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9. 천상천하 유아독존 (2)2022.03.29.
“그러니까 피를 흘리지 마라. 감히 이 검주에게 먼저 이를 들이민 황제에게? 그러면 뭐, 죽으라는 건가?”
“…….”
기와 린은 할 말이 없어졌다. 만우 입장을 그들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것보다 더 큰, 세상을 위한 일이었다.
“그냥 죽어라…… 흠. 그걸 신수란 작자들이 와서는 죽어야 될 사람에게 하는 말이라고.”
웅웅웅웅!!! 드드드드-! 만우의 전신에서 공력이 활화산처럼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자연스레 주변의 대기가 만우의 공력과 공명을 하면서 미친 듯이 떨어 대기 시작했다.
“하늘이 대체 나에게 무엇을 해 줬다고?”
사아아아! 만우의 주변으로 스멀거리며 푸른 하늘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기와 린은 난처한 표정으로 그런 만우를 쳐다보았다. 눈앞의 인간을 제압한다? 수천 년을 살아온 기린이지만 쉽게 남을 해하지 않는다. 피와 죽음을 끔찍이도 혐오하는 기린이기에 단 한 번도 생명체를 해한 적이 없었다.
“운명이 나에게 대체 무엇을 해 줬다고?”
만우는 주변에 자욱하게 깔린 푸른 하늘과 그 안에 선 기와 린을 보면서 다시 한번 더 물었다. 그렇게 기와 린에게 묻는 만우의 눈은 지극히도 잔잔한 호수처럼 맑았다. 부동심(不動心). 자신의 운명을 반추하면서도 만우는 완벽한 부동심을 유지했다.
“만약 하늘과 운명이 내게 바라는 것만 있다면.”
만우는 하늘과 운명의 덕을 보면서 산 적이 그가 기억하는 한 한 번도 없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먼 명나라까지 와 머슴살이를 할 이유도 없고 그 어린 나이에 유일한 안식처이던 광산군을 그리 잃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정말 하늘과 운명이 있었더라면, 만우에게 어딘가에 정착하여 평온하게 살아가는 즐거움을 알려 주지 않고 역마살을 주어 평생을 떠돌게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뭐?
“내가 하늘을 버리면 되겠구나.”
만우는 기와 린을 보면서 비릿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양 손에서 자연스럽게 강기를 일으켰다. 수강을 일으킨 만우는 전신의 감각을 일깨웠다. 화르륵! 그런 만우의 단전 속에서 정화가 그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러자 그 순간 느껴졌다. 만우는 자신의 상단전, 그러니까 백회혈과 이어진 끝 모를 기다란 끈 같은 것을 느낀 것이다. 그것은 평소에는 느껴지지도,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지금 순간만큼은 그것이 또렷하게 느껴졌다. 만우가 느끼고 있는 것을 같이 느낀 기와 린의 눈이 커졌다.
“이, 인간! 무엇을 하려고!”
“위험하다. 위험해! 어찌하려 죽음을 자초하려 하는 것인가!”
“그것을 끊었다가는 인간, 넌 죽을 것이다!”
기와 린이 앞다퉈 다급하게 만우에게 말했다. 하지만 만우는 그들의 목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에게 연결된 그 끈, 그 끈만이 또렷하게 느껴졌다. 운명. 하늘이 내린 바로 그 질서. 서걱-!!!!
만우는 그 끈을 수강을 씌운 자신의 손으로 갈라 버렸다. 그 순간 구름이 껴 있던 밤하늘이 쩌억 하고 갈라지면서 그 속에 숨어 있던 월광이 고고한 빛을 세상 천하에 흩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쏟아지는 월광 너머로 아뜩한 상실감이 만우를 삽시간에 뒤덮었다. 그 순간은 찰나였지만 만우는 자신의 존재 자체가 세상으로부터 부정당하고 있는 듯한 심한 박탈감과 괴리감을 느꼈다. 우우웅-!!!! 하지만 그런 만우의 박탈감과 괴리감을 채워 주는 것이 있었다. 기천(氣天). 만우가 가진 모든 것의 시작이자 종점인 바로 그것. 산중무예로 일인전승으로 내려오는 그 기천. 그 푸른 하늘이 만우가 끊어 버린 그 끈의 빈자리를 채워 넣으며 새로운 공명이 되어, 새로운 울림이 되어 만우를 두드리기 시작한 것이다.
“아!”
만우가 바짝 쥐고 있던 긴장의 끈을 탁 하고 놓았다. 그러자 만우는 자신의 몸이 공중으로 부양하는 느낌을 받으며 끝 모를 고양감을 느꼈다. 본래는 이리한다면 주화입마에 곧바로 빠져 폐인이 되거나 죽거나 둘 중에 하나인데 지금 만우에게 일어나는 변화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제 손으로 운명의 끈을 베어 버린 만우다. 하늘로부터 이어져 있는 운명의 끈, 결코 피해 갈 수 없다는 그 운명의 끈을 고작 필멸자인 만우가 깨달음을 얻어 제 손으로 베어 버린 것이다. 물론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진인에 오른 만우의 경지와 주작이 불어넣어 준 숨결이라는 우연이 합쳐져서 만들어 냈기 때문이기는 하나 기와 린은 그런 만우를 보면서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제 손으로…….”
“운명을 베어 낸 자.”
기와 린이 차례대로 말했다. 호선은 그런 기와 린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두 눈을 부릅떴다. 사람은, 아니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태어나면서부터 운명을 이고 태어난다. 사람보다 더 전에 존재했던 별이 그 사람의 운명을 이미 점지해 두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하나 때때로, 그런 필멸자들 중에 제 손으로 운명의 끈을 베어 내는 이들이 있었다. 하늘이 부여해 준 운명의 끈을 끊고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자들. 하지만 그런 자들이 필멸자 중에서 탄생할 확률은 100만분의 1, 아니 1000만분의 1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자들은 존재해 왔다. 그리고 그런 자들을 무어라 부르는지 호선은 잘 알고 있었다. 원영신(元嬰神), 혹은 광신(光神). 화아아악-!!!
“크윽!”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호선이 자신도 모르게 이를 꽉 깨물며 선기를 끌어올렸다. 잠시 안정을 찾는가 싶은 바로 그 순간, 만우의 존재감이 끝도 없이 자라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신(神). 호선은 그 신이란 존재를 상상해 본 적도 없지만 단 한 번 이와 비슷한 것을 느껴 본 적이 있었다. 선계(仙界). 비록 끝까지 오르지 못하고 일말의 인연이 그녀를 옥죄는 사슬이 되어 떨어져 내렸지만 만우에게서 느껴지는 존재감이 바로 그 선계의 문을 통해 느껴지던 것과 비슷했다.
“우화등선을 하는 건가요?”
호선은 그런 만우를 보면서 기와 린에게 물었다. 그러자 기와 린은 난처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호선을 돌아보고는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다.
“나도 모른단다, 아이야.”
“인간에게 그저 부탁을 하러 왔을 뿐인데 광신이라니…… 우리가 저 인간으로 하여금 허물을 벗게 해 주었구나.”
광신이라 함은 신기(神氣)를 품게 되기 시작한 모든 존재를 뜻한다. 따로 무학에서는 그 상태를 원영신이라 부르는데 이 역시 공력을 넘어선 신기가 극도로 영성을 띠어 작게 응축한 것을 뜻한다. 그 원영신은 또 다른 육신의 씨앗이라 칭해지기도 하는데 원영신, 혹은 광신이 극성에 달하면 육신을 버리고 원영신을 진짜 몸으로 삼는 반인반선(半人半仙)에 들어서게 된다.
“우리가 반선을 깨웠구나.”
“그럼 린아, 이를 어찌해야 하느냐. 천살이 태어난다 하더라도 저 인간에게는…….”
“……세상의 혼란만 가중될 터.”
기와 린은 여전히 복잡한 얼굴이었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순간에 만우가 제 허물을 스스로 벗고 광신의 경지에 올라서면서 기와 린이 만우를 설득하려 한 논리 자체가 필요 없어지게 됐기 때문이다. 이미 세상의 가장 큰 축인 운명의 굴레를 벗어던진 만우다. 그런데 천살성이 태어난다고 해서 뭐, 이미 더 이상 하늘의 운명은 만우에게 영향을 끼칠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만우에게로 향해야 할 그 천살(天殺)이 어디로 향하겠는가. 바로 세상이다. 그렇게 기린과 호선이 어찌할 줄을 모르고 헤매고 있을 무렵, 만우의 정신은 이미 원래의 육신에 안착해 있었다. 지극히 찰나의 순간이었으나 만우는 자신의 혼백이 하늘과 땅을 넘나들고 우주를 넘어 삼라만상의 진리를 먼발치까지 보고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네가 원영신이구나.’
만우의 눈에서 옥빛의 광채가 치솟았다. 두 눈에서 옥빛의 안광이 뿜어져 나온다는 것은 광신의 증거였다. 원영신을 이루었다는 것은 만우의 깨달음이 최소 생사경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하지만 만우는 이것이 톡 치면 스러질 사상누각이란 것 역시 누가 말해 주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정기신(精氣身). 이 세 가지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것이 무인들이 바라는 이상향인데 만우는 지금의 깨달음으로 원영신을 이루게 되면서 그 정기신이 크게 틀어졌음을 깨달았다. 만우의 정(精)은 광신을 이루었으나 아직 기(氣)와 신(身)이 그를 따라오지 못한 것이다.
‘최소한 생사경에는 가야 되겠군.’
지금 만우의 몸은 좋게 말해 무너지기 일보 직전의 둑방이나 다름없었다. 지금 이런 만우의 몸에 누군가 돌멩이 하나만 던져도 만우의 몸은 폭주를 일으킬 것이다. 기와 신이 따라오지 못할 깨달음을 얻은 것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자칫하면 백치나 폐인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나마 만우가 얻은 것이 깨달음이라 기(氣)만 지나치게 성장하거나 신(身)만 성장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만우의 정(精)이 크게 성장했다는 것은 그만큼 자의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제어의 범위가 늘어났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진정한 진인의 경지.’
기천 자체가 중원의 무학과는 그 궤를 달리했다. 그렇기에 중원 무학의 기준으로는 현경 초입에 오른 만우였으나 기천의 기준으로는 진인(眞人)에 완벽히 올라서지 못했다. 그런 것이 방금 전의 깨달음으로 인해 완전한 진인에 올라서게 된 것이다.
‘이로써 내 육신이 완벽하게 내 통제 하에 놓이게 되었구나.’
진인이라 함은 풀어서 말하면 진정한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 뜻이 무엇이냐면, 사람은 절대로 자신의 신체가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끝까지 끌어내지 못한다. 그런 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창안된 것이 무공이나 무예인 것이다. 스스로의 육신을 끊임없이 통제하고 제어하는 것이 무공이나 무예의 기본적인 요지다. 하나 인간이란 것은 소우주라 불릴 정도로 복잡하고 섬세하기 그지없는 유기물인지라 제 아무리 몸을 단련하고 무공을 익혀도 제 몸의 모든 잠재력을 끌어낼 수는 없었다. 당최 자신의 몸이 가진 잠재력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그 누구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 기천의 진인은 바로 그 경지를 뜻했다. 자신의 몸에 대해서 백분십할로 이해하게 되고 모든 것을 끌어내 쓸 수 있는 경지.
‘그러니.’
인간의 육신이 도달할 수 있는 극에 달하는 경지가 바로 진인이다. 하나 그 정도로도 만우는 자신의 깨달음을 담아내기가 버겁다는 것을 느꼈다. 생사경(生死境). 그 전무후무한 경지에 도달해야 비로소 자신의 깨달음을 온전히 녹여 낼 수 있을 것이란 느낌이 들었다.
‘시간이 해결해 줄 터.’
다행이라면 가장 힘든 깨달음을 미리 얻었기에 만우는 자신의 상, 중, 하단전의 그릇이 무한하게 커졌음을 느꼈고 완벽하게 자신의 통제에 들어온 육신 또한 단련으로 무한하게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 부지런히 수양하고 단련하다 보면 이미 찾아온 깨달음과 만우가 이룬 것들이 자연스럽게 하나로 녹아들 것이다.
“푸우우우우.”
새로운 경지에 발을 내딛었으나 환골탈태 같은 극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단지 만우가 내뱉는 숨결에는 자욱한 탁기가 스며들어 있었다.
‘경지가 낮아졌다?’
‘고의적으로 성취를 막아 두었구나. 허어. 어디까지 도달한 것인가.’
기와 린은 그런 만우의 상태를 곧바로 눈치챘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대해졌던 만우의 존재감이 다시 작아진 것을 보고 만우의 상태를 눈치챈 것이다. 그런 기와 린의 두 눈에 기광이 흘렀다. 인간은 본래 욕심이 많은 동물이다. 그렇기에 당장 눈앞에 있는 달콤한 과실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해 화를 불러일으키곤 하는데, 눈앞의 만우는 그 달콤한 과실의 유혹을 뿌리쳤다. 그리고는 다시 낮은 곳으로 내려왔으니, 기린이 호기심을 품는 것도 문제는 아니었다.
“어떤가, 인간.”
“아니, 이제 인간이라고 부르지도 못하는가?”
기와 린은 편안해진 만우의 표정을 보면서 말을 걸었다. 그들은 그러면서 목소리에 선기를 실었다. 그러자 만우의 시선이 그 둘에게로 돌아갔다.
“아직 사람인데, 귀신 취급은 좀 그러한데.”
“그런가…… 대단하군.”
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순수하게 감탄했다. 신의 반열에 오르며 느낀 그 고양감을 버리고 다시 인간으로 돌아올 수 있는 정신력을 지닌 인간이 몇이나 되겠는가. 한데 그렇게 말을 하는 만우의 눈에는 일말의 아쉬움도 보이지 않았다. 당연했다. 이미 한 번 가 본 길을 다시 걸어가는 것인데, 시간이 걸릴 뿐 조급할 이유가 만우에게는 조금도 없었기 때문이다.
“한데 어찌…… 어찌 원영신을 유지할 수 있는 거지?”
린이 심각한 표정으로 마주에게 말했다. 마주는 자신의 머리 위를 부유하는 희멀건 광구를 힐끗 쳐다봤다.
“이게 보여?”
“보인다. 하나 우리 같은 존재에게만 보일 것이다. 본래 원영신이란 것 자체가 신선의 육신이니. 신선은 스스로가 원하지 않는다면 육신이 있는 자들은 그 누구도 신선을 볼 수가 없다.”
우화등선 자체가 그 원영신을 완성하는 마지막 단계라는 뜻이다. 속세의 허물을 벗고 신선이 된다는 것이 원영신을 뜻하는 것임은 만우도 원영신을 만들어 내고서야 깨달았다.
“나도 모르겠는데?”
만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만우는 분명 고의적으로 정과 기, 신을 맞추기 위해 깨달음을 얻고도 진인의 경지에 머물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구가 머리 위에서 맴돌고 있는 이유를 당연히 만우는 알 수 없었다.
“한 번 생겨난 육체가 어찌 버려지겠는가. 그것이 자연의 섭리거늘.”
기는 광구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린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린은 끄응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팩 하고 돌렸다.
“이해하시게. 린이는 자신이 이해되지 않는 것에 대해 스스로가 답답해하는 것이니.”
“이해할 필요도, 그럴 생각도 없다. 그냥 너희는 너희고 나는 나일뿐.”
천명(天命)의 끈을 베어 버린 만우는 정신적으로 어마어마한 고양감과 함께 자유를 얻었다. 그렇기에 만우는 명확하게 기린과 자신 사이에 선을 그었다.
“너희는 하늘이 만들어 낸 피조물이나 신수가 되어 스스로의 한계를 허물어뜨린 존재. 하니 나의 말이 무엇인지 다시 설명해 주지 않아도 알 터.”
“…….”
“천살성? 그것이 나로 인해 생겨난다 한들 그것이 무슨 상관인가. 나는 아직 필멸자이고 속세에 많은 미련과 연이 남아 있거늘. 그것은 중원이 감당하고 해결해야 될 일이다.”
만우로 인해 천살성이 태어나고, 그 천살성이 만우에게 향할 것이란 것도 이제 더 이상 그에게 통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하나로 귀결된다(萬流歸宗). 만우는 무학을 통해 그 깨달음에 도달하였으나 그렇다고 하여 만우가 얻은 깨달음이 스스로를 관조하며 수백 년간 수양에 힘쓴 이들보다 못하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독보(獨步)하는 자였으니, 내 길을 가겠다. 하니 너희들은 괘념치 말라.”
만우의 목소리가 힘을 품고는 웅웅 하며 기린에게 가닿았다. 기와 린은 그런 만우를 보면서 굳힌 표정을 풀지 못했다.
“업과 겁의 무게를 이제 인간도 느끼고 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를 흘리려 하는가?”
모든 피와 죽음에는 업과 겁이 뒤따른다. 그것은 제 아무리 신선이라도, 아니 신선보다 더 위대한 존재라 하더라도 피할 수 없는 이 세상의 이치다. 만우가 이번에 끊은 것은 모든 필멸자가 안고 태어난 천명(天命)이나, 그렇다고 하여 세계의 인과율에서 벗어났다는 뜻은 아니다. 아니, 만우는 이제 자신만의 하늘을 만들었고, 독보하고자 하였으니 그 업과 겁은 훨씬 더 무겁게 만우에게 작용할 것이다.
“이젠 신수께서 이 몸의 걱정도 하는가? 한데.”
만우는 우습다는 듯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었다.
“너희가 진정으로 걱정하는 것이 본주인가, 아니면 천살성인가?”
기린은 결코 만우를 위해 이 자리에 온 것이 아니다. 그들이 온 것은 얼토당토않게도 황제를 만나 피를 흘리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 온 것이다. 만우는 그것이 어이가 없었다.
“하면 너희들은 먼저 황제를 찾아갔는가?”
“…….”
“왜. 황제는 세상천지 가장 존귀한 자이니 너희들의 함부로 말조차 하지 못할 정도인가?”
“…….”
“이상하군. 내 마음만 먹으면 한 시진 내에 황제 놈의 목을 따올 수 있을 것 같은데.”
스악-! 만우의 한 마디에 주변의 공기가 뒤바뀌었다. 그러자 호선이 자신도 모르게 한 발자국 물러섰다. 단지 기린만은 신수라는 말에 걸맞게 만우의 돌변한 공기를 물러서지 않고 받아 내었지만, 표정이 더욱 굳어지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결국 피를 보겠다는 것인가.”
“인간. 네 결정이 세상에 수없이 많은 피를 불러올 것이다.”
기와 린은 만우에게 이제는 거의 반 협박조로 이야기했다. 우스운 점은 만우에게 직접적으로 협박하는 것이 아니라 중원을 놓고 협박하는 것처럼 들린다는 것이었다.
“그 존귀하신 분께서 알아서 하시겠지. 아니 그런가?”
만우는 그런 기린을 비웃었다. 신수라 들었지만 주작과는 다르게 기린은 비겁했다. 피를 흘리지 않을 것을 그 존귀하다는 황제에게는 가서 말할 생각도 못 하면서, 만우를 찾아와 천살성이니 업과 겁이니 하면서 말만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들어 주지 못하겠군.”
“…….”
스윽.
“기.”
만우가 마침내 축객령까지 내리자 온화한 분위기였던 기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그런 기를 린이 불렀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호오.”
그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지만 만우는 겁먹지 않았다. 이미 한 번 주작과 겨뤄 보아서 신수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익히 잘 알고 있는 만우였다. 하나 그때는 도인의 경지였고, 이제는 온전한 진인의 경지에 들어섰다. 그러니 그때와는 또 달라질 것이다.
“안 그래도 한 번 전력을 쏟아 내 보고 싶었는데.”
새로운 경지에 올랐으나 그렇다고 하여 그것을 실험해 볼 곳이 없던 참이었다. 적이라고 해 봤자 잔챙이들밖에 없었는데, 신수라면 아주 좋은 대련 상대가 되어 줄 것이다. 만우가 전력을 쏟아부어도 거뜬히 견뎌 낼 수 있는 그런 상대. 하지만 한 발자국 만우에게 가까이 다가간 기가 보인 행동은 만우가 전혀 예상치도 못한 행동이었다. 털썩.
“마지막으로 부탁드리겠네. 아니, 염치없게 인간에게 피를 보지 말라 청하지도 않겠네. 그러니, 그러니 우리가 생각한 대로 한 번만 움직여 줄 수 있겠는가, 인간?”
“기!”
기와 린 중 기. 남아의 외형을 한 기가 만우 앞에 털썩하고 무릎을 꿇은 것이다. *****
“아미타불.”
불존의 발걸음이 그 자리에 아교를 발라 붙인 듯 딱 멈춰 섰다. 그런 불존은 무의식적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째서인지는 모르나 그 순간 구름이 껴 있던 하늘이 갈라지면서 월광이 고요한 연경을 밝게 비추었다.
“…….”
두근두근두근. 불존은 자신의 심장이 미친 듯이 박동하는 것을 느꼈다. 불존은 갑작스런 변화에 불호를 읊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쉬이 그 박동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아직…… 몸이 낫지 않아서인가?”
만우에게 일격에 나가떨어진 후 소환단만 복용하고 곧바로 용접곡을 나서 만우를 추격한 불존이었다. 그 때문에 몸이 나쁜가 했지만 그것이 아닐 것이라는 강한 직감이 들었다.
‘하면, 대체 어찌하여.’
부르르!!! 불존의 어깨가 순간 바르르 떨렸다. 한기가 든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불존은 자신의 육체가 자꾸만 제어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것에 당혹해하며 주변을 살폈다. 이런 현상은 불존의 무승 인생에 단 한 번도 겪어 본 적이 없었다. 혹시 모를 주화입마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불존은 근처에 안전을 간단하게 확인한 뒤 곧바로 운기조식에 들어가기 위해 가부좌를 틀었다. 그런 현상이 비단 불존뿐만 아니라 연경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
“아으하아아암!”
동군영은 그날 늦게까지 녹초가 되도록 검을 휘두르다가 기진맥진해서는 분명 잠자리에 들었었다. 그리고는 그 다음 날 일어났는데, 일어나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엉?”
검을 휘두른 지 꽤 되었다고는 하나 지금은 조천을 위해 풍찬노숙을 며칠이나 해 왔던 동군영이다. 그 때문에 격통을 감수하고 어제 밤늦게까지 홀로 수련을 한 것인데 몸이 너무나도 가벼웠다. 통통. 어제 각오가 남달랐던지라 조금 더 힘이 들어가 무리를 했다 생각했는데, 마치 하루를 꼬박 푹 자기라도 한 것처럼 몸이 새털처럼 가벼워진 것이다.
“역시. 수련의 효과가 있는 건가?”
동군영이 생각할 수 있는 게 딱 거기까지였다. 그게 아니고서야 자신의 몸이 이리 가벼운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너머에는 어젯밤 내공을 익힌 자들을 뜨악하게 만들었던 주화입마 대란이 있었지만 그것이 동군영 같은 일반인에게는 이득이 된 것이다. 만우의 깨달음이 하늘에 닿아 광신지경에 접어들면서 생겨난 여파로 인해 동군영 같은 일반인들에게는 마치 영약을 복용한 같은 효과가 일어난 것이다.
“아하아아암. 잘 잤다.”
방매나 간장, 설미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들 피부가 뽀얀 것이 광택이 흐르는 듯했고 간만에 날아갈 것 같은 상쾌함에 밝은 얼굴로 다들 내려왔다.
“역시 사람이 잠을 잘 자야 돼.”
“살 것 같다.”
“험, 험.”
그런데 1층으로 내려온 방매를 비롯한 일반인들의 눈이 커졌다. 그 1층 바닥에 마치 반 시체처럼 늘어진 이들의 몰골 때문이었다. 특히나 오는 내내 막강한 체력으로 지치지 않을 것 같아 보이던 이들이 반쯤 초죽음이 되어서는 빌빌거리고 있었다.
“어제 만우랑 다들 대련이라도 한 거예요? 쯧쯧. 그러니까 말 좀 잘 듣지.”
방매는 그런 그들을 보고 간밤에 만우와 한바탕 푸닥거리를 한 것이라 생각하고는 혀를 찼다. 이렇게 빨랫감처럼 늘어진 이들의 모습을 조선에서 몇 번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 무슨! 우린 대장 보지도 못했는데.”
“어? 서장관 할아버지! 얼굴색이 왜 그래요?”
감령이 억울하다는 듯 반박했지만 방매는 가뿐히 무시했다. 대신 위층에서 내려오는 척일의 두 눈이 퀭하게 들어간 것을 보고는 놀라서는 달려갔다.
“옹주마마 아니십니까. 헐헐.”
언제나 기운이 넘치던 척일도 오늘은 얼굴이 퀭했다. 심지어는 척사영마저도 얼굴이 불편해 보이는 것이 제대로 쉬지 못한 티가 팍팍 났다.
“다들 왜 이래?”
방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간만에 편한 잠자리라 그런지 좀 뒤척여서 그렇습니다. 그러니 이 늙은이는 신경 쓰지 마시지요. 헐헐.”
척일은 방매에게 그렇게 대답하고는 1층으로 내려갔다가 흠칫했다. 진이 빠져서 1층 곳곳에 널브러진 초절정 5인방을 본 것이다.
“다들 고생 꽤나 한 얼굴이네만. 헐헐.”
“고생…… 어르신도 느끼셨군요.”
“느꼈다마다.”
척일의 눈 밑이 퀭한 것도, 초절정 5인방이 파김치처럼 늘어진 것도 전부 어젯밤의 일 때문이었다.
“갑자기 내기가 진탕되고 혈맥이 끓어오르는 듯한 느낌에 주화입마가 드는 것 같은 현상이었나?”
“그러면 어르신도?”
“그렇네.”
하지만 파김치가 된 초절정 5인방과는 다르게 척일은 눈 밑이 퀭하기는 해도 쌩쌩했다. 이것이 바로 경지의 차이인 모양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아는 사람 없나?”
마치 세상이 격변하는 듯한 거센 울렁거림을 느낀 척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왜, 어디서부터 느껴진 것인가는 척일도 알 수 없었다.
“저흰 그저 1층에 모여 있었는데…….”
“후우. 죽는 줄 알았습니다. 밤새 진정시키느라.”
“쿨럭, 쿨럭.”
파김치가 된 초절정 5인방은 움직일 힘도 없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들끓는 내기와 혈맥을 진정시키기 위해 밤새 잠도 못 자고 쉬지도 못 한 채 운기조식을 했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수련을 위한 운기조식이 아니라 주화입마에 들지 않기 위해, 살기 위해 한 운기조식이니 사람이 지치는 것이 당연했다.
“조금 진정이 되는가 하면 다른 곳에서 날뛰고, 다른 곳이 괜찮아진다 싶으면 원래 괜찮아졌던 곳에서 날뛰고.”
“후우우우…….”
얼마나 지독했는지 밤새 온 몸이 들끓었다. 그 때문에 체력과 집중력이 완전히 고갈된 초절정 5인방은 누워서 꿈틀거리기만 할 뿐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못했다.
“대장이면 알지도 모릅니다.”
“아, 만우.”
척일이 위층을 올려다봤다. 황룡객잔은 가운데가 뻥 뚫린 개방감이 있는 구조의 ‘ㅁ’자 형태의 복도에 방이 주르륵 붙어 있었다.
“아직 안 일어났나?”
“어제 그 사단이 대장과 관련된 일이 아니었을까요?”
“……그러면 이 황룡객잔이 멀쩡하겠나? 그리고 그럴만한 경지의 무림인이 연경에 있고?”
사실 심증으로는 만우가 이 사건의 발단이라고 다들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물증이 없고 원인을 명확하게 알 수가 없기에 그렇지 않을까 생각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척일의 말처럼 말이 안 되는 것이 너무 많기도 했고. 쿡, 쿡.
“마익후 아저씨. 죽었어요?”
방매가 미동도 하지 않는 마익후를 손가락으로 쿡쿡 찔러 대는 것을 보고 있던 척일의 눈이 커졌다. 전혀 느끼지도 못했는데 어느새 자신의 옆에 만우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알아챈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있다는 것을 알리다니.’
척일은 자신의 감각이 뛰어나 만우를 알아챈 것이 아니라는 것에 모든 재산을 걸 수 있었다. 만우가 스스로를 알리려 했기에 느껴진 것이다. 그전까지는 만우가 바로 옆에 와 있다는 것도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
“잘 주무셨습니까요, 서장관 나리.”
“밤새 난리 때문에 한숨도 못 잤지.”
척일이 그런 만우를 보면서 눈을 빛냈다. 안 그래도 만우의 경지가 자신보다 위였기 때문에 그를 바라보면 망망대해가 느껴지던 척일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어제와는 또 달랐다.
‘느껴지지 않는다. 진정으로 눈앞에 있는 것인지 아닌지.’
눈으로 보면서도 저곳에 만우가 존재한다는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만우의 존재감 자체가 희미해진 것이다.
‘아니, 희미해진 것이 아니라.’
너무나도 커졌기 때문에 자신이 느끼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척일은 그런 만우를 보면서 침을 꿀꺽하고 삼켰다.
‘또 다시 한 걸음 나아갔단 말인가?’
만우의 기도가 이리 하룻밤 만에 변했다는 것은 척일 정도의 고수가 되면 눈치챌 수 없는 정도였다. 당장 같은 화경인 척사영은 만우에게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으니까.
“언니. 언니. 이 아저씨들 좀 봐봐.”
그때 방매가 호선을 발견하고는 달려가서 매달렸다. 그런데 호선도 간신히 서 있는 것이지, 다리를 후들거리는 것이 언제 주저앉지 않아도 이상하지 않아 보였다.
“언니는 또 왜 이래?”
“어제…… 잠을 잘 못 자서?”
“이상하네. 난 엄청 잘 잤는데. 서장관 할아버지도 별로 못 주무셨다고 하던데.”
“그런 일이 있었어.”
스윽스윽. 호선은 일부러 화제를 돌리기 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