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0. 잡것들의 오만 (2)2022.02.26.
연경의 문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금의위가 매일처럼 황제의 침전의 경비를 강화한다 소란스러웠지만 사실 가장 속이 시끄러운 것은 검주 하나를 잡겠다 뭉친 세 명의 고수들이었다. 동창제독 부로. 불존 진한대사. 독왕 중백약. 각기 황실과 무림맹, 그리고 사림곡을 대표하는 고수들은 침중한 얼굴로 취구개 만복의 보고를 들었다.
“최소 둘이 더 있다?”
“허어…… 아미타불.”
“돈극. 기린대와 혈천대만으로는 부족하다. 극락당을 부르라.”
“예. 곡주.”
부로는 눈을 크게 떴고 진한은 눈을 감고 불호를 읊었다. 독왕은 한탄하기 보다는 곧바로 돈극에게 부족한 이들을 충원하라 전했다.
“초절정 다섯, 화경 둘. 그리고 검주. 만만치 않은 상대입니다.”
제갈명공이 두 눈을 감은 천혜대사에게 말했다. 무림맹에서도 이번 일에 청룡단과 백호단이 동원되었지만 천혜대사는 이상하게 마음이 진정되지가 않았다.
“하나 이곳에 모인 고수들 역시 만만치 않사옵니다.”
제갈명공은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풍문의 검주가 상대한 일패, 혈세천마와 곡왕, 마존을 뛰어넘는 세 고수분들이 있을 뿐더러 진혼대와 천마대를 뛰어넘는 고수들이 모이지 않았습니까.”
둘러앉은 이들이 제갈명공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청룡단과 백호단은 만우에게 당한 주작단보다 더 뛰어난 고수들로 구성된 이들이었다. 남궁세가와 하북팽가. 태산북두라는 무당이나 검으로 유명한 화산파에도 꿇리지 않는 검가(劍家)인 남궁세가의 고수들로 이뤄진 청룡단과 신력을 바탕으로 한 패도적인 도법으로 유명한 하북팽가의 고수들로 이뤄진 백호단이 이번 일에 동원이 된 것이다. 비록 무림십좌 중 일좌를 맡고 있는 무존(武尊) 남궁무가 청룡단주 자리는 고사하였으나 청룡단주인 남궁태도 창천검이라는 별호를 얻은 초절정의 고수였다. 또한 하북팽가 역시 가주인 팽우는 아니나 초절정에 오른 젊은 후기지수인 맹호도 팽대수를 단주로 임명했다. 그리하여 청룡단과 백호단의 실력 차이는 말 그대로 종이 한 장 차이. 단주인 창천검 남궁태가 초절정에 오른 지 더 오래되어 팽대수보다 실력이 반 수 정도 뛰어나다는 것이 청룡단을 무림맹 사대단 중 으뜸으로 뽑는 이유였다. 물론 그 위로는 화산의 황룡단과 남해검후가의 봉황단이 있었으나 그들은 무림 전체에 큰 환란이 닥치지 않는 이상 잘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청룡단과 백호단 정도라면 능히 마교의 천마대와 진혼대를 맞상대할 수 있을 것이란 것이 제갈명공의 평가였다. 이미 죽었으나, 무립십좌 중 두 명인 천마대의 마존과 진혼대의 곡왕을 상대로 청룡단과 백호단을 동일선상에 놓은 것은 남궁세가와 하북팽가의 합격진이 능히 두 명의 화경의 고수를 상대할 정도로 수준이 높기 때문이다.
“허니 능히 상대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검주라고는 하나 본래 검주는 독보하던 자, 그러니 다른 이와 손발을 맞추는 것이 쉬울 리가 없지요.”
제갈명공은 만우와 그 일행들의 용모파기가 그려진 종이들을 늘어놓았다. 그들 중 눈에 익은 고수들을 제외하고는 처음 보는 이들이었기에 독왕과 부로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들은?”
“이 둘은 조선의 임금이 조천사로 파견한 관리입니다.”
“그리고 이 둘은?”
누가 보더라도 학자처럼 생긴 설미수와 동군영은 제갈명공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고 넘어갔다. 애초에 이들이 손을 잡고 나선 이유가 황제가 보낸 칙서를 조선에서 제 마음대로 해석하였기에 명분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허니 동군영과 설미수에 대해서는 부가적인 설명이 필요 없었다.
“의원과 야장입니다.”
“의원? 야장?”
“예. 한데 특이한 점은.”
곱상한 얼굴을 한 방매는 용모파기로만 봤을 때는 여인이란 것이 드러나지 않았다. 그랬기에 그들은 웬 무림인이 아닌 이가 두 명 껴있나 싶어 고개를 갸웃했다.
“검주와 긴밀한 관계인 듯싶습니다.”
“……군사. 증좌가 있으십니까?”
불존이 불호를 읊으면서 묻자 제갈명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바깥으로 고개를 돌려서는 말했다.
“데려오거라!”
끼익! 문이 끼익하고 열리더니 제갈세가의 문양이 들어간 옷을 입은 무인들이 들어와 여인 하나를 내려놓았다.
그런데 얼마나 고초를 겪은 것인지 피투성이가 된 여인은 눈도 뜨지 못하고는 꿈틀대고 있었는데, 보나마나 심한 고신을 겪은 흔적이 여기저기서 보였다.
“여인인 듯싶은데. 제갈세가에서 이젠 여인을 고신까지 하는가?”
독왕이 이죽대면서 제갈명공에게 말했다. 하지만 제갈명공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감히 천안각의 정보를 탐내더이다. 또한 이 여인은 여러분들도 다 아실만한 여인이외다.”
제갈명공이 축 늘어진 여인의 머리채를 잡아 올렸다. 그러자 고초를 당하고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도 가릴 수 없는 미색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아윽…….”
여인이 고통스러운 얼굴을 찡그렸지만 자애롭다는 천혜대사도 제갈명공의 행동에 대해 인상만 찌푸릴 뿐 말리지는 않았다. 이미 다 보고를 받은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저 여인이 무엇인데 이곳에서 피를 보는 것이냐?”
무림의 소식에 둔한 부로가 인상을 쓰고서는 불결하다는 듯 제갈명공에게 말했다. 그러자 제갈명공이 정중하게 부로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는 말했다.
“하오문이라고 혹시 아십니까?”
“하오문? 무림의 삼류잡배들이 모여 만든 곳이라 알고 있다. 기루나 객잔의 정보를 주로 다룬다지?”
“예. 비록 보잘 것 없는 이들이오나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어 그 차원은 다르나 궁가방과 상당히 유사한 점이 많은 곳입니다 공공.”
“한데?”
정보를 취급하는 곳이라기에 부로가 눈을 반짝하고 빛냈다. 정보를 수집하는 일은 동창 역시도 황실에서 꽤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여인이 바로 하오문주의 딸이자 연경 분타주입니다.”
“무화(無花)?”
돈극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런 돈극의 혼잣말을 듣지 못할 정도로 무공이 떨어지는 이는 그 안에 없었다.
“호오. 오화(五花)란 말이냐?”
독왕이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반짝하고 빛냈다. 그리고는 임수미의 이목구비를 찬찬히 뜯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저 꼴이 되어서도 미색이 빛나니. 과연 오화로다.”
남자가 되어 아리따운 미녀를 거부하는 이 없고, 여자가 되어 잘생긴 남자를 거부하는 이 없다. 교수 역시 재미있다는 듯 임수미를 쳐다봤다. 그런데 그때 불존이 불호를 읊었다.
“아미타불. 그렇다 하여 그 여시주를 그리 혹독히 고신한 것이 옳다 보시오?”
맹주인 천혜대사는 알고 있었으나 불존은 아니다. 무승이라고는 하나 그래도 불도를 닦는 중이었기에 진한대사가 거부감을 드러냈다.
“껄껄껄. 그래도 꼴에 땡중이라고 의젓하게 굴려 하는구나!”
“곡주. 허언을 일삼는 그 입을 뭉개드리오리까?”
독왕이 비웃자 불존이 날카롭게 받아쳤다. 다시 분위기가 험악해지려 하자 제갈명공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천안각의 정보를 감히 하오문이 노렸다는 것은 둘째입니다. 임수미, 무화가 그런 천안각에서 세가의 일류무인 다섯을 때려눕히고 도주하다가 진법에 갇혀 사로잡힌 것입니다.”
“호오. 다섯?”
“하오문에, 저리 어린 여아가?”
부로와 독왕의 눈가에 서린 이채가 더욱 짙어졌다. 일류무인이라 함은 어린 나이에 세가에 들어가 상승의 절학을 게으름 피우지 않고 꼬박 20년 정도를 익히면 도달할 수 있는 경지다. 그것도 꽤나 재능이 있다고 하는 이들이 20년간 수련하여 도달하는 경지가 일류다. 그 외에 재능 없이 노력으로만 도달할 수 있는 경지는 잘해야 이류 정도였다. 그런데 하류 인생들이 모여 만들어진 하오문 출신의, 아직 서른도 되지 않아 보이는 여인이 제갈가의 일류 고수 다섯을 때려눕혔다는 것이다.
“하오문에 무공이 있소이까?”
돈극이 그런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다는 얼굴로 제갈명공을 쳐다봤다. 하오문은 정과 사, 그리고 마 어느 곳에서 속해 있지 않은 집단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머릿수는 많으나 고수가 너무 적어 무림 강호에 무공으로 끼칠 수 있는 영향이 지극히 적은 바, 어느 곳에서도 환영을 받지 못하고 배척을 당했기 때문이다.
“없습니다. 거기에 무화의 무공 수위는 높아 봤자 이류.”
“듣기로는 일류 고수 정도만 되어도 하오문에서는 간부급이 된다 하더이다.”
돈극이 제갈명공의 말에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덧붙였다. 제갈명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어디서 영약이라도 먹었다고 하고 싶은 건가?”
독왕이 이죽대면서 제갈명공에게 말했다. 그런 독왕의 눈에는 음심(淫心)이 가득했다. 오화 중 하나인 무화를 보자 색욕이 동한 것이다. 독왕은 여색을 대단히 많이 밝히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하여 저도 그 부분이 대단히 이상하여 개인적으로 조사를 했습니다. 한데…….”
임수미는 눈이 풀린 채로 눈동자만 조금씩 움직여 천막 안에 자리한 이들을 살폈다. 초점이 잘 맞지 않고 눈이 아물거렸지만 임수미는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제갈세가가 주인으로 있는 천안각을 우습게 본 것이 임수미의 크나큰 실책이었다.
‘동창제독…… 사림곡주 저자는…… 불존.’
임수미의 눈가가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제갈세가의 고문은 지독했지만 그걸 견뎌 낸 임수미가 훨씬 더 지독했다. 하지만 제갈세가와 천안각의 정보력은 임수미가 입을 마냥 다물고 있다고만 해서 원하는 것을 찾지 못할 정도로 무능하지 않았다.
“장보도. 기억하시는지요.”
교수의 눈이 커졌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기린대를 끌고 조선으로 갔다가 큰 낭패만 당하고 왔던 교수였다. 그 때문에 중앙에서 밀려 얼마나 큰 고초를 감내해야만 했었던가.
“그 장보도로 중원 전체의 풍문을 조작한 곳이 하오문이라는 것도 알고 계시는지요.”
제갈명공의 말에 부로가 놀란 표정을 짓고는 임수미를 쳐다봤다. 하지만 독왕이나 무왕은 놀란 표정을 짓지 않았다. 그들 모두 무림의 삼대 단체 중 하나인 무림맹과 사림곡의 맹주와 곡주였기에 그 정도는 다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작이라? 어찌하여?”
“그곳에 숨겨진 무공을 감히 하오문에서 노렸기 때문입니다. 큰 혼란을 만들어 그 누구도 가지지 못 하게 한 뒤, 틈을 파고들려는 것이었겠지요.”
“호오. 묘수로다. 묘수야.”
항상 이 세상은 강자만이 승리하는 법은 없었다. 약자라도 어떻게든 머리를 굴리고 굴리다보면 결국 활로가 열리는 법이다. 하오문이 딱 그러했기에 부로는 피딱지로 뒤덮인 임수미를 보면서 감탄했다.
“그리하여 무화가 향한 곳이 바로 조선입니다.”
“……조선?”
“그리고 검주는 하오문의 명예 호법입니다.”
“검주!”
부로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그런 부로보다도 먼저 독왕이 입을 열었다.
“이류만도 못 한 수준이던 무화를 검주가 절정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판단하고 있습니다.”
제갈명공의 말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게 아니고서는 하오문에서 불과 몇 달 만에 이류에서 절정에 도달했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여 그것이 검주 일행에 있는 저 두 명과 무슨 관련이 있다는 말입니까?”
돈극이 제갈명공에게 물었다. 아무래도 사림곡은 만우를 주시한 것이 무림맹보다 한참 늦었기 때문에 정보력의 한계를 느꼈다. 제갈명공은 그런 돈극을 물끄러미 쳐다보고는 무화를 쳐다봤다.
“하오문주가 딸을 홀로 조선에 보냈을 리 없지요. 하여 천안각에서는 연경의 하오문을 들이쳐 무화와 함께 조선에 동행하였던 이들을 잡아들였습니다.”
“그리하여?”
“저 자는 만우의 의동생이고.”
뛰어난 야장임에도 불구하고 검계에 염왕채로 묶여 쓸데없는 철검이나 만들면서 지내던 간장이다. 그 검계를 한양 한복판에 조성한 자가 하오문 한양지부장인 삼복이었다.
“그리고 이 자는 만우의 정인(情人)인 듯합니다.”
“저, 정인?”
“검주의?”
용모파기는 사람의 손으로 그린 것이기 때문에 실물과 똑같을 리 없다. 때문에 방매의 용모파기는 누가 보더라도 사내 같았는데 그것이 정인이라고 하자 부로와 독왕이 전부 경악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제갈명공이 그들의 반응에 자신이 말을 빼뜨렸음을 깨닫고는 재차 입을 열었다.
“아. 이 자는 여인입니다. 한양제일매분구라 불렸던, 매분구 겸 보부상을 하고 있는 여인으로 짐작됩니다.”
“아…….”
“흠.”
부로와 독왕이 흠흠했다. 하지만 그들의 어색한 분위기를 깬 사람은 바로 불존이었다.
“아미타불. 하여 군사께서 하고 싶으신 말씀이 무엇이오?”
불존은 그리 말하면서 제갈명공을 쳐다봤지만 사실은 힐난하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제갈명공이 어찌하여 이 부분을 짚어 냈는지 짐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존의 그런 눈빛에도 제갈명공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당장의 자존심 따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가 더 큰 것을 바라고 있었다. 고금의 천하제일과 겨룰 수 있는 작금의 천하제일인을 무림맹의 이름으로, 그리고 제갈세가의 이름으로 무릎을 꿇릴 수 있다는 그 찬란한 영예. 역사에 새겨져 절대로 지워지지 않을 그러한 영예만이 제갈명공이 신경 쓰는 유일한 것이었다. 제갈명공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도 이젠 지키고자 할 것이 생긴 것이니, 다행일 수가 없습니다.”
과거 만우가 중원을 독보할 때 그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면서도 감히 건드릴 수 없었던 것은 그에게 약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 그를 눈엣가시처럼 생각하는 이들은 그러면서도 만우를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던 이유가 그들에게는 지킬 것이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이다. 가문, 명예, 제자…… 등등. 하나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만우에게도 지킬 것이 생겼으니 말이다.
“그것을 검주에게 알려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갈명공의 말에 눈을 반짝이던 부로가 빙글거리면서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는 터뜨렸다.
“푸흐흐흐…… 흐하하하핫!!!”
부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박수를 쳤다. 불존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부로 때문인지 경거망동은 하지 않았다.
“아주 좋다! 그리 하자꾸나! 흐하하핫!!”
***** 벌떡!!!!! 잠이 든 줄만 알았던 이들이 벌떡 하고 상체를 일으켰다. 만우 일행은 석가장의 융숭한 대접으로 노숙임에도 불구하고 고급 객잔 못지않은 곳에서 자고 있었던 중이었다. 단지 여러 명이서 한 천막에서 자야 한다는 것이 고급 객잔과 다른 점이었지만 다들 노숙임에도 이 정도로 잘 수 있다는 것에 감지덕지했기에 분위기는 좋았다. 그렇게 잠이 든 이들이 꼭두새벽에 놀라 몸을 일으킨 이유는 간단했다. 고오오오-!!! 예민한 초절정 고수의 기감에 바로 근처에서 어마어마한 기파의 유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게 뭐야?”
“대장님인가?”
감령과 필두가 눈가를 비비면서 말했다. 슌스케는 자신으로서는 감히 넘볼 수도 없을 것 같은 강렬한 기파에 어깨를 부르르 떨기만 했고 문형일과 마익후는 놀랐다가 심드렁해져서는 다시 이불을 덮고는 누웠다.
“안 보러 가?”
“뭘 보러 가.”
“이 기파가 안 느껴지는 것도 아닐 테고.”
딸랑-! 감령은 도를 그러쥐었다. 무림인은 자신의 애병을 절대로 몸에서 떼어 놓지 않는다. 특히나 지금처럼 노숙을 할 때는 더더욱 그러했다. 비록 노숙이라고는 볼 수 없는 푹신한 침상과 고급스런 천막이었지만 그래도 노숙은 노숙이다. 석가장이 호의를 베푼다고 해서 그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먹을 정도로 어리숙한 감령도 아니었고 말이다.
“가 봤자 아무 것도 못 볼걸?”
“괴검. 넌 아는 게 있는 눈치인데?”
문형일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감령은 그렇다 쳐도 필두까지 눈치가 저리도 없이 굴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질문의 답이었기에 문형일은 슌스케를 쳐다봤다.
“쟨 아는 거 같은데.”
슌스케는 무림에 한 번도 출도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딱히 부를 만한 별호 같은 것이 없었다. 하지만 자신을 쳐다보는 문형일의 시선에 슌스케는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하다.”
“간단하다고…… 아.”
필두도 뒤늦게 깨닫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에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감령뿐이었다. 감령은 이불을 덮고 누운 마익후의 팔을 두들기면서 말했다.
“덩치. 덩치. 넌 모르지? 어? 내가 얘보다 못 하다고?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얘랑?”
“저리. 가라. 귀찮.”
휙! 마익후가 어깨를 크게 한 번 털자 감령의 아귀가 힘없이 풀리면서 커다란 어깨가 툭 하고는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눕는 마익후의 모습에 감령은 큰 충격을 받고서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마익후도 알아챈 것을 알아채지 못하다니. 문형일과 필두야 생김새와는 달리 머리가 잘 돌아간다는 것을 익히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 다섯 명 중에서 지능으로 자신이 세 번째 정도는 된다고 생각했다. 하나는 무림 경험이 일천한 왜인이고, 한 놈은 말도 어눌하게 하는 곰 같은 놈이었으니까.
“안 돼.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감령이 도를 꼭 껴안은 채 이불 속으로 스르르 들어가서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필두는 그런 감령을 보면서 혀를 쯧쯧 차고는 문형일에게 말했다.
“화경이라니. 분명 이 정도로 우리와 차이가 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만우를 따라다니는 이 다섯 중에서 누가 더 강하느냐를 논하는 것은 사실상 의미가 없었다. 다들 종이 한 장만큼의 차이도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개중에서는 슌스케가 가장 뒤쳐지기는 했다. 제대로 된 스승 없이 무학보다는 실전 위주로 경험을 쌓았고, 외팔이가 되면서 만우의 가르침을 새롭게 깨달아 가는 중이었으니까. 하나 극쾌(極快)에 달하는 슌스케의 발도술은 그보다 강하다고 자부해도 까딱하는 순간 단박에 저승사자를 보러갈 수 있는 일격필살이었기에 상대하기가 쉽지 않았다. 언제 어떤 식으로 발도술이 목 줄기를 노릴지 알 수 없기에 신경을 끝까지 끌어올려야 해서 체력의 소모가 컸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 감령과 필두, 마익후와 문형일은 서로 간의 실력을 비교하는 것이 큰 의미가 없었다. 다들 그날 몸 상태가 어떠냐에 따라 승부가 매번 갈릴 정도로 근소한 차이들이었으니까. 한데 그들은 만우가 가르침을 친히 내리는 일검진천 야율태를 보면서 따라잡지 못할 정도의 차이를 실감하지는 못했다. 야율태는 확실히 그들보다 한 수 위의 고수였지만, 그렇다 하여 그 차이가 좁힐 수 없을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으니까. 고오오-! 하지만 지금, 지근거리에서 느껴지는 이 강렬한 기파는 그들이 감히 승리를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현격한 격차가 느껴졌다.
‘이것이 바로 화경과의 차이.’
막 화경의 초입에 오르고 있는 야율태에게서 느껴지는 차이가 이 정도다. 그러니 초절정과 화경은 그냥 글로 써서 보면 한 단계 차이였지만 그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일 것이다. 인간의 탈을 본격적으로 벗기 시작하는, 진정한 초인(超人)의 시작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부러워할 시간. 자라. 잠이나.”
마익후가 부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필두와 문형일에게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둘이 마익후의 뒤통수를 쳐다봤다. 중원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흑발과는 확연하게 차이가 있는 금발의 머리카락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야율태. 모르나, 보면? 강해지면, 우리가. 대장이, 만들어준다.”
마익후는 고개를 천막의 벽 쪽으로 돌린 상태에서 한 박자를 쉬었다. 정확히는 자신이 하려는 말에 어울릴 만한 표현을 고르기 위함이리라.
“화경.”
“!!!!!!!!!!!”
마익후의 말에 문형일과 필두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 보니 마익후의 말에 틀린 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야율태를 화경으로 끌어올려 준 사람은 바로 만우다. 물론 그러기 위해 야율태가 쌓아온 고된 시간이 있을 터이나 그러고도 계기가 없어 벽을 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는 이들이 수두룩하다. 한데 만우는 그 벽을 넘도록 야율태를 지도했다. 그렇다는 건 그들도 야율태 정도의 수준이 된다면 만우가 그들에게 가르침을 내려줄 수 있을 것이란 뜻이었다.
“대장 말. 듣는다 잘. 그러면 떡, 떨어진다.”
마익후는 하늘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하늘에서.”
*****
“저희와 함께 가셔도…….”
“됐다. 이게 본주의 일이니.”
석미도는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황공하다는 표정으로 만우를 쳐다봤다. 자신이 말 위에 앉아 있는데 만우가 말고삐를 잡고 있는 것이 영 이상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어제를 기점으로 석가장의 은인이 된 만우이니 그게 더더욱 이상했다.
“그럼 저도 이리 가겠습니다, 제일검.”
“사람 불편하게 하네, 진짜.”
만우는 석미도의 말고삐를 잡은 야율태를 보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야율태는 어제 본 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바뀌어 있었다. 피부에 흐르는 광택은 물론이거니와 겉모습이 서른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확 젊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울퉁불퉁하게 솟아올라 있던 근육이 줄어들어 호리호리한 몸이 되었고 키가 더 커졌다. 아마 야율태가 이립(서른) 쯤 되었을 때 바로 이런 모습이리라. 환골탈태. 어젯밤 깨달음을 갈무리하고 화경에 올라서면서 환골탈태를 겪으며 신체의 노화가 뒤로 미뤄진 것이다. 야율태의 진천검법에 걸맞는 몸으로 바뀐 것이기 때문에 오늘 다시 붙는다면 어제와는 아예 다른 양상이 될 것이지만, 만우는 그러지 않았다. 일정에 늦지 않기 위해 오늘은 움직여야 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제일검께서는 석가장의 큰 은인이세요. 그러니 꼭 석가장에 와주시어요.”
석미도는 만우에게 만점을 준 듯했다. 석소군의 명을 받아 검주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왔던 석미도는 만우가 마치 주인 없는 황금 덩어리처럼 보였다. 주인 없는 탐스러운 황금 덩어리이기는 한데, 그게 쉽게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기분이랄까. 그런 탐스러운 황금 덩어리를 품에 넣을 수 있다면 반드시 넣어야만 한다. 만우에 대한 석미도의 평가가 바로 그것이었다.
‘젊고, 강해. 사람을 단박에 사로잡는 마력도 있고.’
그 증거가 바로 야율태다. 만우는 야율태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아낌없이 제공하여 그의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았다. 비록 그 행위가 보상이 걸린 일이었다고는 하나 만우의 가르침이 무가지보(無價之寶)라는 것을 석미도는 의심치 않았다. 화경에 오를 수 있는 가르침이란 것은 억만금을 준다 하여도 석가장에서 단 한 번도 얻지 못 한 지재였기 때문이다.
‘또한 기개와 기백이 대단한 사내이고.’
개방 만이당의 당주인 취구개를 만우는 만나 주지도 않았다. 그가 무림맹의 입을 대변하는 이란 것을 알면서도 만우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만우의 모든 것이 긍정적으로 비춰지는 석미도에게는 그것마저도 강자의 기백과 기개처럼 느껴졌다. 더군다나 만약 만우를 석가장이 품을 수 있다면, 석가장은 무림의 그 어떤 대문파나 세가도 감히 따라잡을 수 없는 무력을 구가하게 될 것이다. 금력과 무력. 천자도 어찌 할 수 없는 강력한 권력이 석가장에 생기게 될 것이다.
‘제일검과는 무조건 긍정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돼.’
“저 여우는 어디에 또 꼬리를 치는 거야.”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방매가 중얼거렸다. 그러자 인간으로 둔갑해 있던 호선이 방매를 보면서 소맷자락으로 입가를 가리고는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어요, 언니?”
“아니. 우리 방매 동생이 이제 어엿한 처녀가 되었다 싶어서.”
“무, 무슨 말이에요 그게!”
방매의 얼굴에 금세 발갛게 물들었다. 간장이 옆에서 그런 방매를 흐뭇하게 쳐다봤다.
“나도 도와줄게. 형님도 마음이 없지는 않은 것 같…….”
퍽!
“뭐라는 거야!”
간장과 방매는 나이 차이가 두 살밖에 나지 않았다. 물론 간장이 방매보다 더 많았다. 하지만 방매는 간장의 옆구리에 발차기를 날리고는 씩씩 붉어진 얼굴에 손부채질을 했다.
“아, 아니. 내 말은…….”
“알았어, 알았어.”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지 않은 방매를 보면서 호선은 살포시 웃었다. 사실 방매 나이 정도면 누군가에게 연정을 품는 데 적은 나이는 아니다. 방매도 어느 덧 스물이었으니 말이다. 다른 평범한 여아 같으면 벌써 시집을 가서 아이를 낳았어도 진작에 낳았을 나이다. 허나 그 시기를 놓쳤고 파란만장하게 살아왔기 때문인지 방매는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에 능숙하지 못했다. 만우 역시도 그것은 마찬가지라 이 둘 사이가 지지부진한 것일지도 모른다.
‘한 번 나서 봐?’
호선이 속내를 숨기며 빙긋 웃어 보였다. 겉으로는 요조숙녀인 척 하지만 호선의 근본은 호랑이다. 그리고 호랑이는 심심한 것을 잘 참지 못한다. 그중에서도 호선은 특히 장난치는 것을 즐겨했다. 그간은 선주도 잃고 악선이 되지 않기 위해 매일 같이 치열하게 싸우느라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작지만 선주가 생긴 호선의 장난기가 동하는 데 방매와 만우만큼 적당한 먹잇감이 없었다.
‘흐흣.’
방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콩콩거리며 만우에게 다가가는 것을 보면서 호선이 입가를 가리고는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