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2. 과거의 약조 (3)
(342/400)
342. 과거의 약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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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2. 과거의 약조 (3)
2022.04.09.
꽈르릉!!!
척일이 손가락을 들어 만우를 가리켰다. 그러자 문형일은 만우가 기습을 당했음에도 제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밀려나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했다.
“킁.”
굉음이 가라앉고 옆으로 휙 하고 꺾였던 만우의 고개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동시에 만우는 제법이라는 듯 씩 웃으면서 한 쪽 콧구멍을 막은 채 강하게 호흡을 내뱉었다.
그러자 코 안에 뭉쳐 있었던 코피가 쭉 하고 빠져나와서는 땅에 떨어졌다.
“역시. 썩어도 준치라고 소림이 황보세가보다는 나아. 그렇지?”
만우는 고개를 돌려 황보천을 쳐다봤다. 황보천은 만우의 손아귀에서 가까스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덜렁거리는 팔을 보니 그냥 멀쩡히 벗어날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어이쿠. 부러졌나? 살짝 쥔다는 게.”
“검주…….”
황보천은 이를 까득 하고 갈았다. 만우의 빈틈을 노리고 내뻗은 일권이 너무나도 쉽사리 붙잡혔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다.
그나마도 누군가가 만우를 기습하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그의 손에 걸려 끝이 날 뻔했다. 팔 하나가 부러져서 끝낸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만우는 고개를 돌려 저쪽에서 빠르게 가까워지는 강렬한 기운을 느끼고는 히죽 웃었다.
“그런데 아직도 기습하는 버릇은 버리지 못했어. 땡추.”
“검주!!!”
쩌렁 쩌렁!
항마(降魔)의 기운이 담긴 사자후와 함께 불존 진한대사가 겅중겅중 지붕을 뛰어넘으며 만우에게로 쇄도해 들었다. 만우는 불존이 허리에 딱 붙인 주먹에서 이글거리는 공력을 보면서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우득, 우드득.
“제법 아찔했어.”
소림의 절학 중 하나인 백보신권(百步神拳)을 만우는 굳이 피하지 않았다. 용접곡에서의 그였다면 그런 도박은 하지 않았을 것이나 지금의 만우는 그때와 또 달랐다.
그 증거로 백보신권을 맞아 놓고도 코피가 난 것이 고작이었다.
“음…….”
만우는 잠시 혀로 자신의 입안을 훑었다. 혹시라도 이가 나가거나 했을까 봐 점검을 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만우의 치아는 전부 다 제자리에 붙어 있었다.
백보신권을 마치 뒷골목 잡배의 주먹 취급하는 자는 이 세상에 만우밖에 없을 것이다.
“그게 전부야? 백보신권?”
만우는 이를 드러내며 불존을 향해 진하게 웃어 보였다. 불존은 굳은 얼굴로 황보천 앞에 떨어져서는 말했다.
“아미타불. 황보 시주께서는 세가의 가솔들을 물리시지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불존.”
“후읍! 여러 가지로 설명을 드릴 방법이 없소이다!”
불존은 만우를 향해 강렬한 투기를 드러내 보이며 황보천에게 말했다. 황보천은 그런 불존의 말을 듣고는 품에서 신호탄을 꺼내들었다.
“이리 물러날 정도로 황보세가의 저력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보여드리지요, 불존.”
펑!
황보천이 불존의 기세에 밀리지 않으며 터뜨린 신호탄에 만우가 피식 웃었다.
“본주가 네놈이 아무런 대비책도 없이 이곳에 왔다는 것을 믿을 성 싶었더냐?”
“그러면 순순히 오라를 받으라. 죄인 검주.”
황보천은 어깨를 쭈욱 폈다. 앞에 불존이 있건 말건 상관없었다. 오늘, 황보세가는 죄인 검주를 잡고 무림과 관에 걸쳐 영향력을 끼치는 대세가(大世家)의 반열에 올라설 것이니까.
“제 아무리 검주, 네놈의 무공이 역발산기개세의 경지에 이르렀다고는 하나 대명군 일 만을 상대로 버틸 수 있을 성 싶더냐?”
“황보시주!”
황보천의 말에 불존이 놀라 그를 쳐다봤다. 관과 무림은 상호불가침 관계다. 그런데 지금 황보천의 말은 무림의 일에 관을 끌어들였다는 뜻이다.
“대명군 역시 우리 황보세가의 힘 중 하나. 불존께서는 원칙을 논하려 하지 마시지요.”
황보천은 그런 불존의 말에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이런 반발을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니고 설령 반발한다 하더라도 귀 담아 들을 생각도 없었다.
이미 지금의 무림맹의 수뇌부는 용접곡에서의 참사로 자신의 무능을 드러냈다.
그러니 자신은 무림맹의 수뇌부들이 못 한 일을 해내면 된다. 그렇게 되면 결국 사람들의 칭송을 받게 될 것은 바로 자신이다.
“북진무사 황보경이 여기에 있다! 크하핫!”
그리고 미리 대기하고 있던 황보경이 붉은 의복과 황금 갑주를 걸친 금의위들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황보시주. 대체 이 일을 어찌하려고…….”
“불존께서는 검주를 쓰러뜨리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십니까? 하니 제 말에 따르시지요.”
황보천은 불존을 보면서 눈을 번뜩였다. 불존은 황보천의 두 눈에서 느껴지는 감출 수 없는 야욕에 불호를 읊었다.
황보천.
황보세가의 가주에 대한 세간의 평이 완전히 잘못 되었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맞아 불존. 네놈의 그 민머리가 생각하는 그대로다.”
만우는 그런 불존과 황보천을 비웃었다.
“약조도 지키지 않는 놈일진대. 사내자식이 한 입으로 두 말하고 말이야. 그 가운데는 잘라 버려. 필요도 없는 거.”
“검주!”
“역시. 이래서 가장 못 믿을 놈들이 바로 정파 놈들인 거야. 불존이란 놈이 두 번이나 기습을 하질 않나, 황보세가의 가주라는 놈이 제 야욕에만 눈이 벌게져 있어서는.”
만우는 신랄하게 황보천과 불존을 눈앞에서 비웃었다. 그에 그 둘의 얼굴이 붉어졌지만 만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침 황보천이, 네놈이 숨겨 놓은 패가 다 뒤집어져서 다행이네. 그냥 한 번에 처리하고 가는 게 깔끔하니까.”
만우는 황보경과 금의위들이 지붕을 뛰어넘으며 이곳으로 달려오는 것을 보고는 비릿하게 웃었다.
[피를 봐서는 안 되네!!!]
“아 진짜. 어디 숨어서 자꾸 보고 있는 거야?”
그런 만우에게 기린 중 기가 전음으로 신신당부하듯 말했다. 만우는 신경질이 났다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아무리 만우라고 해도 기린이 마음먹고 숨어들면 찾을 도리는 없었다.
“야박하네. 나 죽이겠다고 이렇게 몰려온 놈들인데 피를 봐서는 안 된다니 말이야.”
[약조를 기억하시게.]
“물론. 난 저기 서 있는 고자 놈처럼 한 말도 지키지 못하는 위인은 아니거든.”
만우는 황보천을 보면서 육성으로 중얼거렸다. 대체 만우가 누구와 대화를 하길래 저리 중얼거리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 내용이 충분히 모욕적이었기에 황보천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왜, 왜 네놈은 아직까지 당당한 것이냐!”
황보천은 점점 주변에 늘어나는 황보세가의 힘을 보면서 이해가 안 된다는 눈으로 만우를 쳐다봤다.
황보세가는 이번에 아예 단단히 작정을 했는지, 동원한 힘이 무림맹과 사림곡, 그리고 동창이 용접곡에 동원한 것보다도 더 거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유자적하기 그지없는 만우가 황보천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네가 쌓아올린 모든 것을 무너뜨릴 것이다. 그리고 네놈을 개처럼 자미원까지 끌고 가 황상 앞에 무릎 꿇릴 것이다.”
천하제일인?
개나 주라고 해라.
감히 이 대명에 발을 들여놓았으면서 황제 외에는 허락되지 않은 천하제일을 논하려 하였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우는 죽어 마땅하다.
“그러니 그딴 표정을 짓지 마라.”
그러니 만우는 저런 표정을 지어서는 안 된다. 자신은 무림맹을 넘어 황실을 등에 업고 무림에 새로운 질서를 도입할 고금제일세가인 황보세가의 가주가 될 몸이다.
그러니까 검주는 자신을 두려운 눈으로 쳐다봐야 한다. 미래의 새로운 질서이자 새로운 힘의 척도가 될 대황보세가의 다음 대 가주가 될 사람이 바로 자신이기 때문이다.
“엎드려 빌어라. 그러면, 그러면…….”
황보천은 만우를 쳐다보면서 말을 하려고 했지만 결국 끝내지는 못했다. 만우는 그런 황보천을 비릿하게 웃으면서 쳐다봤다.
“그러면 뭐.”
“…….”
“결국 이도저도 아닌 놈들이 서로 모여서 내가 낫니 네가 낫니 하니까 뭐라도 된 줄 안단 말이지.”
천외천이란 말이 왜 있던가.
중원은 물론 넓지만 중원제일이 천하제일은 아니다. 중원은, 천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을 모르면 결국 정저지와, 우물 안 개구리가 될 수밖에 없다. 만우가 보기에 각기 야망을 품고 자신의 명예를 노리고 달려든 놈들이 딱 그러한 놈들이었다.
그 작은 울타리 안에서 자기들끼리 최고가 누구니, 그 다음이 누구니 하면서 놀다 보니 정말 그 우물 안이 전부인 줄 아는 그런 개구리들.
“그러니까.”
하지만 만우는 이미 기린과 약조를 했다.
그 약조는 기린이 만우에게 제안한 것이 아니다. 만우가 기린에게 이렇게 하라고 협박하듯이 내밀어서 기린이 울며 겨자 먹기로 고개를 끄덕인 약조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손속은 둬야 하는 것을.
“한 놈도 오늘 죽지는 않을 것이다.”
만우는 황룡객잔 주변을 빼곡하게 포위한 황보세가와 금의위를 보면서 선포했다.
“대신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을 수 있으니, 그건 뭐 어쩔 수 없지. 아니 그런가?”
만우는 돌아오는 대답이 없는 허공을 향해 그리 말하고는 씨익 웃었다. 물론 다른 이들의 귀에는 아니지만 만우에게만 돌아오는 대답이 있기는 했다.
[그거면 족하다.]
기린의 기가 승낙했다. 린은 아무런 말이 없었지만 기와 린은 일심동체다.
그러니 기가 말하는 것이 곧 린이 말하는 것이다.
“너무 여기서 오래 있었으니.”
뚜둑, 뚝.
만우는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이 근처에 자미원인데, 이것저것 하면서 누굴 기다리느니 뭐니 하다 보니 필요 이상으로 시간이 지체됐다.
그냥 가면 되는 것이거늘.
만우는 지붕 위에 그를 포위하듯 주르륵 늘어선 금의위와 가장 강렬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황보경을 죽 둘러보고는 히죽 웃었다.
“황실이나 황보세가나, 수준이 거기서 거기구나.”
이미 황보세가의 황보천과 그 무인들을 애병인 검이 아닌 주먹으로 압도적으로 찍어 누른 만우다. 그런 만우의 비웃음이 황보세가의 무인과 금의위 사이로 나지막하게 피어올랐다.
고오오오오!!!!
그러자 당연히 만우를 향한 이들의 기세 역시 한층 더 높아졌다. 그런 만우를 향해 황보경이 천지가 울릴 것 같은 커다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검주 만우! 감히 황군을 모욕하는가!”
“모욕?”
만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언제부터 진실을 말하는 것이 모욕이 된 것이지?”
“노옴!!!!”
황보경이 만우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그와 동시에 황보경의 신형이 근처 지붕에서 스슥 하고 사라지더니 만우의 머리카락이 뒤로 다 날릴 정도의 강렬한 풍압이 바로 앞에서 뿜어져 나왔다.
꽈르릉!
황보경의 벽력신권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황보세가의 금의위의 무인들 수백이 일제히 황룡객잔을 향해 몸을 날렸다.
*****
“푸흐흐흐흐흐.”
“부 태감. 미치신 게요?”
서창제독이 웃음을 터뜨리는 부로를 보면서 얼굴을 찌푸렸다. 끌끌거리던 부로는 이내 어깨가 들썩거릴 정도로 웃음을 참지 못하고는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푸하하하하하!!!”
“태감 부로! 감히 황명 앞에서 대소하는 것이냐!!!”
본디 동창과 서창은 동등한 입장이었다. 하지만 동창과 서창의 그 쓰임새가 명확하게 갈리면서 그림자인 서창보다는 동창이 어느 순간부터인가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 일로 동창제독인 부로가 완전히 황제의 신임을 잃었다. 서창제독은 자신의 허리춤에 달린 천자의 검을 뽑아들었다.
창!
“그간 태감 부로의 공을 기려 대우하려 하였으나, 태감 부로는 제 발로 황은을 차 버렸을지언저.”
척!
그때 부로가 몸을 일으켰다. 그런 부로의 얼굴은 창백하기 그지없었고 다리는 바르르 떨렸으나 서창제독은 자신도 모르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황실의 고수들 중 금의위의 남진, 북진 두 무사와 유일하게 동수를 이룰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 자가 바로 부로다.
한 마디로 부로의 원래 실력은 그가 멀쩡한 상태였으면 지금 이 자리에서 곧바로 죽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서창제독은 부로가 지금 멀쩡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떠올리고는 어깨를 피고 턱을 치켜들었다.
“아아. 너무 긴장하지 마시게. 내가 웃은 이유는.”
부로는 이미 천자의 검을 본 순간 살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사실은 용접곡에서의 일이 실패하면서부터 더 이상 살 수 없을 것이라고 직감했다.
이미 한 번 실패했던 자신이 환관이 되어 동창의 제독이 된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대명의 천자 정도 되는 이의 인내심이 그 정도면 상당히 깊은 편이었으니까.
“황상께서 검주, 그자를 너무나도 무시하시고 계셔서일세.”
“무시…… 감히, 감히 부로 네놈이 황상을 능멸…….”
“능멸이 아니라.”
부로의 전신에서 일어나던 떨림이 잦아들었다. 검주가 자신을 살려 둔 이유를 부로는 그때서야 깨달았다.
경고.
‘저번처럼,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도록.’
검주는 황제가 방심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리하여 저번 같은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사실일세. 어차피 난 곧 죽을 목숨. 내가, 이 부로가 목숨으로써 간언하는 이 말을, 황상께 꼭 전해 주시게.”
부로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쿵 하고 꿇었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남은 내공을 오른손에 쥐어짜 내고는 서창제독을 향해 말했다.
“황상께서는 필히 하실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하시고 모든 준비를 다 하시어 검주를 맞이하셔야 한다고. 그러지 않는다면, 무림의 낭인에게 세상 가장 존귀한 피가 자미원에 흐를 수도 있음을!!!!”
퍼억!!!!
내공이 담긴 부로의 손이 자신의 백회혈을 내리쳤다. 부로는 그대로 허물어지면서 자신을 보고 경악한 서창제독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
짜악!!!!
쩡-!!!!!
털썩, 털썩
“우웨에엑!!!”
털썩!
부르르!!
황보경은 노란 신물을 토해 내며 그 자리에서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자신이 무릎을 꿇었다는 것을 깨닫고 일어나려 안간힘을 썼지만 이미 풀려 버린 다리는 황보경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호오. 썩어도 준치라 이거네?”
그런 황보경은 부들거리는 자신의 목을 간신히 돌려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만우를 향해 달려들던 수백 명의 무인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 무인들은 마치 원래부터 그랬었다는 것처럼 눈을 까뒤집은 채 정신을 잃고는 바닥에 처박혀 있었다.
초절정이건, 절정이건, 일류건 이류건.
경지에 상관없이 무공을 익힌 이들 수백이 연경대로에 취객처럼 이리저리 쓰러져 있는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질리게 할 정도의 광경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만들어 낸 것이 고작 박수 소리였다는 것에 황보경은 두 볼을 푸들거리며 떨었다.
“웬만하면 네놈들의 성의를 봐주고 싶었는데.”
박수 소리 한 번으로 수백에 달하는 무림인들을 쓰러지게 한 자가 바로 눈앞의 만우다. 주변에는 제정신을 차리고 있는 무림인이 자신 말고 딱 한 명이 더 있었다.
불존.
그 불존도 신물이 올라오는 노란 액체를 토하고는 자신과 똑같은 자세로 무릎을 꿇은 채 전신을 부들거리며 떨고 있었다.
“본주가 바빠도 너무 바빠.”
저벅, 저벅.
만우는 황보경을 지나쳐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뒤를 멀쩡한 사행단들이 뒤따랐다. 하지만 그들도 반쯤은 넋이 나간 상태라 그냥 무의식적으로 따라가는 것뿐이었다.
그중에 단 한 명.
호선만은 놀라지 않았다.
이미 만우가 천명을 끊고 탈각의 단계를 밟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딱히 이 정도로 놀랄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빨리 황제 놈의 면상을 보고.”
부릅!
만우의 점점 광오해져 가는 표현에 황보경의 두 눈에 핏발이 돋았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황보경의 두 다리는 주인의 말에 따르는 것을 거부했다.
그래야만 살 수 있다는 듯, 필사적으로 황보경의 다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 더러운 진흙탕에서 벗어나고 싶거든. 강호무림 말이야.”
만우는 황보경 다음으로 불존을 지나쳤다. 불존은 자신을 지나치는 만우를 보면서 무릎을 꿇은 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본래라면 강호무림에서 자비를 베푼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어떻게든 강호의 은원은 후환으로 남는다. 그렇기에 만우는 절대로 후환을 남겨 두는 성격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기린과 약조한 바가 있으니 후환을 남겨 둘 수밖에 없었다.
대신 그만큼 기린과 약조를 한 것이 크니, 만우도 양보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본주가 특별히 자비를 베푸는 것이니, 살았음에 기뻐하라.”
만우와 사행단은 그렇게 천천히 쓰러진 수백의 무인들을 지나치며 불존과 황보경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그렇게 만우와 사행단이 완전히 사라지자 불존과 황보경은 비틀거리며 가까스로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아무리 일어나라고 말을 해도 듣지 않던 다리가, 만우가 사라지자 다시 말을 듣기 시작한 것이다.
“…….”
황보경은 가주인 황보천은 물론이거니와 세가의 무인들, 그리고 금의위들로 인해 빼곡하게 뒤덮인 연경대로를 보면서 할 말을 완전히 잃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그들 모두가 잠든 것처럼 혼절을 해 있다는 점이었다.
‘내상이 없다.’
만우가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친 손뼉에는 순간적으로 화경의 고수인 황보경의 다리를 풀리게 하고 탈진을 하게 만들 정도의 경력이 담겨져 있었다.
대체 어떻게 만우가 그런 고절한 기예를 펼쳤는지는 황보경도 모른다. 황보경의 수준보다 만우의 그 한 수가 더 고절했기 때문이다.
‘……천하제일.’
거기에 황보경은 몇 번이나 자신의 몸을 관조해 봐도 티끌만 한 내상의 상처도 없다는 것에 오히려 완벽하게 전의를 잃어버렸다.
두 명의 화경의 고수와, 수백 명의 고수들을 박수 한 번으로 무력화시킨 검주다. 그것을 깨닫자 그제야 비로소 ‘천하제일’, 네 음절이 강하게 황보경의 가슴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비틀.
그런데 그때 멍하니 선 황보경과는 달리 불존은 만우가 사라진 방향으로 비틀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그런 불존의 얼굴은 고통으로 크게 일그러져 있었지만, 그는 꿋꿋이 만우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움직였다.
“…….”
황보경은 그런 불존의 뒷모습을 보다가 역시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검주가 걸어간 방향은 황제의 거처인 자미원이 있는 곳이다.
원래라면 황보경은 만우를 그곳으로 압송하여야만 했다. 하지만 그것에 실패했음에도 그곳으로 움직이는 이유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자신의 눈으로 봐야 할 것만 같은 그런 직감.
그리하여 그것을 알리든, 홀로 간직하건 간에 기억해야만 할 것 같은 그런 기시감이 든 것이다.
저벅, 저벅, 저벅
만우와 사행단이 사라지고 난 뒤 침묵에 잠긴 연경대로 위로 불존과 황보경의 저벅거리는 소리만이 을씨년스럽게 울려 퍼졌다.
*****
자미원은 연경에 있는 그 어떠한 건물보다도 컸다.
임시 거처라고는 하나 명색이 천자가 사용하는 곳이기에 무수히 많은 장인과 인부들을 동원하여 공을 들여 지어 놓은 곳이 바로 자미원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우는 멀리서도 자미원을 금방 식별해 낼 수 있었다.
“자미원이 보입니다요, 나리들.”
만우는 박수 한 번으로 수백이 넘는 무인들을 쓰러뜨리는 기염을 토했으면서도 또 다시 동군영과 설미수에게는 천연덕스럽게 나리라 부르며 굽신거렸다.
그러니 설미수와 동군영이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는 것도 그리 이상한 장면이라고만은 할 수 없으리라.
“이제 귀찮은 장애물들은 다 치워 버렸으니, 마지막 고비 한 번만 넘기면 됩니다요.”
만우는 설미수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그 귀찮은 장애물들이란 것이 만약 만우가 없었다면 몇 번이고 넘게 저승길을 왕복했을 법한 장애물들이었지만 설미수는 굳이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지금 당장은 살아서 자미원을 눈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어째 많이들 놀라신 것 같은데, 걱정 마십쇼 나리들. 자미원에 들어가면 아마 금방 끝날 겁니다요.”
“설마 만우 자네. 황상 앞에서 검을 뽑아든다던가…….”
‘아니면 그 검으로 황상의 목을 딴다던가’하는 말은 일부러 삼킨 동군영이다. 만우가 괜히 일이 빨리 끝날 것이라고 하니 그런 쪽으로만 생각이 이어진 탓이다.
만우는 그런 동군영을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그렇게 할 생각이었으면 저 혼자 왔습죠.”
만우는 그렇게 말하면서 호선을 쳐다봤다. 사실 만우가 기린을 만나 그런 약조를 맺게 된 것도 다 호선 때문이었다.
그런 만우의 시선을 눈치챈 호선은 익숙하게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는 딴청을 부렸다.
“자. 두 분은 놀라지 마십쇼.”
“이미 충분히 놀랐네. 정말…… 괜찮은 건가?”
동군영의 ‘괜찮은 건가’란 말에는 많은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만우는 씩 웃으며 동군영을 쳐다봤다.
“괜찮지 않을 것은 또 무에 있단 말입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