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4. 호북성으로 (4)
(36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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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4. 호북성으로 (4)
2022.06.25.
“대, 대협?”
“멀쩡한 세가 문 닫게 만들어서 누굴 무림공적으로 만들려고?”
만우의 두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만우는 황보세가를 문 닫게 하는 것 따위에는 조금의 관심도 없었다. 어차피 남경에 갔다가 조선으로 돌아갈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만우가 황보세가를 봉문시켰다는 말이 돌아 봐라.
그러면 아마 정파들이 모여 무림첩을 돌려 만우를 무림공적으로 선포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무림공적으로 선포된 이들의 말로?
천마(天魔)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죽었다.
“그, 그것이 아니라, 그 정도로 간절하게 용서를 구한다는…….”
“너, 예전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만우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면서 황보천을 향해 손바닥을 들어올렸다. 안 그래도 예전에 황궁에서 만났을 때부터 혀를 놀리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황보경은 그런 만우를 보면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악, 악! 악! 대, 대협! 대혀어어업!”
발우수리 객잔에서 울려 퍼졌던 황보경의 비명소리와 비슷한 비명소리가 황보세가의 심장부에서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
“아미타불.”
무왕 천혜대사의 눈이 쉴 새 없이 잘게 떨렸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천혜대사와 비슷한 수준의 고수인 황보천이 엉망이 되어 끌려온 모습을 보면 누구나 다 그럴 것이다.
“맹주. 결론은?”
만우는 무림맹에 단신으로 밀고 들어와 맹주인 천혜대사의 앞에 황보천을 데려다 놓았다. 황보천은 제 입으로 모든 것을 천혜대사에게 하나도 빠짐없이 말했다.
“불존, 아니 진한 그 아이를 데려가셔서 어디에 쓰신다고 하셨습니까, 검주 시주.”
“뭐긴. 수레를 끌 사람이 없어서 그래. 사람이.”
만우는 귀찮다는 듯 손을 홰홰 내저었다. 그리고 그것은 평생 불도를 닦아 온 천혜대사의 평정심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히 무성의한 손짓이었지만, 천혜대사는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았다.
아니, 사실은 초인적인 인내심이 아니라 가까이 있는 주먹이 두려워서 참았다.
“충분하잖아 명분이야. 응? 오히려 이게 더 싸게 먹히는 거 아니야? 땡중 보내 주는 대신 무림맹에 대한 원한은 없는 것으로 해 주겠다니까.”
용접곡에서의 일전으로 인해 동창과 천안각의 제갈세가 무인들은 거의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
그 후유증으로 인해 현재 맹주의 군사 자리가 공석이었으나 만우는 뻔뻔하게 자신이 관대하다는 것을 천혜대사에게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와. 설마 그게 기억이 안 난다는 건 아니겠지? 옛말에 그런 말이 있더라고. 때린 놈은 발 뻗고 자도 맞은 놈은 못 잔다고. 그게 딱 나네. 나야.”
만우의 눈이 점점 더 세모꼴로 변했다. 그것을 보면서 천혜대사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여기서 몇 번 더 뻗대다가는 황보천에게 그러한 것처럼 자신에게도 매타작이 일어날 것을 말이다.
그렇다면 정말 무림맹은 끝장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무림맹주가 무림맹의 한복판에서 검주에게 개처럼 매타작을 당한다면 정파가 검주에게 패배한 셈이기 때문이다.
‘그건 안 된다.’
천혜대사의 맹주 임기는 거의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게 물러나야 할 맹주직에 그런 오욕을 심어 주고 물러날 수는 없었다.
“소승이 소림사에 인편으로 연락을 하여 질 좋은 명마를 드리겠습니다, 시주. 허니 제발.”
원래 수레는 사람이 끄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만우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기에 천혜대사는 간절하게 만우에게 매달렸다.
하지만 만우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람이 끄는 게 훨씬 더 빨라. 초절정 애한테 한 번 끌게 해 봤는데 괜찮더라고. 근데 화경이어봐. 더 승차감이 끝내 줄 거 아니야.”
“…….”
“저기 황보세가의 가주는 기꺼이 그 덩치를 내어 주기로 했다고. 덕분에 나한테 가르침도 한 수 받았고. 응?”
움찔.
만우가 쳐다보자 황보천의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가르침이 맞기는 했다. 두 번 다시 검주에게 개기면 안 된다는 교훈이 뼛속 깊이까지 새겨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참. 그리고 발우수리 객잔의 경비도. 알지?”
만우가 눈을 찡긋했다. 그런 만우의 행동에 천혜대사는 하늘이 노래지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눈앞의 이 천하제일인은 예의나 명예고 뭐고 그냥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다 얻어 내야만 성에 차는 그런 놈이었던 것이다.
“화, 황보세가에서도 하는 것입니까, 시주?”
천혜대사는 황보세가를 걸고 넘어졌다. 그러자 황보천이 도끼눈을 떴지만 만우가 쳐다보자 금세 순한 양처럼 눈꼬리가 쳐졌다.
“그럼. 발우수리 객잔을 원래 운영하던 게 황보세가잖아. 우리 황보 가주가 내 동료가 고생할까 봐 친히 사람을 보내 도와준다고 했다고. 맞지?”
“그렇습니다, 검주 대협.”
황보천은 아주 공손하게 만우에게 대답했다. 역시 무림인에게 있어 진정한 교육은 바로 주먹으로 하는 대화였다. 만우는 흡족하게 웃어 보이고는 천혜대사를 쳐다봤다.
“어때. 맹주도 막 이제 구미가 당기고 그러나?”
이건 숫제 칼만 안 들었지 강도가 따로 없었다. 문제는 눈앞의 강도가 칼을 들지 않은 맨손으로도 무림맹을 몰살시킬 수 있는 고수라는 것이다.
“……예, 시주. 시주의 뜻대로 따르도록 하지요.”
천혜대사도 결국은 만우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좋았어.”
만우가 히죽 웃으며 휙 하고 돌아섰다. 그런 만우의 뒤를 황보천과 황보경, 불존이 고개를 푹 수그리고는 따라 나갔다.
*****
황보경과 불존이라는 아주 쓸 만한 우마를 구한 만우는 콧노래를 부르며 발우수리 객잔으로 돌아갔다. 물론 돌아가기 직전에 황보천에게 약속을 이행할 것임을 다시 한번 확답을 받은 다음이었다.
“나리들.”
만우가 한 눈에 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황보경과 불존을 데리고 발우수리 객잔에 들어서자 설미수와 동군영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특히 동군영은 그 둘의 얼굴을 알아본 것인지 입을 떡 벌렸다.
“저, 저 분들은!”
“저 분은 무슨. 우리 죽이겠다고 온 덩치랑 땡중인데.”
만우는 화경의 고수인 황보경과 불존을 거침없이 덩치와 땡중이라 부르며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황보경과 불존은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지금 그들에게는 만우가 곧 사신이었기 때문이다.
“저기 남경까지 우리가 타고 갈 수레를 끌 겁니다. 이 둘이 잘못을 뉘우치기 위해 스스로 자원을 했습니다요. 맞지?”
만우가 불존과 황보경을 보면서 눈을 부라렸다. 그러자 그 둘이 시커멓게 죽은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아미타불.”
그런 불존과 황보경을 보면서 초절정 오인방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슌스케가 가장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그 둘을 쳐다봤다.
‘뒤끝이다.’
조선에서는 경공을 사용할 수 없는 방매나 동군영이 동행을 하였기에 겸사겸사 슌스케를 우마 대용으로 쓰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은 굳이 수레를 타고 갈 필요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우가 저 둘을 우마로 쓰겠다고 한 것은 누가 봐도 뒤끝이었다.
천하제일인의 뒤끝.
부르르.
슌스케는 만약 자신에게 그런 일이 다시 한번 더 일어난다면 그냥 제 손으로 자진을 하는 것이 그 고통과 수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라고 생각하며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저…… 둘이 수레를 끈다고?”
“아, 이번에는 수레가 아니라 마찹니다요. 마차.”
황실에서는 만우와 조선 사행단이 한시라도 빨리 연경에서 떠나게 하기 위해 아낌없이 지원해 주었다. 그중에는 승차감이 아주 좋은 팔두마차도 껴 있었다.
팔두마차라는 것은 마차가 말 여덟 마리가 끌어야 할 만큼 무겁고 크다는 뜻이다. 그 정도 팔두마차라면 황제로부터 친히 왕작을 하사받은 이들만이 타고 다닐 수 있는 마차 크기였다.
무림왕인 만우 역시 그 마차를 탈 자격이 충분했다.
퉁퉁.
“자. 이걸 너희 둘이 끌면 된다.”
만우는 바깥으로 나가 팔두마차를 퉁퉁 두드리면서 불존과 황보경에게 말했다. 그것을 본 둘의 표정이 거뭇하게 변했다.
딱 봐도 만만치 않은 무게와 크기의 마차였기 때문이다.
“아참. 그리고.”
하지만 거기서 만우가 끝날 리 없었다. 만우는 불존과 황보경에게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했다.
“난 자다가 깨는 것을 아주 싫어하거든. 그러니까 웬만하면 조심히 몰아야 할 거야. 안 흔들리게.”
“…….”
이번에는 불존과 황보경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앞으로의 고생길이 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우는 일말의 자비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느린 것도 싫어해.”
이동속도가 빨라야 하는데 자는 사람이 깨지 않을 정도로 흔들림도 없어야 한다?
그 말인즉슨 불존과 황보경 보고 죽으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그들이 슌스케보다 나은 점이라면 이번 징벌에는 끝이 명확하게 있다는 것이다. 그때 만우는 그 둘이 입고 있는 옷을 보더니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혀를 한 번 쯧 차고는 감령과 필두를 쳐다봤다.
“덩치랑 땡중, 마차 끌기에 편한 옷 좀 사 와라. 지금 옷은 너무 사치스러운데.”
“예, 대장님.”
감령과 필두가 황보경과 불존의 눈을 쳐다보지 않으려 애를 쓰면서 곧바로 튀어 나갔다. 그 둘이 너무나도 불쌍했기 때문이다.
화경의 고수.
심지어 불존은 무림십좌의 일인이다.
그런 양반이 하필이면 걸려도 만우에게 제대로 걸려서 앞으로의 고생길이 훤했으니, 지금만큼은 정파니 사파니를 떠나서 같은 무림으로서 동정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대장 눈 밖에 나지 말자.’
‘죽어도 대장 옆에 붙어 있는다.’
새삼스레 만우의 무시무시함을 깨달은 감령과 필두가 만우에 대한 충성심을 불태우면서 대로를 내달렸다.
*****
호북성 융중에 자리한 제갈세가.
그곳의 초라한 초가집에서 제갈세가의 시조인 충무후(忠武侯) 제갈공명이 촉황제 유비를 세 번이나 찾아오게 하였다는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어원이 시작됐다.
그 이후 제갈공명의 후손들은 삼국을 통일한 사마 씨의 진나라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비상함과 총명함으로 생존하여 그 기틀을 다졌다.
그러나 그 이후 사실상 조정으로 출사하는 길은 거의 막힌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제갈세가가 선택한 것은 바로 강호무림으로의 전향이었다.
그들의 선조가 거대한 중원을 놓고 천하삼분을 논하였다면, 제갈세가는 뇌까지 근육으로 들어찬 무림인들의 사이에서 총명하고 비상한 머리로 검(劍)이 아닌 붓의 힘으로 기틀을 다졌다.
강호무림의 세계는 중원과 함께 그 역사를 같이 해 왔다.
어떤 왕조가 들어서냐에 따라 견제나 박해의 정도만 달라졌을 뿐, 사람 스스로 수련을 하고 제 몸을 지키기 위한 무공(武功)이란 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 존재해 왔기 때문이다.
푸드덕!
어쨌거나 그 제갈세가는 명나라의 건국과 함께 무림맹의 일원으로 공신의 반열에 들어 최근 몇십 년 동안 크게 부흥했다.
융중의 작은 초가집으로 시작했던 제갈세가는 점점 더 그 크기와 영향력을 늘려 가면서 호북성의 최고 세가로 발돋움한 것이다.
그런 제갈세가의 가주전에 전서구가 날아들었다. 그 전서구의 다리에 묶인 편지를 풀어낸 제갈명공의 표정이 멈칫하더니 이내 딱딱하게 굳었다.
‘검주.’
용접곡에서의 실패를 책임지고 무림맹의 군사직에서 물러나 세가로 낙향을 한 제갈명공이다. 그런데 방금 무림맹에서 온 전서구에는 검주가 호북성으로 향할 것이라며 미리 경고를 해 왔다.
“…….”
그런 제갈명공의 머릿속에 용접곡의 참사가 스쳐 지나갔다. 그간 중원인들이 애써 무시하고 모른 채 해 왔던 검주의 검은 일말의 자비도, 동정심도 없었다.
검주의 검은 무참히 제갈세가 무인들의 몸을 갈랐다.
제갈세가가 자랑하던 기관진식은 그런 검주 앞에서 무참히 무너졌고, 제갈명공은 제갈세가의 가주임에도 세가의 수많은 무인들이 그리 헛되이 스러져 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숨을 크게 들이마시면 그들을 화장하는 내내 맡았던 타는 냄새가 아직도 코끝에서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한데 그런 검주가 제갈세가로 오고 있었다.
‘검주의 검 앞에 나의 모든 지모는 쓸모가 없었다.’
왜 여포를 상대했던 조맹덕의 기라성 같은 군사들이 한탄을 했는지 이해가 갔다. 압도적인 무력 앞에서는 아무리 뛰어난 책사라고 해도 머릿속에서 나오는 모든 책략들이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랬던 여포도 결국에는 조조의 앞에 무릎이 꿇렸다. 초패왕이라 불리던 항우 역시 결국은 유방에게 목이 잘렸다.
‘허나 그것은 고사(古事)이고 나라의 일이다.’
수천, 수만이 싸우는 나라와 나라 간의 전쟁이 아닌, 이건 몇몇 뛰어난 고수들에 의해 모든 것이 좌지우지되는 무림이라는 세계다.
만약 여포와 항우가 군주와 장군이 아니라 무림인이었다면?
무림에는 책략으로 여포와 항우를 쓰러뜨릴 수 있을 만큼의 무인들이 많은 것도 아니었고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늘 관부가 무림을 주시하고 있었다.
‘게다가 황제도 검주를 치는 것에는 실패했다는 뜻.’
애당초 무림맹을 움직이게 한 것은 황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경에 제 발로 들어간 검주가 두 발로 호북성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은 황제도 그런 검주를 다루는 데 실패했다는 뜻이다.
아니, 다루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제갈명공의 책략이 검주 앞에서 무소용이었듯 황제의 권력과 권위 역시 검주 앞에서는 무소용이었을 것이다.
“…….”
검주에 대한 복수심이 들끓었지만 자신은 제갈세가의 가주다.
그리고 그런 제갈세가로 천하제일인이 향하고 있었다. 그것도 제갈세가와 결코 좋은 관계라 할 수 없는 성질 더러운 천하제일인이 말이다.
제갈명공의 처세에 따라 향후 제갈세가의 운명이 달라지게 된다.
그 갈등의 기로에서 제갈명공은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죽어간 수많은 제갈세가 무인들의 원혼을 달래 주어야 할 것인지, 아니면 그 슬픔을 묻고 세가의 가주로서 판단을 내려야 할 것인지.
가늘게 떨리는 제갈공명의 눈썹이 그의 복잡한 심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