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8. 천상천하 유아독존 (1)2022.03.26.
퉁퉁퉁!
“만우. 만우 안에 있나?”
동군영은 밤새 뒤척이다가 결국 잠들지 못하고 야심한 시각에 만우의 방으로 향했다. 황룡객잔의 모든 시설은 조선의 그 어떤 객주와도 비교를 할 수가 없었다. 마치 황궁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최고의 시설이 갖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점소이나 숙수가 없이 텅 비어 있다는 것이 하나의 흠이었지만, 침상은 푹신하고 침구류는 깨끗해 그간의 여독을 노곤하게 충분히 풀어 줄 수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황룡객잔의 뒤편에는 언제나 뜨거운 온천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는 작은 노천탕까지 있어 쌓이고 쌓인 한 톨의 여독까지 풀어 줄 모든 시설이 완비가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군영은 쉽사리 잠에 들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앞으로의 일이 걱정됐기 때문이다. 그러니 황룡객잔의 잠자리가 아무리 편해도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피곤하지만 잠이 오지 않는 그런 느낌에 동군영은 잠에 드는 것을 포기했다.
‘어르신은…….’
설미수를 잠시 떠올린 동군영은 고개를 내저었다. 혹시 모를 상황에 자신이 자처해 검을 배워 보겠다고 한 설미수가 지쳐 쓰러지듯 잠들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군영도 만우의 눈에는 아직 기초도 벗어나지 못한 수준이라고는 하나 설미수와 비교하면 아주 큰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그 정도로 동군영이 지쳐 곯아떨어질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 뒤에서 동군영을 불렀다.
“부사 나리.”
깜짝 놀란 동군영이 고개를 돌려 뒤를 쳐다보니 찾고 있던 만우가 아니라 바로 문형일이었다.
“여기서 뭐 하십니까?”
“문 별감. 아, 잠이 오지 않아서.”
“나리도 그러셨습니까? 아래서 같이 술 한잔하고 있는데 같이 가시겠습니까?”
솔직히 말해 동군영은 술을 마실 기분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돌렸다. 문득 자신이 만우를 찾아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닥쳐 올 미래에 대해 걱정을 늘어놓는 것뿐이다. 그렇게 닥쳐 올 미래에 동군영은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불안한 것인데, 그 불안이 만우에게 푸념을 늘어놓는다 하여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대장은 나갔습니다. 어차피 기다리셔도 언제 올지 모르구요.”
“나갔다고요?”
“네. 잠깐.”
“흠. 그러면…….”
동군영은 문형일의 뒤를 따라 황룡객잔의 1층으로 따라 내려갔다. 그러자 위에서는 몰랐는데 동군영과 설미수만 빼고 모두가 1층에 모여 있었다. 어디서 찾아 낸 것인지 커다란 술독이 탁자를 밀어 낸 곳에 떡하니 놓여 있었다. 그런데 그 술독 크기가 웬만한 장정 세 명을 합쳐 놓은 크기였다. 거기에 누가 식재료 창고를 뒤져서 안주를 만든 듯 기름 냄새가 자욱했고, 그 사이로 코를 찌르는 듯한 독한 주향이 알싸하게 퍼지고 있었다.
“지금 적진 한복판에 들어온 셈인데 술이…….”
그런 그들을 보고 뭐라 한마디를 하려고 했던 동군영을 입을 다물었다. 1층에 모여 서로 술잔을 나누고 있던 다섯 명의 초절정 고수들의 앞에 놓인 작은 나무 조각들을 본 것이다.
“여기서 이렇게 움직여야지.”
“창위 애들 보통 아니라고 했어. 최소 일류 이상으로 봐야 돼.”
“일류 이상이 수백이라고?”
“더 최악은 황보윤이지. 대장군에 올랐다면서. 이번 일에 황제가 불렀을 거야.”
“제 생각은…….”
다섯 명의 초절정 고수 앞에 놓인 나무 조각들이 시시각각 위치를 바꿨다. 동군영은 그것이 무엇인지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만우를 제외한 사행단 전원인 것이다. 가운데 모여 있는 것은 자신을 비롯한 설미수와 방매, 간장일 것이고, 그 주변에서 계속해서 위치를 바꿔 가면서 움직이는 나무 조각은 바로 자신들인 것이다.
“어르신. 어르신은 혼자서 하실 수 있죠?”
감령이 척일에게 씨익 웃으며 말했다. 잘 생긴 감령의 얼굴이 눈앞에서 씨익 웃자 허연 수염을 늘어뜨린 척일은 껄껄 웃으며 손가락을 딱 하고 튕겼다.
“같이 하자고 지금 이 노인네 앞에서 그러고 있는 거 아닌가?”
“척 무사님도?”
감령이 이번에는 척사영에게 물었다. 척사영은 가만히 있다가 고개를 성의 없이 끄덕였다.그러자 감령이 손가락을 딱 하고 튕겼다.
“좋아. 그러면 이렇게 저기 어르신이 이 앞에 서고 척 무사님이 뒤에 서면…….”
“수백 명이라면서. 이걸로 뚫는다고?”
“야. 화경의 고수야. 화경. 이 정도는 가능하지. 우리들도 있는데.”
“그럼 대장은?”
그들이 하고 있는 행동은 닥쳐올 미래에 대비책을 강구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그들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선에서 말이다. 동군영은 그것을 보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주향? 기름 냄새? 그런 것보다 저들도 나름대로 살 길을 강구하고 모색하고 있다는 것에 동군영은 얼굴이 뜨끈해지는 느낌이었다. 자신이 하려고 했던 것은 만우에게 푸념이나 늘어놓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저들은 정말 만우가 말했던 대로 말로 하는 대화가 끊겼으니 몸으로 하는 대화를 위해 머리를 짜내어 준비하고 있었다.
‘이러고 있을 바에는.’
동군영은 그런 그들을 보면서 퍼뜩 정신을 차렸다. 공맹의 말씀을 줄줄 읊고 그렇게 수도 없이 많은 경전을 읽었으며 기라성 같은 경쟁자들을 뚫고 장원급제를 한 자신이다. 그런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고작 푸념이나 늘어놓는 것이다? 동군영은 그런 자신을 납득할 수 없었다.
“이럴 시간에 검이라도 휘두르자.”
어쩌면 만우는 자신에게 기회를 준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일이 닥쳤을 때 앉아서 발만 동동 구르면서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옛 성현의 말씀을 읊는 것보다 검이라도 휘두를 수 있는 법을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동군영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최선을 다해 준비할 셈이다. 그것이 비록 저들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지금 동군영이 할 수 있는 최선은 바로 그것이었다.
“한 번은. 한 번은 도움이 되겠지.”
제 방에 올라와 낡은 검을 챙겨들고 동군영이 객잔의 뒤뜰로 향했다.
*****
“저놈들은 개방.”
그 무렵, 만우는 황룡객잔 안에서 갖가지 일들이 벌어진다는 것을 훤히 알고 있으면서도 방을 비운 척을 한 채 황룡객잔의 처마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준비를 하는 것이니 간섭을 할 필요가 없고, 마냥 불안하기만 한 푸념은 별로 듣고 싶은 생각이 없으니 그냥 없는 척을 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만우가 할 일이 없는 것도 아니다.
“저긴 하오문.”
만우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내린 연경을 눈으로 스윽 훑으면서 중얼거렸다. 백성의 소개령이 내렸기 때문인지 정말 연경은 죽은 도시처럼 어둡고 고요했다. 저 멀리 황궁이 지어지고 있는 쪽과 황제가 기거하고 있다는 자미원이 있는 방향에서는 불빛이 보였지만 만우는 서두르지 않았다. 황제가 먼저 대놓고 도발을 하는 듯 들어오라며 관도를 비우고 성문을 비웠다. 그러니 그런 황제가 보인 여유에 맞서 만우도 합당한 여유를 보여 줄 셈이다. 황제와 만우는 서로의 위아래가 아닌, 동등하다는 것을 황제의 머릿속에 단단히 심어 놓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아주 크건 작건 승냥이 떼들이 득시글거리는구먼.”
만우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소개령을 받고 움직인 것은 백성들이지만, 백성들이 옮겨간 자리에 둥지를 튼 놈들이 곳곳에 보였기 때문이다.
“석가장도 있고. 하북팽가, 저긴 황보세가…… 무림맹도 있네.”
무림맹과 동창, 사림곡의 최고수들이 모였음에도 검주를 막지 못했다. 이미 이 소문이 무림 전역에 파다하게 퍼져 나갔을 것이다. 그 때문에 소문의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저 많은 승냥이 떼들이 연경에 모여든 것이리라. 사실이건 아니건, 만우가 연달아 불러일으킨 광풍에 강호무림 전역이 들썩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건 황궁…… 에이. 재미없다.”
만우는 벌러덩 드러누웠다. 하늘 위를 쳐다보자 북두칠성부터 시작해 눈에 익은 별들이 셀 수도 없이 반짝이고 있었다.
“방이 있어도 이제는 밤하늘 보이는 데가 더 편하네.”
밤이슬을 맞는다고도 하지만 만우는 그래도 바깥이 왠지 모르게 더 편했다. 아마 어릴 적부터 역마살이 끼었던 것인지 머슴인데도 중원 전체를 돌아다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평생을 조선이 아니라 명나라에서 광산군을 따라 돌아다녔고, 검주가 되어 무림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다음에도 중원 유람을 다녔으니 만우는 지붕이 있는 곳보다 없는 곳에서 잔 적이 더 많았다.
“그렇게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 했는데.”
만우는 피식 웃었다. ‘평범’이라는 단어가 너무나도 낯설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만우가 조선으로 돌아간 것은 말 그대로 검주가 아닌 평범한 만우로 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결국 운명이란 놈은 흘러가는 대로만 놔두지 않는 법이다. 일이 하나둘씩 쌓이더니 종래에는 명 천자까지 만우의 운명에 얽혀들게 된 것이다.
“내가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건가?”
만우의 상단전, 중단전, 하단전에 들어찬 내공이 서로 꼬리를 물며 순환하는 것이 오롯하게 느껴졌다. 아마 이놈들이 만우의 운명을 그리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현경, 만우의 기천에서는 진인(眞人). 삼라만상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단위인 기(氣)의 흐름이 눈에 보이는 경지. 지금도 만우가 보려고만 하면 아마 밤하늘에 별과 구름 대신 오색찬란한 기류(氣流)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천자와의 일이 해결이 되면?”
만우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진정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는 다른 사람에게 묻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묻는 것이다. 두근거리는 심장과 꼬리를 물고 순환하는 내공은 항상 만우에게 길을 제시해 주었으니까.
“먼저 검을 뽑아든 이들과의 원한관계를 마무리 지어야지.”
피 냄새가 벌써부터 짙게 느껴지는 듯 했다. 하지만 그것은 무림인의 사명이자 숙명이었다. 원한관계는 남의 손을 빌리는 것이 아니라 직접 해결하는 것이니 말이다.
‘후환.’
만우는 얼마든지 비정해질 수 있었다. 비정함이란 만우가 악하다거나 감정의 한 부분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다. 비정해진다는 것은 결국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정신이 먼저 방어기재로 내세우는 것 중 하나일 뿐이다. 그렇기에 무림인들은 후환을 남겨 두지 않는다. 내가 지금 살린 이 아이가 복수의 칼을 갈아 나를 죽이겠다고 올지 모른다. 차라리 나를 죽이러 왔을 때 실력이 부족하여 죽는다면 그것은 무림인으로서의 죽음이지만 세상이 그리 낭만적이지만은 않다. 주변 사람들. 만우의 주변에는 검을 들어 본 적도 없고 무림강호의 비정함을 겪어 보지도 않은 이들이 많았다. 방매. 김향. 간장. 동군영. 설미수…… 등등등. 당장 용접곡에서만 봐도 무림맹과 동창, 사림곡은 만우의 발을 붙잡기 위해 그들을 노렸다. 결국 지킬 것이 있다는 것은 곧 약점이 생긴 것이니까. 대신 그들이 간과한 것은 만우가 그 약점들을 다 안고 갈 수 있을 정도로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것이었다. 현경. 고금제일인이라 불리는 달마, 장삼봉, 천마에 비해 아직은 손색이 있었으나 만우도 이제 완연하게 인간의 탈을 반쯤은 벗은 그런 존재가 된 것이다.
“무얼 하고 계셨나요, 오라버니.”
“내가 왜 네 오라버니야.”
“소녀를 구해 주시고 또한 이 선주까지 구해 주셨으니 그럼 주인님이라 부를까요?”
호선이 기척도 없이 만우의 옆에 장삼을 나풀거리며 살포시 걸터앉았다. 호선은 선주를 얻은 이후로 잃었던 경지를 되찾아가는 중이었다. 게다가 무공이 아닌 선술을 익히고 있었기 때문에 만우는 호선이 나타나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상단전과 선기는 다른 것인가?’
선술(仙術)은 신선이나 신수, 영물들의 것이다. 그들은 진기 대신 선기를 사용하는데 만우는 문득 궁금해졌다. 상단전이라 함은 인간의 몸으로 결국 하늘과 통할 수 있는 천통(天通)의 길을 열었다는 말과 똑같다. 상단전이 열린 인간이 계속해서 수행을 쌓거나, 무림인의 경우에는 다음 경지를 위해 나아가다보면 우화등선(羽化登仙)을 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니 상단전이 열린 만우는 어찌 보면 신선이 되기 위한 준비단계를 거치고 있는 것이라 봐도 무방한 셈이었다.
“됐다.”
만우는 선기에 대해서 막 궁금함이 들려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다가 덜컥 우화등선이라고 해 버리면 여기 남은 사람들이 곤란해진다. 그리고 신선이 되면 오욕칠정(五慾七情)을 벗고 속세를 떠나야 한다고 하던데 만우는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만우의 나이 올해 이립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무슨 속세를 벗어나 우화등선을 하겠다고 수행을 한단 말인가?
“뭐가요?”
호선은 긴 눈썹을 파르르 떨며 만우에게 아양을 떨었다. 하지만 그런 호선이 집채만 한 백호라는 것을 알고 있는 만우는 콧방귀를 뀌며 손가락을 딱 하고 튕겼다. 따악-!
“아흑!”
“아양 떨지 마. 사람 서넛은 그냥 집어삼킬 것처럼 생긴 고양이가 무슨 사람 흉내야.”
“그럼 주인…….”
따악! 호선의 이마가 벌겋게 부어올랐다. 선주를 되찾은 호선은 둔갑을 했다하더라도 피부가 질겨져 기(氣)가 서린 공격이 아니면 티끌만큼의 피해도 줄 수 없었다. 그런데 만우의 지풍 두 번에 이마가 시뻘겋게 부어올랐다. 아마 그 지풍을 사람에게 쏘았으면 아마 수박처럼 머리가 부서지는 모습을 봤을 수 있으리라.
“너무해요.”
“너무는 지금 네가 하고 있는 거고. 왜 올라왔어.”
만우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러자 호선이 교태롭기 짝이 없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냥 밤도 깊었고 적적하실까…….”
따악.
“까불지 말라고 했다.”
호선은 입을 틀어막고는 발을 동동 굴렀다. 정말 방금은 두개골이 반으로 쪼개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까불었다가는 큰일이 나겠다고 느낀 호선이 옷매무새를 가다듬고는 공손하게 말했다.
“오라비를 뵙겠다고 하신 분이 계시어요.”
오라비란 소리에 만우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가 다시 풀었다. 뭐 그렇다고 호선에게 은공이니 뭐니 불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을 은공, 은인이라 부르는 사람은 설미수 가족과 척사영이면 족했다. 그러니 낯간지럽기는 해도 오라비가 차라리 나았다.
“나를? 그나저나 네가 그걸 어찌…….”
만우의 눈빛이 변했다. 호선은 500년을 살아 온 영물이다. 그런 호선이 조선도 아닌 이곳, 중원에 아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 이걸 바꿔 말하면, 아는 영물, 혹은 신수는 있을 수도 있다. 하늘재에서 만우를 찾아 왔던 주작처럼.
[중원에는 기린 씨와 봉황 씨가 있죠.]
주작은 만우에게 그리 말해 주었다. 그렇다면 호선이 자신을 찾아 온 이유는 그 둘 중 하나가 자신을 찾아왔기 때문이란 뜻이다.
“하. 안 만나. 돌아가라고 해.”
만우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런 신수(神獸)를 만나 괜히 감정적인 소모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약속도 안 잡고 무작정 찾아오는 게 대체 어느 나라의 예의란 말인가.
“그…… 이미 와 계세요.”
“누구 맘대로.”
만우는 아예 호선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누웠다. 호선은 그런 만우를 보며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가 하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알겠어요, 오라비. 그러면 가서 다시 말씀드릴게요. 나중에 찾아오시라고요.”
“나중은 무슨. 만날 생각 없어. 훠이. 훠이.”
물론 그들이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도 없이 왔다는 것은 저번처럼 만우에게 부탁할 것이 있다는 뜻이었다. 안 그래도 지금도 할 일이 많은데, 신수까지 만나 뭐 하러 고생을 자처하는가. 신수란 것들은 다들 가난해 빠져가지고 뭐 일을 대신 해 줘도 주는 것도 별로 없었다. 그런데 만우의 몸속에서 이상한 반응이 오고 있었다.
“이건.”
만우는 엄밀히 말하면 아직 완연한 현경의 경지에 든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이미 화경의 껍질을 크게 벗어난 것이라 압도적으로 무림맹, 사림곡, 동창의 합공을 떨쳐 낼 수 있었다. 반면 진짜 제대로 된 현경이 만우 앞에 나타난다면, 만우는 진짜 현경을 제대로 이길 수 없었다. 그런 만우의 하단전에 잠들어 있던 주작의 정화(淨火)가 갑자기 깨어나더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주작과 만났을 때 불어넣어 준 주작의 숨결이었다. 처음에는 이 숨결에 관심이 많았지만 건드려 봐도 아무런 반응이 없어 그냥 넣어 둔 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기도 했다. 그런 정화가 갑작스레 다시 깨어나서는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무슨!”
만우는 정화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느끼지 못했던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선기(仙氣). 방금 전에만 느껴지지 않았던 호선의 선기가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주작이 불어넣어 준 정화였으니 그간 잠들어 있던 그것이 깨어나자 선기가 느껴지는 것이리라. 그에 만우는 저절로 고개를 위로 들어올렸다. 호선보다 몇 배는 더 커 보이는 선기가 만우의 머리 위에 있다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 정도로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선기를 다룬다는 영물, 신수, 선인들을 가볍게 봐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내공과는 아예 다른 기운이다 보니 아예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주작이 그랬지. 기린과 봉황이 중원에 있다고. 둘 중 어떤 존재인지는 모르겠으나.”
휙! 휙! 만우는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만우의 머리 위를 유영하던 거대한 존재감을 지닌 이가 시무룩해하는 것이 느껴졌다. 감정 표현이 저리 솔직하다니, 만우가 본 주작이나 호선보다 생각보다 순수한 존재인 모양이었다.
[우어어엉!!!]
주작이 나타났을 때는 기겁을 했던 불가사리가 무언가 반가운 듯한 느낌으로 울어 대는 소리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런 만우에게 호선이 애걸하듯 말했다.
“한 번 만나 보기라도 해주셔요. 정말 착하고 순수하신 분이신데…….”
[우어어엉-!!]
불가사리가 그런 호선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이룡검 안에서 울어 댔다. 만우는 귓가를 안 밖에서 시끄럽게 만드는 둘에게 만우는 인상을 팍 찌푸리고는 벌떡 일어나 팔짱을 꼈다.
“안 그래도 사람 속 시끄러워 죽겠는데 왜 몰려와서 난리야 난리가.”
“그것 때문이라고 하셨어요. 오라비가 벌일 일 때문이라고…….”
“내가 벌일 일?”
만우의 눈이 슬그머니 반개했다. 아직 만우는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만우가 무슨 일을 할 줄 안다는 것은 미래시(未來視)의 영역이다. 무당이나 점쟁이들처럼 미래를 본다는 뜻이다.
“그건 좀 구미가 당기는데.”
“천기 때문에 많은 것을 이야기해 주시지는 못하세요. 그래도 한 번 꼭 뵙게 해 달라고 하셔서……”
“누군데.”
“기린이셔요.”
“기린(麒麟)?”
그 순간 만우가 팔짱을 낀 채 앉아 있던 황룡객잔의 지붕 위 양 쪽에 두 개의 그림자가 착 하고 착지했다. 만우는 자신이 느끼던 거대한 존재감이 두 개로 나뉜 것에 눈을 치켜떴다.
“참고로 기린 님은 한 분이 아니라 두 분이셔요. 뿔이 없으신 분이 기(麒), 있으신 분이 린(麟)이신데…….”
“아이야. 애쓸 필요 없다. 저 인간은 우리를 보기로 결정하였음이니.”
“고맙다, 인간.”
기와 린, 자그마한 남녀 아이의 형상을 한 기린이 만우를 가운데 두고 지붕의 양 끄트머리에 서서는 호선과 만우에게 동시에 말했다. 만우는 인간의 모습으로 변했음에도 정수리에 작은 뿔이 솟아난 여아, 린을 보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떻게 알았지?”
“살아온 세월이 기천년이다. 기백년도 살지 못 하는 인간을 수백만도 넘게 보았지. 눈만 봐도 알겠더라.”
어른스러운 말투로 말하지만 목소리는 어린 여아의 목소리였다. 만우는 이 역시도 주작처럼 특이하다고 생각하며 이번에는 남아, 기를 쳐다봤다.
“그래. 고맙다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 주려고 하여서.”
“흠. 솔직히 미래시란 것이 궁금했던 것뿐이거든. 그쪽들이 무슨 말을 하건 내 갈 길은 갈 것이고.”
남아와 여아가 된 기와 린은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하지만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거대한 존재감이 만우로 하여금 긴장을 늦추지 못하게 만들었다. 기와 린은 그들의 기나긴 생을 자신들이 복종할 수 있는 왕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이들이다. 이 신수는 자비롭고 덕이 높으며, 생명을 중요시하기에 피를 멀리하는 신수이기도 했다.
“굳이 내게 다가와야 할 정도의 일이라. 글쎄.”
만우, 아니 만우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은 결국 다른 생명체의 피로 살아가는 존재다. 인간은 고기를 먹기 위해 다른 짐승들을 죽이고 제 목숨을 위해 다른 사람을 죽인다. 만우의 손에 흐른 피만 해도 대체 몇이던가. 그렇기에 정상적으로라면 저 기린은 절대로 만우의 곁에 올 수 없다. 저들은 혈향에 민감하기에 만우 같은 자들을 기피하다 못해 혐오한다.
“내가 벌일 일이라. 그게 뭐지?”
만우는 냅다 자신이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그러자 예상대로 저들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떠올랐다.
“천기를 누설할 수는 없네.”
“이해해 주게. 아무리 우리라 하여도 함부로 천기를 거스르다 보면…….”
천기를 거스른다는 것은 결국 저들이 태어난 과정 자체를 부정하는 일이다. 스스로의 존재에 부정하는 신수는 결국 악수가 될 뿐이다.
“그럼 뭐야.”
하지만 만우는 김빠진 표정을 지었다. 천기를 거스르는 게 만우 자신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에 호기심이 생기지 않았더라면 기린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저 정도의 존재감을 지닌 존재가 연을 맺는다는 것은 그 당사자보다는 연을 맺는 상대에게 업이 쌓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저런 신수들은 당사자가 허락하지 않는 이상 절대로 함부로 다른 이의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 없다. 그나마 만우가 현경의 초입에 오르면서 업의 그릇이 넓어졌기 때문에 저들을 마주할 수 있었던 것이지. 그게 아니었더라면 안 그래도 파란만장한 삶이 더 파란만장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와 린 중 뿔이 솟은 린이 만우에게 재빨리 말했다.
“황궁에 너무 많은 피가 흐르는 것만은 자제하여 주시게. 부탁하네.”
여아인 린은 기보다 훨씬 더 직설적이었다. 반면 남아인 기는 린보다 훨씬 더 신중했고 소심했다.
“너무 많은 피라?”
만우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저들은 천기를 누설하지 못한다 했으면서도 결국 그들이 본 미래를 말을 한 셈이다.
‘결국, 그리 되는가.’
만우는 속으로 웃었다. 유쾌하지는 않지만 그렇다 하여 씁쓸하지도 않았다. 자신이 황궁으로 향한다는 것 자체가 그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각오한 후였기 때문이다.
“내가 흘리고 싶지 않다하여 죽어 줄 수는 없는 노릇.”
만우는 기린을 보며 말했다.
“저들이 먼저 검을 들고 덤벼오는데 그냥 죽으란 소린가?”
“아니.”
만우가 한 말에 기린은 동시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동시에 고개를 가로젓는 모습을 보니 흡사 그 모습이 쌍둥이 같아 보였다.
“인간의 앞에 펼쳐질 혈로는 타인이 아니라 자의에 의한 선택이네.”
“그게 무슨 소리지?”
만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기린의 말을 들으면 황제가 먼저 선공을 하여 검을 뽑아드는 것이 아니라 만우가 먼저 검을 뽑아드는 것처럼 말을 했기 때문이다.
“아니. 그럴 수도 있겠군.”
만우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생각해 보면 용접곡에서와 비슷했다. 용접곡에서 만우는 지켜야 될 이들로 인해 발목을 붙잡히지 않기 위해 차라리 먼저 검을 휘두르는 것을 선택했으니까. 황궁에 들어가서도 그런 일이 벌어지지 말란 법은 없었다.
“내가 너희들의 말을 들어 주어야 하는 이유는? 아니, 그 전에 왜 황궁에 피가 흐르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지?”
이미 지금의 황제는 혈풍을 일으켜 황위에 앉았다. 만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피를 흘리며 황위에 앉은 자가 있는데 왜 이들은 지금 만우가 흘릴 그 피가 두려워 자신을 찾아왔단 말인가.
“천살성(天殺星).”
“천살성?”
만우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만우는 천문 따위는 읽을 줄 모른다. 허나 천살성에 대해서는 중원을 유랑한 만우도 자주 들어 보았다. 살성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다는 천살성. 사람의 피를 보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는 기구한 운명. 하나 무림인의 운명을 타고 태어났다면 천하제일인, 고금제일인이 될 수 있는 별의 운명을 타고 났다는 뜻이다. 하나 천살성은 존재만으로도 주변에 너무나도 많은 피를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무림 역사를 돌아보면 천살성을 타고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꽃도 피워 보지 못하고 죽은 이가 여럿이다. 투귀대의 나찰사화가 앓은 혈성(血星)보다 위험한 것이 바로 이 천살성이다.
“중원 천지에서 가장 존귀한 이의 주변으로 너무 많은 피가 흘렀네. 하나 이번에 흐를 피는 존귀한 이의 분노가 함께 담겨 하늘에 닿을 터.”
“나를 죽이기 위한 천살성이 태어난다는 말인가?”
만우는 기와 린이 하는 말을 그리 알아들었다. 그러자 그 말이 맞는 듯, 둘의 입이 다물어졌다.
“흐흐흐…….”
만우는 뜻 모를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흐르는 소리 안에는 재미있다는 듯한 감정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웃겨. 아주 웃겨. 하늘의 뜻이라는 게.”
자신을 죽이기 위한 천살성이 태어난다라. 그럼 결국, 만우는 하늘이 점지한 그 운명조차도 만우 자신을 죽이기 위함이란 뜻이었다.
“내가 그리 많이 죽였나? 황제 놈이 죽인 피의 업이 그리 되는 것을. 그런데 나라. 나를 죽이기 위한 천살성이라.”
만우의 옷자락이 나풀거리기 시작했다. 호선은 불안한 눈으로 만우와 기린을 번갈아 쳐다봤다. 만우의 옷자락이 나풀거린다는 것은 만우가 공력을 끌어내고 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만우와 기린. 예전 같았으면 볼 것도 없이 기린의 낙승을 점쳤겠지만 한 단계 또 다른 차원의 경지에 발을 딛은 만우였다. 청령단으로 선주를 다시 만든 호선이 만우를 보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거대한 망망대해를 느꼈으니 말이다.
‘하늘도 너무하시지.’
거기에 호선이 듣기에도 기린의 말은 하늘이 너무하다는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먼저 살의를 품은 것은 황제다. 그런데 가장 존귀한 이의 곁에서 흐르는 피로 인해 그것이 업이 되어 천살성이 태어날 것이고, 그 업이 만우에게로 향한다니. 만우보다도 몇 십 배, 몇 백 배는 더 많은 사람의 피를 흘린 것이 바로 황제다. 황제가 직접 흘리게 한 피는 괜찮고, 황제의 주변에 흐르는 피는 안 된단 말인가?
‘대체 무슨 뜻이옵니까.’
호선은 하늘을 쳐다보며 가슴 속으로 그리 물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런 것처럼 하늘은 답을 해 주지 않았다.
“저곳.”
그때 정수리 위로 뿔이 솟은 여아, 린이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