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3. 과거의 약조 (4)
(343/400)
343. 과거의 약조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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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3. 과거의 약조 (4)
2022.04.12.
두두두둑!!
그때 자미원으로 이어진 연경대로의 양 옆에서 두둑거리는 소리와 함께 말을 탄 기마병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것을 본 동군영과 설미수가 놀라 풀썩이는 것을 보면서 만우는 말의 고삐를 쥐어 챘다.
“워, 워.”
말은 생각보다 대단히 예민한 동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수가 놀라면 말 역시 놀라서 날뛰게 되어 있다. 그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마주가 말고삐를 낚아챈 덕에 말들은 다행히 안정을 되찾았다.
두두둑, 두둑!
하지만 자미원까지 이어진 연경대로에 기마병들이 새카맣게 들어차기 시작하자 삼엄한 군기가 삽시간에 사행단 전체를 찍어 눌렀다.
척일이나 척사영 같은 고수들은 괜찮았지만 그래도 명색이 무림에 이름을 제법 날렸다는 초절정 사인방도 갑주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장착한 수백의 기마대를 보자 몸이 바짝 굳고 입이 바싹 말랐다.
황군(皇軍)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지금 상황이 그만큼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괜찮아. 괜찮아.”
그때 만우가 말의 목덜미를 쓸어내리며 내는 목소리가 사행단 모두의 귓전에서 울려 퍼졌다. 그러자 놀랍게도 바짝 올라갔던 긴장이 녹아내렸다.
척, 처저저적!!!
그렇게 자미원까지의 연경대로 위에 도열한 기마대들은 만우와 사행단을 보면서 옆으로 한 발자국씩을 비켜났다.
그러자 아예 막혔던 길이 열렸다. 수백의 기마대가 도열한 그 옆으로 간신히 말 하나가 지나갈 정도의 길이 열린 것이다.
척, 척.
“이곳에서부터 하마(下馬)하여 걸어가시오!”
양 옆으로 도열한 기마대 사이에서 투구 끝에 붉은 솔을 단 부관 하나가 나와 사행단 앞에 서서는 동군영과 설미수를 쳐다보면서 소리쳤다.
만우가 고개를 들어 동군영과 설미수를 쳐다보자 설미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설미수가 먼저 말에서 내렸고 그 다음으로 동군영이 말에서 내렸다.
종래에는 수레 위에 타고 있던 방매와 간장, 호선까지 내리자 기마병 몇이 말에서 내려서는 다가와 말과 수레를 끌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따라오시오.”
그리고 그런 만우와 사행단을 향해 붉은 솔을 단 부관이 말했다. 그런데 부관은 말 위에서 내리지 않았기에 만우와 사행단이 그를 올려다보는 모양새였다.
이건 외교적인 큰 결례였다.
제 아무리 대명의 천자라고 해도 사행단을 이렇게 대해서는 안 되는 법이었다. 물론 천자는 이들이 사행단이라 생각하지 않을 것이지만 말이다.
“자꾸만 명분을 챙기려는 것 같은데.”
만우는 붉은 솔을 단 부관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러자 지풍이 팡 하고 튀어 나가더니 말의 엉덩이를 딱 하고 때렸다.
이히히히힝!!!!
“워, 워…….”
딱!
히히히힝!!
풀썩.
부관이 탄 말이 잘 훈련된 전투마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말의 본능을 전부 없앤 것은 아니다.
그러니 당연히 놀라서 앞발을 치켜든 전투마를 보며 뒷다리의 오금에 지풍을 날린 만우는 전투마가 풀썩 쓰러지는 것을 보고는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처적!
쓰러지는 전투마 위에서 몸을 날려 흑표처럼 착지한 부관이 고개를 돌려 성난 눈으로 만우를 쳐다봤다.
하지만 만우는 되레 그 부관을 향해 기세를 뿜어냈다.
“강호무림의 천하제일이 명 천자를 만나러 온 길이다. 본주가 천자보다 밑이 아니니, 그대 역시 눈을 낮춰라.”
퍽!
털썩!
어디선가 또 다시 날아온 지풍이 부관의 무릎을 털썩 꿇게 만들었다. 그 모습에 만우의 뒤에 선 설미수와 동군영이 까무라칠 것처럼 얼굴이 창백해졌다.
만우는 아예 들어가면서부터 일을 크게 만들고 있었다.
“본주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인데.”
당연히 황군이 만우의 그 오만방자한 말이 마음에 들 리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만우 역시 여기서 약하게 나갈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하면 네놈들이 막아 보겠느냐? 황군이니 저 허섭스레기들보다는 낫겠지.”
만우는 자신이 걸어온 길을 가리켰다. 하나 그것은 단순히 만우가 황룡객잔에서 걸어온 길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조선에서부터 이곳까지 도달하면서 걸어온 길.
만우가 가리키는 손가락은 그 모든 길을 가리키고 있었다.
부르르.
부관은 굴욕감에 두 주먹을 쥐고는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그가 받은 명령은 만우를 사살하는 일이 아니었기에 이를 악 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존심이 왕창 뭉그러졌지만 그런 자존심보다는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분의 명령이 우선이었다.
“…….”
휙!
부관은 말도 하지 않고는 몸을 돌렸다. 만우는 그런 부관을 보면서 피식 웃고는 고개를 돌려 동군영에게 말했다.
“나리. 가시지요.”
“만우 자…… 자네…….”
동군영이 입을 뻐끔거리면서 말을 쉬이 잇지 못하자 만우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동구녕.”
“…….”
“이미 이렇게 될 것이란 거, 조선에서 나를 압송하는 대신 사행단으로 보낼 때부터 각오한 것 아니었어?”
“…….”
사람의 상상력이란 생각보다 상당히 빈곤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빈곤한 상상력을 가진 사람으로서 동군영은 지금 이러한 상황까지는 단연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단지 지금까지 보인 만우의 행보가 상상 이상이니, 자신이 전혀 예상치 못 할 길이 될 것이라고만 짐작했을 뿐이다.
설마 만우를 따라오는 이 길이 결국 명나라 전체를 대적하는 일이 될 줄 그 누가 알았겠는가.
“어차피 피할 수 없어. 그럼 즐겨. 어깨 피고, 굳은 표정도 좀 피고.”
“그게 말이 쉽지…….”
“말만 쉬운 게 아니라 여기까지 오는 길도 쉽게 만든 게 나야. 여기 콧대 높은 놈들이 곧바로 인정하지 못하고 꼭 한 번씩 당한 다음에 인정하는 천하제일이 나라고.”
천하제일(天下第一).
동군영은 조선이란 작은 나라에서 나고 자라면서 그 네 음절을 생각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이 세상의 중심은 조선이 아니라 명나라였고, 학문의 중심 역시 조선의 성균관이 아니라 바로 명나라였으니까.
어찌 감히 조선에서 나고 자라 천하제일이란 것을 생각이나 해 봤겠는가.
근데 눈앞의 만우는 그것을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입에 올리고 있었다.
비록 검과 무공이라는 낯선 학문이지만 만우는 그것으로 당당히 천하제일을 논하고 있었다.
“후읍.”
동군영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래, 여기까지 왔는데 예까지 와서 하지 못할 일이 또 무엇이란 말인가.
여기에 오기까지 모든 것을 하는 데 있어 만우가 앞장섰다. 그렇게 만우의 뒤를 따르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그러니 이제 와서 또 무엇을 더 믿겠는가.
“너를 믿는다, 만우.”
“좋아. 어깨 피고, 고개 치켜들고. 가진 게 쥐뿔도 없더라도 자존심은 있어야지. 큭큭.”
동군영이 어깨를 피고 고개를 들자 만우가 큭큭 웃었다. 그렇게 동군영의 정신무장을 새롭게 해 준 만우는 고개를 슬쩍 들어 허공 어딘가를 쳐다봤다.
기린.
육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자미원의 하늘 저 어디쯤 기린이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경천동지(驚天動地)라.’
오늘이 지나면 하늘이 놀라고 땅이 떨리듯 세상사람 모두가 화들짝 놀랄 것이다. 만우는 칼 같은 군기로 사행단을 압박하기 위해 도열한 기마대 사이를 여유롭게 뒷짐을 진 채로 걷기 시작했다.
*****
“공녀?”
“예, 문주.”
임택평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대체 그 여아가 무엇이라고.”
방매가 상왕에게서 사성받아 옹주가 되었음을 아는 이는 조선에도 극히 드물었다. 하물며 중원의 하오문에 그 소문이 들어갔을 리 없었다.
그저 그들이 궁금해하는 것은 만우와 방매의 관계였다.
“남녀 사이에 상열을 빼면 무엇이 있겠습니까, 문주.”
“그리 간단한 일이더냐?”
임택평은 얼굴을 찌푸렸다. 이 와중에도 자신의 딸인 임수미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는 오리무중이었다. 그저 그들이 기대며 바라보는 것은 만우 하나뿐이었다.
“혹시 검주가 남색을…….”
“슷!”
임택평이 도끼눈을 뜨면서 그 말을 한 간부를 쳐다봤다. 사실 검주를 자신의 지지 세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을 해 보지 않은 무림 세력은 없었다.
다들 한 번씩은 검주의 명예와 실력을 노리고는 어떻게든 접근을 해 봤던 것이다.
그런데 만우는 단 한 번도 여색에 의해 흔들린 적이 없었다.
고작 약관의 나이에 무림에 출도하였음에도 그 혈기왕성한 나이에 만우는 단 한 번도 검 이외의 다른 곳에 쓸데없이 눈길을 빼앗긴 적이 없었다.
그중에는 무림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섯 송이의 꽃이라 하여 화화(花花)라 불리던 초옥도 포함이 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만우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특히 초옥은 시서예화에 모두 능통한 데다가 무공도 일류 이상으로 익힌 무림 최고의 기생이자 지재상인이기도 했다.
하오문이나 개방과는 다르지만 무림인이나 고관대작들을 전문으로 상대하는 기루를 큰 성마다 하나씩 세워, 치마폭으로 남자들을 휘감아 고급 정보들을 뽑아내어 그것을 거래하는 것으로 유명한 백화루(白花樓)의 주인이 바로 그녀였다.
하오문에서도 몇 번이나 그녀를 하오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했다가 거절당했기 때문에 임택평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초옥마저 실패했다는 소식에 검주에 관심이 있는 이들 중 검주를 바라보는 눈빛이 바뀐 이들이 있었다.
여색이 하나도 통하지 않았으니, 혹시 검주가 남색에 관심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미소년을 은밀히 보내 검주를 시중들게 한 적이 있었었다.
그리고?
그날, 경치 좋고 물 좋아 웬만한 세력으로는 발을 들이밀지도 못한다고 알려진 항주(杭州)에서 최고는 아니지만 그래도 대여섯 번째쯤 하는 커다란 문파 하나가 기둥뿌리 하나 남기지 않고 싹 쓸렸다.
물론 그 때문에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서 한때 중원이 시끄러웠던 적이 있었지만 어쨌든 검주에게 남색은 금기였다.
비록 검주의 귀가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는 하나 임택평은 만의 하나라도 가능성을 남겨 놓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하나 문주. 그게 아니라면 검주가 일개 매분구에게 그리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임택평은 찝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또 풀리지 않는 문젯거리였기 때문이다.
검주가 여인을 구하려 했다면 아마 무림에 난다 긴다 하는 집안의 여식이나 이름 난 여인들을 얼마든지 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여인들을 다 마다하고, 사내 같은 차림을 한 그 매분구라?
‘진짜 남색 아니야? 왜 하필이면 남장을 한 그 여아를…….’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이상한 생각을 했던 임택평은 뜨끔 놀라서는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그는 아주아주 오래오래 살고 싶었다.
“한데 하필이면 내각대학사 댁의 몸종이라.”
“검주가 원하였으니 원하는 바를 가서 그냥 알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문주.”
임택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면 만우가 부탁한 것을 백분 충실히 수행하게 되는 셈이었다.
“그런데 누가 가서 전할 건데.”
“…….”
임택평이 좌중을 살펴보자 다들 땅을 쳐다보면서 딴청을 부렸다. 혹시라도 임택평이 자신에게 시킬까 다들 꺼려졌던 것이다.
그러자 임택평이 울화통이 치밀어 오른다는 표정으로 소리쳤다.
“야! 수미라고 수미! 수미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자미원에 들어가라고 하는 말씀이지 않습니까, 문주. 그냥 죽으라고 하십쇼.”
“검주가 살아 나올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판 아닙니까, 솔직히.”
임택평의 말에 간부들이 투덜대면서 한마디씩을 했다. 다들 임수미를 아끼지 않는 것은 아니나 검주가 처한 상황 역시 모르는 이들은 그 자리에 없었다.
“어제 기절한 애들은.”
“아직…….”
“아니, 대체 뭔 일이 있었길래 다들 기절을 한 거야? 어?”
연경에 몰래 숨어 황룡객잔을 염탐하던 이들 중에는 당연히 하오문도 포함되어 있었다. 문제는 나름 정예들을 뽑아서 보낸 것인데 그들이 하라는 염탐은 안 하고 전부 혼절한 채로 다음날 발견이 되었다는 것이다.
안 그래도 머리가 복잡한데 이해하지 못할 일이 또 일어나자 임택평은 머리카락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무림맹 이 개자식들.”
임택평은 이를 뿌득뿌득 갈면서 종이를 꺼내 만우가 알아 달라고 부탁한 정보들을 써 내려갔다.
“다 뒤졌으면 좋겠다. 그냥 싹.”
용접곡에서 무림맹이 호되게 당했다고 했을 때 얼마나 통쾌했던가. 비록 힘이 없어 딸이 납치된 사실을 알고서도 할 수 있는 것이 만우만 바라보는 일뿐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분노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임택평은 만우가 간절히 황제의 손아귀에서도 살아나오길 바라면서 종잇장에 빼곡하게 내각대학사의 몸종에 대한 것을 적어 내려갔다.
*****
“온소.”
“예, 장주.”
석소군의 말에 적포쌍검 온소가 단전에 힘을 단단히 주고서는 우렁차게 소리쳤다.
석가장의 최고 존엄인 가주가 나온다는 온소의 외침소리에 전각에 미리 앉아 있던 석가장의 주요 간부들이 분분히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손을 모았다.
스윽.
시비가 열어 준 문으로 들어온 석소군의 전신에서는 투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그 짧은 사이에 석소군이 또 다시 한 단계 더 성장한 것이다.
절정의 극에 달한 석소군의 성장세는 초절정인 온소가 보기에도 가히 경탄스러울 수준이었다. 중원 전체의 황금을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석소군에게 황금신공만큼 잘 어울리는 무공은 없었다.
물론 하도 황금을 많이 쏟아부어 이제 황금이 황금처럼 보이지 않을 지경에 오른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말이다.
“일검진천 야율태!”
석소군은 상석에 앉자마자 곧바로 아율태의 이름을 호명했다. 그러자 석가장의 재물로 초청한 빈객들로 구성된 제일표국의 대표두이자 새롭게 화경의 경지에 들어선 야율태가 걸어 나왔다.
“온소.”
척!
그런 야율태를 쳐다보는 온소의 눈빛이 착잡했지만 석소군의 부름에 온소는 지체 없이 움직였다. 온소는 야율태를 위해 석소군이 따로 마련한 장검을 받아들었다.
“중원과 북해, 세외의 이름난 대장장이들을 불러 모아 운철로 만든 검이네.”
그렇게 귀한 것으로, 귀한 사람들이 만든 장검이란 것에 야율태의 눈가가 살짝 떨렸다. 운철은 하늘에서 떨어진 운석에서 나온 철로 그 희소성 때문에 같은 무게의 황금보다도 더 비싼 광물이었다.
거기에 중원과 북해, 거기에 세외의 대장장이들의 손을 통해 만들어졌다면 그것 역시 부르는 것이 곧 값인 검이다.
그것을 야율태에게 하사했다는 것은 딱 한 가지.
석가장의 관점대로라면 아율태란 인물의 가치가 그에게 하사한 운철검처럼 그 역시도 가격을 매길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대에게 지급되는 월봉을 황금 백 냥으로 늘리겠네. 또한 따로 전각을 두어 그 전각을 진천각이라 부르고, 시비와 하인 쉰을 내리겠네.”
석가장의 돈지랄은 천하으뜸이다. 황실도 따라올 수 없는 석가장의 씀씀이에 야율태의 눈이 커졌다.
능력이 있다면 그만큼 보상이 후하고 확실한 곳이 바로 석가장이다. 야율태가 허리를 깊게 숙여 읍했다.
“가주님의 성의에 감사드리오.”
“성의라니. 화경에 올랐거늘 원하면 더 해 줄 수도 있네. 말해 보시게.”
석소군은 대견하다는 눈으로 야율태를 쳐다봤다. 그러자 야율태가 눈을 반짝하고 빛내며 포권을 했다.
“하면 이 야율 모가 장주께 청을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말해 보시게.”
석소군의 씀씀이는 과연 석가장의 가주다웠다. 거기에 석가장에서 그리 소원해 마지않던 화경의 고수가 나왔기에 석소군은 야율태에게 자신의 딸인 석미도를 내어 주는 것 외에는 뭐든지 다 보상을 해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야율태의 입에서 나온 말은 석소군을 고민케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 야율 모가 화경에 이르는 데는 은인의 도움이 컸습니다. 하니 그 은혜를 마땅히 갚기 위해 은인께 도움을 드리고 싶은 즉, 허락해 주십시오.”
“야율 형!”
온소가 놀라 그런 야율태를 자신도 모르게 불렀다. 그러자 야율태가 씩 웃으며 온소를 쳐다봤다.
“온 형께서 할 말이 있으시오?”
적포쌍검 온소와 일검진천 야율태는 석가장이 자랑하는 최고수들이었다. 은근히 경쟁구도가 만들어져 있다가 야율태가 화경에 오르며 그 균형이 깨졌지만 그전에 온소와 야율태는 매우 친밀한 사이였다.
“혹 그 은인이 검주를 말씀하시는 것이오?”
“천하제일검이신 검주 대협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며 맞소이다.”
야율태는 검주를 천하제일검이라 칭했다. 그가 본 만우는 과연 천하제일검이란 칭호가 아깝지 않은 검객이었기 때문이다.
검 한 자루를 들고 약관의 나이에 무림에 출도하여 무림십좌에 오르고, 고금에 몇 없는 현경에 오른 만우는 그야말로 검을 든 모든 무림인들의 우상이다.
심지어 야율태는 만우의 가르침을 받아 화경에까지 올랐다. 은원이 확실한 것이 무림의 도리이니, 은혜를 갚기 위해 야율태가 나서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황실과 나라의 죄인인 죄인이기도 합니다, 야율 형.”
온소가 야율태에게 말했다. 그러자 야율태는 석소군을 쳐다봤다.
“장주께서도 그리 생각하십니까?”
석소군은 야율태를 쳐다봤다. 그리고는 그 뒤에 선 석미도까지 쳐다봤다. 석소군은 석미도와 야율태를 보면서 속으로 감탄했다.
검주란 자, 그자가 그 짧은 시간동안 석미도와 야율태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만큼 비범하다는 것이겠지.’
그래서 동창제독인 부로 앞에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던 석소군이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검주가 연경에 들어섰다는 보고를 받았지. 그리고 그가 황보세가의 황보천과 북진무사 황보경을 쓰러뜨리고 자미원으로 향할 것이라는 것도.”
연경에서의 전서구는 거의 일다경마다 하나씩 석가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만큼 석가장에서 연경에서 일어나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는 뜻이었다.
“한데 검주를 위해 가겠다?”
“은혜를 모르는 것은 금수라 생각합니다, 장주.”
야율태는 석소군에게도 당당했다. 애시당초부터 그는 빈객이지, 석가장의 가솔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석소군은 빙긋 웃으며 야율태를 쳐다봤다.
“그대로 인해 석가장에 화가 미칠 수도 있네만.”
“팔이라도 내어드리고 가오리까?”
야율태는 거침없었다. 야율태는 진짜로 만우를 위해 반드시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석소군은 그런 야율태를 보면서 빙긋 웃었다.
“떼어 내면 쓸모도 없는 팔, 받아서 무엇하리. 그 팔 붙여서 다시 잘 오시게. 온소!”
“장주!”
“내가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궁금한 것이 하나 있었단 말이지.”
석소군은 자신을 말리려고 하는 온소를 향해 한 손을 들어 보이고는 말했다.
“황상께서 정녕 그 황실의 수치라 불리는 일을 씻고 싶어 하시는 것인지 말이야.”
“…….”
“노리시는 것이 따로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장주?”
석미도가 온소 대신 나서서 물었다. 석소군은 석미도와 눈을 마주치고는 속으로 웃었다. 석미도는 일부러 지금 석소군의 대답을 이끌어 내기 위해 나선 것이었다.
확실히, 자신의 딸이긴 하지만 머리가 비상한 아이였다.
“만약 검주에게 황실이 또 다시 한 번 예전의 그 수치를 맛보게 된다면, 분노한 황상의 검이 어디로 향하게 될까?”
“……설마.”
“황상께서는 욕심이 많으시지. 하니 연왕의 자리에 만족하시지 못하셨던 것이고.”
황제의 욕심에 대해 석소군이 말하자 전각에 모인 석가장 간부들의 눈이 커졌다. 석가장은 기본적으로 상단이기에 그들 모두 이해득실에 머리 회전이 대단히 빠른 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런 이들이 석소군이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할 리 만무했다.
검주에게 패한 황상의 칼이 향하는 곳.
무림이다.
“검주는 조선으로 돌아갈 이방인이다. 황상께서 조선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실 생각이 아니시라면.”
“황상께서 전쟁을 하시려거든 넘어야 할 산이 많다고 들었사옵니다.”
석미도가 적절한 순간에 끼어들어 석소군의 말에 힘을 보탰다. 일견 보기에 작금의 황상의 권위는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대단하였으나 이 거대한 제국은 황제 하나에 의해서 돌아가지 않는다.
조카를 몰아내고 차지한 황위를 지키기 위해서는 정통성을 지키는 것이 중요했는데, 호시탐탐 그를 노리는 대신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대신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손에 쥔 황상이라고 해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대명을 세운 홍무제를 도운 개국공신들.
그들 중 살아 있거나 개국의 공으로 명문가를 일군 이들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황상의 치정을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조선을 상대로 군을 일으키시지는 않으실 테고.”
석소군은 눈으로 호선을 그리며 간부들을 쳐다봤다. 전쟁, 혹은 그에 준하는 일이 벌어지면 상단을 운영하는 석가장의 입장에서는 큰 재물을 벌어들일 절호의 기회다.
그러니 그들은 석소군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이득을 최대한 크게 볼 수 있는 그림을 머릿속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무림을 손에 넣으려 하시겠지. 명분도 충분치 않더냐.”
검주, 무림인인 검주가 자미원까지 들어와 결국 또 다시 황실을 무릎 꿇렸다.
강호무림의 위험성을 설파하기에 그보다 더 좋은 명분은 없다. 그러니 황상은 강호무림에 쌓인 분노를 터뜨릴 것이고, 강호무림은 결국 황상의 진노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나 장주.”
간부 중 하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하남성 석가상단의 총책임자였다.
“검주가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어찌합니까.”
황실을 무릎 꿇린 검주가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고 중원에 계속 머물러 있는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석소군은 좋은 질문을 한 간부의 얼굴을 기억해 놓으며 빙긋 웃어 보였다.
“그 역시 말이 된다. 검주가 명실공히 새로운 무림의 황제가 되는 것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자연재해와도 같은 일이니.”
이미 검주 만우가 천하제일인이란 소문은 마교와 석가장에 의해 무림 전역에 널리널리 퍼지고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 황실을 무릎 꿇린 사실까지 소문으로 퍼져 나간다면 만우는 원한다면 무림의 황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석소군은 고개를 돌려 마지막으로 야율태를 쳐다봤다.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석소군은 말을 빙빙 돌린 것이다.
“대표두 그대에게 제일표국과 인해표국, 독랑단을 모두 내어 줄 터이니 연경으로 가시게.”
“!!!!!!”
안 그래도 석가상단의 외부 업무를 담당하는 전투집단인 제일표국과 인해표국, 독랑단을 전부 소집하라 하였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풀렸다.
그들을 모두 합하면 물경 사천에 이르는 무인들이다.
“만일 미도와 대표두가 나에게 말한 검주 만우에 대한 것 중 절반만 진실이라 하여도.”
석소군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검주에게 빚이든, 연이든 맺어 두는 것이 우리 석가장의 미래에 있어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일세. 그것이 나의 결론이네.”
척!
야율태는 그런 석소군을 향해 포권을 취해 보였다.
“장주의 명에 따르겠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