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 무림왕이 나가신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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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무림왕이 나가신다 (1)
2022.06.28.
“잘 관리하고 있어. 아마 달포쯤 걸릴 거야.”
호북성에 들렀다가 강소성 남경에 들린 후 산동반도까지 올라오는 데 최소한 그 정도 시간은 걸릴 것이다. 방매는 만우에게 말했다.
“내가 말아먹으면 어떻게 하려고 나한테 통째로 맡겨?”
“조선에서 여객 차려 놓고 장사할 거라면서.”
“그건 나중이고.”
“미리 연습한다고 생각해.”
만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발우수리 객잔이라고 이름까지 고쳐 현판을 매단 뒤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저런 우는 소리를 해 봤자 이미 늦었다.
“……치사한 놈.”
“뭐?”
“이 치사한 놈아! 같이 좀 있어 주고, 도와주고 그러고 가지!”
방매가 만우한테 빽 하고 소리를 지르고는 쿵쿵거리면서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만우는 황당하다는 눈으로 방매를 쳐다보았다.
“왜 저래?”
“대협. 방매 아우를 너무 기다리게 하지 마세요.”
“어?”
그런 만우에게 호선이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호선은 둘 사이의 미묘한 감정을 눈치채고 있었으나 일부러 끼어들지 않았다.
끼어드는 것도 그런 것이 벌써 저런 지 한참 됐기 때문이다.
그것도 호선만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초절정 오인방이나 동군영까지 모두 다 둘 사이의 미묘한 연모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단지 그 말을 꺼냈다가 감령이 정말 비 올 때 먼지 나도록 처맞는 것을 봤기 때문에 다들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뿐이다.
이어지지는 않고 자꾸만 헛도니 고구마를 우겨넣은 듯한 답답함이 느껴졌지만 어쩌겠는가.
맞는 것은 싫은 것을.
호선이 칼자루를 쥐고 나선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다. 그런 호선에게 주변에서 응원의 눈길이 쏟아졌다.
“여인을 기다리게 하는 남자는 매력이 없다고 해요.”
“음…….”
만우는 볼을 긁적였다. 사실 만우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러니 하늘재에서 척사영을 거절한 것이다. 단지 방매에게 직설적으로 고백을 못 하겠는 것뿐이다.
“거기에 방매가 가장 믿고 의지하는 것은 대협이에요. 그런데 대협이 연경 한복판에 혼자 두고 떠난다고 하니 많이 불안해하더이다.”
“…….”
사실 방매가 위험한 사행길에 오른 것은 온전히 그 사행단에 만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만우가 자신을 혼자 내버려 두고 간다니 주변에 간장이나 마익후, 문형일에 호선까지 있지만, 그래도 불안한 것이리라.
“그건 아는데…… 내가 뭐 여기 있을 수도 없고, 그 제갈세가 애들도 보고 음…….”
만우가 웬일로 횡설수설을 했다. 특히 무공에서 만우는 자신의 손으로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탈각자였으나 연애라는 것에 있어서 만우는 이제 막 목검을 쥔 수련자만도 못 하다.
“아잇 참. 그럼 증표라도 하나 주시고 가세요.”
호선이 답답하다는 듯 결국 만우에게 방법을 말해 주었다. 그 말에 만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증표?”
“다시 돌아오겠다는 증표. 설마 증표가 뭔지 모르시지는 않으시지요?”
호선은 만우를 빤히 쳐다봤다. 만우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뭔가 남사스러웠기 때문이다.
“그…… 연인도 아닌데 증표를 주고 간다는 게…… 조금…….”
만우가 말끝을 흐리자 호선은 두 눈을 크게 치켜떴다. 그런 호선의 박력에 만우가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호선은 귀신처럼 두 눈을 뜨면서 만우에게 말했다.
“그럼 무작정, 저 꽃다운 방매 아우가 대협을 기다리기만 하라고요? 여자의 마음은 갈대랍니다 대협.”
“어…….”
“대협이 천하제일인이니 뭐니 해도 좋은 남자가 먼저 되어야 하는 거예요. 만인에게 칭송을 받으면 뭐하겠어요. 정작 주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는다면요.”
“…….”
만우는 이게 그렇게 잘못한 일인가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그냥 지나갔던 사실 하나를 기억해 낸 만우가 호선을 쳐다봤다.
“다…… 아는 거야?‘
“하아…….”
무공에 있어서는 그 무재가 하늘에 닿았으면서 남녀관계에서 만우의 눈치는 거의 바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무공의 경지가 쭉쭉 나아가는 것에는 그리도 도전적이면서 여인과의 관계에서 만우는 답답할 정도로 엉덩이가 무거웠고 굼떴다.
“당연하지욧!!!!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욧!!!”
결국 호선이 폭발했다. 만우는 그런 호선을 보며 움찔하고는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서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았어. 가져다주면 되잖아. 가져다.”
“저한테 말고. 방매 아우에게 직접 전해 주세요.”
“어…… 어?”
만우가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 그러자 호선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만우에게 말했다.
“그럼 저보고 하라고요?”
호선이 다시 도끼눈을 장착하자 만우는 한숨을 내쉬면서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흡족한 표정을 지어 보인 호선이 어서 다녀오라면서 문 쪽을 쳐다보자 만우는 어기적거리며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근데 증표는 어떤 게…….”
“빨리 나가서 구해 오세요!!!!”
뭉그적거리던 만우가 흠칫하고는 객잔의 문을 열어젖혀 쌩하고 튀어 나갔다.
“하아…… 아이고 두야.”
그런 만우가 사라지자 호선은 역시 속세야말로 복잡하기 그지없다는 생각을 하며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
“무엇이 필요하시다구요?”
설미수는 자신의 앞에서 아이처럼 땅바닥을 쳐다보며 발끝으로 흙바닥을 휘적거리고 있는 만우를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그…… 증표란 걸 구해야 할 시간이 필요해서…….”
이제 남경으로 떠나기만 하면 되는데 만우가 한 시진 정도 뒤에 출발하자고 설미수에게 요청하고서는 물어볼 것이 있다면서 말한 내용은 설미수의 예상 범위를 아득하게 벗어났다.
“허, 허허허헛!”
설미수는 그런 만우를 멍하니 보다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설미수의 너털웃음에 만우의 볼이 살짝 붉어졌다.
제 아무리 만우라고 해도 이런 일에는 부끄럼을 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웃지 마십쇼, 나리.”
“하하하하, 알겠습니다. 은공.”
설미수는 웃음을 삼키면서 부드럽게 휘어진 눈으로 만우를 쳐다봤다. 신기하게도 만우가 고민하는 것을 털어놓자 만우를 뒤덮고 있던 껍질이 벗겨지면서 저 나이대의 만우가 제대로 보였다.
‘이립도 되지 않으셨으니까 그럴 만도 하지.’
물론 설미수는 이미 그 나이 때 혼인을 했었다. 그것도 그것보다 훨씬 더 어릴 때 조 씨 부인과 혼인을 한 것이다.
허나 그것은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나 조혼을 하는 풍습 때문에 연애는커녕 집안에서 점지한 조 씨 부인과 혼인을 한 것이지만 말이다.
허나 만우는 자신과 같은 사대부 집안의 자제도 아니고, 무엇보다도 바람 같은 사람이다. 거기에 자신의 은인이라는 것 때문에 그가 저런 고민도 할 줄 아는 청년이란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대개 증표라 하면 은공을 상징할 수 있을 물건을 뜻합니다. 증표를 받을 사람이 그것을 보고 은공을 떠올릴 수 있도록 말이지요.”
“끙…….”
만우는 어렵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설미수는 만우의 증표가 갈 사람이 바로 방매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만우에게 말했다.
“옹주 자가께서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기뻐하실 겁니다.”
“……진짜 다 알고 있었네.”
만우는 작게 중얼거렸다. 진짜로 주변 사람들이 만우와 방매 사이의 그 미묘한 감정을 다 눈치채고 있었다.
“은공께서는 옹주 자가께서 은공을 어찌 기억하시길 바라십니까?”
설미수가 건넨 질문에 만우는 두 눈을 감고서는 상념에 잠겼다.
*****
방매가 자신을 어떻게 기억하기를 바라느냐.
그 설미수의 질문에 만우는 장고를 거듭했지만 결국 답은 하나였다.
만우가 스스로 자신을 상징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단 하나뿐이었으니까.
우우웅!!!!
검(劍).
만우의 무릎 위에 놓인 검에 푸르스름한 공력이 덧씌워지더니 검신이 미세하게 진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만우는 눈을 반개한 채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놓은 검에 무섭도록 집중하기 시작했다.
카가가각!!!
그러자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끌과 정으로 검신에 음각을 새기듯 검신에 작은 홈이 파이기 시작하면서 철가루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검(劍)은 만우 그 자체이다.
만우의 모든 인생은 바로 이 검에서 시작해 검으로 끝난다. 검 한 자루만 손에 쥔다면 이 세상과 맞서 싸운다고 해도 하나 두려울 것이 없는 만우다.
그래서 만우는 검에 마음(心)을 담았다.
검은 만우의 분신이자 마음이고 인생이자 그 시작과 끝이다.
그런 검에 만우는 자신의 마음을 하나 더 담았다.
카가가각!!!
그런 만우의 마음이 검신에 새겨지기 시작했다. 무림의 그 어떠한 누구도 감히 따라할 엄두도 낼 수 없는 고절한 무학이 만우의 마음대로 움직여 검신 위에 글씨를 새기기 시작했다.
아마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이라면 이 검신 위에 새겨진 만우의 필적만 보고서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이이잉-!!!
검신이 미세하게 진동을 일으키는 소리와 파이는 소리가 조화를 이루면서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 진동과 소리가 합치되며 같은 진동과 같은 음폭으로 맞아떨어지는 순간, 만우는 검신 위에 음각된 글자의 끝을 찍었다.
애(愛).
우우웅!!!
만우가 자신의 진심을 검에 불어넣었고 그것에 혼(魂)이 깃드는 순간 자신의 경지가 진일보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자각하지 못했다.
만우는 그저 자신의 진심이 새겨진 검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깊은 감회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진심이라는 것.
그 누구에게도, 어떠한 방식으로도 지금까지 만우가 그 진심을 남들이 볼 수 있는 방법으로 꺼내든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그 진심을 검에 새기고 나니 복잡하던 머릿속은 평화를 되찾았고 무겁던 가슴 속의 돌덩이가 쑥 하고 빠져나가며 고요가 그 자리에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부르르!!
그리고 그 자리에 있었던 유일한 관객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는 자신이 손에 들고 있던 검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간장아.”
“형님.”
만우의 요청에 자신이 만든 검을 가지고 왔던 간장이다. 하지만 간장은 만우가 자신의 눈앞에서 마음과 혼을 검신에 불어넣어 새기는 것을 보고는 개안을 했다.
번쩍!
깨달음이 담긴 간장의 눈빛은 맑고 순수했다. 그가 얻은 것은 무학의 깨달음이 아니라 장인의 깨달음이다.
“다시 돌아오시면, 제 인생 최고의 역작을 내어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건강히 다녀오십시오.”
“그래. 이 검, 고맙다.”
만우는 간장에게 검을 들어 보이며 맑게 웃어 보였다. 고마움 외에는 다른 감정이 들어 있지 않은 티끌 없는 미소였다. 간장은 그런 만우의 미소에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저 역시 형님을 보고 느낀 바가 적지 않으니,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만우는 단단해진 듯한 간장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였다. 간장이 나가고 난 뒤 만우는 자신의 진심이 담긴 검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부르르!
그러자 마치 검은 살아서 만우의 손길에 반응을 하는 것처럼 부르르 떨렸다.
“애심검(愛心劍)이다, 네 이름.”
누군가를 사랑하고 연모하는 만우의 진심이 담긴 검, 애심검이 그렇게 탄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