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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3. 호북성으로 (3) (363/400)


363. 호북성으로 (3)
2022.06.21.



“가주!”

팔객 중 일인인 섬객은 별호처럼 극쾌의 발도술을 자랑하는 절정 고수다. 그는 본래 산동에서 가장 유명한 도객 중 하나였는데 황보세가의 초청을 받아 황보세가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러면서 자신이 자청하여 총관 역할을 도맡았는데 번뜩이는 도법뿐 아니라 의외로 사람을 대하는 것도 능숙하여 초청한 무림명숙이 아니라 이제는 황보세가의 가신으로 인정을 받고 있었다.


“감히 대(大) 황보세가를 욕보인 자이온데 어찌하여.”

“우리는 패하였네.”

황보천은 입술을 잘끈 뜯으면서 섬객에게 말했다. 그 말을 하자 가슴 속에서 살점이 뭉텅이로 뜯겨져 나간 듯한 아픔이 느껴졌지만 그게 사실이다.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네.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황보천의 머릿속에 도저히 상상하기도 싫은 단어가 스쳐 지나갔다.

멸문(滅門).

천하제일검인 검주에 의해 황보세가가 그날로 역사를 다할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만 한다.

강자존(强者存)이며 약육강식(弱肉强食)인 강호의 법도에 제 주제를 알지 못하고 만용을 부렸다가 세가의 현판을 내려야 하는 일은 수시로 일어나는 법이다.

그 대상이 황보세가가 아니 될 것이란 법은 없다.


“가주! 아직 황보세가에는 저희 팔객과 기라성 같은 동량들이 많습니다!”

“허나!”

황보천은 섬객이 꽥꽥거리는 소리에 시끄럽다는 듯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그들 중 검주를 뛰어넘는 성취를 이룬 자, 없지. 기억하시게. 검주는 나 황보천을 이기기 전부터 무림십좌의 일인이었다는 것을.”

“…….”

섬객은 검주의 명성을 부러워하고 있었다. 변변치 않은 무공 하나 없고 문파나 세가 하나 없는 낭인 주제에 그 어린 나이에 무림십좌의 검주라는 소리를 듣는다는 것이 마뜩치 않은 것이다.

허나 그것은 추한 질투심에 불과했다.

황보천은 그런 섬객을 보면서 나머지 칠객들 역시 저와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라고 직감했다.

절정 고수인 팔객과 현경의 고수인 검주.

그 둘 사이에서 누군가를 선택해야 한다면 황보천은 단 1초의 고민도 없이 검주를 선택할 것이다.

황보세가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개안을 하시게. 질투와 시기를 넣어 두고 차가운 눈으로 검주를 보시게. 검주에게 나이란 그저 허상에 불과한 것이니.”

불과 이립도 되지 않은 나이로 천하제일의 반열에 올라선 검주다. 그럼 검주를 황보세가는 애초부터 넘어설 수 없었다. 황보천은 지금은 굴욕을 감내해야 될 때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직접 나가서 모실 것이네. 그러니 내 당부하건대.”

황보천은 아직도 꺼지지 않은 섬객의 두 눈 속의 이글거리는 불꽃을 보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참으시게. 그게 우리가 사는 유일한 길일세.”

황보천이 벌떡 일어나 바깥으로 나갔다.


 

*****



“검주 대협께서 자미원을 떠나 호북성으로 가신다 합니다.”

“호북성! 제갈세가로구나.”

석소군은 올 게 왔다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석미도를 향해 말했다.


“가는 길에 검주 대협을 석가장으로 모셔야 한다.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느냐?”

“이미 행수 하나를 보내 놓았습니다.”

행수를 보냈다는 석미도의 대답에 석소군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 아비의 표정에 석미도는 살포시 웃으며 대답했다.


“검주 대협의 일행 중에 역수교어(逆水鮫魚) 필두가 있는데, 수중이란 막내 행수가 필두란 자와 인연이 있다 합니다.”

“호오. 그래?”

역수교어 필두라면 장강수로를 주름 잡는 수적들의 왕이다. 그가 최근 몇 년 동안 자취를 감추었다는 풍문이 돌았었는데 사실은 검주 밑으로 들어갔던 모양이었다.


“수적이라. 장강의 수적들이 다시 기지개를 필 수도 있겠다는 말이로구나.”

“잘은 모르겠으나 대채주인 역수교어가 지난 몇 년 간 자리를 비우는 바람에 내분이 벌어지지 않았습니까.”

“쯧. 상행을 다니는 것이 더 힘들어졌어.”

석소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석가장의 장주였지만 상단의 고충에 항상 귀를 기울이고 신경을 썼다.

그중 하나가 지난 몇 년 사이에 부쩍 늘어난 산적과 수적들의 준동이었다.


“옥면산군(玉面山君) 감령 역시 검주 대협의 수하가 되었습니다.”

“녹림과 장강의 대채주들이 전부 공석이니 그 난리가 일어났을 터. 혹시.”

석소군이 눈을 가늘게 좁혀 뜨면서 석미도를 쳐다봤다.


“검주 대협의 수하들이라면 검주 대협의 휘하로 녹림칠십이채와 장강수로십팔채가 집결할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 그에 재편될 무림의 질서를 준비해 오거라.”

이럴 때 발휘되는 석소군의 육감은 그 정확도가 상상을 초월한다. 그런 석소군이 예측을 내놓은 것이라면 무림이 그러한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란 소리다.


“예, 장주님.”

“그렇다면 우리가 검주 대협께 드릴 선물이 하나 더 생기겠구나.”

석미도가 석소군의 말에 고개를 숙였다. 할 일이 잔뜩 늘어났지만 석미도는 우는 소리 한 번 늘어놓지 않았다.


“녹림과 장강의 현황이 적힌 정보를 준비해 놓겠습니다.”

 

*****



“어. 신수가 훤하네?”

“…….”

황보천은 만우가 흉흉한 기세를 뿜어내는 황보세가 무인 가운데서도 오연하게 팔짱을 끼고 서 있다가 자신을 보고 손을 흔드는 모습을 쳐다봤다.

그런 만우의 뒤에는 황보경이 죄인처럼 손목이 묶인 채로 끌려온 흔적이 역력했다.

아마 세가의 무인들이 저리 살기를 피워 내는 것도 황보경의 몰골 때문이리라.

질끈.

황보천은 막내동생인 황보경의 몰골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어찌나 호되게 얻어맞은 것인지 온 몸에 붉고 퍼런 멍이 들지 않은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형님 봤으면 인사해야지.”

“…….”

만우가 그런 황보경을 힐끗 쳐다보면서 말했다. 황보경은 정말 죽고 싶다는 얼굴로 만우의 뒤에 서 있었다. 만우에게 일방적으로 얻어맞은 것도 서러운데, 세가의 가솔들 앞에서 이러고 있으니 자존심이 바닥까지 떨어진 것이다.


“차라리 죽이시오.”

황보경이 그런 만우에게 애걸하듯 말했다. 이런 모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나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우는 그런 황보경에게 코웃음을 쳤다.


“본주에게 수작을 부리러 오는 건 네 마음대로지만, 가는 건 네 마음대로가 아니야. 본주의 마음인 것이지.”

“그래서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황보경 대신 황보천이 그런 만우에게 말했다. 만우가 굳이 황보경을 끌고 와서 저 모습을 자신에게 보여 준 것은 다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만우는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내가 조선에서 아주 쓸 만한 우마(牛馬)를 끌고 다녔었거든.”

슌스케가 들으면 피눈물을 흘릴 이야기였다. 함주에서 상왕을 노렸다가 상왕에게 한 쪽 팔을 잃고, 만우에게 사로잡혀 수레를 끌고 다녀야만 했었던 슌스케였기 때문이다.

그 슌스케가 이제는 사람대접을 받았으니, 새로운 우마가 필요했다.

그래서 만우는 새로운 우마를 선택했다.


“승자는 전리품을 획득할 권리가 있지. 아니 그런가?”

만우가 슬쩍 황보천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황보천은 그런 만우의 시선에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만우는 능히 홀로 이 황보세가를 멸문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저 말은, 전리품을 내놓든가 아니면 가문을 닫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뜻이었다.


“이노오오옴!!”

그런데 그때 섬객이 분기탱천한 목소리로 만우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화들짝 놀란 황보천이 섬객을 말리려 하였지만 한 발짝 늦었다.

만우에게 잔뜩 주눅이 들어 있던 터라 섬객을 말리는 것이 한 박자 늦은 것이다.

쉬익!!

캉!!

섬객의 허리춤에서 뿜어진 쾌속한 발도술이 만우의 손가락에 탕 하고 맞고서는 튕겨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섬객은 자신의 손아귀에서 느껴지는 반탄력에 두 눈을 크게 떴지만 오히려 사납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감히 대 황보세가를 욕보이려 들지 마라! 팔객!”

쉬시시식!!

황보천과 황보경이 검주에게 겁을 집어먹고 있다는 것은 검주가 그만큼의 능력이 있다는 뜻일 것이다.

허나 그렇다고 하여 그를 겪지 않은 자신과 칠객들까지 검주 앞에 무릎을 꿇을 필요는 없다.

약육강식의 세계라고는 하나 이곳은 대황보세가다.

장차 무림제일세가가 될 황보세가의 심장에서 검주가 달라는 대로 황보경을 내어 준다는 것은 황보세가의 의기 자체를 꺾어 버리는 일이다.

섬객의 호통소리에 칠객들이 전부 모습을 드러냈다. 다들 무림에 이름을 알린 명숙들로 황보세가의 은혜를 입거나 합당한 보수를 받고 황보세가를 수호하는 이들이다.


“자. 이건.”

하지만 만우는 섬객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미 첫 충돌에서 자신이 신경 쓸 만한 정도의 상대가 아니라고 직감한 것이다.

대신 만우는 얼굴이 허옇게 질린 황보천을 쳐다봤다.


“황보세가가 본주에게 반항하는 것이라 봐도 되는 것이겠지?”

덜덜덜.

황보천은 자신의 다리가 떨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은 만우의 주변을 포위한 황보세가의 무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팔객과 소수의 무인들만 빼고 황보세가의 모든 무인들이 나가 검주를 마주했었다. 그리고는 압도적으로 패배한 기억이 모두의 몸에 아직 선명했다.

그런 와중에 검주가 이를 드러내려 하고 있었으니, 황보경의 모습에 욱해 기세를 끌어올렸던 황보세가의 무인들도 절로 몸이 떨려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

“황보세가를 욕보이려 하지 말라!!!”

팔객들이 황보천의 입에서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허공을 격하고는 만우를 향해 일제히 달려들었다. 그러자 황보천이 다급히 손을 내저으며 소리쳤다.


“물러서라! 모두 물러서!!!”

팔객들은 전부 절정 고수들이다. 반면 황보세가의 가솔들은 대부분이 일류였기에 혹여라도 가솔들이 다칠까 황보천이 소리를 치자 만우를 포위하고 있던 황보세가의 무인들이 썰물처럼 뒤로 물러나 공간을 벌렸다.

쉬이이익!!

도와 검, 창과 비도, 장과 권이 매섭게 허공을 가르며 만우에게로 떨어져 내렸다. 무공을 모르는 자가 본다면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화려한 장관이었지만 만우에게는 아니었다.


“으하아암!”

최근 들어 황룡과 기린이라는 신수를 연달아 보았고, 만우 또한 새로운 경지로 개안을 하였기에 팔객의 전력을 다한 공격은 하품이 나올 정도로 따분했다.


“쓸데없이 화려하고 번잡하다.”

번쩍!!

만우의 한 마디와 함께 순간적으로 번쩍하는 빛이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팔객들의 눈이 커졌다.

푸스스스!!!

풍문이 전부 사실일 것이라 믿지 않았다. 아니, 믿을 수 없었다. 허나 황보천과 함께 나갔던 수백 황보세가 무인들이 패퇴하였다는 것에 과연 무림십좌라 생각하고 그에 방심하지는 않았다.

그에 전력을 담아 내지른 공격이었다.

하나하나는 상대가 되지 않겠으나 팔객이 전부 전력을 다한 공격이라면 충분히 검주를 당황케 할 수 있다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은 그들의 망상일 뿐이었다.

떨그렁!

팔객들이 전력을 다해 내뻗은 공격은 한 번의 번쩍임에 마치 산들바람처럼 변해 버렸다.

내지른 검은 검신이 가루가 되어 흩날렸고 창대는 톱밥이 되어 바스러졌다. 날아간 비도는 쇳물이 되어 바닥으로 흘러내렸고 휘둘러진 도는 도병을 제외하고는 절반이 썩둑 잘려 나가 먼지가 되어 흩날렸다.


“커헉!”

“크헉!”

동시에 권과 장, 각과 금나수를 펼쳤던 팔객 중 사객이 피를 토해 내면서 그 자리에 쓰러졌다. 만우는 그 때문에 피어오른 먼지가 거슬린다는 듯 손부채를 펼치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자. 황보 가주.”

황보천은 물론, 황보경도 대체 만우가 무슨 무공을 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마치 눈 뜬 장님이 된 것만 같았다.

허나 그들의 궁금증을 풀어줄 생각이 없었던 만우는 황보천을 보면서 손가락을 까닥였다.


“안 튀어와?”

후다닥!

황보천은 이미 만우에게 몸도 마음도 모두 패배했다. 그랬기에 이제 황보천에게 남은 목표라고는 이 황보세가를 멀쩡하게 보존하는 것뿐이었다.


“햐, 향후 5년 간 황보세가를 봉문하고 단전을 폐하겠으니 세가의 명맥만큼은 유지해 주십시오.”

“혀, 형니이이이임!”

 

 
그렇게 만우에게 완전히 굴복한 황보천은 만우 앞에 달려가서는 무릎을 턱 하고 꿇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충격적인 발언이 흘러나왔다.


“봉문하고 단전을 폐하겠다?”

황보천 자신이 황보세가의 이번 일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짊어지겠다는 소리다. 아마 그것이 가주인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최후의 방법이리라.

하지만 황보경을 제외하고는 그 어떠한 황보세가의 무인들도 황보천을 말리지 못했다. 정확히는 팔객을 눈 깜짝할 사이에 쓰러뜨린 만우에게 두려움에 질려 있다고 함이 맞을 것이다.


“대신 그리 한다면 이 황보세가의 명맥을 유지한다고 약조를 해 주시오.”

황보천은 간절하게 만우에게 말했다. 만우는 그런 황보천을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와. 이 쓰레기 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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