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4. 사고 치다 (2)
(354/400)
354. 사고 치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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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4. 사고 치다 (2)
2022.05.21.
“자미원이 조용하단 말인가?”
“예, 그렇습니다, 맹주.”
천안각에 소속된 무인의 말에 맹주는 자신도 모르게 불호를 읊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용접곡에서의 사고를 간신히 수습하고 맹으로 돌아왔지만 좋은 소식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막막하군. 막막해…….”
맹주는 제갈명공의 빈자리를 크게 느꼈다. 용접곡에서 일어난 비극으로 인해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것이 바로 제갈세가다.
그렇기 떄문에 제갈명공은 곧바로 복귀하지 못하고 호북성의 제갈세가로 잠시 돌아가기로 했다.
모름지기 제 아무리 불가항력이었다고 해도 실패를 한 것은 실패를 한 것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처벌도 있어야 했다. 맹주는 제갈명공의 낙향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황보세가도 검주 하나를 막아 내지 못하였고, 자미원마저도 조용하다라…….”
아미타불, 소리와 함께 맹주는 어두운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검주를 잡고 그간 강호무림이 동이족 하나에게 입었던 수많은 패배들을 씻어 내고자 하였던 것이 이리 어그러질 줄이야.
“우리가 검주를 천하제일인으로 만들었구나. 천하제일인.”
맹주는 애석한 목소리로 허공을 쳐다보면서 중얼거렸다. 맹주 역시 이번 일로 인해 소림의 동량인 불존이 크게 다쳤다는 것에 어두운 심기를 감추지 못했다.
무림십좌의 일인이자 소림의 최고수로 자신의 무에 대한 자존심이 높았던 불존이다.
그런데 그런 불존이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그토록 처절하게 패배하였으니 걱정되는 것은 불존이 육신에 입은 상처 따위가 아니라 정신에 입은 상처였다.
심마(心魔).
맹주는 불존이 심마에 빠지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맹주.”
벌컥!
그때 맹주전의 문이 벌컥 하고 열리더니 꾀죄죄한 차림새의 거지, 개방의 방주인 만타개가 뛰어들어 왔다.
“큰일 났소.”
“큰일이라. 이보다 더 큰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이오? 아미타불.”
맹주는 비관적으로 웃어 보이며 만타개에게 말했다. 만타개는 의기소침한 맹주를 보면서 가슴을 쿵쿵 두드리고는 소리쳤다.
“남궁세가와 하북팽가에서 들고 일어나게 생겼소 지금!!!”
“어찌…… 청룡단과 백호단 때문인가?”
“그렇소!!!”
맹주가 놀라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동시에 맹주는 이번 일로 인해 자신의 권위가 땅바닥에 떨어졌음을 깨달았다.
오대세가 중 무려 두 개나 되는 세가가 움직이는 일이다. 한데 그런 중차대한 일을 맹주에게 고하지도 않고 만타개가 와서 알렸다는 것은 맹을 더 이상 신뢰하지 못하겠다는 뜻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번 일이 지나고 무림회의를 개최하시면 되오. 일단은 남궁세가와 하북팽가부터 말려야 하오.”
용접곡에서 청룡단과 백호단의 수많은 무인들이 죽었다. 청룡단은 전원 남궁세가의 무인들로 이뤄진 곳이고 백호단은 만우와도 인연이 있는 북경제일도인 팽대수가 단주로 있는 하북팽가의 고수들로만 이뤄진 단이다.
그러니 그 두 세가에서 이번 일로 들고 일어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들도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만우가 어디 있는지 정도는 모를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가야겠네. 아미타불.”
무왕 천혜대사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
척, 척, 척, 척
아직 황명으로 내린 소개령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연경대로 주변에는 사람의 기척이라고는 1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적막함마저 맴도는 그 연경대로에 나타난 수십 명이 무인들이 잰 듯한 걸음으로 그 끝에 자리한 자미원으로 향했다.
그들은 의복으로 두 부류로 나뉘어졌다. 한 쪽은 황색 무복을 걸쳤고, 다른 한 쪽은 연한 푸른색으로 된 무복을 걸친 이들이었다.
남궁세가와 하북팽가.
강호무림에 수백 개, 어쩌면 수천 개가 있을지도 모르는 무가(武家)들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무가들을 일컬어 오대세가라 불렀다.
자미원 쪽으로 향하고 있기에 그들의 상징과도 마찬가지인 검과 도는 소지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 하여 그들이 뿜어내는 기세가 작아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들 중 맨 앞에 선 남궁세가의 가주인 구명검(救命劍) 남궁현덕과 팽가의 가주인 오호도(五虎刀) 팽우는 불타는 듯한 눈으로 자미원 너머를 쳐다봤다.
펄럭!!!
그런데 그때 남궁현덕과 팽우의 발걸음이 멈췄다. 둘의 앞에 바람을 일으키며 맹으로부터 예까지 날아오다시피 한 맹주와 만타개가 도착했기 때문이다.
“맹주.”
“아미타불.”
맹주는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합장을 했다.
“두 분께서는 어딜 가십니까.”
맹주는 엄한 목소리로 두 가주에게 말했다. 하지만 남궁현덕과 팽우는 그런 맹주의 엄한 목소리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자미원으로 가고 있는 중입니다.”
“혈채를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맹주.”
남궁현덕과 팽우가 스산한 목소리로 맹주에게 말했다. 그런 둘의 목소리에는 맹주에 대한 비난도 섞여 있었다.
어쨌거나 황제로부터 그 칙서를 받아 전략을 입안하고, 청룡단과 백호단을 이끌고 나섰던 것이 바로 맹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돌아온 것은 청룡단과 백호단의 시신이었으니 제 아무리 황명이라 하더라도 피붙이를 잃은 남궁현덕과 팽우는 세가를 나서야만 했다.
“혈채라. 정녕 그리 생각하는 것이오?”
맹주의 두 눈이 날카롭게 빛을 발했다. 청룡단과 백호단에도 물론 피해가 전무한 것은 아니다. 검에는 눈이 없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나 그것은 만우를 죽이고자 함정을 팠던 것이었기에 그들의 죽음에 따지고 들을 수 없었다. 만우는 강하기에 살아남았고, 죽은 자들은 약하기 때문에 죽은 것이었으니까.
더군다나 대부분의 사상자는 천안각의 제갈세가로부터 나왔지, 청룡단과 백호단의 피해는 미미했다.
만우의 기세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 무너져 내린 청룡단과 백호단이었으니까.
“검주는 자비를 베푼 것이외다.”
맹주는 사실을 짚었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 자리에 있었던 맹주였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그 자리에서 검주가 자비를 베풀지 않았더라면 모두가 죽었을 것이다.
만우를 합공한 불존과 독왕, 부로가 처참하게 패배한 순간 이미 승부는 결정되어 있던 셈이었기 때문이다.
“맹주!!!”
남궁현덕이 사자후를 터뜨렸다. 하지만 맹주는 눈썹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맹주는 황명에 따르고자 했던 자신의 결정이 잘못 됐다는 것을 겸허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두 분께서도 그러셨지요. 특히 팽 가주께서.”
맹주는 팽우를 보면서 말했다.
“검주가 천하제일인일 지언데 그 누가 그를 호송해 오겠냐고. 그 말이 맞았을 뿐입니다. 소승은 보는 눈이 어두워 그것을 보지 못하고 크나큰 실수를 저질렀으나.”
맹주는 남궁현덕과 팽우 뒤에 비장한 표정으로 도열한 두 세가의 미래 동량들을 보면서 합장을 했다.
“두 분께서는 소승과 같은 실수를 범하지 마시오. 아미타불.”
맹주가 절절한 목소리로 두 가주에게 고개를 숙였다.
무려 맹주다.
그것도 소림사의 무왕, 천혜대사.
그런 이가 숙인 고개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것을 가주인 남궁현덕과 패우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둘은 가만히 서서는 침음성을 흘렸다.
그런데 그때, 그들 모두를 뒤흔드는 존재가 연경대로 한 복판에 떡 하고 모습을 드러냈다.
“다들 여기 모여서 무림맹 회의라도 하시나?”
만우.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닐 지언데 이 시간이면 자미원에 있어야 할 만우가 떡하니 연경대로 한복판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아미타불.”
씩 웃고 있는 만우를 본 맹주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불호가 흘러나왔다.
*****
“방매야. 너는…….”
방매는 꾀꼬리처럼 자신의 앞에서 조잘대는 권비를 보면서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만 같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간만에 눈치를 볼 필요 없는 말동무가 생긴 권비는 그간 쌓인 것들을 방매에게 사소한 것까지 쉴 새 없이 말했기 때문이다.
“어머. 내가 나 혼자 말을 너무 많이 했구나?”
점점 방매가 집중력을 잃어 간다는 것을 눈치챈 권비가 자신의 입을 가리면서 말했다. 그러자 방매는 그게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아, 그런 뜻이 아니고.”
“그래? 내가 너무 말이 많아서…… 말을 하다 보니까 멈출 수가 없네. 미안해.”
“말할 사람이 없었구나?”
“음…….”
권비는 씁쓸하게 웃었다. 굳이 대답을 하지 않아도 방매는 권비의 대답을 들은 것만 같았다. 그러자 방매는 자신의 가슴 한 켠이 쿡 하고 쑤셨다.
‘엄마.’
자신을 낳은 뒤 공녀로 끌려간 친모가 떠오른 것이다. 권비를 보면 꼭 친모가 이렇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러니 이렇게, 권비가 하는 말이 많다고 생각하면서도 묵묵히 들어줄 수밖에 없는 것이리라.
“답답해.”
그때 권비가 불쑥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권비의 주변에는 평소에 그녀를 감시하다시피 붙어 있는 환관들이 하나도 없었다.
황제가 환관들에게 엄명을 내렸기 때문이다. 황제의 한 마디에 권비가 그렇게 말해도 듣는 척도 안 하던 환관들이 군소리고 내지 못하고는 전부 물러났다. 그렇기에 권비는 조금이나마 솔직해질 수가 있었다.
“넌 매분구라고 했지.”
“응.”
“그럼 한양을 매일 같이 다 돌아다녔겠네?”
“한양도 가고, 더 먼 데도 가고.”
“더 먼 데?”
권비가 눈을 반짝였다. 권비는 조선에 있을 때는 평범한 농민의 딸이었다. 그렇다고 하여 권비가 방매만큼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다.
어려서부터 일을 해야 했고, 일을 하지 않으면 입에 들어오는 게 딱히 없었기에 권비의 삶은 조선에서도 딱히 여유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응. 여기, 명나라에서 들어온 분이나 미안수도 좋고, 연지나 동백기름도 좋은 게 있었거든. 향낭 같은 것도 원하는 집들이 많았고.”
그때는 그런 집에 가면 그 집의 규수들이나 마님들에게 넙죽거리느라 바빴는데, 이제는 자신이 옹주가 되었으니 사람의 운명은 어찌 될지 모른다는 말이 맞았다.
“좋겠다…….”
권비는 그런 방매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듣다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방매는 그런 권비가 불쌍하다고 느껴져 자신도 모르게 불쑥 말했다.
“그럼 나갈래?”
“뭐? 여기서?”
방매가 한 말에 권비가 화들짝 놀라하면서 방매를 쳐다봤다. 방매는 그런 권비에게 말했다.
“폐하께서 널 그렇게 아끼신다면서. 그래서 환관들이나 금의위 무사들도 잔뜩 붙여 놓으셨고.”
“으, 응.”
환관과 금의위 무사들은 권비를 감시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었다. 황제는 자신이 그만큼 권비를 귀하게 여겼기 때문에 환관과 금의위들을 붙여 놓은 것이다.
하지만 평생을 농민의 딸로 살아왔던 권비에게 환관들과 금의위 무사들이 편할 리 없다. 방매는 그 점을 꼬집었다.
“그러면 네가 잠깐 나간다고 해서 크게 벌하시겠어?”
“하, 하지만 폐하이신데…….”
“정 그러면.”
방매는 권비를 꼭 데리고 나가고 싶었다. 연경에는 방매가 한양에서도 보지 못한 것들 천지였다. 그렇기에 권비에게, 자신의 친모에게는 해 주지 못했던 자유란 것을 한 번 경험케 해 주고 싶었다.
“만우를 팔아.”
“만우?”
“아까 나랑 같이 왔던 걔.”
‘걔’라고 하기에는 방매와 나이 차이가 나는 만우였지만 방매는 그런 것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제 와서 오라비라니, 처음부터 그랬다면 모를까 그게 더 웃기지 않은가.
“음…… 그걸로 될까?”
권비는 심히 불안한 듯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말했다. 방매는 그런 권비에게 말했다.
“아까 전에 봤지? 그 대단하신 폐하께서 만우, 걔랑 단 둘이 이야기하겠다고 하신 거. 그런 거 본 적 있어?”
“음…… 없어.”
권비는 비록 농민의 딸이었지만 그래도 공녀로 명에 온 다음 황제의 후궁이 되었기 때문에 아까 전 황제의 행동이 대단히 파격적이란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런 황제의 파격적인 행동의 대상이 대단한 권력을 가진 명문가의 대신이 아니라 미천한 신분인 만우란 점이 놀랍다는 것도 권비는 알고 있었다.
“나도 그런 경우는 없다고 알고 있거든. 조선에서도. 그런데 여긴 자미원이잖아. 황제폐하께서 계시는. 이곳에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고.”
사실 방매도 자신이 만우를 팔아먹는 지금 이 행동이 잘 된 것일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무장한 만우가 그리도 자신을 믿으라 큰 소리를 쳐 댔으니 한 번 써먹어 보기로 방매는 다짐했다.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황제가 사행단을 죽이리라 마음먹었다면 지금쯤 산목숨이 아닐 것이라 생각하는 방매였다. 자신의 곁에 있는 만우가 그보다 훨씬 더 대단한 사람이었지만 방매는 그 때문에 자신이 살아 있다고는 믿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살아 있으니, 황제는 자신들을 죽이지 않을 것이라고 방매는 생각했다.
‘무림이란 곳에서 유명하다니까, 만우가 여차하면 데리고 도망가 주겠지.’
방매는 단순하게 생각했다. 만우라면 무슨 문제가 생겨도 어떻게든 풀어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기도 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만우는 지금까지 그 믿음을 단 한 번도 배반한 적이 없다.
“그럼…… 어떻게 나가? 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바깥에서 바로 알 텐데.”
권비가 반쯤 방매에게로 넘어왔다. 문제는 들키지 않고 자미원에서 나가는 방법이었다. 권비가 관심을 보이자 방매는 그런 권비를 보면서 씩 웃어 보였다.
“혹시, 도를 아니?”
“도?? 무슨 도?”
방매는 권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 순간 권비의 전각 안에서 상쾌한 미풍이 살랑이며 불어오더니 어느 순간 청량한 향이 방 안에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