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5. 연경 입성 (1)2022.03.15.
“싸우다니. 그게 무슨…….”
“팽대수. 네가 도를 쥐었을 때, 싸우고자 쥔 것이 아니더냐?”
만우는 팽대수에게서 눈을 돌려 모든 이들을 불쌍함과 한심함이 공존하고 있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자기 수양을 위해 검과 도를 들었다 개소리하지 말라. 그대들보다 높이 닿은 자로서 감히 말하니, 나는 내 수양을 위해 무공을 익히지 않았음이다.”
강해지기 위해, 그래서 그것으로 나를 지키고 내 것을 지키기 위해 도를 든 것이다. 한데, 왜 그 대상이 황제라 하여 그 도를 들고 내 것을 지킬 생각을 하지 못한단 말인가.
“네놈들은 네놈들보다 약한 이들의 고혈만 빨아가면서 살고자 하였던 것이냐?”
둥-! 만우의 한 마디는 그곳에 모인 무림인들의 가슴 속 무언가를 건드렸다. 만우의 말은 직설적이고 거칠었지만 그만큼 솔직했다. 만우는, 지금 자신들을 진심으로 불쌍하고 안타깝다 여기고 있었다.
“투쟁이 없는 네놈들이 무림인이더냐, 아니면 무뢰배더냐.”
검과 도를 들고 자신을 위해 투쟁을 한다면 무림인이고, 그것으로 약자를 괴롭힌다면 무뢰배다. 만우는 이룡검을 치켜들었다.
“이 세상에 싸우지 않고 쟁취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생각하느냐?”
그것이 만우가 살아온 방색이다. 투쟁과 쟁취. 만우는 살고자 무공을 익혔고 살아남기 위해 검을 들었다. 수없이 많은 적들을 조우하였고 그들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검과 예를 갈고 닦았다. 그리고 그것은 곧 모든 무림인들의 인생이다. 강호무림이란 곳은 애초에 그런 이들이 모여 만들어진 곳이었으니까. 그곳의 모든 이들은 살기 위해 검과 도를 든다. 그 검과 도는 자신이 살아남기 위함이지, 강자의 명령에 굴복하여 소수를 핍박하고 약자를 겁박하기 위함이 아니다.
“투쟁하지 않는 자!!”
고오오오-!!! 만우의 이룡검을 푸른 검강이 뒤덮었다. 현경임을 드러내 보이는 만우의 신위에 모든 고수들이 입을 꾹 다물었다. 만우의 존재감이 태산처럼 그들의 어깨를 짓눌렀다.
“내 죽이지 않겠다. 나보다 약한 무뢰배를 베고자 그리 목숨을 걸어가며 익힌 검이 아니니.”
하나 그것은 곧 무림인으로서의 종말을 고하는 것이다. 만우의 검에 죽지 않은 자는 무림인이 아니라 무뢰배일 뿐이니까.
“죽고자 하는 자는 나서라. 투쟁하고자 하는 자만 나서라.”
저벅. 만우는 그리 말하고는 발을 내딛었다. 그 순간 분지의 모든 무림인들이 자신도 모르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내 검주로서, 천하제일인으로서 기꺼이 그대의 용기와 기개에 진심으로 대해 주겠노라.”
만우는 그리 말하고는 걸어 나갔다. 그런 만우의 뒤를 천천히 사행단이 뒤따랐다. 스스슥. 만우가 걷는 길 주변의 무림인들이 만우에게 저절로 길을 비켜주었다. 검을 휘두르면 얼마든지 검이 닿는 거리임에도, 그들 중 단 하나도 만우에게 검을 들고 나서는 자들은 없었다. 무림맹. 사림곡. 동창. 저 거대한 중원과 강호무림을 주름 잡는다는 단체의 고수들 수백이 만우 한 사람의 위압과 기개에 눌려 절로 길을 터 준 것이다. 그러면서도 만우 앞에 검을 들고 나설 용기 있는 자가 하나도 없었으니. 만우는 그들을 지나치면서 한탄했다.
“무림의 정기(精氣)가 크게 상하였도다. 무림맹은 권세에 무릎 꿇은 칼잡이들이 되었고 사림곡은 파락호들뿐이며 동창은 승냥이 같은 놈들뿐이로다.”
그들의 자존심이 크게 상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서는 자들이 하나도 없었다. 만우는 혐오스럽다는 눈으로 그들을 쳐다보며 싸늘하게 일갈했다.
“본주의 검 앞에 설 자격조차 없는 놈들이로다. 네놈들은 차라리 용접곡 안에서 죽은 이들을 부러워하라.”
저벅, 저벅, 저벅 만우와 그 뒤를 따르는 사행단이 수백 명의 사이를 천천히 스쳐지나갔다. 털썩! 그리고 잠시 뒤, 무언가를 열심히 하려던 제갈명공이 허무한 눈으로 무릎을 털썩 하고 꿇는 소리만이 용접곡 안에 쓸쓸하게 울려 퍼졌다. *****
“칼잡이라.”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다시 설미수가 탄 말의 고삐를 건네받고는 천천히 연경을 향해 나아가는 만우를 보면서 동군영은 중얼거렸다. 자신이 보기에는 무시무시해 보이는 괴물 같은 고수들이 만우 앞에 길을 만들고, 그 사이를 걸어가면서 봤던 그들의 표정을 동군영은 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모두 수치스러워하면서도, 부끄러워하고 있었으니까.
‘마냥 살인귀만은 아닌가.’
동군영은 무림인들이 살인귀라고 생각했다. 만우와, 그리고 그의 수하들과 오랜 기간을 함께 하였지만 그들이 사람의 생명을 초개처럼 여긴다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나 그들도 수치스러워하고, 부끄러움을 느낄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검.’
동군영은 자신의 허리춤에 매달린 낡은 검을 쳐다보았다. 대체 이 검이 무엇이길래 저들은 저리도 목숨을 거는 것일까. 과연 이 검에 공맹의 말씀이 적힌 논어만큼이나 복잡한 무언가가 정녕 있는 것일까?
“생각이 많은 듯 보이오.”
그때 척일이 말머리를 붙이며 동군영에게 슬쩍 말을 걸었다. 동군영은 그런 척일을 보고는 고개를 숙였다.
“예, 조금.”
척일은 상왕과 담판을 지은 거대무가의 태상가주다. 거기에 그가 그동안 보인 모습은 사행단의 가장 연장자로 믿음직스러웠기 때문에 동군영도 그런 척일을 충분히 존중해 주었다.
“내 그런 얼굴을 익히 많이 보았소.”
“이런 얼굴이라하시면…….”
“그 개경과 한양의 먹물 깨나 먹었다는 자들이 나 같은 늙은이와 달포만 붙어 지내도 그런 얼굴을 보이더이다.”
“흠…… 흠…….”
“삼봉이 그러했고 포은도 그러했었지.”
“……!!!”
동군영의 눈이 커졌다. 삼봉과 포은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고려 말의 대학자였기 때문이다. 삼봉은 상왕과 함께 조선의 기틀을 잡은 유학자이고 포은은 상왕과 대적하였으나 그가 그리도 경외해 마지않았던 고려 최고의 충신이다.
“최영도 그러했고 이인임도 비슷했지.”
동군영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척일의 입에서 나오는 이들이 전부 고려를 주름 잡았던 당대 최고의 권세가들이었기 때문이다.
“동 부사 같은 유학자들에게는 공맹의 말씀이 있고 문(文)이야 말로 으뜸 되는 가치겠지. 모든 성현의 말씀과 세상의 이치들이 있으니 말이오.”
동군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학자들은 붓의 힘을 믿는 이들이다. 책 안에는 옛 성현들의 지혜가 모두 담겨 있고 그것을 공부하여 태평성대를 만들 수 있다 믿었으니까.
“이 검(劍)이 궁금한 것이 아니오. 헐헐헐.”
“……맞습니다.”
“붓을 놀리는 동 부사 같은 유학자들은 검을 무시하지. 공맹의 말씀에는 사람을 죽이는 대신 측은지심을 갖고 긍휼한 마음으로 유학을 통해 나라를 올바르게 다스린다면 그러한 검은 없어도 될 것이라 생각하니 말이오.”
“도방의 전례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한데, 먹물 깨나 먹었다는 그 치들이 고려를 말아먹은 것은 무어라 설명할 수 있소?”
“…….”
“검이 피를 더 흐르게 했느냐, 글이 피를 더 흐르게 했느냐 말이오.”
“…….”
동군영은 척일의 말에 뭐라 반문을 할 수가 없었다. 척일의 관점대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직접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칼에 대해서만 생각했지, 직접 칼을 휘두르지 않고 칼을 쥔 이들을 움직인 이들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척일은 그런 동군영을 보면서 재미있다는 듯 빙글거리며 웃었다.
“글쎄 말이외다, 이 늙은이는…….”
척일은 자신의 검집과 머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하고 두드렸다.
“다 똑같소. 검이나, 먹물이나.”
“똑같다…… 라는 말씀이십니까?”
“아. 유학자인 동 부사에게는 좀 과격한 말인가?”
척일은 혼자 말하고 혼자 대답하면서 킬킬거렸다. 하지만 그런 척일의 말에 동군영은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척일의 말에서는 그의 경륜이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쓰는 사람이 문제이니까. 공맹의 말씀을 평생 공부한다 한들 그 말씀으로 공부하여 관직에 오른 작자가 패악을 저지르면 어찌 되겠소?”
그렇게 고려가 망했다.
“이 검도 마찬가지. 검으로 남을 협박하고 목숨을 상하게 하여 최고에 오른 자가 패악을 부린다면 어찌하겠소이까?”
그렇게 도방이 탄생했었다.
“하지만 무(武)는 남을 상하게 함이 아니라 스스로를 지키기 위함이고, 문(文)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오?”
척일은 허연 수염을 쓸어내렸다. 이것이 척일이 곡산척가라는 고려, 조선제일무가의 가주와 태상가주로 있으며 얻은 깨달음이었다.
“허니 무(武)를 탓하지 마시오. 인(人)을 탓하셔야 하외다.”
“아…….”
동군영은 큰 깨달음을 얻은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는 척일을 향해 공손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렇군요. 제 식견이 짧았습니다. 모든 것은 결국 사람이 하는 것이거늘…….”
“내 말이 도움이 되었으면 다행이외다. 헐헐헐.”
척일은 동군영을 손주 보듯 쳐다보면서 수염을 쓸어내렸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만우를 쳐다봤다.
“내게 고마워하시오. 검주. 홀홀홀.”
단 한 명이라도 누군가 자신을 이해해 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혈로를 걸어가는 이에게는 마음이 쉼터가 되지 않겠는가. 자신이야 가족이 있고 전우가 있지만, 검주는 그의 검이 인중최고(人中最高)에 닿았음에도 뜻을 함께하는 이들이 없다.
‘조건 없이 그대를 바라봐 주는 이가 하나.’
척일은 눈을 돌려 수레 위에서 만우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방매를 쳐다봤고.
‘생각은 많으나 그대를 이해해 주는 이가 하나.’
여전히 혼란스러워 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길을 찾은 동군영의 홀가분한 얼굴을 척일은 쳐다봤다. 비록 만우가 척일보다 무에서는 더 높으나, 인생의 경험은 더 짧다. 그렇기에 인생을 더 살아본 선배로서 그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동군영과 대화를 한 것이었다. 칼잡이라 하더라도 사람인 것은 마찬가지이니까.
‘사영의 배필로 저 정도만 아주 훌륭하지!’
물론 척일이 여전히 만우와 척사영을 이어주는 것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것도 하나의 요인이 되었긴 했다.
“노인네. 오지랖은.”
앞에서 걸어가던 만우가 척일의 목소리를 듣고는 피식 웃었다. 일반인이라면 듣지 못할 거리였으나 만우의 청력은 그런 일반인의 범주를 벗어난 지 오래였으니 말이다. 어쨌거나 다행히도, 자신이 마음에 들어하던 이들이 자신을 경외하거나 존경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만우가 홀가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
“이제 곧 있으면 일주대로(一主大路)에 들어서게 됩니다, 은공.”
“일주대로라…….”
“한 명의 군주를 위한 길이란 뜻이지요.”
“대국 놈들의 허영은 내 익히 아는 밥니다요.”
만우가 피식 웃었다. 일주대로, 광오하기 짝이 없는 이름이 붙은 길이었다. 일개 대로(大路)에 그런 이름을 붙일 정도로 중원의 광오함에는 만우도 익숙했다. 낯 뜨겁게도 무림십좌니 뭐니 하면서 자기들 스스로 줄 세우기를 좋아하는 이들이 사는 곳이 바로 중원이었기 때문이다.
“허영이나 저는 늘 그에 압도되었습니다, 은공.”
설미수는 그런 만우를 보면서 쓰게 웃었다. 그는 만우의 저 패기가 부러웠다. 하지만 설미수는 언제나 소국, 조선의 사신이었기에 일주대로를 보면서도 한 번도 저리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조선은 소국이고, 명은 대국이니 나리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요.”
만우는 그런 설미수의 얼굴을 보면서 히죽 웃었다. 용접곡의 무림인 수백을 저절로 물러나게 한 그 날의 일이 있은 지도 시간이 지났다. 그렇게 며칠을 꼬박 걷자 드디어 연경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일주대로가 나오는 지점까지 도착했다. 그 기간 동안에는 지금까지의 일이 무색하게도 산 사람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유례없는 평화를 만끽하며 사행단은 전진했다. 그러나 그것도 오늘까지만이다. 설미수의 얼굴에는 명나라를 상대해야 한다는 소국 사신의 비애처럼 긴장감이 떠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후우.”
곁에 만우도 있건만 설미수는 긴장되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대명의 황제를 알현해야 한다는 그 중압감은 제 아무리 만우가 곁에 있다하더라도 어찌 할 도리가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곳부터 일주대로입니다.”
그렇게 얼마를 더 나아가자 설미수는 만우를 비롯한 사행단에게 그리 말했다. 그리고 그 일주대로에 선 순간 동군영을 비롯한 모든 이들이 자연스럽게 입을 꾹 다물었다. 일주대로(一主大路). 만인지상(萬人之上)의 단 한 명의 군주를 위해 만들어진 길. 일주대로는 연경으로 들어가는 길이자 그 길 위에 선 이로 하여금 대국의 위대함과 위압감을 느낄 수 있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어마어마한 넓이의 대로였다. 광활하기 짝이 없는 크기의 길. 단언컨대 이들 중 그 어느 누구도 조선에서 이런 폭과 넓이의 대로를 본 이는 없을 것이다. 일주대로는 단 한 명의 군주를 위해 만들어진 길이기에 그 폭이 300자가 넘었다. 길과 길이 아닌 곳의 경계를 위해 세워 놓은 구분선이 아니었다면 아마 커다란 공터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폭이 300자란 것은 횡으로 선 기마병이 서른 기 이상 나란히 늘어설 수 있는 길이다. 소달구지가 서른 대 이상 한꺼번에 지날 수 있는 길이기도 했다.
“이 일주대로가 30리를 걸쳐 이어져 있습니다. 그 끝에는…… 연경이 있습니다.”
설미수는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는 만우에게 말했다. 만우는 바짝 긴장한 일행들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갑시다. 황제 놈의 면상 보러.”
그렇다면 그 긴장감을 깨주기 위해서는 자신이 움직이면 된다. 만우가 성큼성큼 설미수의 말고삐를 쥐고는 일주대로에 올라서자 사행단 전원이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 뒤를 따랐다. ***** 부르르. 번쩍! 부로가 번쩍하고 눈을 떴다. 얼굴에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그조차도 느끼지 못하고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허어어어억-!!!”
그와 동시에 부로는 있는 힘껏 숨을 들이마셨다. 눈을 뜨니 방금 자신이 본 것이 꿈이 아니었다. 꿈속에서 부로는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거대한 겁화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사방이 온통 불, 불, 불이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꿈속에서의 부로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 화경에 이르는 힘이 사라진 부로는 그저 힘없는 일개 환관일 뿐이었고 그 때문에 불에 타죽는다는 것에 벌벌 떨기만 했다.
‘괴물…….’
그리고 그 겁화 속에는 분명 난생 처음 보는 괴물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리 생긴 동물을 부로는 본 적이 없었다. 몸은 곰처럼 퉁퉁했고, 코는 뱀처럼 긴 데다가 무소의 눈처럼 눈은 컸고, 털이 빳빳한 바늘에 꼬리는 호랑이 꼬리를 가진 동물이었다. 무엇보다도 그 괴물은 부로를 태워 죽이려는 겁화의 주인이었다. 그 괴물이 살기 띈 눈으로 부로를 보면서 입을 벌려서는 불을 내뿜었다. [화르륵!!!!] 그런데 그때 누군가의 팔이 부로의 멱살을 틀어쥐고는 세상을 집어삼킬 것처럼 타오르던 겁화 속에서 자신을 불쑥 꺼내어 주었다.
“검주…….”
검주. 하필이면 그 겁화를 막아주고, 그를 꺼내주었던 이가 바로 검주 만우였다. 그런데 그 직후 부로는 가슴팍에 큰 충격을 받고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가 지금 깨어났다. 그것이 부로 자신이 꾼 꿈이었다. 욱신.
“크, 크윽!!!”
그런데 그때 부로는 가슴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통증에 고통을 호소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자신의 상체를 내려다보니 붕대가 칭칭 감겨져 있었다.
“이…… 이건…….”
파락!
“부 공공! 정신이 드십니까!”
그때 천막이 걷히더니 부제독이 달려 들어왔다. 부제독은 깨어난 부로를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냐. 내가 왜 이리 된 것이야.”
“공공…… 기억이 나지 않으십니까?”
“기억? 무슨…… 큭?”
부제독의 말에 부로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는 두 눈을 부릅떴다. 자신이 꿈이라 생각했던 그것이 꿈이 아니라는 것이 떠오른 것이다.
“내, 내가 검주에게 달려들었고…….”
반양공은 황실이 보유한 최상승 무학 중 하나다. 황실의 무학들은 대부분 반양공처럼 무식한 내공을 필요로 하는 대신 복잡한 초식이 없었는데 바로 황실이 그리하기 때문이었다. 강호의 문파나 세가는 어릴 때 재능이 있는 아이들을 입문토록 하여 사제관계를 맺고 기초부터 하나씩 차근차근 가르친다. 하지만 동창은 그런 문파나 세가가 아니다. 그 때문에 기초를 가르쳐주는 교관은 있으나 스승이란 존재는 없기에 대를 걸쳐 내려오는 현묘한 무학이 아닌 단순하고 실전적인 무공을 선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신 제국의 재력으로 진귀한 영약 같은 것들을 언제든지 공급해 줄 수 있으니, 반양공처럼 엄청난 내공을 필요로 하는 대신 단순한 무학과 무공들을 동창들은 익히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반양공을 검주는 집어삼켰다.
‘그 괴물.’
부로는 반양공으로 끌어올린 극양의 내기를 하사받은 보검에 쑤셔 넣어 뽑아낸 검기로 검신 전체를 휘감은 채로 검주에게 달려들었다. 그렇게 달려들면서 부로는 제 아무리 검주고, 그가 한 수 위라 하더라도 자신의 일수는 쉬이 받아내지 못할 것이라 자신했다. 자신을 상대하기 전에 이미 검주는 용접곡을 돌파하였고, 불존과 독왕을 차례대로 상대하면서 공력이 부족한 상태일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검주에게 같은 경지의 무림고수보다 내공이 족히 한 배 반은 더 많은 부로의 내공이 집약된 일격이라면 충분하다 생각했다. 설령 부로의 공격이 부족하다 하더라도 그때의 검주는 거의 모든 공력을 소진해 잔뜩 지친상태이거나 중상을 입었을 것이라 생각했으니 뒤에 대기한 고수들이라면 검주를 죽이거나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 내다보았고 말이다. 하지만 그랬던 부로의 생각은 자신이 일으킨 반양공의 성질을 그대로 담아낸 극양의 검기가 검주의 이룡검을 한 치도 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산산조각이 났다. 그리고는 부로가 꿈속에서 본 것처럼, 반양공의 극양의 검기가 오히려 부로를 집어삼키려 하였다.
‘아니. 그건…… 마치 반양공의 내공이 살고자 발악하는 것 같았다.’
부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로의 공력은 부로를 공격한 것이 아니었다. 부로의 공력은 마치 이지가 있는 것처럼 만우의 이룡검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발악을 한 것이었다. 괴물. 만우의 이룡검 안에 숨어 있는 그 괴물이 반양공의 검기가 실린 부로의 검을 씹어 먹고 반양공의 공력을 집어삼켜 버렸으니까. 그러니까 부로의 공력은 그 괴물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발악을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살기 위해 발악을 한 부로의 공력이 되레 진짜 공력의 주인인 부로의 통제에서 벗어났다는 점이었다. 스윽. 부로는 자신의 단전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언제나 자신의 든든한 우군이 되어 주었던 그 든든한 공력이 자신을 물어뜯기 위해 그 이빨을 드러냈던 순간을 떠올리면 아찔했기 때문이다.
‘그런 나를 구해 주었던 것이.’
검주. 부로는 이를 악물었다. 이룡검의 괴물을 날뛰지 못하고 공력으로 찍어 누르고 반양공의 공력을 흩어 부로의 단전이 깨지지 않도록 손을 썼던 것이 바로 검주다.
‘왜 나를 살렸지?’
검주의 손속은 잔혹했다. 그는 일수에 부로와 동급의 고수인 불존을 날려 버렸고 그 다음으로 독왕의 독공을 와해시켜 버리고 독왕의 손목을 잘랐다. 그런데 그런 검주가 자신은 구해 주었다? 그때 검주가 나서지 않았다면 부로는 알아서 주화입마를 일으키며 온몸의 혈맥과 혈도가 찢어지고 터져서는 고통스럽게 죽었을 것이다. 제 주인의 통제에서 벗어난 반양공의 공력은 부로의 내부에서 이미 날뛰면서 적지 않은 내상을 입혀 놓고 있던 중이었으니까.
‘아니, 살린 건 아닌가.’
부로는 가슴을 내려다보면서 쓰게 웃었다. 생각해 보면 검주가 자신을 살린 것은 아니다. 검주가 불존의 백보신권을 막기 위한 방패막이로 자신을 사용했다는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사악한 간적이 공공을 육간(肉干:고기방패) 삼아 백보신권을 막는 바람에 큰 일이 나실 뻔 했습니다. 다행히 보력단(保力丹)이 있어 고비는 넘겼으나 앞으로 족히 달포는 정양을 하셔야 합니다.”
“나도 알고 있다.”
백보신권에 가슴이 적중 당했다. 어찌 생각해 보면 즉사하지 않은 것이 천운이었다. 소림의 절학으로 소문이 난 백보신권에 심장이 터져 죽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으니 말이다. 대신 갈비뼈가 몽땅 부서져 부로는 단순히 일어나는 것만으로도 벌써 식은 땀 범벅이 되었고 얼굴에 창백해질 정도로 큰 중상을 입었다.
“끄응…….”
부로는 신음소리를 내면서 다시 누웠다. 아이러니하게도 검주에게서 받은 상처가 아니라 같은 편인 불존에게서 받은 상처가 부로를 이리 만들었다. 부로는 피식 웃다가 통증에 얼굴을 찡그렸다.
“검주는?”
부로는 고개를 돌려 부제독에게 말했다. 부제독의 신색이 너무나도 멀끔했기 때문이다. 중상을 입어 감각이 평상시의 십분지 일도 되지 않았기에 부로는 부제독에게 말했다.
“그것이…….”
부로의 물음에 부제독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러더니 이내 그가 무릎을 털썩 꿇고는 이마를 쿵 하고 바닥에 박았다.
“공공. 검주 그자는, 그자는…….”
“……잘 했다.”
“예?”
부제독이 놀라서는 고개를 들었다. 부로에게 큰 꾸중을 들을 것이라 생각하였는데 전혀 다른 말이 입에서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길을 터 주었겠지. 불존과 독왕, 나까지 쓰러졌으니.”
세 명이나 되는 화경의 고수가 만우에게 쓰러졌다. 제대로 된 합격술이라 할 수는 없지만 차례대로 합공을 해 놓고도 이기지 못한 것이다. 그런 검주를 세 명보다 못한 고수들이 공격한다?
“검주, 그자를 막는 것은 개죽음이다. 그리고…….”
부로는 뒷말은 삼켰다. 어찌 되었건 간에 자신의 목숨을 구명해 준 것은 바로 만우다. 만우가 아니었다면 자신은 그 괴물에 의해 죽었을 것이란 것을 부로는 짐작할 수 있었다. 비록 백보신권을 막아 내는 육간으로 사용하기는 하였으나, 부로는 살았다. 산 것이 중요한 것이다. 죽은 것 보다는.
‘꼭 그때 같구나. 아니, 그때보다 차라리 후련한가.’
부로는 건륜제 시절 일어난 황실의 수치를 기억했다. 그때의 그는 붉은 옷 위로 갑주를 걸친 금의위였으나 지금처럼 검주 앞에서 쓰러졌었다. 그때도 검주는 자신을 살렸고 이번에도 죽이지 않았다.
‘죽일 필요도 없다는 것이겠지.’
부로는 피식 웃었다. 검주의 자신감이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화가 나지 않았다. 애초에 넘지 못할 산이고 벽이란 것을 이제라도 깨달았기 때문일까. 부로는 눈을 뜨고 있기도 힘들어 지그시 감으면서 부제독에게 말했다.
“검주를 상대할 수 있는 것은 폐하뿐이시다. 이미 우리는 패배하였으니, 죽음으로 폐하의 은혜를 보답할 수밖에 없을 지언 저.”
부로는 천자께서 검주를 이기기를 바라야 하는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하나 확실한 것은 검주를 상대할 수 있는 것은 천자 외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명이라는 거대한 대국을 다스리는 황제 외에는 진정으로 검주를 상대할 자가 없는 것이다. 천하제일인.
“내가 거동이 가능커든 폐하께 내 발로 찾아가 죄를 청할 터이니 너희들은 돌아가 폐하의 곁을 지켜라.”
“공공!”
부제독이 놀란 표정으로 부로를 쳐다봤다. 하지만 부로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정신을 잃었다. 부제독은 그런 부로를 보며 두 팔을 들어 올리고 허리를 굽히며 예를 올렸다. 동창인 그들이 죽을 곳은 바로 황제의 옆이다. 비록 이곳에서는 검주에게 패배하였으나, 목숨을 부지하였으니 그들이 돌아갈 곳은 황제의 곁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죽어야 하겠지.
“공공을 보필할 열 명만 남기고 돌아간다!”
부제독이 부로가 있는 막사에서 걸어 나오며 주변의 동창들에게 말하였고, 이내 그 명령이 모든 동창들에게 전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