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6. 연경 입성 (2)2022.03.19.
“아미타불.”
“사제. 가서 무엇을 하겠다는 겐가!!”
“살아남았으니 산 자로서 무엇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숙님.”
천혜대사는 창백한 안색의 불존, 진한대사를 말리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검주에 의해 입었던 막대한 내상을 소림사의 보물인 소환단으로 치료한 불존이다. 그 때문에 몇몇 혈도에 어혈이 뭉친 것을 제외하고는 만우에게 달려들었던 세 명의 화경의 고수 중 상태가 가장 좋았다.
“무엇이라도 하다니. 사제, 사제는 우리 소림사의 보물이자 기둥일세.”
“…….”
불존은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소림의 의기와 기개는 어디로 져버리고 이딴 삼류 잡배나 할 수작을 부리는 거지?]
불존은 자신의 백보신권을 동창제독으로 막아 낸 만우에게 다시 달려들지 못했다. 성치 않은 몸으로 백보신권 정도의 절기를 무리해서 쓴 탓에 내상이 더 커졌기 때문이다. 대신 불존은 자신을 등지고 무림인들을 절로 물러나게 만들어 그 사이를 지나가는 만우의 뒷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 그때의 굴욕감, 창피함, 수치함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살아남았으니 움직여야 한다. 적어도 불존은 그렇게 생각했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시체가 하는 것이지, 산 자가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불존은 깊은 수치심을 느끼고 있었다.
“사숙님. 소승은 비겁하게 검주의 등을 노렸습니다. 한데도 그자는 소승을 살려 두었습니다.”
“부처님의 뜻일세. 부처님의 뜻이야.”
천혜대사는 그런 불존을 그냥 보내 줄 수가 없었다. 불존은 소림이 보유한 유일한 무림십좌이자 동시에 미래를 책임질 동냥이었기 때문이다. 무왕이라 불리지만 자신처럼 권위가 없는 무림맹주가 아닌, 진정으로 인정받는 소림사를 만들고 이끌어 나갈 이가 바로 불존이었다.
“부처님의 뜻이 아닙니다. 검주의 뜻입니다 사숙님.”
불존은 복잡한 눈으로 천혜대사를 쳐다봤다. 천혜대사는 불존의 눈에 낀 심마(心魔)를 보고는 심장이 덜컹 하고 떨어졌다. 심마는 무인의 몸과 마음을 좀 먹는 존재다. 그 심마가 심해지면 자칫하면 주화입마가 올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심마를 견뎌 내고 자신의 답을 찾아 한 발자국 더 나아갈 수 있다면 소림은 새로운 시대의 절대고수를 맞이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그렇듯, 이런 일일수록 위험 부담이 더 큰 법이다. 주화입마에 빠져 폐인이 되느냐, 그 심마를 극복하고 더 높은 경지의 무인이 되느냐. 그 갈림길에 불존이 섰다는 것을 천혜대사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그런 천혜대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불호를 읊는 것뿐이었다. 불존은 그런 천혜대사를 쳐다보며 말했다.
“사숙께서 모자란 소승에게 베푸신 그 은혜와 사랑은 하해와도 같으나, 소승은 검주의 뒷모습만 좇았습니다. 하니 이번에는 비겁하지 않게 그자의 앞에 서겠습니다.”
“사제…….”
“위험하단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 어찌 무승(武僧)이 고난과 역경을 마주하지 않고 번뇌에 빠져 편한 길을 찾겠사옵니까?”
불존은 일어나 천혜대사를 향해 절을 올렸다. 자신을 잡지 말라는 무언의 행동이었다. 불존이 저렇게까지 나오는데 천혜대사는 사숙이 되어 더 이상 그를 붙잡을 수 없었다.
“부디…… 보중하시게.”
“부처께서 길을 인도하시겠지요. 아미타불.”
불존은 그렇게 말하고는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다. 천혜대사는 불존이 남기고 간 바람만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군사. 군사는 어디에 있나?”
***** 부르르. 제갈명공은 참혹한 세가 무인들의 시체에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팔을 부르르 떨었다. 손바닥에 손톱이 파고들었기 때문인지 핏방울이 방울져서는 땅 위로 떨어져 내렸다.
“검주…….”
핏발이 선 눈으로 제갈명공은 수습한 사체들의 얼굴을 하나씩 눈에 담으면서 이를 악물었다. 용접곡에서의 참사로 죽은 제갈세가 무인의 숫자가 수십이 넘었다. 가뜩이나 고수의 숫자가 부족한 제갈세가의 무력에 제갈명공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또 다시 막대한 피해를 끼치게 된 것이다. 제갈세가의 가주이기도 한 제갈명공은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들은 단순히 제갈세가의 무인이 아니라 핏줄이기도 했다. 혈족으로 이뤄진 제갈세기인만큼 이들은 결국 제갈명공 자신의 친지이며 친척인 것이다.
“운이. 너마저…….”
제갈명공은 두 눈을 감지도 못 한 채 목이 몸통에서 떨어져 나간 제갈운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제갈운은 제갈명공이 특별히 아끼던 인재였다. 비록 정통이 아닌 방계였으나 머리가 영특하고 배움이 빨라 미래가 기대되는 이였기에 제갈명공이 몇 번 직접 가르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제갈세가의 미래마저 이 곳 용접곡에 묻혔다.
“검주…….”
제갈명공은 검주를 떠올리면서 두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이건 분노의 떨림이 아니었다. 분노보다는 공포가 훨씬 더 컸다. 천하제일의 두뇌라 자부하던 자신의 계책은 검주 개인의 무력에 의해 모조리 꺾였고 부서져 나갔다. 천하제일의 두뇌라 할지라도 천하제일의 검을 이길 수는 없었던 것이다. 아니면 제갈명공이 스스로 자부하던 것이 자만이고 오만이었던 것이고. 책사의 존재 자체를 거부하는 듯한 검주의 무위는 인간이 대처할 수 없는 재앙이고 자연재해다. 그와 맞선다는 것은 백계가 다 무소용이란 뜻이다. 제갈무후께서 살아 돌아온다 하셔도 저 검주를 상대로는 그 어떠한 계책도 내놓으시지 못하셨을 것이다.
“아…… 아아…….”
제갈명공은 결국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는 꺽꺽거리며 소리 없는 울음을 삼켰다. 그렇게 무림맹의 제일군사라 불리던 제갈명공의 몸과 마음이 산산조각이 나 부서지고 있었다. 사라락. 그런 제갈명공의 어깨에 누군가 가사(袈裟)를 에둘러 주었다. 제갈명공이 고개를 드니 그곳에 천혜대사가 서 있었다. 천혜대사는 그런 제갈명공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는 죽은 제갈세가 무인들의 앞에 서서는 목탁을 꺼내 두들기기 시작했다.
“제갈운…….”
똑똑똑똑. 천혜대사가 죽은 제갈세가 무인들의 이름을 목탁을 두드리며 하나씩 부르기 시작했다. 약식이기는 하나 다비식의 일환으로 창혼(唱魂)을 하는 소리였다. 그것은 불승인 천혜대사가 고인들의 명복을 빌고 성불을 기원하는 장례의식이었다.
“크흡…… 크흡…….”
제갈명공의 뒤로 살아남은 제갈세가의 무인들이 엄숙한 표정을 한 채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
“뚫렸다?”
“예, 폐하.”
나른한 표정으로 옥좌에 앉아 있던 천자의 두 눈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는 비스듬하게 앉아 있던 몸을 바로 세우고는 먼발치에 무릎을 꿇고 앉은 이에게 손짓을 했다.
“소상하게 듣겠다. 가까이 오라.”
부스럭 부스럭. 천자의 명에 오체투지를 한 채 얼굴을 바닥에 처박고 있던 서창제독이 환관의 율법에 따라 감히 고개를 들지 않은 채로 기다시피 네 발로 바닥을 기어서는 천자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말씀 올리겠습니다, 폐하.”
“그리하라.”
근본적으로 동창과 서창, 대내행창과 금의위의 업무는 제국 전체를 감시하는 일이다. 특히 당금의 천자는 정난의 변을 일으켜 스스로가 황제의 올랐으므로 명분이 없다는 것에 대단히 위협을 느껴 정통파를 두려워했다. 중원이라는 광활한 영토의 주인인 천자가 신하를 두려워한다는 것이 일견 이상하였으나 명분이란 것이 원래 눈에 보이지 않는 막강한 힘을 주기 마련이기에 천자는 정통파를 감시하기 위하여 창위를 만들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무력의 일익을 담당하는 것이 동창과 금의위라면, 간자(間者)로 대소신료를 감시하고, 심지어는 각 지방관과 작은 고을까지 감시하는 임무는 서창에게 주어졌다. 그 때문에 서창에서는 동창과 금의위 안에도 간자를 심어 놓았고 아직 동창의 고수들이 돌아오지 않았음에도 서창에서는 이미 용접곡에서의 일을 알고 천자께 고한 것이다.
“오호.”
탁. 천자는 흥미진진하게 서창제독이 하는 바를 귀담아 들었다. 그리고는 재미난 이야기를 듣는 듯 어떤 곳에서는 웃기도 하고, 어떤 곳에서는 안타까워하며 서창제독의 이야기를 아주 재미나게 귀담아 들었다.
“이에 동창제독 부 태감을 제외한 부례감이 남은 환관들을 인솔하여 돌아오고 있으며…….”
“검주는. 검주는 어디에 있느냐?”
“폐하께서 비워 놓은 길이 제 황천길이 될 줄도 모르고 연경으로 향하고 있다 하옵니다.”
서창제독이 납작하게 엎드렸다. 천자는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말했다.
“태감은 들으라.”
처저저적!! 천자의 한 마디에 아무도 없는 듯 보였던 대전이 술렁이더니 서창제독이 일어나 무릎을 꿇었다. 그 사이 어디선가 순식간에 모습을 드러낸 수십 명의 환관들이 무릎을 꿇으며 두 손을 들어 올리고는 외쳤다.
“황명을 받드옵니다!!!”
천자를 지근거리에서 모시는 환관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시되는 것은 기도비닉이다. 평소에는 없는 듯하다가도 천자가 찾기 전에 먼저 나타나 기다리는 눈치까지 있어야 한다. 천자는 서창제독에게 자신의 패검을 내렸다. 황금으로 검집과 손잡이까지 치장한 검이었다. 그 검을 본 서창제독의 어깨가 바짝 굳었다. 저 검을 든다는 것은 일회용이나마 천자의 분신이 된다는 소리다. 천자의 검. 천자가 검에서 검이 그 모습을 드러낼 때는 딱 한 가지 이유뿐이다. 죽음. 천자의 이름으로 내리는 죽음만이 검집에서 검을 뽑아들 수 있었다.
“짐은 이미 부 태감에게 그 치욕을 씻을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주었다.”
천자의 나른한 목소리가 대전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 나른한 목소리가 천자의 전부가 아니었기에 서창제독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한 번 패배한 자는 그 패배가 뼈에 새겨진다. 그리하여 한 번 실패하고 패배한 이는 계속해서 실패하고 패배하는 법이니.”
천자라고 하여 실수한 적이 없을 리 없지만 그는 그런 기억쯤은 옥좌에 앉으면서 전부 다 잊은 모양이었다. 천자의 눈에 잔혹함이 서렸다.
“짐의 나라에 실패와 패배를 각골(刻骨)한 이 따위는 필요 없다.”
살(殺). 서창제독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그는 이내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면서 소리쳤다.
“명을 받드옵니다. 만세, 만세, 만만세!!!!”
서창제독의 손에 천자의 패검이 쥐어졌다.
“북진무사와 남진무사를 들라하라!!!”
서창제독에게 명을 내린 천자가 재밌는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눈을 다시 반짝이면서 태감에게 이르자 주변의 환관들이 다시금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
“동 부사.”
“예, 대감.”
설미수가 말머리를 바짝 붙였다. 동군영이 부름에 대답해 고개를 숙이자 설미수가 동군영에게 말했다.
“기이할 정도로 조용하군. 그렇지 않은가?”
“……예. 기실 저도 그리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만우가 고개를 슬쩍 돌려 둘을 쳐다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설미수는 그런 동군영에게 걱정된다는 듯 우려가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용접곡의 일이 천자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을 리가 없네. 한데 일주대로가 이리 텅텅 비었다니. 불안하네.”
“…….”
불안한 것은 동군영도 사실 마찬가지였다. 사행단의 운명은 사실상 전부 만우의 손에 달린 셈이었기 때문이다. 사행단을 넘어 어찌 보면 조선의 운명까지 만우의 손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미 명에서는 만우를 죄인으로 규정을 지어 버렸으나, 그런 천자의 칙서를 거부한 채 뜻을 달리 해석하여 조천을 하기 위해 사행단을 보낸 것이 문제가 될 소지가 다분했기 때문이다. 다분한 정도가 아니다. 아마 이번 사행단의 일이 잘못 마무리 된다면, 틀림없이 명에서는 그것을 빌미로 조선에 무리한 요구를 해올 것이 분명했다.
“동창의 공공까지 용접곡에 있었네. 거기에…… 무림인들까지 매복을 하고 있었고. 어찌해야 할지…….”
설미수는 말끝을 흐렸다. 결국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미 기호지세인지라 호랑이 등허리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연히 그 호랑이는 바로 만우였다.
“나리들. 연경에 다 왔습니다요.”
만우는 설미수와 동군영이 불안해하는 것을 들었지만 딱히 위로를 해 주진 않았다. 위로는 무슨 위로란 말인가. 일이 터지면 모든 일을 다 감당해야 하는 것은 만우 혼자인데 말이다. 그리고 불안해한다고 해서 일이 크게 달라질 것도 없었다. 어차피 만우의 일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복잡한 상황과는 달리 간단명료했다. 담판. 만우가 직접 명의 천자를 만나 일에 대해 담판을 짓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 위해 만우는 이미 손에 피를 묻혔다. 동창, 무림맹, 사림곡의 고수들. 이미 마교를 제외하고는 중원 그 자체를 상징하는 상징적인 그 세 곳의 고수들을 용접곡에서 만우가 압도적인 무위로 베었다. 그러니 이미 이제 더 이상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다. 백척간두(百尺竿頭)의 형세다.
“그런데, 성문이 열려 있습니다요.”
“정말이군.”
“무슨 꿍꿍이일까요.”
만우의 말에 설미수와 동군영이 복잡한 표정이 되었다. 연경은 명 천자가 황위에 오르고 나서 의욕적으로 추진한 굵직한 목표 중에 하나다. 과거의 기억을 지우고 새로이 시작하기 위해 고른 곳이 바로 연경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연경으로 들어가는 길이 텅텅 비어 있다니. 바보 천치가 아닌 다음에야 이렇게 들어오라는 듯 문을 활짝 열어 놓고 경비병 하나 세우지 않은 것에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라 의심할 수밖에 없다.
“간단합지요.”
설미수와 동군영과는 달리 만우는 단박에 천자가 남긴 저의를 읽어 내고는 씩 웃어 보였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은공.”
설미수가 그리 불안해하면서 반문하자 만우는 설미수의 말고삐를 탁 잡아채서는 활짝 열린 텅 빈 성문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며 말했다.
“들어오라는 겁니다요. 명 황제가 황제답게 겁먹지 않았다, 피하지 않을 테니 겁먹지 않았다면 너도 들어오라, 이런 말입니다요.”
“…….”
만우의 말을 듣자 어디 샐 길도 없이 천자가 떡하니 준비해 놓은 저의가 설미수와 동군영에게도 와닿았다. 그것은 제국을 다스리는 군주로서의 자신감이 내포되어 있는 데다 검주가 두렵지 않다는 천자로서의 많은 말이 담긴 것이었다. 활짝 열려 있는 성문과 텅 빈 성벽 위. 그 어떠한 것으로도 막지 않을 테니 들어오면 들어와 보라는 천자의 자신감. 꿀꺽. 설미수와 동군영은 그 성문이 마치 벌어진 범의 아가리 속으로 머리를 들이미는 느낌이라 식은땀을 질질 흘려 댔지만, 그들에게는 거부권이 없었다. 가장 앞에서 만우가 마치 재밌겠다는 듯 희미한 미소를 흘리며 말고삐를 잡고는 끌고 나아가고 있었으니까.
‘천지신명이시여. 제발, 제발 큰 사고 없이 다시 조선으로 갈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설미수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
“여기가 연…….”
애초에 관도도 텅 비어 있었고 성문도 지키는 문지기 하나 없이 텅 비어 있었기 때문에 사행단은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연경에 입성했다. 하지만 그것을 입성이라 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알 수 없었다. 신이 나서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기대감에 가득 차 있던 방매의 얼굴이 의아함으로 물드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경이야?”
“흠…….”
옆에서 간장도 방매와 비슷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둘이 그런 의아한 표정을 짓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대감. 원래 연경이…… 이런 곳입니까?”
동군영이 당최 모르겠다는 듯 설미수에게 물었다. 하지만 당혹스러운 것은 설미수도 마찬가지였다. 연경의 모습이 설미수가 아는 것과는 지금 많이 다른 상태였기 때문이다.
“길거리가 텅텅 비다니요.”
천자는 천년만년 이어질 대명(大明)제국을 위해 연경 전체를 확장하고 있었다. 설미수는 황궁이 다 지어지면 연경이 아니라 북쪽의 수도라 하여 북경(北京)이라 부를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까지 명의 대신에게 들었었다. 그런 자신이 들은 것과 당장의 연경은 너무나도 차이가 났다.
“거참. 지나가는 개새끼 한 마리도 없네.”
수레를 끌면서 감령이 구시렁거렸다. 감령과 필두는 각기 산적과 수적, 관아에서 두 눈에 불을 켜고 잡으려는 죄인인지라 이런 대도시에 들어가 본 적이 별로 없었다. 특히나 감령은 그 때문에 연경에 가는 것을 방매나 간장만큼이나 기대했는데, 영 기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벅, 저벅 푸르륵. 데구르르르. 폭발적으로 확장하고 있는 연경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주변에서 작은 소음조차도 들리지 않았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사행단이 내는 소리밖에 없었다. 사람이 걷는 소리, 말이 푸륵거리는 소리, 수레가 굴러가는 소리 등등. 마치 귀신 도시인 것처럼 주변에 사람의 온기나 기척이라고는 조금도 느낄 수가 없었다.
“연경이 언제부터 귀도(鬼都)가 된 거야?”
문형일이 으스스하다는 듯 두 팔을 손바닥으로 비볐다. 그런데 그때 수레 위에 방매와 나란히 앉아 있던 호선이 입을 열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사람이 있었던 것 같은데?”
“어제?”
“아니, 그러면…….”
타닷!!! 감령이 바닥을 박차고는 근처 건물의 기와에 사뿐히 내려섰다.
“이 많은, 그러니까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있는 이 집들이 전부 비워졌단 말이야?”
“이게 무슨…… 후퇴하면서 보리밭까지 싹 다 태워 버리는 전술도 아니고.”
문형일이 질렸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자 그것을 들은 동군영이 딱 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청야(淸野)입니다. 대감.”
“일부러 비웠다?”
설미수는 동군영의 말에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싶었기 때문이다. 그 표정은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귀 밝은 나머지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황제가 관도를 비워 놓고 성문과 성벽까지 비워 놓았는데, 그것도 모자라 백성들까지 대피를 시켰다?
“함정이나 매복일 리는 없고.”
척일이 흔들리는 말 등 위에서 흰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에 척사영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동조했다.
“함정이라면 살기나 인기척이 느껴져야 하는데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알았다.”
동군영이 한 박자 뒤늦게 천자의 의도를 알아채고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지었다. 알았다고 말한 동군영이 입을 다물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다들 궁금한 것이다. 반면 만우만은 뒤에서 그런 난리를 치고 있음에도 의식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한 발자국씩 전진하는 데만 집중했다.
“천자는……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겁니다.”
“……과시? 이런 걸로?”
물론 그 검주, 만우가 오는데 관도를 비우고 성문을 비워 놓은 것은 확실히 자신감의 표현이라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과 아예 이 근방의 백성들을 전부 다른 곳으로 이주시킨 것이 대체 무슨 힘의 과시란 말인가.
“자신이 마음을 먹으면, 저희가 이곳에 들어온 줄도 사람들이 모르게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는…… 그런…….”
동군영은 조선의 임금과는 전혀 다른 난폭하기 그지없는 군주의 저의에 팔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그것은 비단 동군영만이 아니라 설미수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평생을 붙잡고 배워온 공맹의 말씀이 담긴 유학과 그런 과격한 사상 따위는 담겨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백성들은 영문도 모르고 다른 곳으로 가야 했을 겁니다. 결국 천자가 만우와 우리를 세상에서 지울 수 있다는 자신이 있기에 이리 연경을 귀도로 만든 것입니다.”
설미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설미수의 얼굴도 새하얬다. 마치 명의 천자가 품은 살의가 텅 빈 귀도에서 느껴지는 것 같아 으스스해졌기 때문이다. 천자는 사행단에게 연경에 들어서는 초입부터 그들이 살아날 길이 없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은공. 이를 어찌해야 합니까.”
설미수는 당황해하며 만우를 불렀다. 원래라면 적어도 연경에 들어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몇 번의 기회라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제 아무리 명이 크다고는 하나 정변의 난을 일으킨 현재의 천자가 조선을 상대로 군을 일으키기에는 많은 부담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대국의 황제로서 으레 지금까지 다른 황제들도 그러했던 것처럼 사대를 받아 대국과 소국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 시위를 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던 설미수의 예상이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천자는, 이야기할 생각조차도 없어 보였다.
“어찌하긴요, 나리.”
만우는 설미수가 부르자 그제야 뒤를 돌아봤다. 그런 만우의 표정은 얄미울 정도로 태평하기 그지없었다.
“입으로 대화를 하지 않겠다 하니 남은 것은 하나밖에 없지 않습니까요?”
“서, 설마 은공!”
설미수의 안색이 더욱더 새하얗게 변했다. 말로 대화가 통하지 않으니 남은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는 뜻이 무엇인지 알아들은 것이다. 툭툭. 만우가 고삐를 잡지 않은 손으로 이룡검을 툭툭 쳐 주었다. 그 안에는 부로의 극양의 기운과 장인이 만든 명검을 씹어 삼켜 간만에 배가 부른 불가사리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이 놈이 잘하는 것으로 담판을 보아야지요. 아니 그렇습니까요, 나리. 헤헤.”
타들어가는 설미수의 속도 모른 채 만우가 환하게 웃었다. ***** 독왕은 살아남은 혈천대와 극락당, 그리고 기린대를 이끌고 조용히 사라졌다. 일패 혈세천마가 죽어 이제 자신의 세상이 왔다 자부하였으나, 자신이 정저지와(井底之蛙)에 불과하였음을 깨달았기에 쥐 죽은 듯이 몰래 사라진 것이다. 무림맹에서는 죽은 이들의 시체를 모아 화장을 하고 천혜대사의 주도 아래 다비식을 치렀다. 떠나보내는 이들의 얼굴은 짙은 패배감에 젖어 있었는데, 그중 가장 충격이 큰 것은 천혜대사가 아닌 바로 제갈명공이었다. 제갈세가의 가주. 신산(神算)의 제갈세가. 무림맹의 확고한 군사이자 모든 정보를 한 손에 틀어쥐고 맹주 다음의 권력을 구가하여 제갈세가의 입지를 손꼽히는 대세가(大世家)로 만든 이. 이렇듯 제갈명공이 무림맹에 입맹하여 세운 업적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그는 이번 일로 크나큰 자존심의 상처와 함께 혈족들을 잃는 슬픔을 겪었다. 태어나서 난생 처음으로 일인의 무력으로 인해 자신이 세운 모든 계책들이 어그러지는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 실패의 기억은 제갈명공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이러다 다시 재기하지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을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로.
“군사. 제갈운. 그 아이의 복수는 해야 하지 않겠는가?”
제갈명공이 제갈운을 특히 아꼈기에 천혜대사도 제갈운을 알고 있었다. 실의에 빠져 실혼인처럼 변한 제갈명공이 제갈운이라는 이름에 움찔하고 반응을 보였다.
“사림곡은 떠났으나 아직 청룡단과 백호단이 남았네. 지금이라도 연통을 보내면 무림맹에 상주하고 있는 빈객들도 소집할 수 있을 테고.”
불존이 홀로 연경으로 향했다. 소림의 동량인 불존을 그리 홀로 검주에게 보낼 수는 없었기에 천혜대사는 제갈명공의 기운을 북돋아주려 애를 썼다. 무림맹 안에서 제갈명공의 발언권은 기라성 같은 고수들이나 대문파, 혹은 오대세가의 장로급들보다도 더 높았기 때문이다.
“또한 독왕은 떠났으나 부 공공은 남았네. 비록 상세가 위중하다고는 하나 공공이 아닌가. 군사.”
제갈명공이 바싹 마른 입술과 버석해진 얼굴로 고개를 들어 천혜대사를 쳐다봤다.
“다시 일어서라는 말씀이십니까.”
“……언제까지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는 법이니. 아미타불.”
“…….”
제갈명공은 고개를 돌리고는 푹 숙였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던 제갈명공이 퀭한 눈을 들고는 천혜대사를 쳐다봤다.
“도와주십시오, 맹주.”
“…….”
“전…… 복수를 해야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소승이 제갈 시주를 도와드릴 수 있겠소이까?”
복수는 불자로서 입에 담으면 안 되는 것 중 하나였다. 하지만 천혜대사는 그를 입에 담았다. 비록 자신의 지금 선택으로 인해 지옥으로 떨어지더라도, 아직 자신은 속세를 다 떨치지 못한 중생에 불과했으니 그 중생의 삶에 맞춰 살 생각이었다. 무림맹. 그 거대한 무게를 짊어진 이상 속세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은 없었으니까. 제갈명공이 복수를 위해 다시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