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0. 과거의 약조 (1)
(340/400)
340. 과거의 약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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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0. 과거의 약조 (1)
2022.04.02.
쿵! 쿵!
누군가 황룡객잔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것도 그냥 두드리는 것이 아니라 건물 전체가 우르르 울릴 정도의 신력이었다.
척일과 척사영을 비롯한 초절정 오인방의 얼굴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저 문을 두드리고 있는 이는 자신에 대해 숨길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죄인 검주는 나와 오라를 받으라!!!!]
쩌렁쩌렁!
안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바깥에서 사자후가 터져 나왔다. 그 사자후에 담긴 힘이 얼마나 강력했던 것인지 마치 소리가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허어.”
“굳이 왜…….”
“대체 몇 번을 더 경험을 해야 정신을 차릴꼬.”
그런데 그 내용이 하필이면 ‘죄인 검주’였던지라 척일은 물론이거니와 감령까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다혈질적인 감령도 학습능력이란 것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로 해서는 안 될 말과 해서는 안 될 행동 같은 것을 숙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대체 이 무림맹 놈들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그렇게 당하고도 또 다시 다른 놈들이 우르르 몰려와 만우를 도발하고 있었다.
“죄인이라.”
존재감이 희미해질 대로 희미해진 만우가 입을 열자 그의 존재감이 화악 하고 커졌다. 그러자 방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넌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아까부터?”
“넌 괜찮은 거야?”
방매가 만우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이상한데?”
“이상한 건 없어. 바뀐 건 없으니까.”
만우는 그런 방매를 보면서 피식 하고 웃었다. 진인(眞人)의 새로운 경지에 들었다는 것은 만우가 스스로에 대한 완벽한 관조를 끝냈다는 뜻이다.
그렇다는 것은 만우가 스스로의 감정에 더욱 솔직해질 수 있다는 뜻이었다. 자신의 감정이 어떤 것인지 외면하지 않고 마주했다는 뜻이었으니 말이다.
자신은, 방매를 연모(戀慕)한다.
“근데 왜 산신령처럼 말하는 거야? 무슨 약 먹었어?”
방매가 그런 만우에게서 한 발짝 떨어져서는 이상하다는 듯 쳐다봤다. 반쯤 산신령이 된 것은 맞았기에 만우는 그저 웃기만 할 뿐, 아니라고 하지 않았다.
“얘도 정상이 아니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방매는 만우의 볼을 잡아서는 주욱 늘렸다.
“으아 해라(그만 해라).”
“이렇게 해도 참는다고? 너 만우 아니지?”
주욱 주욱.
만우는 볼에서 은은한 통증을 느꼈다. 진정한 진인의 경지, 그러니까 완숙한 현경의 경지에 들어섰다고 해서 볼을 죽죽 잡아당기면 아프지 않은 것이 아니다.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일 뿐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원영신을 완성한다면 또 모를까.
“으아 해라(그만 해라).”
“그럼 이것도?”
방매는 기어코 만우의 코까지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방매에 대한 자신의 연모를 깨달았던 만우의 이마에 핏줄이 솟아올랐다.
원래 연모와 애증은 종이 한 장 차이인 법이다.
“아 쫌!!!!”
타닥!
만우가 방매의 손을 타닥 하고 쳐 냈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방매의 뒷덜미를 쥐려고 하는데 방매가 샥 하고 몸을 피했다.
“오. 오래 참았다, 만우?”
“저게 진짜.”
호선은 멍한 눈으로 방매를 쳐다봤다. 자신은 어제 만우의 그 모습을 본 순간부터 함부로 접근할 수가 없었다.
만우에게서 느껴지는 그 희미한 존재감, 그 너머의 진정한 만우를 어젯밤에 경험했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탈을 벗고 탈각하고 있는 깨달은 자의 존재감은 500년을 살아온 영물인 호선의 숨이 막힐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그만큼 원래 주어진 천명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니까.
그런데, 방매는 그런 만우의 숨 막힐 것 같은 존재감을 단박에 평범하게 바꿔 놓았다.
‘무슨…….’
기린의 말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던 만우가 유일하게 진심으로 반응하는 사람이 방매라는 것에 호선은 혼란스런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근데 그보다도 먼저 분위기를 확 잡치는 이들이 있었다.
쩍!
콰앙-!!!
황룡객잔의 문이 쿵 소리가 나는 것도 모자라 아예 쩍 갈라지면서 박살이 나 버린 것이다.
“흐음.”
날아오던 파편들이 만우의 콧소리 한 번에 그 자리에 멈춰서더니 후드득하고 떨어져 내렸다. 그것을 본 척일과 척사영의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방금 만우에게서는 그 어떠한 공력의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죄인은 나와 오라를 받으라!!!”
다시 한 번 더 사자후가 터져 나왔다. 만우가 시끄러운 듯 인상을 살짝 쓰자 사자후는 만우와 그 뒤의 일행들에게로 쏟아지지 못하고는 소리가 튕겨 올라가서는 황룡객잔의 위로 향했다.
“시끄러.”
와자작!!!
“어…….”
만우는 심술이 난 것인지 사자후 자체를 위로 돌려서는 황룡객잔의 천장을 깨부쉈다. 하필이면 황룡객잔의 중앙이 ‘ㅁ’자 형태로 천장까지 구멍이 뚫려 있었던지라 객잔의 지붕에 부서지면서 파편들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자신의 사자후가 만들어 낸 참사에 키가 만우보다 머리 하나는 족히 큰 이가 멍한 눈으로 천장을 쳐다봤다.
“이…… 무슨.”
“봐봐. 오죽 시끄럽게 소리를 질렀으면 천장이 무너지냐. 천장이.”
만우는 넋이 나간 무인을 보면서 이죽거렸다. 그리고는 무인의 아래 위를 슥 훑어보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황보세가 같은데. 여기는 어쩐 일로?”
“어…….”
황보세가의 무인은 만우를 마주하고는 멈칫했다. 자신의 코앞에 선 만우 때문이다. 과장된 소문이라고 치부하기는 하였으나 그 소문의 주인공이 눈앞에 떡하니 있으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아까 죄인 뭐라 하던 것 같은데.”
만우는 슬쩍 고개를 옆으로 빼서는 부서진 황룡객잔의 문 너머로 보이는 전경을 보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황보세가의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으로 타고난 근골을 갖는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건 여자건 가리지 않고 큰 키와 체격을 자랑한다.
그런 황보세가의 무인들 수백이 연경대로에 모여 있는 장면은 그 자체로만 봐도 장관이었다.
기골이 장대한 장군들을 모아 놓은 것 같은 기백이 느껴진달까.
“설마. 나보고?”
“중일. 물러서라.”
만우가 고개를 삐뚜름하게 치켜들었다. 그 모습은 지금 무림 전체를 진동시키고 있는 천하제일인의 풍모가 아니라 마치 뒷골목 삼류 잡배처럼 보였다.
하지만 먼저 나선 황보세가의 무인을 물리는 진중한 목소리가 있었다.
“황보천.”
“기억하시는구려.”
“기억하지. 본주가 어찌 기억하지 못할까.”
만우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황룡객잔 밖 연경대로에 장승처럼 늘어선 황보세가의 무인들 사이로 나온 황보천을 본 다음이었다.
황보천은 자신을 보면서 입꼬리를 잔뜩 끌어올리고 있는 만우를 보고서도 얼굴 표정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괄괄하고 다혈질적인 황보세가의 사람들 사이에서 황보천은 인내심과 끈기가 강해 가주에 오른 자였다.
하지만 한 번 분노하면 마치 바다의 파도가 밀려드는 듯하다 하여 그에게 붙은 별호가 유해권(流海拳)이었다.
“이 사달을 낸 것이 바로 황보천, 네놈일 지언데.”
만우는 황보천을 알고 있었다. 아니, 그를 모를 수가 없었다. 애초에 지금의 황제가 전 황제의 일을 꺼내들게 만든 그일 자체가 황보천으로부터 시작된 일이었기 때문이다.
황보천의 저 유해 보이는 얼굴과 인내심이 강한 성격은 만우의 눈에는 그저 연기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의 눈에 황보천은 웬만한 무림의 노고수들보다 훨씬 더 노회한 구렁이 같은 놈이었다.
“이 황보천이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맞소. 하나 나로 인해 그일이 일어났다니, 그것은 인정할 수 없소이다.”
황보세가는 애당초 무림보다는 관과의 거리가 더 가까운 곳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중원에서 무명을 떨치고 있는 만우를 황실로 부르는데 황보세가도 부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
만우는 자신을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는 수백의 황보세가 무인들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황보세가 무인들은 분노하고 있었다. 만우가 하늘같은 자신들의 가주를 이놈 저놈 불렀기 때문이다.
“그럼 그때의 약조를 지키지?”
만우의 입에서 나온 약조란 말에 황보천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
“본주는 싸우러 온 것이 아니니 검을 들 이유가 없소.”
그랬지만 검이 날아들었다.
날아드는 검에 그냥 맞아 죽고 싶은 생각은 없기에 검을 뽑아들었고, 그러자 감히 황상 앞에서 검을 뽑아들었다는 이유로 반역이니 뭐니 하면서 금의위들이 만우를 향해 달려들었다.
만우는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럼 어쩌라고.’
그냥 중원을 유람하고 홀로 독보하고 있던 만우를 황상의 이름으로 다짜고짜 불러들인 것이 바로 이들이었다.
그런데 사람을 불러 놓고는 검무를 추는 무희처럼 검술이나 보자는 무례부터 시작해서 검을 들지 않으니 다짜고짜 공격하는 것은 대체 어느 나라의 법도란 말인가.
그리고는 그에 맞서기 위해 검을 뽑았더니 반역이라?
한 마디로 제 입맛대로 사는 것에 익숙한 놈들이 이 황실에는 득시글거린다는 소리였다.
굳이 귀찮음을 자처할 이유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또 그런 놈들을 그냥 보고만 있지 못하는 것이 만우의 바로 이 지랄 맞은 성격이었다.
자신을 가만 놔두면 모르지만 자신을 그 진흙탕 속으로 끌고 들어갔으니 그 진흙탕이 쏟아져 사방팔방이 더러워진다고 하더라도 만우는 알 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끼어들지 않고 지켜보는 놈들이 있었다.
‘황보세가라 했던가?’
관과 무림의 상호불가침 조약을 알고 있던 만우는 황실에서 부른 자리에 세가의 사람이 껴 있을 줄은 몰랐다.
만우가 중원 천지를 돌아다니면서 강자에게 검을 내밀었다고는 하나 일부러 황보세가는 피했었다.
만우에게 황보세가는 무림세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때의 만우는 지금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아니,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손속에 자비가 없다는 정도.
그 때문에 금의위 수십이 근맥이 잘리고 단전이 폐해져서는 폐인이 되어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황금을 들여 키운 수십의 금의위들이 만우의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못하고 나가떨어진 것이다.
하지만 만우는 알고 있었다.
황제의 곁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는 남진무사와 북진무사는 자신보다 반 수 정도 떨어지는 실력이기는 하나 분명 화경의 고수들이란 것을.
‘약간 벅찰 수도 있겠군.’
이미 만우가 죽이지 않고 폐인으로만 만든 금의위가 수십이 넘어갔다. 그동안 만우는 공력과 체력을 꾸준히 소비하였으나 저 두 명이 화경의 고수는 아니다.
만약에 저 둘까지 나선다면?
‘흐흐.’
저 둘을 어찌어찌 이긴다 하더라도 황제는 만우를 살려 두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만우는 물러서지 않았다. 애초에 검을 들고 검주가 된 후로 이런 상황에 한두 번 처해 본 것이 아니다.
쿠당탕!!!
만우는 마지막으로 달려들던 금의위까지 처리했다. 하지만 이런 저런 상념 때문인지 마지막으로 달려들었던 금의위는 약간 검이 얕게 들어가 폐인으로 만들지 못했다.
그게 나중에 동창제독인 부로가 되었지만, 그것은 먼 미래의 일이었다.
그리고 황제의 곁에 있던 남진무사와 북진무사가 나서려는 순간.
벌떡!!!
타닥!
만우와 황제 사이에 황보천이 떨어져 내렸다. 황보천은 만우 앞을 가로막고는 태산 같은 어깨를 쭉 펴며 만우를 쳐다봤다.
“뭐하는 짓이지?”
황보천은 지금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만우는 그것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 수 있었다. 만우가 금의위를 제압하는 내내 황보천의 시선이 자신에게서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황보천의 두 눈에 번들거리는 저 눈빛은 딱 그것과 똑같았다.
자신을 이용해 먹을 궁리를 하던 각 문파와 세가, 그리고 무림맹의 노회한 늙은이들의 눈빛.
이놈은, 감히 검주인 자신을 이용하려 하고 있었다.
“예까지 하게나.”
“애초에 본주는 시작한 적이 없다. 하나 끝내는 것은 본주의 마음이지.”
샤악!
황보천의 옷깃이 나풀거리며 떨어졌다. 만우는 그에게 경고한 것이다. 끼어들면 그조차도 베어 버리겠다고 한 것이다.
“예서 물러난다면 황보의 이름을 걸고 원하시는 것 한 가지를 이뤄 주겠네.”
“내가 원하는 것?”
“그래. 황보의 이름을 걸고.”
황보천의 눈과 만우의 눈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하지만 황보천은 애초에 만우와 길게 눈을 마주칠 생각이 없었다. 그는 만우가 대답하지 않았는데도 몸을 돌려 황제에게 읍했다.
“영특하고 총명하신 황제 폐하! 폐하와 대명의 위엄을 이 정도면 이 자도 충분히 느꼈을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하니 폐하께서는 부디 자비를 베푸시옵소서!”
누가 보더라도 장내의 상황은 만우가 압도적으로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하지만 황보천은 그것을 말장난으로 황제의 자비인 것처럼 뒤바뀌어 놓았다. 만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무…….”
“어찌 칼잡이의 칼이 빠르고 강맹하다 하여 저 하늘의 해를 가릴 수 있겠사옵니까? 위대하신 황제 폐하의 군령 한 장이면 날랜 군마들이 세상을 휩쓸어 버릴지언저, 폐하의 한 마디에 이리 몸을 던진 충신들이 많다는 것만으로 폐하의 위대함을 증명하시었사옵니다.”
황보천의 목소리는 내공을 싣지 않았음에도 우렁우렁했다. 동시에 그는 절묘하게 황제의 귀를 홀렸고, 황제로 하여금 피하고 싶은 지금 상황을 자신이 자비를 내리는 것이라고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참으로 뱀 같은 혀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황제는 기다렸다는 듯 황보천의 그런 말을 덥석 붙잡았다.
“조, 좋다! 내 칼 쓰는 데 재주가 있다는 낭인을 들여 그 재주를 충분히 보았으니 이제 흥이 돋워졌다! 금의위에 대한 것은 잊을 터이니 낭인은 이만 물러가라!!!”
전 황제, 건륜제는 만우의 신위를 두 눈앞에서 지켜본 후 그 놀람을 내색하지 않으려 애를 썼다.
그의 곁에 든든한 북진무사와 남진무사가 있었지만, 금의위를 추풍낙엽처럼 쓰러뜨리는 만우를 눈앞에서 보자 압도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찰나에 황보세가의 가주인 황보천이 나서 중재를 하였으니, 건륜제는 옳다구나 하고 자비를 베푼 것처럼 하여 만우를 내보내기로 했다.
[예서 멈추셔야 하오. 명 전체를 적으로 돌릴 생각이시오?]
“…….”
만우는 전음으로 말을 하는 황보천을 노려보았다. 황보천은 세 치 혀로 자신을 황제 앞에서 솜씨나 부린 칼잡이로 만들어 버렸다.
끝내는 것을, 황보천이 나서서 제 마음대로 해 버린 것이다.
[이것이 무림 전체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오. 죄 없는 피가 흐르길 원하시오?]
황보천은 더할 것 없는 공명정대한 협의지사인 것처럼 만우를 설득했다. 하지만 만우는 황보천을 믿지 않았다. 황보천의 눈에서 일렁이던 야욕을 분명히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다.
놈은 연기를 하고 있었다.
“본주는 오늘 이 날을 잊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만우는 그곳에서 검을 물고 같이 죽자고 달려들지 못했다. 황보천이 한 말이 아예 이치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나 황보천은 무림을 위해 나선 것이 아니다.
황보천은 자신의 영달을 위해, 황보세가를 위해 그 자리에 나선 것이니까.
그리고 그때의 일이 황보세가는 쏙 빼놓은 채 황실의 수치니 뭐니 하면서 소문이 떠돌았다. 그와 동시에 황보세가의 군문에서의 승승장구가 이어졌고, 만우는 다시 한번 더 확신할 수 있었다.
황보천은, 자신을 이용했다.
자신을 이용해 그러한 소문을 내어 황실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무림인에 대한 경각심을 높여 무림 출신이나 군에 충성을 바치는 황보세가를 만들어 세를 넓혔다.
하지만 그건 끝이 아니었다.
하나의 약조.
만우는 아직 그때 그 자리에서 황보천이 내걸었던 하나의 약조를 아직까지 말한 적이 없었다.
*****
“그랬었지. 그랬어.”
“이제 기억난 척을 하시겠다?”
만우는 코웃음을 쳤다. 공명정대하고 사람 좋아 보이는 황보천이나 그때 황실에서 보였던 눈빛을 떠올리면 그런 것을 절대로 잊을 인물이 아니다.
또한 그가 만우를 직접 만나러 나온 것 역시 치밀한 계산이 머릿속으로 이미 이루어졌고, 얻을 것이 있기 때문에 직접 행차한 것이리라.
“혀가 매섭군.”
“본주는 아직 그날을 잊지 않았으니.”
만우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시릴 정도의 한기와 살기가 뒤섞여서는 황보천에게로 향했다. 황보천이 그런 만우의 살기를 받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노옴! 황보세가의 가주시다! 예를 지켜라!!!!”
그런데 그때 황보세가의 젊은 무인 하나가 끼어들었다. 그들에게는 하늘이나 다름없는 가주가 한참 어려 보이는 만우에게 하대를 받는 것이 거슬린 모양이었다.
하지만 만우는 어이가 없었다.
“너. 본주가 누군지는 아나?”
뭐 명문정파들이야 항렬이니 연배니 하면서 그런 복잡한 것을 따질지도 모르나 적어도 만우는 아니다.
무림에서 가장 으뜸 되는 것은 바로 실력과 명예다.
“아무리 그렇다 하여도 한 가문의 가주인데!”
“그러는 나는? 황보천이 무림십좌에 발끝이라도 미쳤던가?”
“네놈은 듣던 대로 사파에 가까운 놈이로구나! 아무리 무림이라 하여도 사람 간의 예가 있거늘.”
“아, 그래서 이리 우르르 몰려온 네놈들은 예의가 투철한 거고?”
“이, 이익!!!”
만우의 혀는 현란하고 매서웠다. 섣불리 나섰던 황보세가의 젊은 무인이 얼굴을 붉힌 채 할 말을 찾지 못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야. 황보천이.”
부르르르!!!
연경대로에 늘어선 황보세가의 무인들 수백에게서 동시에 가공할 만한 투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투기의 발로는 만우에 대한 분노였다.
그렇게 수백의 무인들이 만우를 찢어죽일 것처럼 노려보고 있었지만 만우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이 정도로 주눅이 들기에는 만우가 걸어온 길의 험난함에는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왜. 아니꼽나?”
만우는 황보세가의 무인들이 아니라 황보천을 보고 물었다. 황보천은 만우가 그리 굴었음에도 전혀 깨지지 않은 표정을 그대로 유지했다.
“거슬리기는 하는군.”
“어째. 그럼?”
만우는 손가락을 들어 까닥였다. 그러자 황보세가의 무인들이 쏟아내는 투기가 한층 더 강해졌다. 개중에 살기마저 느낄 정도이니 만우의 행동에 격분하는 이들이 상당히 많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움직이지 않고 대열을 유지하는 것을 보니, 황보세가는 사실상 세가가 아니라 거의 군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듯 보였다.
“안 올 거야?”
만우는 일부러 황보천을 도발했다. 더 나아가서는 황보세가를 도발했다.
“황보세가 덩치를 자랑하려고 온 건가? 응? 안 올 거면 물러나지. 너희 윗대가리 보러 가는 길이니까.”
만우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하늘의 자식이라 불린다면서. 응?”
천자(天子).
만우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면서 낄낄거리자 황보세가의 무인들의 살기가 강해졌다. 수백 명의 무인들이 동시에 뿜어내는 살기는 상상 그 이상이었다.
오죽하면 척일이나 척사영이 손을 들어 기막을 둘렀을까.
만우는 어깨를 짓누르는 그 살기를 피식거리며 받아 냈다. 그리고는 손을 까닥였다.
“비키라니까. 부른대잖아. 본주 보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