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7. 무림왕 (1)
(357/400)
357. 무림왕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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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7. 무림왕 (1)
2022.05.31.
“하, 하지만 조선에서 끌려온 것도 억울한데 궁에만 맨날 갇혀 있다고 하는 바람에…….”
“그래도. 그럴 수밖에 없는 나름의 법도와 이유가 있거늘.”
호선은 조화를 추구하는 영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호선은 가급적이면 속세의 일에 끼어들지 않았다. 호선은 자신의 존재 자체가 속세에 큰 혼선을 줄 수 있는 특이점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우와 얽힌 일이야 만우란 존재 자체가 호선보다 훨씬 더 큰 특이점을 가지는 존재이기 때문에 상관없었지만, 그외의 다른 경우에는 그러지 않았다.
“저…… 방매는 아무런 잘못이 없어요. 호선 언니.”
“……자가께서 저를 언니라 부르실 필요 없답니다.”
만우가 안 그래도 방매를 잘 돌봐 달라고 부탁을 했기 때문에 방매의 부탁을 들어준 것뿐인데, 알고 보니 방매가 달고 온 혹이 어마어마해서 문제가 된 것이다.
황제의 총애를 받는 후궁이라니.
그 후궁을 데리고 자미원에서 빠져나온 것은 다름 아닌 호선이 되 버린 것이다.
“조금만, 조금만 보다가 들어갈게요, 언니, 네?”
방매는 호선에게 아양을 떨었다. 하지만 방매도 아무런 생각 없이 단순히 권비가 불쌍하다고만 하여 그녀를 데리고 자미원에서 무단으로 외출을 감행한 것은 아니다.
“저도 조선의 옹주란 걸 황제가 알고 있어요. 자미원이라고는 하지만 옹주가 일일이 그곳의 출입을 허락 받아야 하는 위치는 아니잖아요. 그렇죠?”
방매도 다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었다. 물론 그 생각이라고 해 봤자 평생을 평민으로 살아온 방매의 관점에 불과했지만 아예 이치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곳은 명나라이고, 우리는 사행단이야. 이방인이 주인의 허락 없이 막 집 안을 나고 든다고 해 봐. 너라면 기분 좋겠어?”
방매는 호선의 지적에 입을 다물었다. 마땅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호선은 그런 방매를 보면서 이마를 감싸 쥐었다.
방매는 어렸다.
경험이야 나이에 비해 많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어리지 않은 것은 아니다. 어린 나이 특유의 치기와 경험 부족이 이 사태를 일으킨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호선 자신의 잘못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미리 그런 것들을 다 알아보지 않고, 방매의 말만 듣고 그냥 자미원에서 나와 버린 것은 호선의 잘못이니 말이다.
“그, 그럼 제가 들어갈게요. 지금이라도 들어가면…….”
“늦었어요.”
호선은 자미원 쪽을 쳐다봤다. 눈에는 보이지 않았으나 연경의 자연이 호선에게 말을 해주고 있었다. 자미원에서 무수히 많은 혈향이 빠져나오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아마 권비를 찾는 것 같은데, 이미 자미원 안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네요.”
“그, 그럼…….”
“아무리 방매가 조선의 옹주라고 해도.”
호선은 권비에 대해서 잘 모른다. 하지만 후궁인 그녀가 사라졌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빠르게 저리도 많은 인원이 움직였다면 그녀는 분명 자미원 내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방매가 그런 권비를 데리고 나왔다는 것을 황제가 알게 된다면?
“사행단 전체가 위험해질 수도 있는 행동이야, 방매.”
“……그럼.”
“황제의 기억력이 좋기를 바라는 수밖에.”
호선은 짧게 한숨을 내쉬면서 방매와 권비를 이끌고 저잣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주변의 모든 것이 신기한 듯 두리번거리는 것을 멈추지 못하는 권비를 데리고 말이다.
*****
까가강!!!
쾅!
감령과 필두가 거칠게 부딪쳤다가 서로의 병장기를 강하게 후려치면서 뒤로 주르륵 미끄러졌다.
감령과 필두는 요즘 들어 더욱 스스로를 단련하는 데 몰두하고 있었다. 수년 간 막혀 있었던 화경의 벽이 조금씩 열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주르륵!
“퉷.”
감령이 걸쭉한 침을 탁 하고 내뱉었다. 필두는 그런 감령을 향해 얼굴을 찡그려 보이며 말했다.
“더럽다.”
“그럼 다음에는 그 매끈한 대머리에 뱉어 줄게.”
한창 대련 중이라 감정이 올라온 감령이 하얀 이를 드러내면서 으르렁거렸다. 그런 감령을 향해 필두가 아무 말 없이 손에 쥔 도끼에 공력을 불어넣었다.
“그 입을 못 쓰게 만들어 주마.”
“흐핫핫!”
쾅! 쾅!!
감령과 필두가 재차 맞부딪쳤다. 감령과 필두는 정반대의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감령이 천년만년 움직이지 않는 굳건한 산의 무거움을 담는다면, 필두는 변화무쌍한 강의 부드러움과 난폭함을 담았다.
무겁고(重) 느린(慢) 감령과 부드럽고(流) 난폭한(亂) 필두는 호적수였기에 서로가 대련을 거듭하면서 조금씩 성장했다.
“조만간 벽을 깰지도 모르겠구먼. 허허헛.”
척일이 허연 수염을 쓸어내리면서 감령과 필두를 기특하다는 듯 쳐다봤다. 저 정도 경지에 도달하였다면 게으름을 필 법도 하련만 둘이 매일 같이 구슬땀을 흘리는 것을 지켜봤기 때문이다.
“왜. 너도 근질거리느냐?”
움찔.
척사영이 척일의 말에 손을 꼼지락거리다가 흠칫했다. 척일은 그런 척사영을 대견스럽다는 듯 쳐다봤다.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렇게 항상 향상을 위한 마음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예, 할아버님.”
척사영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슬그머니 팔짱을 꼈다. 척일은 그런 척사영을 보면서 말했다.
“심심하면 가서 어울리자고 해 보거라. 저들도 기뻐할 것이니.”
호적수와 대련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강자와 대련을 할 때 더 배우는 것이 많다. 그렇다고 하여 척사영이 저들과 대련을 하여 아무것도 얻어가지 못할 정도의 압도적인 강자도 아니다.
그러니 척사영에게도 훌륭한 성장의 기회가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저렇게 열정을 불태우는 이들의 곁에 있으면 척사영 역시 무공에 대한 열의를 한층 더 불태울 것이다.
“한데.”
“누구냐!”
척일보다 한 발 늦게 척사영이 위화감을 느끼고는 주변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격렬하게 부딪치고 있던 감령과 필두가 멈칫했다.
그사이 척일은 주변을 향해 나른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느긋하게 말을 건넸다.
“이쪽에 볼일이라도 있는 겐가?”
사행단이 머무르고 있는 전각의 지붕 위로 환관복을 입은 동창의 환관들이 모습을 하나둘씩 드러냈다.
“무슨…….”
“적?”
전각 안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문형일과 슌스케도 바깥에서 느껴지는 기세를 느끼고는 달려 나왔다.
쾅!!
벌컥!!
그리고 바로 그때 전각의 문이 부서질 것처럼 거세게 쾅 하고 열렸다. 그리고는 그렇게 열린 문으로 수십에 달하는 환관들과 그 환관들을 이끄는 태감이 얇은 목소리에 공력을 담아 척일을 향해 소리쳤다.
“사행단의 설미수는 나와 황명을 받들라!”
이곳은 황궁이다.
물론 황제가 임시로 기거하기 위해 만든 자미원이었으나 황제가 기거하는 곳이 곧 황궁이니황궁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곳에서 이렇게 환관이 황명을 들고 쳐들어 왔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다.
“나를 찾으셨소?”
“황명이다!!!”
설미수와 동군영이 한발 늦게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 둘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지만 주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황명을 들고 온 태감의 앞에 섰다.
척, 처적!
어쨌거나 저 환관이 들고 온 것은 다름 아닌 황명이다. 교지를 들고 왔다는 것은 황제의 말을 받드는 것이었기에 설미수와 동군영, 그리고 척일은 차례대로 무릎을 꿇었다.
“네놈들은 뭐 하는 것이냐!”
태감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설미수가 고개를 뒤로 돌려서는 척사영을 비롯한 초절정 고수 사인방에게 말했다.
“무릎을 꿇으시게.”
“…….”
다들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그들은 명색이 사행단의 통사와 역졸들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이 하나둘씩 무릎을 꿇자 교지를 손에 든 태감이 거만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교지를 펼쳤다.
“……원에서 현인비께서 실종되신 일에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을 지언저,”
황명은 미사여구가 대단히 길고 장황했다. 설미수를 비롯한 사행단원들은 그 긴 교지를 읽는 환관의 얇은 목소리를 듣다가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사행단의 의원이자 조선의 옹주인 이방매가 흉수로 지목되었으니, 황명에 따라 사행단 전부를 동창으로 압송할 것이니 황명에 따르라!”
조선에서 온 사신이 조그마한 꼬투리를 잡혀 동창이나 금의위에 억류되는 일은 허다하게 벌어지는 일이었다.
그게 일종의 신고식처럼 대국인 명이 소국인 조선의 기강을 잡기 위해 대놓고 벌어지는 일이긴 했는데, 설미수는 그런 것과 지금은 명확하게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흉수! 이보시오 공공!!!”
설미수가 두 눈에 노기를 띠고는 태감에게 일갈했다.
“감히, 감히 옹주자가를 억류하겠다 하시었소? 증좌를 가져오시오! 증좌!!”
명나라가 대국은 맞았다. 그에 조선은 명나라를 사대하며 명나라를 상국으로 모신 것은 맞다. 허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다.
조선은 명나라를 상국으로 모심으로 인해 불필요한 심력의 소모와 전쟁을 막고자 하였고, 명나라는 그런 조선을 받아줌으로써 명나라의 후방을 안정시키려 한 것이다.
명나라는 거대한 땅을 가진 제국인 만큼 그만큼 적들도 많았다.
안 그래도 남쪽과 서쪽 국경이 어지러웠고 북방에서는 이민족의 침입이 잦았으며 동부와 남부 해안으로는 왜구들이 들끓었다.
그 와중에 명나라보다 국력은 작으나 오랜 기간 문명국으로 큰 힘을 쌓아온 조선마저 등을 돌린다면 혼란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때문에 명나라는 개국 초기부터 조선과의 관계에 신경을 써 왔다.
그런데 지금 교지를 들고 쳐들어온 태감은 그간 명나라가 조선에 쌓아온 그 모든 노력들을 허물어뜨리고 있는 셈이었다.
전시가 아닌 다음에야 제 아무리 명나라 황제의 측근인 환관이라 하더라도 조선 국왕의 누이인 옹주를 죄인 취급할 수는 없었다.
“그 말은 금의위에 가서 하시오!”
하지만 태감은 냉정하기 그지없었다. 그들도 황제의 이해할 수 없는 황명 때문에 조선 사행단에게 쌓여 온 묵은 앙금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지막으로 권비가 규화각에 들인 것이 그 옹주와 머슴이었고 규화각 안에서 옹주와 함께 사라졌으니 그 옹주가 범인임이 확실했다.
“설 대인.”
척일이 모욕감에 어깨를 부르르 떨고 있는 설미수를 느긋한 목소리로 불렀다. 그러자 설미수는 고개를 돌려 척일을 쳐다봤다.
“가지 않고자 하면 안 갈 수도 있소이다.”
“척 노야.”
“이 노부가 한 가지 확실히 설 대인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척일은 자리에서 에구구 소리를 내면서 몸을 일으켰다. 늙어서 그런지 무릎이 뚝뚝 소리가 난다면서 엄살을 피운 척일은 자신을 황당하다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환관을 보면서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저 교지, 황명, 가짜라는 것이외다.”
태감의 눈이 부릅뜨였다. 태감의 얼굴이 금세 시뻘겋게 변하며 척일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기 시작했다.
“가짜라니! 지금 감히 황제폐하를 모독하는 것인가!!!!”
그런 태감의 노성에 전각을 포위한 동창들의 전신에서 삼엄한 기세가 피어오르더니 척일과 사행단에게 향했다. 하지만 설미수와 동군영을 제외하면 이곳에 있는 이들은 거뜬히 한 개 성의 최고수가 될 수 있는 고수들뿐이었다.
쿠웅-!
“감히.”
그중에서도 단연 독보적인 실력자는 척일이다. 척일이 눈을 반개한 채로 공력을 끌어올리자 삽시간에 동창들의 기세가 사그라들며 그의 묵직한 기운이 장내를 채우기 시작했다.
“네놈 따위가 조선의 왕실을 모욕하는 것이냐?”
무릎이 아프다며 엄살을 피우던 노인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진 지 오래다. 눈을 반개한 채 태감을 노려보는 척일에게서는 절대고수의 위압감이 절로 뿜어져 나왔다.
화경.
만우나 신수 같은 괴물들이 연달아 등장했기 때문에 빛을 바랬지만 척일은 당장 무림에 나서도 무림십좌 자리를 언제든지 꿰찰 수 있는 고수 중의 고수다.
더불어 척일의 곡산척가는 왕조가 바뀌는 과정에도 반도를 수호하기 위해 명맥을 유지한 조선 최고의 무가다.
그런 척일이 양녀라고는 하나 조선의 옹주를 한낱 죄인 취급하는 태감의 태도에 분노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휘오오오!!!
척일의 기세가 마치 용트림을 하듯 장내에 있는 동창들의 기세를 휘감으며 포효하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런 척일의 기세를 정면에서 받고 있는 태감의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지, 지금 이게 무슨 무엄한…….”
“그게 황명이라고? 아니 말이 되지 않지. 왜냐.”
또한 척일은 어젯밤의 비사(祕史)를 기억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다. 그랬기에 척일은 자신의 무공을 걸 수 있었다.
황제는, 만우의 일행인 사행단에 저런 명령을 내리지 않는다. 아니 내릴 수 없다.
당장에 황제가 내건 약조가 그런 것이었고, 그 약조는 만우의 무위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본 황제가 직접 내건 약조이기 때문이다.
“일을 크게 만들지 말라. 황제폐하께서 아셨을 때 진노하시면 어쩌려고 그러는 것이냐?”
척일은 저 교지가 위조된 것임을 그로 인해 추론했다. 그리고 그 추론이 사실이라는 것을 척일은 장담할 수 있었다.
동창.
건문제를 폐위하고 스스로 황위에 오른 작금의 황제는 동창과 금의위를 만들어 모든 대소신료들과 나라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감사하고 감시할 권리를 하사했다.
그 가운데 동창은 황제에게 별도의 상소나 절차 없이 곧바로 원하는 것을 주청할 수 있게 만들어진 곳이다.
그리고 유일하게, 동창은 황제의 직속기구들 중에서 선 조치 후 보고가 가능했다.
명분이나 목적이야 만들어 내면 그만인 곳, 그곳이 바로 동창이다.
“이, 이익!!!”
태감이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설마하니 교지까지 들고 온 자신의 앞에서 저렇게 뻗대는 사람이 있을 줄은 미처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태감은 여기서 그릇된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태감의 입장에 놓이면 비슷한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이곳은 황제가 기거하는 자미원이고, 저들은 소국인 조선의 사행단일 뿐이었으니까.
그런 한낱 사행단 따위가 동창의 말을 거절하는 것은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