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9. 중과부적 (3)
(349/400)
349. 중과부적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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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9. 중과부적 (3)
2022.05.03.
“커헉!”
만우의 입에서 피화살이 솟구쳐 올랐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 깔린 푸른 운무가 빠른 속도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결국, 재롱이었다는 것이구나.”
만우는 각혈을 하면서 중얼거렸다. 자신의 기천무에 뒤덮이고도 황룡이 그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던 이유를, 만우는 깨달은 것이다.
[제법 재미있는 재롱이었다. 탈각자여.]
황룡이 그런 만우를 보면서 히죽 웃었다. 만우는 그 자리에서 황룡을 한 번 슬쩍 올려다보고는 그대로 눈을 감고 가부좌를 틀었다.
만우의 전신에서 기가 터져 나갈 것처럼 부글거리며 폭주를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인의 경지, 현경의 경지에 도달한 만우라고는 하나 방금처럼 기(氣)와 신(身)에 크나큰 부담을 가져다주는 무학을 강제로 끌어다 써 놓고 무사할 리가 없었다.
거기에 황룡의 진신을 마주하면서 크게 놀란 만우의 정(精)이 불안하게 흔들렸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라도 해야만 했다.
[이제 막 탈각을 시작하였는데 나의 진신까지 보았다라.]
황룡이 운기조식에 들어간 만우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가 우레 소리를 우렁차게 터뜨렸다. 기와 린은 그런 황룡을 올려다보면서 중얼거렸다.
[마음에 드신 듯한데.]
[후……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이야, 기.]
황룡 앞에서도 이제 막 탈각을 시작한 인간이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덤벼들었다?
아마 이 소식이 선계에 퍼진다면 그 누구도 이 소식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자 린이 기에게 당부했다.
[어디에 가든 이번 일은 입 뻥끗도 하지 마.]
[내가 입이 가벼운 줄 알아?]
[중요한 일이야. 만약 이 소식이 투선(鬪仙)들께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난리가 날 테니까. 상제의 말도 안 듣는 분들이잖아.]
[음. 알았어. 명심할게.]
린의 말에 기는 과연 큰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계에는 상제도 말릴 수 없는 사고뭉치들이 여럿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귀에 만우의 소식이 들어간다면.
불과 서른도 안 된 나이에 탈각을 하고 있는, 황룡의 진신까지 봤다는 만우의 소식이 그들의 귀에 들어간다면 난리가 날 것이다.
[저 인간도 성격을 보아하니 절대로 먼저 숙일 성격이 아니야. 그러니까 최선은 오늘의 일을 얌전히 덮고 넘어가는 것이고.]
[명심, 또 명심.]
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때 강한 기운이 일어나더니 운기조식에 들어간 만우를 향해 살기가 빗발쳤다.
카가가가가각!!!!
하지만 그렇게 빗발친 누군가의 공격은 운기조식에 들어간 만우에게 하나도 적중하지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한 막이 만우를 보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어.]
황룡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탄하면서 고개를 돌려 황제를 쳐다봤다. 거대한 존재감과 위압감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황제는 이를 악물었다.
“커헉!”
황제와는 달리 그를 대신하여 만우를 해치우고자 했던 황제의 남진무사, 주순은 황룡의 위압감을 견뎌내지 못하고는 피를 뿜으며 무릎을 꿇었다.
부들부들.
“폐…… 하.”
하지만 이내 주순이 부들거리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자 황룡이 그런 순을 쳐다봤다.
[호오. 저 인간에게서도 황제, 너의 핏줄이 느껴지는구나.]
“…….”
황제의 얼굴이 굳었다. 남진무사 순이 주 씨 성이라는 것은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져 있어야 하는 비밀인데, 그것이 지금 만천하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용의 가호를 받지 않은 핏줄이라면 지금 저렇게 순처럼 황룡의 존재감을 인지하고도 움직일 수 없었다.
[아, 본룡이 비밀을 말해 버린 건가? 의도치 않게 미안하게 되었군.]
황룡은 황제의 표정을 보고는 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그렇게 말했다. 황제는 고개를 들어 그런 황룡을 쳐다보았다.
“황제와 왕의 운명을 가호하는 황룡이라 하였는가?”
황제는 황룡이라는 초월적인 존재 앞에서도 비록 몸은 굳고 긴장하였으나 황제로서의 품위를 버리지 않았다.
마치 원래부터 그리 태어났다는 듯, 황제는 황룡에게도 절대로 말을 높이지 않았다. 수많은 백성들의 어버이이자 절대자가 바로 황제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황제는 그 누구에게도 말을 높일 수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 황룡은 황제의 말투를 가지고 시비를 걸지 않았다
[그렇느니라.]
“하면 어찌하여!!!!”
황제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런 황제는 운기조식에 들어간 만우를 죽일 듯한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황제와 왕의 운명을 가호하는 신수가 나, 주체의 뜻을 거스르려 하는가!!”
쩌렁쩌렁!
황제에게서 패왕의 기운이 물씬 풍겨져 나왔다. 황제와 왕의 운명을 가호하는 것이 황룡이라면 자신의 편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룡은 그런 황제를 금안으로 빤히 쳐다보았다.
[본룡은 황제의 신하가 아니다.]
“하나 나의 운명을 가호한다 하였다!”
황제는 단 위에서 내려왔다. 바닥에는 황룡의 존재감에 혼절한 수천 명의 군사들이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었지만 황제는 그들이 떨어뜨린 창을 집어 들었다.
성큼성큼.
그렇게 한 손에 창을 든 채로 황제는 운기조식에 들어간 만우에게로 가까워져 갔다. 주순은 당장이라도 몸을 움직이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하였으나 지금 서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한데 어찌하여!!!!”
꽈악!
황제는 긴 창을 쥔 손아귀에 힘을 불어넣었다. 황제의 군대 중에서도 북방의 정예병들이 사용하는 창이었기 때문에 제법 창이 손아귀에 착 달라붙었다.
연왕이던 시절 북방을 휩쓸면서 창을 여러 번 쥐어 본 황제이기에 황제는 그대로 양손에 힘을 줘서는 만우를 찔렀다.
캉!!!!
“짐의 운명과 이 동이족 놈의 운명을 겨루고 있는 사이에 신수들이 낀단 말인가!!!!!”
캉! 캉! 캉!
화경인 주순이 온 힘을 다해 한 찌르기도 만우에게 가닿지 못했다. 그러니 당연히 황제의 창도 만우에게 가닿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울분을 토해 내면서 만우를 향해 계속해서 창을 휘둘렀다.
주르륵!
그러자 그 반탄력에 기어코 창을 쥔 황제의 손바닥에서 피가 주륵 하고 흘러내렸다. 황제는 가슴을 들썩거리면서 눈을 들어 하늘 위의 황룡을 쳐다보았다.
“어찌하여 인세(人世)에 네놈들이 끼어드냐 이 말이다!!!!”
[쯧쯧쯧…….]
황룡은 황제의 울분을 들으면서 혀를 쯧 하고 찼다. 황제가 아주 커다란 것을 잊어 놓고는 자신에게 소리를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진 바 재능과 천운, 그리고 인덕은 자신의 가호를 받은 이답게 나쁘지 않았으나 황룡의 눈에 황제는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다.
그것은 황제의 시야가 좁다거나 안목이 뒤떨어지기 때문이 아니다.
전장을 내달리던 말이 질 좋은 여물이 즐비하고 안락한 마굿간 안에서만 살다 보니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것을 잊고 있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그런데 그때 황룡의 주변에서 우레 소리가 터져 나왔다.
꽈르릉!
그와 동시에 운기조식에 들어가 있던 만우가 어느새 끝내고는 가부좌를 틀면서 눈을 떴다.
본래 기천은 행공, 좌공, 와공 등이 전부 가능한 무공이었다.
하나 마음이 흐트러지고, 내부가 진탕이 된 상황에서 가장 빠르게 내부를 진정시키기 위해 좌공을 택한 것이었기에 만우는 잠시 휘청거렸다.
들끓던 내부를 간신히 진정시킨 것뿐이지, 그러면서 얻은 내상은 전혀 치료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진인의 경지에 들어도.’
한 순간의 부동심을 잃으면 이렇게 되는 법이었다. 만우는 아주 비싼 대가를 치렀다고 생각하며 부들부들 떨고 있는 황제를 향해 발을 뗐다.
쉬익!!!
“네놈은.”
만우의 신형이 호흡 한 번 들이마시고 내뱉는 사이에 황제의 지척에 나타났다. 하지만 그 순간 있는 힘을 모두 쥐어 짜낸 주순이 그런 만우를 향해 달려들었다.
“떨어져라 검주!!!”
쐐애애액!!!
맨 처음의 일격에 비하면 하품이 나올 정도로 약한 공격이었지만 지금은 그것이 주순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턱!
만우는 그렇게 내뻗어진 주순의 창을 한 손으로 붙잡은 뒤 손에 힘을 줘서는 그 창을 뺏어 들어 창극이 달려 있지 않은 창끝을 휘둘렀다.
뻑!!!
쿵!!
만우가 그린 궤적에 정확하게 주순의 턱 끝이 걸려들었다. 뻑 하는 소리와 함께 주순이 정신을 잃고 통나무처럼 옆으로 쓰러지자 만우는 손에 들고 있던 창을 내던졌다.
텅! 텅!
데구르르르.
황제는 그런 만우를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바로 지근거리에 만우가 있었지만 그렇다 하여 황제는 겁을 먹은 기색이 전혀 없었다.
“네놈은 말이다.”
만우는 주순 때문에 도중에 끊긴 말을 마저 황제에게 했다.
“이 자리에 정녕 네놈과 나만 있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
황제는 아무 말 없이 그런 만우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만우가 한 말에 하늘의 우레 소리가 한층 더 커졌다.
힐끗하고 하늘 위의 황룡을 바라본 만우는 다시 시선을 내려 황제의 얼굴을 쳐다봤다. 황제의 키는 만우와 비슷했고 기골이 장대했는데 눈에서는 제왕의 기운이 줄줄 흐르는 듯했다.
“여기 쓰러져 있는 네놈들이 신하와 군대들은 보이지도 않아? 그래 놓고서는 네놈의 운명과 나의 운명이 부딪치는데 왜 저들이 끼어들었냐고?”
만우는 코웃음을 쳤다.
“그 황제의 면류관. 네놈이 그 길지 않은 생을 다하고 관짝에 들어가 혼이 되어도 그것이 계속될 것 같더냐?”
“그…….”
“네놈이 벌인 일에 여기서 몇 명의 운명이 얽혔는지를 먼저 생각해 보라, 그 말이다!”
빠악!!!
만우의 주먹이 황제의 턱에 들어가 꽂혔다. 하지만 만우는 이번에는 주먹에 내공을 싣지 않았다. 다행히 아직 그 정도의 분별력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부웅!
털썩!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위력이 약하다는 뜻은 아니다. 맞고 죽지 않을 정도라는 것이지 그에 담긴 힘은 황제를 뒤로 나가떨어지게 하기에 충분했다.
“…….”
황제는 대(大) 자로 벌러덩 드러누웠다. 손에 들고 있던 창은 만우에게 한 방 맞음과 동시에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그런 황제의 두 눈에 하늘을 가득 채운 용의 황금빛 거체가 가득 들어왔다.
“제 백성도, 군사도 아끼지 않는 자가 황제라니. 명의 백성들이 불쌍해질 지경이다.”
만우는 하늘을 본 채로 드러누운 황제에게 차갑게 중얼거렸다.
꽈르르릉!!!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하늘을 가득 채운 황룡에게서 우레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소리가 시끄러웠기 때문에 만우는 인상을 쓰고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네 눈에는 보이더냐?]
“뭐가 보인다는 거야.”
[운명의 와류.]
황룡은 만우가 정확하게 자신이 황제에게 하려 했던 말을 짚어 낸 것을 보고 물었다. 만우는 그런 황룡을 향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그런 게 내 눈에 어떻게 보여.”
[그럼 어떻게 알고 황제에게 그리 이야기를 한 것이지?]
“당연한 거 아니야? 달고 다니는 눈이 장식도 아니고, 여기 쓰러진 사람들이 안 보이면 여기 있을 게 아니라 의원을 찾아가야지.”
만우는 쓸데없는 것을 물어본다면서 투덜거렸다. 안 그래도 제 맘대로 불가살이를 날려 버려서는 황룡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은데 말이다.
그래도 저번의 주작처럼 감히 자신이 오르지 못할 나무란 것을 알고 있었기에 만우는 발작적으로 황룡에게 달려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만우가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여기서 더 강해지면.’
아직은 저 황룡에게 검 하나 날리는 것도 실력이 부족해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만약 정, 기, 신의 균형을 맞춘 뒤 상인의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면?
기천의 궁극인 상인(上人)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면 저 황룡과도 능히 자웅을 겨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오늘 당한 수치와 수모는 절대로 잊을 생각이 추호도 없는 만우였기에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반드시.’
오를 나무가 없어 방황하던 찰나에 눈앞에 나타난 끝이 안 보이는 거목이다. 만우는 그에 호승심과 투지를 불태우며 스스로에게 다짐한 뒤 기린을 쳐다봤다.
“구경꾼으로 있다 갈 셈이냐?”
[…….]
[…….]
“이게 원래 약조의 내용은 아니었을 텐데.”
만우는 황룡이 나타난 이후에 병풍이 되 버린 기린을 보면서 비꼬았다. 애시당초 저들이 한 약조에는 황룡이 나타날 것이란 내용도 없을 뿐더러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는 것도 없었다.
“이 일을 해결해 줄 신수란 것들이 둘은 구경이나 하고 있고 하나는 나와서 증인으로 삼을 사람들을 싹 다 기절시켜 놓고.”
[증인?]
황룡이 머리 위에서 우렁우렁하며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그러자 만우가 인상을 빡 쓰고는 위를 올려다봤다.
“넌 사람으로 변하는 거, 그런 거 못 해? 얘네들은 둔갑 같은 거 하던데.”
신수들을 마치 옆집 똥개 말하는 것처럼 ‘얘네, 쟤네’하는 만우였다. 황룡도 그의 헤아릴 수 없는 용생에 이런 황당한 인간은 처음 보기에 금안을 잠시 끔뻑였다.
[아. 그렇다는 건가. 그럼 잠시.]
파아아아앗!!!
그 순간 어마어마한 선기가 황룡으로부터 뿜어져 나왔다. 진인, 기신에 도달하면서 원영신이 생겨 상단전이 열리기 시작한 만우가 순간적으로 헛숨을 들이켰을 정도의 선기였다.
그렇게 모여든 선기가 빛으로 변해 황룡을 감싸자 그 크기가 급속도로 작아지기 시작했다.
작게, 작게, 더 작게.
[흠. 어떠한가?]
“꼭 색목인 같은데.”
그리고 그렇게 모여든 선기가 가시고 나자 황룡의 모습이 드러났다. 인간으로 둔갑한 황룡은 빼어난 미남이었는데, 곤룡포를 걸친 채 탐스러운 금발을 늘어뜨린 금안의 미남자였다.
그 모습이 몇 번 중원을 유람할 때 본 적이 있었던 서역에서 온 색목인 같았다.
[어쨌든. 증인이라니?]
“증인. 그래. 그 이야기부터 하자.”
이미 자미원에서의 계획은 모두 다 어그러졌다. 거기에 황제는 만우에게 한 대 얻어맞고는 마치 혼백이 빠져나간 것처럼 대자로 누워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고 그나마 버틴 척일과 척사영은 숨소리도 내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까.”
만우는 어젯밤에 기린과 했었던 약조에 대해서 황룡에게 말했다.
기린은 만우에게 황제를 만나러 가 피를 보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천살성이 탄생할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는데, 그것을 해주는 대가로 만우는 기린에게 조건을 내걸었다.
하나, 이번 명과 조선 사이에 일어난 이 호송단이니 죄인이니 하는 일들을 신수인 너희들이 나서서 깔끔하게 정리를 해 달라.
지가 대국의 황제랍시고 다짜고짜 조선으로 그딴 칙서를 보내서 사람을 이 먼 길을 오게 만든 것이니, 그 문제에 대한 깔끔한 해결이 필요했다.
황제를 세뇌를 하건, 겁박을 하건, 설득을 하건 무슨 수를 써서건 간에 기린이 나서서 그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한 것이다.
둘째, 피를 흘리지 않기 위해서는 내가 세운 작전에 따라라.
제 아무리 그 무(武)가 인간들 중 하늘에 닿은 만우라고 해서 타인의 생각이나 감정까지 조절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만우는 기린에게 이번 문제를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다.
간단하지만, 기린이 수천 년 간 살아온 신수의 자존심을 버려야만 할 수 있는 방법.
“무릎을 꿇으라고 했지. 인간들이 보는 앞에서.”
[뭐?]
황룡이 두 눈을 크게 뜨고는 고개를 돌려 아직 본체 상태인 기와 린을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그게 사실이냐는 뜻이었다.
그러자 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의 목표는 상제께서 내리신 일을 마무리하는 것이었습니다, 황룡. 수천 년이란 시간일 뿐이니, 자존심이랄 것도 없습니다.]
[허어.]
기는 그렇지 않은 듯했지만 린의 말에 대신 나서지도 않았다. 하지만 황룡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같은 신수인 황룡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신수라는 것, 수천 년간 스스로를 돌아보고 끊임없는 욕망과 욕구와 맞서 싸워야만 될 수 있는 신수가 됐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는 신수들이 여럿이기 때문이다.
당장 황룡만 해도 그러했다.
“그런데 그걸 황룡, 그대가 망친 거다.”
만우는 황룡을 원망하는 눈으로 쳐다봤다. 그것뿐만 아니라 황룡은 갑자기 튀어나와서는 불가살이까지 없애 버렸다. 만우는 애검(愛劍)까지 잃은 것이다.
[허어…… 하나…….]
황룡 역시 상제에게 부탁을 받고 자미원에 강림했다. 탈각자가 될 만우를 시험해 보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자신으로 인해 많은 것이 어그러졌으니, 황룡은 뭐라 할 말이 없었다.
“‘하나’는 무슨. 그에 대한 보상은 황룡, 그대가 해야지.”
황룡이 이미 넘을 수 없는 벽이란 것은 뼈저리게 느낀 만우다. 격의 차이가 너무나도 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우는 그런 황룡을 보면서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치켜들고 당당하게 이번 일을 배상하라는 만우를 보면서 기린이 안절부절못할 정도다.
“왕과 황제의 운명을 가호하는 황룡.”
왜냐하면 만우에게도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림에도 일패이왕삼존사주라는 게 있는데 말이야.”
만우가 목소리를 착 하고 깔았다. 황룡이 다른 말을 하지 못하게 아예 못 박아 두기 위함이었다.
“그곳에서 으뜸인 것도 왕과 황제의 운명을 타고난 것과 비슷한 거겠지?”
[……뭐?]
“핏줄을 타고 태어나 그대의 가호를 받는 것이 아니라, 순수히 노력만으로 무림이란 세계에서 최고에 오른 이들, 그렇게 으뜸이 된 이들이 더 가치 있는 것 아니냐, 이 말이지.”
[흠…….]
왕과 황제란 것은 곧 으뜸, 최고(最高)임을 뜻한다. 그러니 만우의 말에 약간 언어적인 유희가 들어가 있다고는 하나 아예 말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이번 일.”
만우가 손가락을 들어 대(大)자로 드러누운 황제를 가리켰다.
“황룡, 그대가 처리해 줘야 하겠는데. 아, 기린, 그대들은 약조를 어겼으니 당연히 새로이 약조를 해야 할 것이고.”
황룡과 기린이 만우에게 점점 말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