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1. 과거의 약조 (2) (341/400)


341. 과거의 약조 (2)
2022.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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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데.”

그때 지금껏 입을 다물고 있던 황보천이 입을 열었다. 만우는 드디어 입을 연 황보천을 바라봤다. 저 뱀 같은 혀가 또 어떤 기적을 만들어 낼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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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자하니 황상께서는 조선국에 죄인을 호송하라 하셨다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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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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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죄인은 바로 검주, 그대이고.”

황보천이 손가락을 들어 만우를 가리켰다. 만우는 히죽거리는 얼굴로 황보천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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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 내려. 잘라 버리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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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데 지금 검주가 압송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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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오…….”

만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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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보세가가 군문에 머리를 조아리더니 언제 관군이 되었는가 모르겠어. 친히 황보세가의 가주께서 본주를 압송하러 나오시다니.”

황보천은 방금 한 마디로 자신들에게 명분이 있음을 공고히 했다. 황명이란 모든 것을 뒤집을 만한 명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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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 검주는 오라를 받으라.”

황보천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목소리로 만우에게 말했다. 그러면서 만우 앞에 포승줄을 휙 하고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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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명을 받는 백만 대군이 조선까지 들어가는 모습을 정녕 봐야만 오라를 받겠는가?”

황보천은 묵직한 목소리로 만우를 압박했다. 만우는 자신의 발치에 나동그라진 포승줄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들어 황보천을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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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황보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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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 검주는!!!!”

황보천이 만우의 말을 무시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황보천의 사자후가 연경대로 전체를 다 뒤덮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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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걸고 본주를 겁박하고 싶은 모양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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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황명에 따라 순순히 오라를 받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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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또 뭘 노리나 황보천이? 나를 미끼로 무림에 대한 황실의 경각심을 올린 것으로도 부족했나?”

말하자면 황보세가를 황실에서 중용하기 시작한 것은 대(對) 무림을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황보천은 일부러 만우를 이용하여 무림의 위험성을 황실에 각인시킨 뒤 자신들이 무림 출신이나 황제에게 충성한다는 것을 보여 황실의 총애를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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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치 혀로 감히 황보를 논하려 하는가!!!!”

황보천은 만우가 사실을 말하고 있음에도 얼굴로는 조금도 내색하지 않았다. 만우는 그런 황보천을 보면서 속으로 혀를 찼다. 참으로 대단한 야심가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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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황보천이. 나 지금 그때 약조 말한다. 어?”

만우는 황보천을 보면서 두 눈을 부라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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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여기서.”

스릉!

만우는 허리춤의 이룡검을 빼들었다. 그러자 황보천의 입가가 파륵 하고 떨렸다.

황보천도 만우를 마주하자 곧바로 알았다.

비록 초절정에 머물러 있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하여 상대방의 실력을 가늠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런 황보천에게 만우는 그저 평범한 일반인처럼 느껴졌다.

공력이 하나도 없고, 무공도 하나도 모르는 민간인.

하지만 황실에서 봤던 만우는 아니었다. 그때의 만우는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을 것 같은 날카로운 검 같았으니까.

그랬던 만우가 지금은 그 어떠한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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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경을 뛰어넘었다.’

초절정의 고수는 화경의 경지에 다다른 고수를 느낄 수 있다. 물론 무공으로만 따지면 넘어설 수 없는 거대한 태산이 버티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나, 자신의 앞에 있는 것이 태산이란 것을 알 정도는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우에게서는 정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無).

만우는 태양혈도 튀어 나와 있지 않고 밋밋했고 껄렁껄렁한 자세는 검이라고는 쥐뿔도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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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녕, 정녕 천하제일검이란 말인가.’

그렇다는 뜻은 만우가 황보천의 수준으로는 감지할 수도 없는 높은 하늘이나 깊은 바다가 되었다는 뜻이다.

산에 오르니 하늘이 나왔고, 산을 넘으니 바다가 나오는 법이니까.

아직 산에 오르지도 못한 황보천으로서는 세간에 떠도는 소문이 거짓되지 않았음을 만우를 본 순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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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녕 검주라고 하여 황상의 백만대군을 이겨 낼 성 싶은가!”

황보천은 여전히 차분하고 묵직한 듯 연기를 했다. 하지만 만우는 그런 황보천의 심경을 꿰뚫고 있다는 듯 뽑은 이룡검을 척 늘어뜨린 채로 히죽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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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못 할 것 같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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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경이라면 못 한다. 일만 명도 상대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만우는 현경이다. 무림의 역사 속에서 현경에 도달한 무인은 지극히 소수다.

그리고 그들은 전부 무림사(史)에 잊히지 않을 족적을 남겼다.

그렇기에 황보천은 함부로 대답할 수 없었다.

탈각의 경계에 들어선 이들이 바로 현경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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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놈도 도망가지 말아다오. 그게 내가 네놈이 해 주었으면 하는 약조다.”

만우의 검 끝에서 미풍이 일기 시작했다. 그 순간 황보천이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는 온몸의 공력을 끌어 모아 폭발시키듯 몸을 부풀리며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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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아아압!!!”

황보천의 단전에서 공력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황보천의 두 주먹에서 파륵 하며 뇌전이 서리기 시작했다.

벽력신권(霹靂神拳).

황보세가의 독문무공이자 가주에게만 내려온다는 절기가 황보천의 주먹에서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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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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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살상은 안 된다! 그렇다면 계약을 어기게 되는 것이다!]

만우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자신이 대체 뭘 했다고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기린의 전음이 들려오고 황보천은 주먹에서 벼락을 피워 낸단 말인가.

자신이 한 것은 그저 몇 마디 말을 하고, 검 끝을 흔든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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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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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그럼 검을 흔든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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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흔든 거야. 말하다가. 아무 의미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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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런…….]

기린이 난감해하는 것이 다 느껴졌다. 만우는 수천 년을 살아왔다는 신수에 대한 개념이 와장창 깨지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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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주작은 신수 같아 보였는데.’

아니, 모르는 일이다. 기린의 저러한 모습도 만우가 진인의 경지에 들었기 때문에 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주작도 지금 만나면 또 다를지도 모른다.

흐아아압!

크아압!

퉁!

투둥!!!!

황보세가의 가주가 익히는 것이 패권(覇拳)으로 유명한 벽력신권이라면 그 아래의 가솔들이 익히는 것은 천왕삼권(天王三拳)이다.

검법과 장법도 있었으나 황보세가 특유의 큰 덩치와 신력을 잘 살리는 데 있어서는 권법만 한 것이 없었기에 황보세가의 무인들 중 8할 이상이 권법을 익힌 권법가들이었다.

만우는 제 가주를 따라 제각기 공력을 끌어올리는 황보세가의 무인들을 보고는 어이가 없는 얼굴로 뒤를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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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또 뭐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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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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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이야말로 뭣하는 거요. 앞에 적인데.”

뒤에서는 또 감령과 필두를 비롯한 초절정 오인방이 공력을 끌어올린 채 바짝 긴장을 하고 있었다.

경지에 있어서는 초절정 오인방이 압도적이라고는 하나 상대는 오대세가 중 하나인 황보세가의 무인들이었다.

거기에 그 수도 수백에 달했기 때문에 긴장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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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피곤하네, 진짜.”

만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애초에 만우는 이 검으로 저들을 벨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검 좀 흔들었다고 황보천이 더럭 겁을 집어먹고 일을 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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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도망가지 말랬지, 누가 죽인대?”

만우는 짜증 난다는 듯 황보천에게 버럭 신경질을 냈다. 하지만 황보천에게는 만우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무려 현경의 고수를 앞에 둔 황보천은 공력을 잔뜩 끌어 올린 채 벽력신권의 구결에 따라 내기를 움직이며 만우의 틈을 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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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되겠다.”

스르릉, 철컥!

만우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듯 이룡검을 다시 검집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두 주먹을 말아 쥐며 황보천을 향해 주먹을 들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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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매번 이상한 수작을 부리는 머리부터 깨부숴 주마.”

권(拳).

검주인 만우가 주먹을 말아 쥐었다. 황보천은 그런 만우를 보고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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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감히 이 황보세가를 욕보이려 하는 것인가!”

황보세가를 상대하면서 검주인 만우가 검이 아니라 주먹을 들었다?

그것만으로도 황보세가에는 지울 수 없는 치욕을 주는 셈이다. 만우는 그리 분통을 터뜨리는 황보천을 보면서 비릿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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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주를 검주라 부른 것은 너희 마음이고. 언제 본주가 검만 쓴다고 한 적이 있었던가?”

검주라 하면 당연히 검부터 떠올리게 되는 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만우의 기천은 병장기를 가리지 않는 기공(氣功)이다. 그렇기에 기천은 주먹으로도, 발로도, 심지어는 창이나 돌멩이로도 얼마든지 변형이 가능했다.

괜히 만우가 날리는 지풍이 초절정 오인방의 방어를 뚫고 이마를 때리고 다녔던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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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오늘부로 황보세가의 버르장머리를 고쳐 주마.”

만우의 양 주먹에서 권기(拳氣)가 화악 하고 불타올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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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진무사를 그리 보내셔도 되겠습니까?”

황제는 가까이서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힐끗 돌려 옆을 쳐다봤다. 본래 황제의 100보 안으로는 허락 받은 이만이 들어올 수 있었다.

그렇지 않은 이가 100보 안으로 들어오려 한다면 단박에 금의위 고수들이 튀어나가 고하를 막론하게 목을 벤다.

하나 지금 황제에게 직언을 한 이는 황제의 곁에 병장기를 찬 채 시위를 서는 것이 유일하게 허락된 몇 안 되는 이들 중 하나였다.

남진무사(南鎮撫使) 순(盾).

이름부터가 방패를 뜻하는 순(盾)이란 것에서 알 수 있듯 그는 우직한 황제의 신하이자 황제의 방패였다.

하나 그의 진짜 이름은 바로 주순.

주 씨 성을 쓰는 것이 바로 명나라 황실의 주인들이니 남진무사 역시 계보를 따진다면 황가의 사람이라 할 수 있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이 당연한 말이 때로는 가볍게 등한시되는 곳이 바로 황실이라고는 하나, 이렇듯 아주 중요한 요직이나 반드시 필요한 몇몇 자리에 있어서는 또 족보를 따져 피로 이어진 이들을 앉혀놓는 것이 황실의 용인술이었다.

어쨌거나 주순은 절대로 황위계승권 안에 들어올 수 없는 아주 먼 방계, 아니 사생아였으니까.

본래 황실에서는 사생아가 태어나면 서창이 존귀한 천자의 귀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찾아내어 죽이고 그 흔적을 지우는 것이 황실의 법도다.

황가의 피가 아주 조금만 섞였어도 무도한 역도들이나 말도 안 되는 명분에 의해 정통성이 있는 핏줄이라는 말과 함께 황위 서열이 복잡해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충분히 자격이 되고 명분이 되는 이들끼리 황위로 인해 흘리는 피만 해도 충분했다. 하지만 주순은 대단히 특이한 경우였다.

연왕 주체의 그림자.

황제에 오르기 전 연왕이던 시절부터 그와 함께 한 것이 바로 주순이다. 주순은 황가의 피를 이어 받았지만 다른 황가의 핏줄과는 다르게 무예에 대단히 뛰어난 재능을 가졌기에 황제는 기꺼이 그를 품었다.

그 덕분에 황제, 그전의 연왕 주체는 몇 번이나 주순으로 인해 목숨을 구했다. 그리고는 황제가 된 뒤 그는 주순에게 남진무사의 자리를 내렸다. 품계로는 정4품에 불과하나 실질적인 금의위의 절반을 다스리는 위치였다.

그런 남진무사 순이 주순이라는 것을 아는 이는 황제만이 유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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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내지 말아야 할 이유는 또 있느냐?”

어쨌거나 그런 주순이기 때문에 황제로부터 10보 떨어진 곳까지 병장기를 차는 것이 허락되었다. 주순은 고개를 깊숙하게 숙여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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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접곡에서 무림맹주와 사림곡주, 그리고 부 태감이 검주에게 횡액을 입은 것이 사실이라면, 북진무사와 황보 대장군까지 자미원으로 불러들이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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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지도 모르지.”

주순은 황제의 안위가 걸려 있는 일이라면 백만의 백성을 죽이고서라도 황제를 살리는 것을 선택할 위인이다.

그랬기에 주순이 말하는 모든 것은 황제의 안녕을 위하기 때문에 나온다는 것을 황제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황제는 주순이 하는 말에 가타부타 반응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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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데 북진무사에게 연통을 보내 황보세가까지 전부 불러들이셔야 합니다. 그래야 죄인 검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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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이 두려워 내 쥔 칼을 모조리 불러들인 채 맞이한다면, 세상 사람이 이 주체를 뭐라 생각할 것 같으냐?”

주순은 쿵 하고 무릎을 꿇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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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간의 호사가들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이 무에 중요하다고 하십니까. 제게 가장 중요한 것은 황상의 안위뿐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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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도 안다. 짐이 너의 충심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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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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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황제는 주순의 말허리를 중간에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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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주, 천하제일이라 슬슬 불린다지?”

그도 그럴 것이 홀로 무림을 수십 년 동안 좌지우지 해 왔던 무림의 상징과도 같은 조직과 그 정예들이 만우에 의해 박살이 났다.

거기에 단일 세력으로는 최강이라는 마교는 만우를 찬양하는 듯한 소문을 여기저기 내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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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이라.”

하늘 아래 제일.

황제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목소리에 웃음기를 섞어 주순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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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이란 말은 짐을 가리켜야 하는 말이다. 한데 그 죄인을 그리 부르지 않더냐.”

하늘 아래 으뜸가는 사람은 바로 천자인 황제여야 한다. 그런데 강호무림이란 곳에서는 그리 불온하고 발칙한 별호를 일개 죄인에게 가져다 붙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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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무림이란 곳이 원을 몰아내고 명을 세우는 데 지대하게 공헌한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나 보라.”

황제는 소맷자락을 펄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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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개 죄인이 짐의 심기를 어지럽힌다. 그 죄인 역시 강호무림의 무림인일지언데 말이다. 짐은 그 죄인의 문제를 무림에 맡기고자 하였으나 그들이 스스로의 무능을 드러내었다.”

무능을 드러낸 것은 동창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황제는 그 부분은 쏙 빼놓고 언급하지도 않은 채 무림의 허물만을 입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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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무능한 자들일지언데, 개국공신이라는 이유만으로 관의 간섭을 불허한다?”

주순은 자신이 모시고 있는 황제가 그리고 있는 그림을 깨닫고는 전율했다. 황제는 과거 황실의 수치를 가져다 준 검주, 그 하나만을 노리는 것이 아니다.

무림.

황제는 그 너머의 무림 전체를 손아귀에 넣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황제에게 있어 검주와 관련된 문제는 그저 그 그림을 그리고, 현실로 옮겨 오기 위한 명분 쌓기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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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짐은 조선을 참으로 좋아하였거늘. 어찌하여 이리도 짐의 심기를 거슬리게 하는 저 죄인을 사행단으로 보내었는지, 그 연유가 심히 궁금하도다.”

거기에 조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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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죄인은 무어라 생각하는지 짐이 직접 물어 보고 싶구나. 그리하여 내 북진무사를 보낸 것이다.”

황제는 검주를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고 있지 않았다.

주순은 황제에게서 느껴지는 패왕(霸王)의 기운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황위에 등극하여 새로운 황제가 되었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해서 황제가 걸어온 패도(覇道)가 종식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주순은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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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놔 둬라.”

꿈틀.

주순의 눈가가 순간적으로 꿈틀거렸다. 하지만 황제는 옥좌에 얹은 팔로 턱을 괴고는 나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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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온 죄인, 무림에 적을 두고 있는 그 죄인이 짐의 앞까지 들어와야 저 목석같은 대소신료들이 그제야 발등에 불이 떨어져서는 놀라 말을 들을 것이 아니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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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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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를 지금처럼 시위하면 되는 것이고.”

주순의 눈이 반짝였다. 황제는 대명국의 천자임에도 스스로를 미끼삼아 위험을 자초하려는 것이다. 그런 황제의 대범함과 계략에 주순은 무릎을 쿵 하고 꿇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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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마지로를 다하겠나이다,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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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 만세, 만만세!]

주순의 선창에 환관들의 복창이 뒤따라 울려 퍼지며 대전을 크게 뒤흔들었다.

*****

벽력신권(霹靂神拳)과 천왕삼권(天王三拳)은 중원 전체를 뒤져 봐도 소림을 제외하고는 거의 견줄 대상이 없는 최상승 권법이었다.

특히 벽력신권은 지금의 황보세가를 처음으로 만든 300년 전의 절대고수인 뇌신권(雷神拳)의 독문무공으로 대대로 가주들과 뛰어난 성취를 보이는 직계 혈속에게만 내려오는 무공이었다.

벽력신권을 극성까지 익히면 말 그대로 일격 일격이 하늘에서 떨어뜨리는 벽력같다는 기록이 있었지만 초대 가주 이외에는 그 누구도 극성까지 익히지 못한 난해한 무공이었다.

하지만 벽력신권은 굳이 극성이 아니더라도 7성 정도만 익혀도 초절정에 도달했고, 8성에 도달하는 순간 화경에 오른다고 알려져 있는 무공이기도 했다.

우르릉!!!!

그런 벽력신권이 간만에 무림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지만 명성이 자자한 것과는 달리 지금은 그 벽력이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쩌억! 쩌억!!!

주르륵!

힘과 힘이라면 하북팽가, 더 나아가서는 마교의 곤명웅가(昆明雄家)에도 밀리지 않는 신력을 타고난 황보세가였는데, 그곳의 가주인 황보천이 두 팔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로 맥없이 비칠거리며 뒤로 밀려났기 때문이다.

그런 황보천을 대신하여 황보세가의 무인들이 벌떼처럼 만우를 향해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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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 더럽게 튼튼하네.”

만우는 입으로는 우는 소리를 했지만 얼굴은 웃고 있었다. 만우의 양 손에서는 권기가 이글거리고 있었지만 그런 만우의 주먹질에 얻어맞고 날아간 황보세가의 이들이 다시 벌떡 일어나서는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내공 못지않게 외공을 중시하는 곳이 황보세가다. 그렇기 때문에 황보세가의 무인들은 맷집이 또 남다른 것으로 유명했다.

물론 그것도 어디까지나 비슷한 수준의 상대에게만 통용이 되는 말이었지만.

쩌억, 쩌억!!

꺽! 끅! 우악! 으악!

우당탕탕!

만우가 파리 쫓듯이 이리저리 막 휘두르는 것 같은 손에 황보세가의 무인들이 단 일수도 견뎌내지 못하고는 사방으로 나뒹굴었다.

막아 내려 한 이나, 받아치려 한 이, 그것을 피하려 한 이들조차도 만우의 손은 마치 귀신처럼 움직여 막으면 막은 대로, 받아치려 하면 받아치려는 대로, 피하려고 하면 그것을 따라가서는 모조리 일수에 날려 보낸 것이다.

부르르르.

털썩, 털썩.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만우에게 맞고 나가떨어져도 벌떡거리며 잘도 일어나던 황보세가의 무인들이 이번에는 일어나지 못하고는 다리가 풀려서는 주저앉았다.

그 짧은, 잠깐의 접촉이 일어난 사이에 침투경으로 만우가 그들의 내부를 진탕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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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너무한다, 진짜. 나 검도 안 들었어. 그런데 이렇게 나가떨어지면 황보세가 체면이 말이 아닌데?”

만우는 이죽거리며 그런 황보세가의 무인들을 조롱했다.

지금 이것을 지켜보고 있는 눈이 한둘이 아님을 그들에게 일깨워 주기 위해서다.

아무리 상대가 검주고, 풍문의 주인공이라고는 하나 그래도 명색이 오대세가 중 하나인 황보세가다.

그런데 그런 황보세가의 정예들이 검도 안 든 검주에게 권으로 옷깃도 스치지 못하고 전멸을 당했다?

수치에 향후 몇 년 간 봉문을 해야 될 정도의 대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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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주 같으면 그냥 봉문한다. 봉문해. 아니, 단전을 폐하고 일반인이 된다. ‘뭣하러 무공을 익혔을까’하면서.”

만우는 황보세가의 무인들을 파리 때려잡듯 잡으면서 단 한시도 입을 쉬지 않고 나불거리며 놀렸다.

그런 만우의 곁으로 최대한 기척을 죽인 황보천이 두 주먹에 공력을 잔뜩 끌어 모은 채로 접근해서는 권을 내질렀다.

꽈르릉! 꽈릉!

벽력신권이라는 무공에 걸맞게 황보천의 두 주먹에서는 벽력이 치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만우는 자신의 사각지대로 들어온 황보천을 고개를 돌려 쳐다보고는 빙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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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새끼 같은 놈.”

만우는 사실 황보천이 이런 식으로 나올 줄 알고 있었다. 저놈의 인자한 가면 아래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저열함이 서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싹.

그런데 그 순간 만우의 목 뒤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만우는 위험신호를 보낸 육감을 무시한 채 황보천의 권을 권기가 일렁이는 손으로 잡아 챘다.

투쾅!!!!

그와 동시에 만우의 머리가 옆으로 휙 하고 꺾이면서 거대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황보천이나 황보세가의 무인이 아닌 전혀 다른 곳에서 만우에게 기습을 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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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우!!!!!”

그것을 보고 놀란 방매가 소리를 질렀다. 그와 동시에 문형일과 마익후가 뛰어들기 위해 어깨를 움찔거렸지만 결국 발을 떼지는 못했다.

척일이 그 둘을 보면서 고개를 가로저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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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괜찮다.”

척사영도 그런 척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문형일과 마익후는 제삼자가 만우에게 기습을 한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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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는 것은 기습을 가한 자가 최소한 그 둘보다 고수라는 소리다.

화경의 고수.

화경의 고수가 만우에게 기습을 가한 것인데, 척일과 척사영의 얼굴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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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봐봐.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잖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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