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9. 잡것들의 오만 (1)2022.02.22.
“영락대전?”
“예, 폐하. 폐하의 지혜롭고 자비로운 치세를 널리 알리고저, 모든 공부의 기초가 되는 유서(類書)를 편찬하라 명하소서.”
“유서라.”
“세상 만물의 이치를 담고저 하시면 되실지언저…….”
영락제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카를 죽이고 황위에 오른 영락제는 황권에 유독 광적인 집착을 보였다. 때문에 옥좌에 오르면서 조카인 건문제의 사람들을 죽여 없앴고, 조카의 스승이자 당대의 저명한 학자이던 방효유의 십족까지 멸하면서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이들을 완전히 찍어 눌렀다. 그리고는 7학사에게 내각 정치를 맡기고, 그가 총애하는 승려 도연과 환관 정화 같은 이들과 함께 밀실 정치를 펼쳤다. 황위에 집착했던 영락제는 유구한 세월 속에도 잊혀지지 않을 자신만의 업적을 건설하는 것에도 집착했다. 그 때문에 영락제는 몸소 자신의 근거지였던 북평을 북경으로 이름을 고치고 그곳에 700채의 건물과 무려 9,999개의 방을 가진 거대한 궁을 지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를 위해 남경을 비우고 북경으로 옮겨와 아예 공사가 되는 것을 현장에서 지켜볼 정도였으니 그를 따라 대신들과 관료들이 터를 북경으로 옮겨야 할 정도가 되었다.
“폐, 폐하!”
그런데 그때 천자가 총애하는 환관이자 동창제독인 부로와 사이가 좋지 않은 정화가 허겁지겁 뛰어 들어와서는 봉두난발이 된 모습으로 황제로부터 100보가 떨어진 곳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무슨 일이더냐.”
천자는 소란을 떤 정화에게 근엄한 목소리로 연유를 물었다. 그러자 신하들 중 드물게 황제의 지근거리까지 올 수 있도록 허락을 받은 정화가 숨을 몰아쉬면서 조심스럽게 황제의 곁에 다가와 머리를 조아렸다.
“소신이 방금 망측한 풍문을 들어 감히 폐하께 고하고자 이리 급하게 뛰어왔나이다.”
“풍문?”
천자는 얼굴을 찌푸렸다. 작금의 천자의 황권은 가히 중원 전체를 뒤덮고도 남을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감히 천자에 대해서는 천자가 없는 곳에서도 입에 담지 못할 정도였는데 환관 정화가 이리 기겁하며 달려올 정도의 풍문이 돈다는 것에 불쾌함을 느꼈다. 그러자 정화가 조심스레 천자의 귀에 속삭였다. 그러자 천자의 눈이 커졌다.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 천자를 보러 연경에 가겠노라고. 그러니 성대하게 맞이할 준비를 하라.]
“크하하하핫!!!”
천자는 대소(大笑)를 터뜨렸다. 결국 천자가 머리를 굴려 해결하려 했던 무림인, 검주 만우란 자에 대한 계획이 어그러진 것이다.
“또한 동창제독 부로가 무림의 사특한 무리들과 머리를 맞대어 이 사실을 황상께 알리지 않고 무단으로 동창의 환관들을 움직였다 하옵니다.”
“호오…… 부로가 말이냐?”
“예, 폐하.”
천자는 재미있다는 듯 빙긋거리며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정화는 그런 천자 앞에서 고개를 조아렸다.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으나 언제 돌변하여 진노를 터뜨릴지 모르는 것이 바로 천자였기 때문이다.
“좋다.”
천자의 눈에 살기 어린 광망이 스쳐 지나갔다. 번왕으로 군사력을 키워가며 제 조카까지 죽이고 수천, 수만의 피를 흘려 지고한 자리에 오른 천자였다. 말 한 마디로 수만, 아니 수백만 만민의 생사여탈권을 틀어쥔 황제는 정화에게 말했다.
“금의위를 소집하라! 그리하여 북경의 문을 활짝 열어두어라! 그 누구도 그자의 앞길을 막지 말라 전하라! 그리하여 내 직접 짐의 두 눈으로 보고 두 귀로 들을 것이다.”
황명에 대전의 모든 이들이 머리를 처박았다.
“과연 짐 앞에서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지를.”
천자는 싸늘하게 웃었다. 연적찬위(燕賊簒位) 네 글자에 회유하려 했던 방효유의 입을 찢어 죽이고 구족을 멸하였으며 방효유의 지인들까지 가차 없이 쓸어낸 천자다. 천자는 진심으로 바랬다. 검주 만우, 감히 스스로를 천하제일이라 칭한 그놈이 제 앞에서도 그 말을 똑같이 해 주기를. 그리하여 그놈을 찢어 죽여 무림의 무뢰배들에게 감히 황궁은 쳐다보지도 못할 공포의 본보기가 되어주기를 말이다.
“크하하하핫!!!”
황제의 대소가 대전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 슈가가가각!!!! 진천의 검은 하늘조차도 가른다. 야율태는 진천검법의 구결을 머릿속으로 되뇌며 끊임없이 검을 휘둘렀지만, 진천의 검으로도 가를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만우는 전신을 난도질해 오는 검세 속에서도 마치 살랑이는 봄바람을 맞듯 태연자약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느릿느릿하게 움직이는 만우를 야율태의 검은 스치지도 못했다. 슈가가각!!! 야율태가 힘을 쥐어짜내며 검을 수십 번 만우를 향해 그었다. 하지만 만우는 그저 손가락을 들어 올려 눈부신 속도로 휘둘러져 오는 검을 너무나도 쉽게 옆으로 밀어낼 뿐이었다. 스윽. 우당탕!!! 야율태가 다시 한번 무언가에 딸려가듯 바닥을 굴렀다. 제 의지로 구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야율태의 팔과 다리에서 피가 배어나왔다. 하나 그 고통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는 듯, 야율태는 다시금 검을 쥐고는 일어섰다.
“하나 묻자.”
만우는 숨을 몰아쉬는 야율태를 보면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왜 음공과 검공을 따로 사용하는 거지?”
“그것은 검법에 그리 나와 있기 때문이오.”
만우에게 음공은 강하지 않았다. 본래 음공이란 것은 자신보다 높은 경지의 더 많은 공력을 가지고 있는 상대에게는 잘 통하지 않았다. 단단한 암석이라도 안부터 가루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것이 야율태의 진천검법이었지만 만우에게는 통하지 않은 이유가 그래서였다. 그래서 야율태는 공력을 많이 잡아먹는 음공은 사용하지 않고 검공으로만 만우를 상대하고 있었다.
“음공과 검공이 그리 나뉘어져 있어서?”
“그렇소.”
야율태의 검을 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공력과 체력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야율태의 눈에서 이글거리는 투지는 아직 꺾이지 않은 상태였다.
“그럴 리가.”
만우는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야율태를 보면서 피식 웃었다.
“자세히 풀어서까지 말해 줘야 하다니. 네놈, 그냥 몸으로 부딪치면서 배운 게로구나.”
“……검을 배울 스승께서 일찍 타계하셨소.”
“그래. 그게 보인다.”
야율태의 검은 확실히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진천검법은 상승의 절학이지만 야율태에게서는 상승 절학 특유의 현기보다는 오히려 살기가 더 짙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야율태가 스승에게서 차근차근히 가르침을 하사받은 것이 아니라 실전에서 몸으로 검법을 체득했기 때문일 것이다.
“법(法)과 로(路)는 쓸 만할 정도로 익혔다만 의(意)가 부족한 것이 그 때문일 터.”
만우는 석미도를 힐끗 쳐다봤다.
“검의(劍意)를 알려주어야 하니 더 비싸게 받아야겠다.”
“검주. 그대는 내 진천검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 의를 깨달았단 말이오?”
야율태가 눈을 크게 뜨고는 만우를 쳐다봤다. 안 그래도 야율태가 벽에 막혔다고 느낀 것이 바로 그 부분이었다. 검법서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그 안에 글로 설명된 것을 야율태는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하늘을 진동케 만드는 검, 진천검법. 야율태에게 그 안에 담긴 복잡한 깨달음과 뜻을 풀어서 설명해 줄 스승이 없었다. 살아남은 야율 씨 중에서도 그가 가장 고수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만류귀종이다.”
“…….”
“허니 한 번 받아 보거라.”
“무엇을 말이오?”
만우의 기세가 변했다. 동시에 야율태가 눈을 부릅떴다. 만우에게서 야율태의 눈에 익숙한 기수식이 보였기 때문이다.
“나의 진천검을.”
“무슨…….”
꽈르릉-!!!!! 야율태는 자신이 한 말을 끝까지 듣지 못했다. 만우가 기수식을 취한 순간 자신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거대한 우레 소리가 야율태의 목소리를 삼켜 버렸기 때문이다.
“아…….”
야율태는 자신 앞에 드러난 끝이 보이지 않는 하늘을 보면서 할 말을 잃었다. 그 하늘은 실시간으로 변화하며 품은 우레를 터뜨리기 위해 꿈틀거리고 있었다. 야율태는 그것을 본 순간 깨달았다. 진천검의 진의(眞意)를 말이다.
‘하늘을 울리는 검.’
야율태는 자신이 진천검을 대성했다 생각했다. 하나 대성했다고 하여 극의에 달한 것은 아니다. 야율태는 그것을 깨닫는 순간, 전율이 온 몸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진천검은 음공과 검공이 나뉘어져 있는 검법이 아닐 것이다.”
만우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울려 퍼졌다. 우레 소리가 귀를 멀게 할 것처럼 울려 퍼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율태의 귀에는 만우의 목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한데 그대는 그것을 엄격하게 나눠서 사용하고 있으니.”
하늘이 갈라졌다. 그리고 그 안에서 만우의 손이 부드럽게 휘둘러졌다. 그 순간 야율태의 두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콰르르르!!!! 쭉 하고 두 쪽으로 찢어진 하늘에서 만우의 손이 진동하면서 동시에 검기를 뿜어내며 휘둘러진 것이다. 일수(一手). 단 일수에 불과한 가르침이었지만 야율태는 머릿속에서 뇌전벽력이 치는 듯한 충격과 함께 그 자리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음공과 검공이 나뉘어진 것은 그저 수련하기 쉽게 임의적으로 나뉘어둔 것뿐이다. 하나 그것을 말해 줄 스승이 없었으니, 야율태는 음공과 검공을 합칠 생각을 하지 못하고 당연히 따로 사용해야 하는 줄 알았을 것이다. 전삼식, 후삼식으로 나뉘어진 그런 무공처럼. 하나 만우의 눈에는 그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하나로 귀결된다는 만류귀종의 말처럼, 만우의 눈에는 그런 진천검법의 진짜 모습이 야율태를 통해 언뜻언뜻 보였으니까.
“어찌하여 인간이 하늘을 전율케 하는 것을 그리 나눈 것으로 가능하다 생각했을까.”
만우는 가부좌를 튼 야율태를 힐끗 쳐다보고는 석미도에게 전음을 보냈다.
[가용 가능한 모든 이들을 불러 모아 호법을 서게 하라. 본주는 약속을 지켰으니.]
“핫!”
그 전음에 퍼뜩하고 정신을 차린 석미도가 제일표국의 표사들을 닦달했다. 만우와 야율태의 믿기지 않는 비무에 멍 때리고 있던 제일표국의 표두들이 가장 먼저 야유태의 곁에 날듯이 가서는 섰다. 그렇게 소란이 벌어진 석가장을 뒤로 한 채 만우는 일행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그런 만우를 다섯 명의 초절정 고수들이 뜨겁디 뜨거운 눈으로 쳐다봤다.
“뭐야. 눈들이 다 왜 그래.”
말수가 없는 그 마익후마저도 뭔가 강렬한 열망을 담은 눈으로 만우를 쳐다보고 있었다. 여인의 시선이라도 그렇게 쳐다보면 부담스러울 텐데, 사내들이 그리 쳐다보니 만우가 불쾌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안 해 줘 너희들은.”
“아, 대장님! 왜 그러십니까! 헤헤헤.”
감령이 쪼르르 나와서는 만우 앞에서 허리를 굽신거렸다. 만우는 간과 쓸개를 다 내놓을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들을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벽을 깨고 다음 경지로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은 무인들에게 있어 평생의 목표다. 진정한 무(武)를 추구하는 이라면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들보다도 강해지고 싶은 욕구가 더 크기 때문이다.
“밭이 비옥하고 실해야 뿌린 씨앗이 자라나지. 아직 너희들은 멀었어.”
만우는 혀를 쯧 하고 찼다. 그런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만우라고 해서 모래와 돌밖에 없는 밭에 뿌린 씨가 새싹이 나게 해 준 것이 아니다. 야율태가 그간 길러온 밭은 비옥하기 그지없었고 씨앗도 발아하기 직전의 상태였으니까. 만우가 한 것은 그저 그 발아하기 직전인 상태의 씨앗이 그 안에서 썩어 들어가기 전에 싹이 뚫고 나올 작은 구멍 하나를 만들어준 것에 불과했다. 아직 땅을 비옥하게 다지지도 않았는데 그 씨앗에 그런 구멍을 뚫어주면 오히려 그 안으로 더러운 것들이 들어가 썩기 십상이다.
“아 아프다.”
“그러게. 뼈 맞은 듯하네.”
“…….”
“부럽다. 저 고수”
문형일과 필두, 슌스케와 마익후가 부러운 눈으로 야율태를 쳐다봤다. 하지만 더 이상 만우에게 조르지는 않았다. 그들도 야율태를 보면서 느꼈기 때문이다. 같은 초절정이라고는 하나 야율태는 분명 그들보다 한 수 위의 고수라는 것을 말이다. 계기만 있으면 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야율태였다는 것을 말이다.
“아니 대장님. 그래도 대장이라면 해 줄 수 있는 것이…….”
빠악! 하지만 감령은 끝까지 포기하지 못하고 옆에서 집적댔다가 결국 뒤통수를 얻어맞고 개구리처럼 땅에 늘씬하게 쭉 뻗었다.
“이럴 시간에 나가서 손님이나 맞아라.”
“손님?”
“손님이라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대장.”
만우는 대답하기도 귀찮다는 듯 뒷짐을 척 치고는 휘적휘적 수레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서는 엉덩이를 턱 하고 걸치고 앉았다.
“난 움직여서 조금 피곤하니까. 손님은 너희가 모실 수 있을 만큼 모셔. 알았지?”
퍼드득!!! 만우가 한 말에 모두 영문을 모르고 있는 사이 야영지 앞으로 거적때기를 걸친 거지 하나가 새처럼 내려앉았다. 그 거지를 본 문형일의 눈이 커졌다.
“만이당(萬耳堂)?”
척!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공터에 내려앉은 하얀 백의를 입은 거지가 고개를 숙였다. 하얀 백의를 입었는데 거지인지 어떻게 아는지는 간단했다. 옷만 깨끗한 백의일 뿐, 머리나 꾀죄죄한 얼굴은 최소한 한 달은 씻지도 않은 몰골이란 것이 자명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 거지의 허리춤에 다섯 개의 결이 나풀거렸다. 오결개. 개방의 오결개라 함은 최소한 총타와 각 당의 당주급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다. 십만 거지들이 모여 있다는 개방에서도 일백도 안 되는 적은 수의 거지들만 오결을 허리춤에 달 수 있었다. 하얀 백의에 오결을 단 거지. 그것이 가리키는 이는 하나뿐이었다.
“취구개(醉狗丐) 만복?”
“괴검 문 대협이시구려. 반갑소.”
과연 개방으로 들어오는 모든 정보를 취합하고 분류한다는 만이당(萬耳堂)의 당주답게 그는 문형일을 한 눈에 알아봤다. 물론 문형일이 천축국 출신이기 때문에 생김새가 한 눈에 띈다는 것도 한 몫을 하긴 했을 것이다.
“괴권 마 대협과 옥면산군 감 대협, 필수교어 필 대협까지. 안녕하시오.”
만이당의 거지들이 익힌 무공은 경신법이 전부였다. 물론 당주급인 취구개 만복은 다를 터지만 만이당의 목적은 단 하나, 정보 수집과 지금처럼 사신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곧 개방의 입이자 무림맹의 입이었다.
“석 행수께서도 계신다 들었는데, 혹시 어디 계시오?”
“일이 있으시어 자리를 비우셨소.”
“허면 검주 대협꼐서는…….”
문형일이 나서서 만복과 대화를 했다. 하나 그렇다고 하여 경계심을 늦춘 것은 아니었다. 먼저 검주를 호송해가기 위해 황제의 칙서를 받고 주작단을 보낸 것은 바로 무림맹이었기 때문이다.
“그대가 오는 것을 알고 자리를 비우셨소. 그러니 내게 말하면 될 것이외다.”
문형일은 만복을 빤히 쳐다봤다. 만복이 만우를 보고자 하는 것은 그의 눈으로 직접 만우를 보고 소문의 진위 여부를 파악하기 위함일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만복은 무림맹에서 보낸 사신임과 동시에 이곳의 정보를 파악해내어 무림맹에 알리려는 간자이기도 했다.
“흐음. 곤란하구려. 맹주께서 이 서찰을 검주 만 대협께 전해드리라 하셨는데 말이오.”
“검주라. 그분의 검이 하늘에 닿았음을 듣지 못하였소? 개방이?”
문형일이 만복을 지적하고 나섰다. 이미 마교에 의해 검주의 무위가 무림십좌를 뛰어넘었다는 것이 소문이 난 것이 오래 전이었다. 더군다나 무림맹은 만우가 직접 나서 주작단을 쳐부숴 주면서 몸소 만우의 무위를 겪어 보았을 것이다. 한데도 검주라니. 무림맹에서는 아직도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그들만의 저열한 자존심을 내세우는 중이던가.
“대장께서 그대를 보고 직접 말을 전해 듣지 않은 것을 다행히 여기시오.”
“……알겠소. 내 유의하지.”
만복은 순순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이곳은 적지였고 그는 사신이었기 때문이다.
“서신이라. 무슨 내용인지는 아시오?”
“알다마다. 무림맹에서 격론을 거쳐 이 몸이 쓴 서신이니 말이외다.”
만복은 좌중의 일행을 한 눈에 스윽 하고 살폈다. 초절정임이 분명한 다섯 명의 고수의 기세는 과연 무시무시했다. 한데 그 뒤에 선 초로의 노인과 여인에게서는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만복은 그렇다 하여 그냥 자신의 감각만을 믿고 확언을 하는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만이당의 당주가 되기 위해서면 아무리 하찮고 보잘 것 없는 정보라 할지라도 그 안에서 유의미한 것을 찾아내거나 연결시키는 것이 필수였기에 신중함과 세심함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한데 저 두 분은…….”
만복은 초로의 노인과 그 옆에 선 여인, 척일과 척사영을 보면서 말끝을 흐렸다. 만복의 관심이 자신에게로 향한 것을 안 척일이 수염 사이로 슬쩍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장난기가 동한 것이다.
“내가 누군지 궁금한가?”
화아아악!!! 척일이 그리 말함과 동시에 만복의 눈이 커졌다. 순간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던 척일의 기세가 용트림을 하듯 거대해지더니 만복을 찍어 누르는 듯한 고산(高山)이 존재감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화아악! 하나 그것도 잠시, 고산이 어디론가 사라지더니 만복은 숨이 턱 하고 막히는 것을 느꼈다. 보기만 해도 자신을 빨아들일 것 같은 거센 대해의 와류가 부글거리면서 위용을 드러냈다. 후욱! 그러더니 이번에는 일만 이천봉을 담은 거대한 산세가 만복을 내려다봤다.
‘고…… 고수…….’
만복의 숨이 척일의 기세에 막히다 못해 숨이 넘어가기 바로 직전에 척일의 기세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빙긋.
“보았는가?”
“……어 ……어느 고인이신지…….”
만복은 당주급에게만 주어지는 취구환을 복용하고 개방의 장법인 옥룡팔장(玉龍八掌)과 취선보(醉仙步)를 익힌 일류급의 무인이다. 절정에 다다르기 바로 직전인 일류의 극에 달한 무인이라고는 하나 그의 경신법만큼은 완숙한 절정에 달해 있다고 해도 모자람이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들어도 모를 테지. 먼 조선에 있는 작은 무가 출신이니.”
“곡산…… 척가.”
“호오.”
척일이 재미있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설마하니 중원의 무인이 곡산척가를 알고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조선의 척가에서 무시무시한 고수들이 나온다는 것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세외에도 늘 우리는 귀를 닫지 않으니 말입니다.”
만복의 말이 공손해졌다. 무림인은 결국 모든 것을 무공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허니 만복이 자신으로서는 감히 측정할 수도 없는 경지에 오른 척일에게 공손해지는 것은 당연했다.
“허면 옆에 계신 분 역시…….”
척일이 척사영을 보면서 조심스럽게 묻는 만복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척가의 미래가 될 아이이지.”
“허어…….”
어려 보이기만 하는 척사영의 모습에서 만복은 도저히 고수의 모습을 연상할 수가 없었다. 하나 일류인 그가 전혀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그녀가 최소한 절정 이상의 고수라는 뜻이다. 만약 만복이 척사영이 화경의 고수란 것을 알았다면 거품을 물고 쓰러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한 문파에서 나오기 힘들다는 화경의 고수를 구석에 있는 작은 조선이란 나라의 무가에서 둘이나 배출한 셈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통성명이 됐으면 이 서찰의 내용이란 것이나 말하시오.”
문형일은 척일과 척사영에게 관심을 보이는 만복에게 말했다. 온갖 정보를 수집하는 만이당의 당주인 만복은 그만큼 강호의 야사에 관심이 많은 이였다. 그 때문에 또 까무룩 정신을 빼앗겼다가 퍼뜩하고 정신을 차린 만복이 문형일에게 말했다.
“맹주께서 검주…… 아니 천하제일검께 독대를 요청하시었소.”
“독대?”
“그렇소. 시기와 장소가 그 안에 들어 있으니 제일검께 전해주시면 되오.”
“알겠소. 그리 전하도록 하지.”
“그럼…….”
만복이 그 자리에서 그대로 물러서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척사영이 그간 입을 다물고 있다가 처음으로 입을 열어 만복에게 말했다.
“그대의 눈치가 비상하여 허튼 짓을 하지 않아 주변의 이들을 검하고혼으로 만들지 않았던 즉.”
슈가가각!!! 척사영의 좌검우도가 번쩍거리는 빛과 함께 잠시간 허공을 수놓았다가 다시 검갑과 도갑으로 돌아갔다. 만복은 그런 척사영을 보면서 입을 벌렸다. 그런 만복의 눈에 경악이 서려있었다.
‘화…… 화경……’
만복의 경지가 일류밖에 되지 않아 명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었다. 하나 척사영이 빼들었던 검과 도에는 선명한 검기(劍氣)가 일렁였다. 완숙한 경지에 다다른 검기는 검명도 나지 않고 검기 이전 단계인 검사(劍絲)보다도 보잘 것 없어 보인다는 것을 글로 읽어 알고 있었던 만복이다. 하나 보잘 것 없는 겉과는 달리 검기는 화경의 고수만이 낼 수 있는 가장 파괴적인 기운이다. 만복은 순간 척사영이 좌검우도를 빼드는 순간 자신의 몸이 저 검과 도에 난도질당하는 느낌을 받았다.
‘의기상인(意氣傷人), 검기.’
의지와 기운만으로 상대를 해칠 수 있다는 의기상인까지. 자신보다 어려 보이는 저 조선에서 온 여인은 자신보다 한참 윗줄에 오른 부정할 수 없는 절대고수였다. 그리고 무림맹에서 만복더러 가늠해 보라 한 뒤 결정하라며 동행케 하였던 척마단이 저 여인의 자비로 살아남았다는 것을 말이다.
“그 대가로 옷자락이 저들의 목숨을 대신하였음을 다행케 여겨라.”
후두두둑! 척사영의 차갑디 차가운 한 마디와 함께 척마단의 옷고름이 동시에 잘려 나갔다. 저 정도로 검기를 다룰 수 있다 함은 겉으로 보이는 나이만으로 절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강철도 가를 수 있는 검기로 피륙에는 생채기 하나 내지 않고 정확하게 옷고름만 잘랐다는 것에 만복은 머리끝까지 닭살이 돋는 것을 느끼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무림맹의 저열한 속내는 잘 알았다 가서 전하라. 은공께서 직접 무림맹에 가실지 말지는 아직 정하시지 않으셨음도.”
검주 만우가 무림맹에 온다. 그 의미를 알아들은 만복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만복은 그 자리에서 큰 소리를 내지 않고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애를 썼다.
“무, 무림맹을 상대로 겁박하는 것이오?”
만복의 말끝이 저절로 떨려나왔다. 천하제일인인 만우가 무림맹에 이 일로 찾아온다는 이유는 단 하나뿐이다.
‘응징.’
사신으로 오면서 무림맹의 무력 집단 중 하나인 척마단을 끌고 왔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귀책 사유가 충분하다는 뜻이다. 그러니, 그 무력의 끝을 감히 측정할 수 없는 검주, 만우와 조선에서 온 화경의 고수가 함께 무림맹에 온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재앙이다.
“겁박?”
척사영은 눈을 치켜떴다. 그러자 만복이 자신도 모르게 한 발자국 물러섰다. 자신의 한 마디가 저 젊은 절대고수의 심기를 거스른 것이 아닌가 하고 덜컥 겁이 난 것이다. 하나 척사영은 이미 한 번 넣은 검과 도를 다시 빼들지 않았다. 그저 흑옥을 박아 넣은 것 같은 눈으로 만복을 쳐다봤을 뿐이다.
“강호무림이란 곳에서는 힘이 모든 것을 말해 준다 하였다. 내 은공께 그리 들었음이니.”
만우가 고개를 주억거리는 것이 척사영의 눈에 보였다. 척사영은 그런 만우를 보고는 살풋 웃었다. 그러자 가지런한 백자 같은 치아가 드러났다.
“그러지 못할 이유가 있는 것 같은가?”
“…….”
만복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척사영은 그런 만복을 붙잡지 않았다. 만복의 눈빛에 서린 공포를 그대로 읽어 냈기 때문이다.
“무림맹이라. 이거 점점 더 일이 커진다. 안 그러냐?”
“아니.”
감령의 걱정 섞인 말에도 문형일은 태평하게 대답했다.
“이게 대장이지.”
문형일은 수풀 속에서 옷고름이 잘린 채로 옷자락을 부여잡고 일어서는 척마단이 멀어지는 것을 보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대장이 돌아왔다는 뜻이지. 중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