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3. 사고 치다 (1)
(353/400)
353. 사고 치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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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3. 사고 치다 (1)
2022.05.17.
“검주는.”
황제는 그렇게 기뻐하는 권비와 얼떨떨해 하는 방매를 일별한 후 고개를 돌려 만우를 쳐다봤다.
“짐과 할 이야기가 남은 것 같은데.”
그런 황제의 태도에 주변의 환관들이 놀라서는 헉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황제는 절대로 먼저 움직이지 않는다. 세상의 중심인 명의 황제는 절대로 먼저 움직여서도 안 된다.
더군다나 황제가 허락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황제의 100보 이내에 설 수 없다. 심지어는 황자들과 황녀들조차도 황제가 허락하지 않으면 마주볼 수 없다.
한데 그런 황제가 일개 사행단의 졸자로 보이는 만우에게 이야기를 하자고 한 것이다.
“음…….”
만우는 기뻐하는 권비와 벙찐 표정의 방매를 힐긋 쳐다봤다. 아무래도 저 둘은 둘만의 시간을 보내도록 놔두는 시간이 필요할 듯했다.
“그러지요. 어찌 미천한 소인이 폐하의 명을 거절하겠습니까요?”
만우가 한 말에 황제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하지만 이런 만우에게 걸리면 놀아나는 것이기 때문에 황제는 한 번 꾹 참았다.
“그…… 러지.”
“예. 예.”
만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매가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만우는 손사래를 쳤다.
“놀다가 오십쇼, 옹주 자가.”
“만…….”
만우라고 소리치려던 방매는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자신을 쳐다보는 권비의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는 수 없이 한숨을 푹 내쉰 방매는 고개를 끄덕였다.
“배고픈데 밥 줍니까?”
만우가 앞서 걸어가고 있는 황제의 뒤통수에 대고 물었다.
*****
“원하는 게 뭔가?”
환관들과 금의위들마저 전부 다 물린 황제는 어전에서 퍼질러 앉아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진 만한전석을 입에 쑤셔 넣는 만우를 보면서 물었다.
“원하는 거라니?”
환관들까지 전부 다 물리겠다는 황제의 전언에 금의위들과 환관들이 그 자리에서 할복이라도 할 것처럼 말렸지만 결국 황제는 황제였다.
황제의 신경질 한 번에 그 수많은 이들이 정말 한 명도 주변에 남지 않고 싹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우는 황제를 슬슬 도발하던 얄미운 말투를 더 이상 쓰지 않았다.
우걱우걱.
확실히 황실의 실력 있는 숙수들이 차려 온 밥상이기 때문인지 천하진미를 먹는 듯한 맛의 향연이 만우의 입 속에서 펼쳐졌다.
먹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 만우였기에 우걱우걱하면서 황제를 쳐다봤다.
“원하는 것. 그 원하는 것이 있으니 짐의 복장이 터져 죽게 하는 것이 아니려거든 여기저기 자미원을 활보하는 것이겠지.”
“흐음…….”
만우는 턱을 쓰다듬었다. 황제는 생각보다 만우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하지.”
황제의 칙서 한 장 때문에 평온하게 살려던 조선에서 다시 이 풍랑 치는 강호무림으로 돌아와야만 했던 만우다.
비록 황실을 다 뒤엎어 버리려고 했던 최초의 계획은 황룡과 기린의 만류로 인해 이룰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 괘씸함이 아직 다 사라진 것은 아니다.
명색이 천하제일인의 뒤끝인데, 그 뒤끝 역시 천하제일로 길어야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라 만우는 믿었다.
하지만 무언가 그것을 상회할 만큼의 성의를 황제가 보인다면 마다할 만우는 아니다. 분명 그렇게 되면 정상참작이 되어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
“선제시.”
“……뭐?”
하지만 만우는 먼저 원하는 것을 말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아니, 왜 그래야 한단 말인가.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은 만우지, 황제가 아니다. 그러니 황제가 생각하고 있는 조건을 충분히 들은 다음, 그 이후에 협상에 들어가도 늦지 않는다.
“…….”
황제는 그런 만우를 보면서 이를 악물었다. 자존심이 상해도 보통 상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미 황제는 만우 앞에서 자존심이란 자존심은 모두 다 상했기 때문에 감내할 수 있었다.
만우에게 한 대 얻어맞고 뻗어 버린 기억이 있는 이상 황제는 만우가 어떻게 나오던 간에 성격대로 행동할 수가 없었다.
만우 정도 수준에 다다른 무림인에게 한 대 얻어맞고도 이리 멀쩡하다는 것은 모순적이게도 만우가 사정을 봐준 덕분에 황제가 살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명의 은인.
뭐, 바꿔 생각하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먼저 준비해 놓은 것이 있을 것 아냐. 그래도 명색이 황제인데. 그 보따리부터 풀어 놓고, 그 다음에 이야기를 하자는 거지.”
만우가 황제를 보면서 입꼬리를 씨익 끌어올렸다. 황제는 그런 만우를 보면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끌려가는 것이 대체 무슨 협상이란 말인가.
“황금 열 관.”
“흐음…….”
만우는 턱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황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황금 한 관이면 무려 황금 백 냥이나 되기 때문이다. 그런 황금을 열 관이나 챙겨 주겠다고 했는데도 만우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본주가 재물이 부족할까.”
만우는 가볍게 웃으며 더 말해 보라는 듯 손짓을 했다. 황제는 그런 만우를 보면서 다시 울화통이 치밀었지만 그 말이 틀리다고는 할 수 없었다.
천하제일인.
만우가 무공으로는 감히 대적할 자가 없다는 천하제일인임은 황제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만우를 고용한다면 녹봉을 얼마나 주어야 할까.
‘부르는 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 관이나 되는 황금은 일개 개인이 가지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커다란 재물이다. 저 정도의 재물을 개인에게 줄 수 있는 곳은 중원천지를 뒤져 봐도 몇 곳 없을 것이다.
“석가장에서 실력 있는 무림명숙들을 항상 반긴다고 하던데. 그곳이나 가 볼까.”
만우는 귓구멍을 손가락으로 후비적거리면서 황제 보고 들으라는 듯 말했다. 황제는 석가장이란 이름에 끄응 하는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석가장.
중원제일상단을 거느리고 있는 석가장의 금력은 황실의 그것보다도 더 클 것이라는 풍문이 있다는 것을 황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석가장이라면 정말 황금 열 관 이상의 재물을 지불해서라도 검주를 데려갈지도 모르는 일이다.
“조선으로 가는 하사품의 양을 세 배로 늘려 주마.”
황제는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보였다. 조선에서는 상국인 명나라에 바치기 위해 조공품을 가져오는 것이 관례다.
그렇게 조선에서 조공품을 가져오면 명나라에서는 유교적인 순리에 따라 조선에서 가져온 것보다 더 많은 하사품을 사행단에 들려서는 돌려보낸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베푸는 것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베푸는 것이 더 많은 것과 같은 이치이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원래부터 많은 하사품을 세 배로 늘려 주겠다고 한 황제다. 그중에는 조선에 없는 귀중한 기술들이나 조선에서 구할 수 없는 선진 물품들이 많았다.
“아니, 그거야 황상이 조선 사행단에 들려 보내는 거고. 그렇게 보내면 그게 임금 호주머니로 가지, 내 주머니로 오나?”
만우는 히죽 웃으면서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말했다. 황제는 그런 만우를 보면서 아미를 좁혔다.
“황실 보고를 열어 주마.”
“재물은 됐다니까. 영약도 아까 충분히 챙겼고.”
“아리따운 처녀 백 명과 연경에서 가장 큰 저택을…….”
“주지육림? 본주가 원했다면 못 할까?”
“그럼 대체!!!”
황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자신이 말하는 족족 만우가 퇴짜만 놔 버리니 더 이상 꺼낼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찌하란 말이냐! 검주, 그대가 직접 말해 보라!”
만우는 황제가 버럭 역정을 내자 씩 웃어 보였다. 그 순간 황제의 두 눈이 커졌다.
오싹!
만우와 눈이 마주친 순간 마치 범 앞에 선 토끼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황제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는 것 자체에 자존심을 상해하면서 인상을 썼다.
“뭐 하는 짓이지?”
현경에 도달한 무인이 뿜어내는 살기다. 비록 만우가 강약 조절을 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 하여 이렇게 간단히 떨쳐 낼 수 있을 만한 수준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황제는 주변의 모든 금의위 무사들과 환관까지 물린 채 만우와 정말 단 둘이 독대하는 것을 선택할 정도로 배포가 두둑했다.
“이 일을 벌인 주동자를 색출해 내어 처리하는 것이 원래 목표였으나.”
샤악!
황제를 압박하던 만우의 기세가 삽시간에 봄바람처럼 유해졌다. 황제는 목 뒤에 선뜻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는 것에 만우를 노려보았다.
“감히, 명나라의 황제인 짐을 겁박하려 드는 것이냐?”
“겁박? 굳이? 그냥…… 저지르면 되는 일인데.”
황제는 가슴이 서늘해지는 듯했다. 이번에 만우는 아무런 기운도 일으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우의 말에 담긴 것은 진심이었기에 황제는 자신이 어떤 이와 독대를 하고 있는 것인지 새삼 자각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두 가지.”
만우는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였다. 황제는 그런 만우를 가만히 쳐다봤다.
“첫째. 한 사람의 행방을 황실에서 찾아줬으면 하는데.”
“……행방?”
“십 년도 더 전에, 조선에서 데려온 어느 공녀. 정확히는.”
만우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황제에게 말했다.
“아까 황상이 보았던 그 아이, 방매의 어미.”
“…….”
황제의 입이 헤 하고 벌어졌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입을 딱 하고 다시 붙였다. 예상 외로 만우가 부탁한 것이 무리한 수준이 아니라는 것 때문에, 그리고 그것이 만우 스스로를 위해서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서란 것에 놀랐다.
“그리도 두 번째.”
만우는 손가락 두 개를 펼쳤다.
“그 아이는 어미를 찾기 위해 재물을 모아 객주나 객잔을 차리겠다고 했어. 그래야 오가는 사람들에게 어미에 대해서 수소문하고, 정보를 모을 수 있다고. 그러니…….”
만우가 황제에게 원하는 것은 딱히 없었다. 황제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사실 만우가 원하지 않는 것이거나, 스스로 쟁취할 수 있는 것들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제가 방매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들은 많았다.
“황룡객잔. 그게 좋겠어.”
만우가 히죽 웃어 보였다.
*****
석소군은 자신의 수신호위인 온소와 석미도, 그리고 야율태와 함께 황보세가에 방문했다가 발걸음을 다른 곳으로 옮겨야만 했다.
“초상집이군.”
석소군은 가문 내의 일이 바빠 차마 시간을 낼 수 없다며 축객령을 내린 황보세가를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중얼거렸다.
비록 황보세가의 문턱도 넘지 못했지만 석소군의 입가에는 가느다란 미소가 걸려 있었다.
“피해가 큰 모양입니다.”
야율태 역시 황보세가 내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를 읽어 낸 것인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이렇게 될 것이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온소는 다르다.
“……정말 그렇다면 검주가…….”
“황보세가는 초상집이고 자미원은 조용하다. 그 말인즉슨.”
석소군은 착 하고 손에 들고 있던 부채로 손바닥을 내려쳤다.
“우리 석가장이 제대로 된 선택을 했다는 뜻일 터. 하나 그렇다 하여 황상과 척을 질 필요도 없으니 성의는 제대로 표해야 할 것이야.”
사람이란 어려울 때 내미는 손을 훨씬 더 오랫동안 기억하는 법이다. 그렇기에 장사꾼인 석소군은 승리자의 손만 잡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손은 두 개니까, 양측의 손을 다 잡아 주면 되는 일이다.
“황실에 들여보낼 선물은 미도, 네가 직접 신경을 쓰거라.”
“예. 장주님.”
석미도는 석소군에게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석소군은 장포 자락을 휘날리면서 저 멀리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자미원을 쳐다보았다.
“자. 그럼 이제 검주에게 생색을 어찌 낼꼬…… 그게 문제로다.”
석소군이 빙긋 웃으며 자신의 수염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