들어 소인이 나으리를 모시는 데 소홀했던 것 같습니다요. 심지어 여기는 조선도 아니지 않습니까요. 언제 어디서 위험이 닥쳐올지도 모르는데…….”
만우의 시선이 흘낏하고 동군영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낡은 철검으로 향했다. 동군영이 흠칫하면서 만우의 시선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아이고 나리. 아무래도 검을 보관하는 방법부터 다시 가르쳐 드리겠습니다요.”
만우가 두 눈을 번뜩였다. 동군영은 그런 만우의 표정을 보고는 하고 싶었던 말을 꾹 눌러 담았다. 여기서 괜히 입을 열었다가 자신에게 좋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거기 두 분도.”
만우는 설미수와 동군영의 입막음을 한 데에 이어 척일과 척사영까지 쳐다봤다. 척일이 어깨를 움찔했다.
“하실 말씀이 있으신지요?”
“험…….”
척일은 만우의 시선을 받으니 괜스레 안 아프던 허리가 쑤셔오는 듯했다. 그런 척일이 비가 오려나, 하고 중얼거리며 보이지도 않는 창밖을 보는 척을 했다.
하지만 척사영은 아니다.
“전 할 말이 있습니다 은공.”
“…….”
만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정말로 굳이, 지금 이 시점에 할 이야기가 있냐는 눈빛으로 척사영을 쳐다봤다. 하지만 애당초 척사영은 그리 눈치가 뛰어난 편이 아니다.
게다가 만우는 척사영에게 빚이라면 빚이란 것이 있지 않았던가.
하늘재에서 척사영의 연심을 거절한 것은 다름 아닌 만우였다. 만우가 그에 별말을 하지 않자 척사영이 만우에게 말했다.
“마교란 곳에 가 보고 싶습니다.”
“…….”
“????”
척사영은 과연 눈치가 없었다. 척일이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자신의 손녀를 쳐다봤고 만우 역시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척사영은 무엇이 잘못 됐는지 하나도 눈치채지 못한 표정이었다. 만우는 순진한 척사영의 표정에 한숨을 작게 내쉬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여기서 십만대산까지는 엄청나게 멉니다요. 한양에서 동래까지 가는 것의 곱절에 곱절은 걸리는데…….”
“그때 투귀대의 대장이라는 자와 자웅을 겨루지 못하였습니다. 전 꼭 그자와 자웅을 겨루고 싶은데 방법이 없겠습니까?”
“음…….”
척사영의 호승심은 과연 대단했다. 거기에 그녀는 자신의 패배를 잊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그 투귀대의 대장이 새로운 천마신교의 교주라는 것이었다.
“정녕 사영이 너를 이긴 남자가 또 있다는 말이냐?”
그러나 척사영의 말에 가장 큰 관심을 드러낸 것은 다름 아닌 척일이었다. 척사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척일이 흥분한 듯 빠르게 말했다.
“어디 사는 누구더냐. 뉘 집 자제이고. 마교? 그런 집안이 중원에 있단 말이냐?”
태상가주로 가주직에서 물러난 척일의 죽기 전 숙원 중 하나는 곡산척가 역사상 최고의 천재인 척사영의 배필을 찾아 주는 것이다.
여인이 너무 뛰어나도 또 그에 맞는 배필을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기에 척일은 그게 늘 고민이었는데 눈앞의 검주 말고 손녀를 이긴 자가 또 있을 줄이야.
“역시 중원은 넓고 은거기인은 많다더니…….”
중원의 정세에 대해서 잘 모르는 척일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 천마신교의 교주를 은거기인 쯤으로 생각한 것이다.
끼익!
만우가 기가 막혀서 설명할 의욕도 잃은 사이 덜컹거리면서 마차가 멈춰 섰다. 아직 연경을 벗어나지도 않았기 때문에 만우가 인상을 쓰면서 고개를 딱 하고 내미려는 순간, 밖에서 반가워하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물쟁이!!”
“대채주님!”
“뭔 소리야?”
마부석의 창을 열고 밖을 내다본 만우의 눈에 감령이 웬 작달막한 행수 하나와 얼싸안고 좋아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런 행수의 수행원으로 보이는 듯한 이들은 전부 석(石)자가 크게 쓰인 옷을 입고 있었다.
석가장.
석가장에서 연경까지 만우와 사행단을 초빙하기 위한 사람들을 보낸 것이다.
*****
한왕 주고후(韓王)는 명나라를 다스리는 황제의 차남으로 일찍 타계한 인효문황후 서 씨의 소생이다.
몇 년 전 아버지인 연왕이 정난의 변을 일으키자 용감무쌍하게 선봉장으로 가담하여 큰 공을 세웠고 그로 인해 장자인 주고치보다도 더욱 총애를 받았다.
그 공을 인정받아 한왕(韓王)에 오른 주고후는 한 가지 야심을 품게 된다.
‘황제가 되고 싶다.’
아버지도 정난의 변을 일으켜 사남임에도 불구하고 황제가 되었는데, 자신이라고 왜 못 할쏘냐.
아버지인 황제는 그로 인해 정통성과 명분을 잃고 유가(儒家) 대신들과 격렬하게 대립하고 있었지만 그런 고생은 주고후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이 너른 중원을 다스리는 제왕이 되는 것.
어느 순간부터 그것만이 주고후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그는 점차 불순한 마음을 품게 된 것이다.
“후우!”
타앙-!
주고후는 손에 들려 있던 잔으로 거세게 탁자를 두드렸다. 그 바람에 미처 다 마시지 못한 술이 자신의 손등으로 쏟아졌지만 주고후는 눈썹 한 번 깜박이지 않았다.
스윽.
그런 주고후의 손등의 술을 주름진 손이 닦아 냈다. 주고후는 삐져나온 머리 한 올 없이 정갈하게 쪽진 머리를 한 중년의 여인을 풀린 눈으로 쳐다봤다.
“유모. 이런 내가 한심스러운가?”
“전하. 어찌 감히 소인이 그리 생각하겠나이까. 전하께서는 황제께서 가장 총애하는 한왕이 아니시옵니까.”
황제는 자신의 아들 중에 둘째인 한왕을 가장 총애했다. 그의 호탕한 성격과 두려움 없이 적에게 뛰어드는 배포가 황제를 똑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허나 황제는 그런 한왕 대신 첫째인 주고치를 태자로 봉했다.
황제가 원하는 것은 자신 같은 패왕이 아닌 나라를 안정시켜 평화롭게 만들 수 있도록 치세에 집중하는 성군(聖君)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주고후는 치세보다는 전쟁에 더 잘 어울렸으니 황제가 주고치를 태자로 봉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전하. 몸을 보중하시옵소서. 바람이 차고 너무 많이 드셨습니다.”
어머니인 서 씨는 일찍이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한왕은 그런 어머니로부터 많이 사랑을 받지는 못했다. 어머니인 서 씨는 둘째인 자신보다는 첫째를 더 아꼈기 때문이다.
그런 한왕을 옆에서 돌봤던 것이 바로 눈앞의 김 씨다.
“흐흐흐. 내 마음에 부는 바람이 더 차갑고 시리건만 누구를 탓할까.”
한왕이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나자 유모가 그를 부축하려 했다. 하지만 한왕은 유모에게 손바닥을 내밀어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
“그만 들어가 쉬게 유모. 나는…….”
한왕은 어스름한 밤에도 유등이 밝게 밝혀져 저 멀리 보이는 남경 저자의 불빛을 보면서 손을 흔들었다.
“내려가야겠으니.”
“전하…….”
유모 김 씨는 안타까운 목소리로 불렀으나 한왕은 듣지 않았다. 대신 한왕은 자신의 옆에 그새에 병풍처럼 늘어선 호위무사들과 함께 자신의 저택을 나설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