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7. 말리려는 자, 막으려는 자 (1)2022.02.15.
황상의 분노가 눈앞에 보이는 듯했기 때문이다. 황상이 진노하면 반드시 사람이 죽어 나갔다. 그것이 자신이나 앞에 있는 부 공공이 아니란 법은 없었다.
“제 아무리 날고 기어 반선이 되었다 하더라도 대명군 십만이면 잡지 못할 놈이 없을 지어다. 허니 그리 황상께 고하여야겠다.”
부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자 환관이 그런 부로를 급히 말렸다.
“하나 그것을 황상께서 믿으시겠습니까.”
“너는 황상을 그리 가까이 뫼시면서도 황상을 모르는구나.”
부로는 환관을 보면서 혀를 쯧 하고 찼다. 환관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부로를 올려다봤다.
“예?”
십만이다. 환관은 일개 무림인 하나를 상대하기 위해 십만의 대명군을 준비시켜놔야 한다는 것에 영락제가 당연히 분노할 것이라 상상했다. 하지만 부로는 오히려 얼굴에 화색을 띄고 있었다.
“황상께서는 확실한 것을 좋아하시는 분이시다.”
“그, 그것이야…….”
환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런 것은 그 어떤 황제가 그러하지 않으랴. 대명의 정점으로 지존에 오르신 황상께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검주 만우를 사로잡는 데 고작 십만이라면, 황상께서는 주저치 않으실 것이다. 검주는 무림의 역사를 새로이 쓰고 있는 자이니.”
사서(史書)에 한 줄을 그을 수 있다는 것. 그런 흥미롭고 재밌는 일에 황상이 어찌 나서지 않을까. 부와 권력을 한 손에 쥔 대명의 지존께서 가장 관심이 있어 하는 것은 더 큰 부와 권력이 아니다. 명예. 그 명예 중에서도 으뜸은 생전이 아니라 사후에 사람들의 입에서 이름으로 오르내릴, 역사에 족적을 남기는 것이다.
“하나 내 유일한 걱정은.”
부로는 그렇게 생각하며 환관을 쳐다봤다. 환관은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는 표정으로 부로를 쳐다봤다.
“부디 검주가 십만 대명군 앞에서 역사를 새로 쓸 만한 신위를 선보이기를 바랄 뿐이다.”
십만. 부로는 그 십만 대명군 앞에 검주가 헛되이 무릎을 꿇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야만 황상의 여흥을 채워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가자.”
부로가 명천자가 머무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천하제일검(天下第一劍)] 석소군의 표정이 변했다. 그의 화후는 한층 더 깊어졌다. 황금신공이 6성을 넘어 7성에 다다른 것이다. 그런 석소군이 황금신공을 연마할 때마다 들어가는 황금이 금병으로 백 개가 넘었다. 어쨌거나 그로 인해 한층 더 안정된 기세를 지니게 된 석소군의 주변으로 공력이 발출하며 바람이 일었다.
“천하제일검이라니…….”
그의 호위인 적포쌍검 온소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하나 이 소문의 진원지는 예전처럼 호사가들의 입을 통해 퍼진 것이 아니었다. 천마신교. 그곳에서 흘러나온 이야기였기에 그 진위를 의심할 수조차 없었다. 그들이 검주 만우를 천하제일검이라 인정했다는 것은, 마교에게 있어서는 수치일 수밖에 없는 소문을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일패 혈세천마. 곡왕 부고야. 마존 남요명. 그 외의 천마대와 진혼대의 고수들. 이들이 검주 개인에게 패퇴당했고 몰살당했다는 것을 인정한 셈이었기 때문이다.
“행수 석중이 심양에서 그와 조우하였다…….”
“행수 석중의 휘하에 있는 수중이란 막내 행수가 검주의 동행인과 친분이 있다 합니다. 한데 그 동행인이…….”
“옥면산군 감령.”
“예. 주군.”
온소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옥면산군이 대체 누구던가. 녹림칠십이채를 호령하는 대채주이자 녹림의 희망이라고까지 불리던 초절정의 고수다. 한자루의 도(刀)를 다루는 기예가 사림곡의 도주(刀主)의 뒤를 이을 수 있다는 이야기까지 나오던 이였다. 그런데 그런 옥면산군 감령이 검주 만우를 따르고 있다?
“뱀의 머리보다 용의 꼬리가 좋은 모양이군.”
“본래 녹림과 검주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은 알려져 있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검주가 받아들였다?”
석소군은 고개를 갸웃했다. 쉬이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석가장의 정보는 틀리지 않는다. 개방, 하오문과 황실까지. 막대한 금력으로 한 군데에서만 정보를 받는 것이 아니라 세 군데에서 모두 정보를 받아 교차 확인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어찌하면 좋을꼬.”
석소군은 무림에 거대한 폭풍이 이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고는 팔짱을 꼈다. 무림은 엄청난 돈이 되는 거대한 시장이다. 한 땅에 두 개의 나라가 있는 형국이지만 황실과는 또 다르게 석가장이 무림을 통해 벌어들이는 수익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보신하는 데 돈을 아끼지 않는다. 그 보신(保身)이라 함은 먹는 것부터 시작해 입는 것, 사용하는 것, 사는 것까지 종류를 가리지 않는다. 대개 무림의 문파들은 본래 그 지역의 유지이거나 토족인 경우가 많기에 그들이 쌓아올린 부 역시 석가장을 통해 요긴하게 쓰인다. 허니 석가장의 장주로서 석소군은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천하제일인의 무림출도가 불러일으킬 폭풍에 어느 쪽 바람에 몸을 싣는 것이 도움이 될지 결정을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주군. 설마 검주에게 걸어 보시려는 겁니까?”
온소는 고민하는 석소군을 보면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석소군은 손가락 하나로 거대한 문파 하나가 휘청일 정도로 막대한 자금력을 움직인다. 그렇기에 그의 행보는 늘 신중했다. 석가장의 자금력이 중원의 판도를 뒤집을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상인의 특성상 어떠한 곳과 특별히 연을 깊게 맺거나, 다른 곳과 얼굴을 붉히려 하지 않으려 늘상 심혈을 기울였다. 한데 석소군이 고민을 하고 있었다. 온소가 보기에는 뻔한 결과를 놓고 말이다.
“천하제일검, 마교에서 이를 보증하고 나섰음이 어떤 것을 뜻하는지 모르는가?”
온소는 무림인이다. 그렇기에 석소군이 생각하는 것처럼 깊고 넓게 생각하지는 못한다. 하나 스스로가 무림인이기에 그가 보기에는 답은 간단했다.
“한 손으로 열 손을 감당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게 이 무공으로 알고 있었네.”
석소군의 손가락 끝에서 황금신공의 공력이 어른거렸다. 황금신공의 공력은 이름이 걸맞게 눈부신 황금색이었다.
“이것을 내가 느끼지 전까지는 마교나 천하제일검에 대해 오히려 무지하였을 것이네. 하나.”
석소군은 온소를 쳐다봤다.
“오히려 이 공부를 시작하고 나니 그들이 얼마나 무서운 자들인지 잘 알았네. 그리하여 고민하는 것이네.”
천하제일(天下第一). 중원은 넓고 거대한 땅이었다. 그리고 그 넓고 거대한 땅에 무림인들의 수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리고 그만큼의 많은 무공들이 존재했다. 한데 그들 중 그 누구도 천하제일(天下第一)을 자부하진 못했다. 아니, 감히 그럴 수 없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런데 천하제일이 나왔지. 그것도 천마신교의 입에서.”
천하제일이라 칭하는 이가 나올 수 없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이 세상의 모든 무공에는 파훼법이 있고, 늘 개인이 자부하는 것보다 더 나은 다수와 실력자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설사 마교의 교주였던 혈세천마조차도 스스로를 천하제일이라 칭하지 못했다. 일패(一覇)라 하나 무림십좌 중 가장 뛰어나다는 것이었지, 넓고 끝이 보이지 않는 땅인 중원의 최고(最高)를 자부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한데 그런 천하제일이 등장했다. 그것도 일패를 품었던 천마신교, 마교의 보증으로. 강자존의 율법을 숭상하며 일개 조직으로서는 가장 강력하다 일컬어지는 그 자존심 높은 마교의 입에서 천하제일검이 논하여졌다.
“하나 그가 천하제일이라 하여 황상을 이길 수는 없을 것이옵니다.”
온소가 석소군의 말에 반박했다. 석소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
천자가 아니었다면 석소군은 검주의 필승을 점쳤다는 뜻이다. 온소는 대체 자신이 보지 못 한 무엇을 석소군이 봤는지 궁금했다.
“산해관을 지나쳐 연경으로 오고 있다지?”
“예, 주군.”
“황실에서 어떤 식으로든 움직임을 보일 것이다. 무림맹에서도 나설 것이고.”
무림맹에게는 정파의 기둥으로서의 자존심이 걸린 일이다. 무려 황실에서 내린 황명이 있기 때문이다. 한데 주작단이 심양에서 검주에 의해 처참하게 깨졌다. 그렇기에 이미 한 번 오물을 뒤집어 쓴 무림맹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무림맹은 반드시 먼저 나설 것이다.
“미도를 보내라.”
“주군!”
온소가 놀라서는 석소군을 보면서 목소리가 커졌다. 석소군은 온소를 보고는 신기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 놀라기도 하는구나.”
“주군께서는 검주에게 원한이 있으시지 않으셨습니까!”
황금신공을 익힌 석소군의 눈에서는 만우에 대한 그 어떠한 원한도 보이지 않았다. 황금신공을 익힌 이유 자체가 두 번 다시 그런 무인들에게 무릎을 꿇지 않기 위함이라 온소는 알고 있었다.
“그렇다. 한데 그게 왜?”
“그…….”
“갑자기 태도가 바뀌어서 그러느냐?”
온소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무언의 긍정이었다. 태생이 무인인 온소는 그런 석소군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하나 석소군에게 이런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검 앞에서 꺾인 금력을 수도 없이 봐왔고, 몸소 체험도 한 상인의 핏줄이 흐르는 석소군에게 필요에 따라 적과 손을 잡는 것은 일도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상대는 천하제일인이다.
‘검주도 꺾지 못했다. 한데 천하제일검을 꺾을 수 있을 것인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천자와 무림맹이 움직이면 천하제일검을 꺾을 수 있을 것인가?’
검주가 무림십좌의 말석일 때에도 홀로 중원을 독보하는 그를 그 누구도 꺾지 못했다. 한데 그보다 훨씬 더 강해져 달마와 장삼봉에 비견이 되는 경지에 오른 검주를 과연 황실과 무림맹에서 꺾을 수 있을까?
‘대명군을 동원한다면 가능하나.’
석소군은 철혈과 무정으로 유명한 작금의 황상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금력과 통치는 떼려야 뗄 수가 없는 관계기에 석가장은 황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석소군은 황제를 몇 번 알현하여 그를 독대한 적이 있었다.
‘황실의 수치 때문에 황상이 불명예를 감수할까?’
고작 한 명의 무인에게 황실이 수치를 입었다는 것 자체도 이미 황실의 명예가 땅에 떨어진 상황이다. 한데 땅에 떨어진 명예를 복구하기 위해 일개 무림인 하나를 상대하는 데 대명군을 동원한다? 그것이 곧 황상이 권력을 이용해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로 개인을 핍박하는 것과 무에 다르단 말인가. 그것 역시 명분이 없기에 황제의 명예가 바닥에 떨어지는 것은 마찬가지다.
“미도를 보내 검주를 만나보라 하라. 그리고 결정은 그 아이에게 맡긴다.”
“주군!”
석미도는 석소군의 조카다. 하나 재색이 뛰어나 석소군이 차기 후계자로 점찍어 놨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특히나 석미도는 사람을 보는 눈이 발군이다. 비록 석가장과 검주의 인연이 좋지는 않다고 하나, 그런 사소한 것에 사로잡힐 속 좁은 아이도 아니다.
“따로 황실에도 사람을 보내라.”
“……예?”
“온소야.”
“예, 주군.”
석소군은 수염을 쓰다듬었다. 잘 정리된 수염이 까끌하게 손가락에 휘감겼다.
“우리에게 화경의 고수가 나오기 전까지, 우리는 토끼다. 석가장은 토끼굴이고. 허니 당연히 굴을 여러 개 파 둬야 하지 않겠느냐?”
“허, 허면…….”
“구명줄은 쥐고 있어야지.”
오싹 온소는 석소군의 얼굴을 보면서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석소군은 만약 일이 틀어지게 된다면 조카인 석미도를 버리겠다고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석가장이란 이름을 지키기 위해 석소군의 거쳐 온 수라가 어느 정도인지, 온소는 감히 짐작할 수도 없었다. 하나 이럴 때마다 석소군이란 사람이 두려워지는 것은 당연한 본능이었다.
“무림에 불어오는 폭풍이라…… 그것을 어찌 황금으로 만들지 고민해야겠다. 행수들을 모조리 소집하라.”
*****
“무림맹과 황실이 검주를 위해 손을 잡았다?”
“예. 곡주.”
사림곡주인 독왕 중백약이 재밌겠다는 듯 웃었다. 그는 신비문파인 독곡(毒谷)의 곡주이자 독공으로 화경에 오른 고수로 무림십좌의 일원이기도 했다. 또한 독과 암기로 유명한 사천의 당가를 제치고 독공으로 화경에 올라 사천당가의 콧대를 눌러준 장본인이기도 했다.
“흐음…….”
그는 냉철하기가 뱀 못지않았고 잔혹하기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다섯 살배기 아기도 독수로 만들어 버릴 정도였다. 특히나 그의 절기인 독황신공(毒皇神功)은 200년 전 절대고수이자 독곡의 시조였던 독황의 절기를 그대로 이어 받아 독으로는 무림 으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뛰어났다.
“철권 교수를 불러오라.”
“예, 곡주.”
군사인 설중사 돈극이 갈색 의복을 입고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러자 잠시 후 기린대주인 철권 교수가 들어와서는 허리를 숙였다.
“곡주를 뵙습니다.”
“철권. 요새 쉬고 있다지?”
“크흠…….”
기린대와 함께 조선으로 넘어갔지만 아무런 소득도 없이 돌아온 탓에 철권은 요직에서 밀려 한직 생활을 하고 있던 도중이었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기에 교수가 불편하다는 듯 헛기침을 하자 사림곡주가 피식 하고 웃었다.
“조선에서 검주를 보았다지?”
“예.”
교수는 곡주가 자신을 부른 이유가 그것 때문일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교수는 마교발(發) 소문을 믿지 않는 사람 중 하나였다.
“천하제일검, 맞다고 보는가?”
독왕 중백약은 혈세천마가 죽었다는 것에 기뻐했다. 혈세천마가 무림십좌의 으뜸인 일패에 올랐던 이유는 단지 자신보다 나이가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왕 중 하나로 거론이 되는 것도 중백약에게는 기분이 나쁜 일이었다. 자신의 독공이야말로 천하제일이라는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독공 아래에서는 제 아무리 마교의 교주인 혈세천마라 할지라도 중독되어 칠공으로 피를 쏟고 죽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한데 한 명은 사림곡주고, 한 명은 마교의 교주이니 섣불리 실력을 겨뤄 볼 기회가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나이가 많아 먼저 화경에 오른 그가 일패가 되고, 자신이 이왕 중 하나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이제, 중백약은 자신이 무림십좌의 으뜸이 될 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닙니다.”
교수가 봤던 조선에서의 만우는 진인의 경지에 도달하기 전이다. 그러니 당연히 교수는 검주가 현경에 올랐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현경의 경지가 무슨 애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어찌 그 짧은 시일 내에 그 어린놈이 현경에 도달한단 말인가. 그 나이에 화경에 올라 아무런 세력이나 문파도 없이 무림십좌의 말석을 차지한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다. 그렇기에 교수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검주가 화경의 고수란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그의 나이와 제가 상대했을 시의 무위를 생각해 보면 불가능하나이다.”
“그런가. 소문이란 말인가.”
“그의 곁에 괴검과 괴권, 그리고 옥면산군과 필수교어가 따르고 있었나이다. 또한 검주가 화산과 돈독한 관계라는 것은 모르는 이가 없지 않사옵니까?”
“소문이 조작되었다?”
“검주의 실력이 출중한 것은 분명 사실이나 조력자가 있을 것이옵니다.”
마교의 이름으로 그들은 만우가 천하제일검이라 공표했다. 하나 사림곡도 그 대단한 마교에 뒤지지 않는 사파의 중심이다. 때문에 그들은 마교의 말을 믿지 않았다.
“군사.”
“예, 곡주.”
사림곡주의 지낭인 설중사(舌中死) 돈극이 허리를 굽혔다. 사림곡주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보이는 그는 무림맹의 제갈명공과 마교의 마군자 마원과 쌍벽을 이루는 귀계와 모사의 달인이었다. 사림곡의 뼈대를 이루는 서량돈가의 가주로 독왕 중백약이 사림곡주가 될 수 있었던 것에는 그의 뛰어난 독공이 있다 알려져 있었으나 곡주 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데에는 서량돈가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어찌할까?”
“만에 하나 검주가 소문대로 현경의 경지에 올랐다면 나서지 않으셔야 합니다.”
“현경. 달마와 장삼봉, 천마가 올랐다는 그 경지?”
중백약은 껄껄거리며 웃었다. 무공을 익혔기에 중백약은 그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말인지 잘 알고 있었다. 현경. 화경에 오른 중백약은 화경에 오르자 또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전까지는 정저지와(井底之蛙)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렇기에 중백약은 단 하루도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이립도 되지 않은 검주가 현경에 올랐다?
“달마와 장삼봉, 천마 그 중 그 누구도 그 나이에 현경에 오르지 못했다. 한데 군사, 군사는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남겨 놓아야 한다는 말인가?”
돈극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최악의 최악, 그것을 상정하는 것이 속하의 일이옵니다.”
“돈극, 너는 머리가 좋은 대신 너무 신중하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는 것이 곡의 안살림을 맡는 네게 나쁘다는 것은 아니나, 이 독왕을 너무 의심하는구나.”
“아닙니다, 주군. 어찌하여 속하가 주군을 의심하겠나이까.”
“그렇다면.”
독왕 중백약이 몸을 일으켰다. 교수는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중백약의 기세가 얼마나 충천했던지, 그가 움직이는 것만으로 독기가 뻗쳐오는 듯했기 때문이다.
“일패와 곡왕이 죽었다. 허니 이왕 중에는 나만 남았구나. 그러니 이 내가, 으뜸이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속하는 황실과 연락을 취하겠나이다.”
“좋다. 무림맹의 위선자들에게 모든 이득과 영예를 넘겨줄 필요가 없으니.”
독왕 중백약이 히죽 웃었다.
“연경으로 갈 것이다.”
만우가 심양에 도착하기 이전에 사림곡에서 오간 이야기였다. *****
“음?”
설미수는 고개를 갸웃했다. 산해관부터 연경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쉬어 갈 만한 마을이 하나도 없었다. 명의 중심인 황제가 기거하는 연경 바깥의 모든 민가들을 치워 버렸기 때문이다. 하나 터는 남아 있어서 그 터를 야영지 삼아 노숙을 해왔는데, 눈앞에 터가 있어야 하는 곳에 천막이 쳐져 있고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통사, 통사.”
설미수는 통사, 그러니까 역관을 불렀다. 그러자 뒤에서 따라오고 있던 문형일이 걸어 나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저 앞에. 보이는가?”
“흠…….”
문형일은 아미를 좁히고는 공력을 끌어올렸다. 그렇게 안력을 돋구자 저 멀리 설미수가 본 것이 눈에 들어왔다.
“석가장.”
“석가장? 중원 최대의 부호를 말하는 겐가?”
“예, 어르신.”
문형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앞에 ‘石’자가 쓰인 기가 크게 나부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미수의 말고삐를 잡고 맨 앞에서 걸어가던 만우가 피식 하고 웃었다.
“석가장이라.”
“왜, 왜 표정을 그렇게 짓는 겝니까, 은공.”
설미수는 만우의 표정을 보고는 불안한 듯 물었다. 보아하니 만우가 중원에서 그리 썩 좋은 인연들을 만들어 놓고 다닌 것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황실과도 충돌을 일으켜 황제가 칙서를 보내 만우를 압송해오라 했을까.
“예전 생각이 나서 그랬습니다요, 나리.”
만우는 악동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를 보는 순간 설미수는 깨달았다. 이 역시도 악연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온 것이다.
“엥?”
그런데 그때 만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설미수가 저 멀리 앞을 바라보자 ‘石’이라 쓰인 깃발 옆에 흰 기가 같이 나부끼고 있었다.
“웬 백기?”
백기를 들었다는 것은 투항을 하겠다는 의미이거나, 대화가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전장에서 백기를 단 사신을 보내는 경우는 그리 드물지 않았으니까.
“무조건 싸우자는 말은 아니란 소리인데…….”
“싸움이라니. 그 무슨 망측한! 연경으로 들어가는 길에 감히 누가 싸운단 말입니까 은공!”
설미수가 그 자리에서 팔짝 뛰었다. 만우는 볼을 긁적였다.
“그러기에는 오는 내내 한 번씩은 꼭 싸웠습니다요, 나리.”
“그…… 그건…….”
설미수가 고개를 흔들었다. 어찌되었건 간에 연경으로 가는 길에 불미스런 일이 생겨서는 안 된다. 이 길은 황제에게로 향하는 길이기에, 부정한 일이 일어났다가는 연경에 가서 또 어떤 고초를 치르게 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저들이 싸우자는 것은 아니지요? 그러면 됐습니다.”
설미수는 만우에게 간청을 하듯 말했다.
“허니 제발 이번만은 참아 주십시오. 적어도 연경에 들어가기 전까지면…….”
“그런데 말입니다, 나리.”
만우가 설미수의 말허리를 끊었다. 만우는 일개 역졸의 신분에 불과하나 사행단의 으뜸인 설미수의 말허리를 막 끊어도 뭐라 할 사람 하나 없었다. 실질적인 이 무리의 우두머리는 만우였기 때문이다. 그에 설미수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꼭 다물었다.
“이 미천한 놈이 심양과 산해관에서 한 것을 보고도 정말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 생각하시는 겝니까요?”
“…….”
설미수의 입이 콱 하고 틀어 막혔다. 누가 먹던 감자를 밀어 넣은 것처럼 설미수는 입 안이 뻑뻑해져서는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랬다. 이미 만우는 산해관에서 다른 이도 아닌 천자에게 선전포고를 때린 남자다. 그 말이 분명 연경까지 가 닿았을 것이다. 산해관에서 연경 쪽으로 전서구가 나는 것을 설미수조차도 여러 번을 봤기 때문이다. 허니 당장에라도 천자가 황명을 내려 대명군을 몰아 이들을 죽이러 와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 그…… 그그…….”
“저기 부사 나리 보십쇼. 얼마나 의연하십니까.”
만우는 턱짓으로 동군영을 가리켰다. 설미수는 제정신이냐는 얼굴로 만우를 쳐다봤다. 동군영은 의연하다기 보다는 모든 것을 포기한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오는 내내 틈이 날 때마다 만우가 동군영에게 검을 가르쳐준다면서 닦달을 했기에 눈 밑에 검은 자국이 진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사람이 아닌 산송장에 더 가까운 모습이랄까. 그런 와중에도 동군영은 자신을 불렀다는 것에 반응을 하여서는 설미수를 쳐다봤다. 그리고는 동군영이 흐릿하게 웃었다.
“포기하시면…… 편해지십니다, 어르신.”
“…….”
설미수는 바들거리며 떨리는 동군영의 손을 쳐다봤다. 말의 고삐조차 제대로 잡지 못할 정도로 만우가 동군영을 몰아붙였기 때문이다. 그 효과 덕분인지 그래도 설미수의 눈에는 동군영이 휘두르는 검로가 제법 괜찮아 보였다. 물론 만우는 그런 동군영을 볼 때마다 구녕, 구녕 거리면서 한숨을 내쉬곤 했지만 말이다.
“그러니 나리도 한 수 배우시렵니까?”
“저, 저도 말입니까 은공?”
만우가 은근하게 물어오자 설미수가 기겁하면서 만우를 쳐다봤다. 그리고는 고개를 열심히 가로저었다.
“모, 몸이 많이 연로하여 배울 수 있는 것이 없을 듯합니다. 게다가 가면 할 것도 많으니 몸을 움직였다가 주상전하의 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까 걱정이 되어…….”
“흠. 그런가요?”
만우의 얼굴에 아쉽다는 기색이 스쳐지나갔다. 설미수는 그것을 보면서 못 한다고 한 자신의 결정에 확신을 가졌다. 아마 승낙했으면 동군영의 꼴이 되었을 것이다. 동군영처럼 자신이 젊다면 모를까, 이 나이가 되어서 무슨 한 수를 배운단 말인가.
“눈 먼 검이 날아오지 않게 조심을 해야겠군요.”
“눈 먼…….”
“아. 절 벼르고 있는 게 황제만이 아니라는 건 알고 계시죠, 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