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5. 천하제일인, 천하제일관을 무릎 꿇리다(1)2022.02.08.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 산해관(山海關)은 주변 둘레가 10리가 넘는 사각 요새다. 요새답게 성벽의 높이는 46자(尺)나 됐고 성벽의 두께만 23자였다. 또한 산해관이란 이름답게 산과 바다에 걸친 긴 만리장성의 관문 중 하나로 남쪽의 성벽 끝이 바다와 맞닿아 있었고 북쪽의 성벽은 산을 휘감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만리장성의 시작점이 바다와 맞닿아 있어 노룡두(老龍頭)라 불리는 곳이기도 했다. 그 산해관의 동문인 진동문(鎭東門)의 위에는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동쪽에서 육로로 연경으로 가기 위한 마지막 관문인 산해관. 그 산해관이 눈에 들어오자 동군영이 설미수에게 말했다.
“설 대감님. 산해관입니다.”
“나도 보고 있네.”
“그냥 이대로 가도…… 괜찮겠습니까?”
천하제일관이란 뜻은 두 가지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하나는 그 어떤 외적도 통과시키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고, 다른 하나는 천하제일(天下第一)인 중원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관문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우리는 주상전하의 명을 받은 사행단이네. 저들이 어찌 나오든 간에, 사행단으서의 품위를 잃지 마시게.”
설미수는 단호하게 그리 말했다. 이미 심양태수 앞에서 한 번 자존심을 세웠던 설미수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 자존심을 다시 꺾을 수는 없다. 말마따나 그들은 조선을 대표하는 사행단이니 말이다. 아무리 명보다 작은 소국(小國)이고, 명을 사대한다고는 하나 그렇다 하여 조선이 명의 속국이란 뜻은 아니다.
“예, 대감.”
동군영은 심지가 굳건한 설미수를 보면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의연한 설미수를 보니 초조하던 자신의 마음도 차분하게 가라앉는 듯했기 때문이다.
“저기 근데 말입니다요 나리.”
사행단의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다. 그 때문에 만우는 설미수가 탄 말 옆에서 고삐를 붙잡고 터벅거리며 설미수를 쳐다봤다.
“예, 은공.”
이 사행단에 믿을 수 있는 기둥은 만우 하나뿐이다. 설미수는 공손하게 만우의 말을 받았다.
“만약 심양에서처럼 저들이 군사를 동원하여 압박하려 한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요?”
“…….”
심양에서 산해관으로 분명 기별이 갔을 것이다. 심양태수는 사행단이 그냥 심양과 요녕성을 통과했다는 것을 알리지 못할 테니 말이다.
“뒤에서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군사들이 따라오는데 말입니다.”
“뒤에서요?”
만우의 말에 설미수가 놀라서는 뒤를 바라봤다. 하지만 설미수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옵니다. 분명히.”
“그러고 보니 어제부터 단 한 명도 우리를 앞지른 자들이 없었습니다.”
동군영이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끼어들면서 말했다. 그러자 설미수의 얼굴이 굳었다.
“추격대인 듯합니다.”
“한데 땀 흘리고 피 흘리는 일은 산해관에 맡길 모양입니다요. 저 거리만 유지한 채 다가오질 않습니다.”
만우는 뒤를 힐끗 쳐다봤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만우에게는 분명히 느껴졌다. 군기(軍氣). 하나의 목적으로 훈련을 받은 군대가 발산하는 그 군기가 저 너머에서 느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텅-.
“어쩐지 관도에 사람이 적다 했습니다만.”
설미수는 무거운 얼굴로 산해관의 관문까지 이어진 긴 관도를 보면서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산해관이 관문이라고는 하나 여진과 명, 조선을 오가는 행상인들이 들리는 곳이었기 때문에 유동인구가 많은 편이었기 때문이다. 한데 그 행상인들이 지금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관도 위에는 쥐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대감.”
“일단은 가보는 수밖에 없네.”
연경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무조건 산해관을 넘어야 한다. 여기까지 와서 다른 길을 선택해 돌아갈 길도 없었다. 모든 연경으로 들어가는 길은 결국 산해관을 통과해야만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면 험준한 산 속으로 들어가 장성을 넘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렇게 장성을 넘어 버리면 그 순간부터는 사행단이 아니라 명에 침입한 침입자가 된다. 다각, 다각, 다각 설미수와 동군영, 그리고 척일을 태운 말이 다각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산해관에 가까워져 갔다.
“문이 열려있습니다.”
슌스케가 활짝 열린 관문을 보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산해관이라면 난공불락의 요새로 수천의 군사가 주둔하고 있는 곳이다. 그런데 그 많은 군사들이 활짝 열린 성문 근처에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만우가 피식 웃으며 슌스케에게 말했다.
“아직도 공력을 다루는 것이 미욱하다.”
“죄송합니다, 대장.”
슌스케는 만우의 말에 무조건 복종했다. 마치 신언(神言)처럼 만우의 말을 절대적으로 신봉하고 따랐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족하다는 만우의 말에 슌스케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숙였다.
“매복입니다.”
문형일이 설미수와 동군영에게 말했다. 척일은 주름진 얼굴을 구겨 웃는 표정을 만들어 내면서 홀홀 거리며 웃었다.
“제대로 준비를 해놨구먼.”
“어, 어떻게 해야 합니다.”
“매복이라니.”
설미수도 낭패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무림인들의 감각이 일반인들의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이 말한 것이라면 믿을 만했다.
“어쩌긴요 나리.”
만우는 앞장서서는 설미수가 탄 말의 고삐를 끌었다. 그러자 말이 주춤거리면서도 만우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원래라면 저 전면에서 흐르는 살이 베이는 듯한 긴장감에 말은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원래 짐승들은 겁이 많았으니까. 하지만 만우가 앞에서 손을 내젓자 뾰족하게 찔러 들어오던 군기가 흩어졌다. 그러자 만우의 손길에 말이 앞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의연하게 계십쇼, 나리.”
만우는 설미수와 동군영에게 나지막하게 말했다. 설미수와 동군영의 얼굴은 바짝 긴장한 나머지 하얗게 질리기 일보 직전이었기 때문이다.
“기싸움입니다. 처음에 얕보이고 겁먹으면 그 뒤는 답도 없습니다요.”
본래 기싸움이란 것이 원래 다 그런 법이었다. 한 번 기에서 밀리면 그 다음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된다. 기선제압인지는 모르지만 활짝 열린 진동문 너머 천하제일관이라 쓰인 현판이 만우와 사행단을 도발하는 듯했다.
“천하제일관?”
만우는 일필휘지로 쓰인 현판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저것이 무슨 천하제일이란 말인가. 천하제일이란 현판을 달고 있으면서 쥐새끼처럼 숨어 있는 모습이, 숨는 재주로만 따지면 과연 천하제일이라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듯했다. 퉁!!! 그 순간 어디선가 퉁 하고 당겨진 활시위 소리가 났다. 그리고 그것을 신호도 동시에 앞에서 까맣게 하늘을 가득 채운 화살들이 만우와 사행단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허억!”
“흐억!”
그것을 보고 설미수와 동군영이 놀라 팔을 들어 올려 얼굴을 가렸다. 화살들이 한두 발 정도도 아니고 거의 수천 발이 순간적으로 푸른 하늘을 가득 메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것에서 무사할 수 없을 것이란 공포가 본능적으로 들었다.
“크하하하핫!!!!”
쩌렁쩌렁-!!!! 그때, 설미수의 말고삐를 잡고 가던 만우가 대소(大笑)를 터뜨렸다. 그러자 놀랍게도 사행단을 노리던 화살들이 허공에서 서로 부딪치면서 피해가듯 사행단을 피해 떨어져 내렸다. 파바바바박!! 마른 땅에 화살들이 박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말 그대로 화살비였다. 그런데 경악할 만한 것은 만우와 사행단이 있는 공간만을 제외하고 주변 땅에 빽빽하게 화살이 틀어박혔다는 것이다.
“눈 뜨쇼. 눈 뜨라고.”
웃음소리 한 번에 화살비를 날려 버린 만우가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 있는 설미수와 동군영에게 낮은 목소리로 씹어 내뱉듯 빠르게 말했다.
“허억.”
“헙!”
그러자 슬쩍 팔을 내린 설미수와 동군영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나머지는, 심지어 방매와 간장까지 포함해 그리 놀라지도 않은 표정들이었다. 우직!! 꽈릉-! 만우가 발을 들어서는 바로 앞까지 틀어박힌 빽빽한 화살들을 즈려밟았다. 그와 동시에 주변의 땅이 흔들리더니 사행단이 나아갈 길 앞으로 화살비 사이로 길이 쭈욱 하고 났다. 저벅, 저벅 다각, 다각 만우는 그렇게 자신이 만들어 낸 길로 말의 고삐를 잡고 이끌었다. 설미수와 동군영은 넋이 나간 얼굴로 만우의 뒤통수를 보면서 만우가 이끄는 데로 따라갔다.
“휘유. 죽는 줄 알았네.”
“그러게. 그런데 대장님, 더 강해지신 것 같지 않은가?”
감령은 과장된 몸동작으로 이마의 땀을 닦아 내는 척을 했다. 그런 감령에게 문형일이 말을 했다. 사실 모두 다 간담이 서늘해지기는 했다. 아무리 무림인들이 날고 긴다고 하더라도 본격적으로 동원하기 시작한 군대에 이길 수 없는 이유는 간단했다. 무림인은 적고, 군대는 많았으니까. 아무리 무림인들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다고 해도 인간인 이상 먹어야 하고, 자야만 한다. 보통 일반인보다 더 오래 버틸 수 있다는 것뿐이지, 인간이 아닌 것은 아니기 떄문이다. 방금 전에 쏟아진 수천 발의 화살도 무림인들은 따라하고 싶어도 따라할 수가 없는 무지막지한 폭력이다. 저건 군대의 물량과 머릿수가 채워져야만 보일 수 있는 무자비한 폭력이었다. 그리고 저런 화살세례에 무사할 수 있는 무림인?
‘최소 초절정 이상.’
날아오는 암기와 섬광만을 남기는 검끝을 보고 피해 내는 무림인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암기 몇 개, 검 한 자루에 한한 것이다. 그런데 수천 발의 화살비에서 무사할 수 있다? 초절정 정도가 아니라면 불가능하다. 초절정이란 것이 한 개 성(省)에 고작 한 명이 있거나 녹림칠십이채, 장강수로십팔채 같은 거대한 조직의 우두머리 정도만이 초절정이란 것을 봤을 때 대부분의 무림인들은 방금 전 같은 화살세례에 결코 무사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 감령은 정말 방금 전에 몇 군데 화살 맞을 것을 각오했었다. 감령이나 필두, 문형일, 마익후와 슌스케라고 해도 비 오듯 쏟아지는 화살 세례에서는 어디쯤 한두 군데 정도는 화살을 맞을 각오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걸 뭐라고 해야 하지? 사자후(獅子吼)? 창룡후(蒼龍吼)?”
내지르는 소리에 공력을 담아 경지가 낮은 이들의 속을 진탕시키게 하는 것은 감령도 가능했다. 하지만 날아드는 화살을 빗겨나가게 할 정도의 공력을 웃음소리에 담아내어 이 일행 전부를 지켜 내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괴물이 더 괴물이 되었군.”
장담하건데 1갑자 정도의 내공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했다. 본래 소리란 것은 사방으로 퍼져 나가려는 성질이 있어 음공(音功)에는 일반 무공보다 월등하게 많은 내공을 필요로 한다. 그 때문에 무림에서 이름을 알린 유명한 음공의 고수들은 모두 내가고수이기도 했다. 그 예가 바로 마교 진혼대의 수장인 곡왕이다. 알려진 곡왕의 내공 수위는 3갑자. 100년도 못 사는 인간이 180년이나 되는 내공을 쌓았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다. 다른 무림십좌의 고수들은 1갑자 반 정도의 내공을 지니고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중 으뜸인 일패, 혈세천마가 2갑자 정도의 내공을 가졌고. 그런데 만우가 보인 묘기를 부리려면 적어도 내공이 3갑자는 있어야 할 것이다. 만우가 현경에 올랐다는 것은 알았지만 현경은 전인미답의 경지였기에 다들 알고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만우가 하니 그런가보다, 할 뿐.
“천하제일관이라 하더니, 쥐새끼들만 숨어 있는 모양입니다요 나리!!!”
쩌렁쩌렁-!! 만우는 고삐를 잡고 일행을 이끌어 나가며 맨 앞에 검조차 들지 않은 채로는 크게 소리쳤다. 소리치면서 내공을 듬뿍 담았기 때문에 떡하니 열린 성문의 안과 밖으로 만우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우웩-! 우욱!!! 숨어 있던 명군 중 몇이 만우의 도발에 구역질을 해댔다. 만우의 목소리에 깃든 내공이 매복하고 있는 군사들의 내부를 진탕시켰기 때문이다.
“이노오오오옴!!!”
그 순간 노성과 함께 일진광풍이 일어났다. 설미수와 동군영은 거센 바람이 얼굴을 덮쳐오자 소맷자락을 들어 코와 입을 가렸다. 엄청난 양의 흙먼지가 함께 일어났기 때문이다.
“큭.”
“허헛!”
감령과 필두 등 초절정 고수들이 놀라 하늘을 쳐다봤다. 반면 척일과 척사영은 두 눈을 빛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흡사 유성이 떨어지는 것처럼 거력이 실린 화살 한 대가 대기를 찢으며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용(龍)?”
척일이 하얀 수염을 쓸어내리면서 화살을 보고는 중얼거렸다. 화살에 휩싸인 와류가 흡사 용의 형상을 띄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쓸데없는 짓.”
하지만 만우는 머리 위에서 느껴지는 거력에도 비릿하게 웃었다. 어느새 얇은 기막이 방매와 간장, 그리고 설미수와 동군영의 머리에 쳐진 뒤였다. 그 때문에 방매는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옆에서 감령과 필두가 답답한 신음을 흘리는데도 왜 그러는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천하제일관이라 하더니, 서미관(鼠尾關)이라 이름을 붙여야겠구나.”
부르르르!! 만우가 손을 뻗자 거력을 품고 떨어져 내리던 화살이 크게 흔들렸다. 문형일이 놀란 눈으로 만우를 쳐다봤다. 저 화살에는 내공이 담겨져 있었다. 그런데 그런 화살의 제어권을 만우가 뺏어오려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것이 현경.’
문형일은 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이 무공을 펼칠 때 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내공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움직인다 생각해 보라. 그로 인해 입게 될 피해 중 주화입마는 어쩌면 가장 가벼운 것일지도 모른다. 내공으로 사혈을 자극해 그대로 죽어 버릴 수도 있었고, 몸의 한 군데가 터져나갈 수도 있는 법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이의 공력에 간섭할 수 있다는 것. 문형일은 그런 만우를 보면서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을 느꼈다. 그런데 그건 문형일 뿐만 아니라 주변의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만우를 보면서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감령이나 필두, 슌스케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무슨 생각을 하는지 통 알 수가 없는 마익후는 빼고, 화경인 척일과 척사영의 얼굴에도 경악스러움이 떠올라 있었다. 쐐애액! 콰악! 잠시 힘겨루기를 하던 화살이 만우의 손으로 패액 하고 빨려 들어왔다. 화살을 쏘아 보낸 자의 내공을 완전히 만우가 장악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빠득!
“나오라! 쥐새끼처럼 숨지 말고!”
“커허어억!”
“자, 장구운!”
술렁술렁 만우가 손으로 잡은 화살이 우득 소리를 내면서 부러져 나갔다. 그러자 성벽 위에서 흰수염이 난 노장군이 피를 내뿜으며 고꾸라졌다. 그러자 성벽 뒤에 매복을 하고 있었던 군사들이 술렁이더니 성벽 뒤에서 사람들이 몸을 하나씩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두 황망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믿을 수 없게도 단 일인에 의해 족히 기천은 넘는 군사가 매복을 파고 있다가 반대로 당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흥.”
만우는 차가운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다가 허리춤에서 검을 빼들었다. 그리고는 아무런 예비 동작도 없이 검을 휙 하고 휘둘렀다. 쩌억!!!
그러자 놀랍게도 만우와 사행단 일행을 내려다보듯 오만하게 쓰여 있던 天下第一關 현판이 쩍하고 갈라졌다. 천하제일관. 그 현판이 쩍 하고 갈라진 것이다. 하지만 만우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휙, 휙휙! 써걱, 썩! 鼠尾關, 서미관. 쥐 서, 꼬리 미. 쥐꼬리란 글자가 떡하니 절반이 잘려나가 토막이 난 현판 위에 쓰여진 것이다. 문제는 만우와 현판 사이의 거리가 족히 이십 장도 넘는다는 것이었다.
“무슨!!!!”
그 전까지는 대경하지 않았던 척일이 대경해서는 만우를 쳐다봤다. 만우가 휘두르는 검에서는 내공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십 장이나 떨어진 현판에 검으로 긁어내린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지고 있었다.
“대체…….”
척일은 만우를 아득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만우가 도달한 경지는 척일이 평생을 꿈꿔 바라마지 않던 바로 그 경지였다. 그러나 수십 년 째 길을 전혀 보여주지 않아 단념하고 있었던 그 경지를, 만우를 통해 엿본 척일의 두 눈에 열정의 불씨가 지펴졌다. 막연하고 뿌연 목표를 쳐다보고 있다가 한순간 반짝하고 뿌연 것이 젖혀지면서 그 안이 조금이나마 보인 덕분이었다.
“들어가시지요, 나리.”
“은공. 대체 어찌하려고 이런 사고를 치신 겁니까.”
설미수는 태연하게 말고삐를 다시 잡는 만우를 보면서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고도 이런 대형사고가 없었다. 이건 그냥 몇 명을 붙잡아다가 쥐어 팬 것과는 아예 차원이 다른 사고였다. 대명군의 장군과 그 병사들을 만우 홀로 압도적인 무위로 찍어 누른 말도 안 되는 일이 지금 벌어진 것이다. 안 그래도 자존심이 강하기로는 세상에 둘째가라면 서러운 것이 명나라의 장군들인데, 그들이 어떻게 나올지 벌써부터 아찔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면 그냥 앉아서 당해야 했습니까요?”
만우는 다시금 고삐를 붙잡아 설미수가 탄 말을 끌고 가면서 설미수에게 말했다. 설미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아닙니다. 허나…….”
“사행단이 안전하기 위해서는 저들이 지리멸렬해야 됩니다요. 둘 다 만족하는 그런 것 따위는 없다는 걸 잘 아시지 않습니까요?”
만우의 말에 설미수는 말문이 턱 하고 막혔다. 만우의 말이 맞았다. 아니, 만우의 말은 인생사의 큰 진리를 하나 담고 있었다. 이 세상 그 어떠한 것이어도, 심지어는 그게 엄청나게 좋고 선한 의지에서 나온 것이라도 모두가 다 좋은 방법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음 같아서는 사행단이고 뭐고 연경으로 날아가고 싶지만…….”
조선 때문에 참는 것이다. 만우에게도 돌아갈 고국은 필요 했으니까. 자신 때문에 천자가 분노해 군대라도 일으킨다면 무고한 이들이 다치고 피를 흘릴 것이다. 무림인 주제에 그런 것을 생각한다는 것이 우습기는 했지만, 만우의 솔직한 심정이 그랬다. 그러니 자신을 죄인이니 뭐니 호송하라고 한 명천자의 웃기지도 않는 교지에도 꾹 참는 것이었고. 하지만 저렇게 대놓고 매복을 하고, 살기를 피워 대고 있는 것까지 두고 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선의에는 선의로 악의에는 악의로. 그러나 결국에는 죽은 사람 하나 없으니, 저들도 최소한 머리가 있다면 생각은 할 것이다. 만우가 그들에게 손속을 봐줬다는 것을. 우르르르!! 처저저적!!! 그때 성벽 위에서 매복하고 있던 병사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더니 진동문으로 들어서고 있는 사행단의 앞을 가로막은 채 창두를 곧추세웠다. 외적으로부터 명나라를 지키기 위해 불과 20여년 전 명나라의 장군이 재정비를 하여 지금의 관문이 된 산해관이다. 그런 장군의 의지가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인지 사행단을 겨눈 창두는 제법 관리가 잘 되어 있어 번쩍거리며 빛을 발했다.
“난 조천을 위해 연경으로 향하고 있는 조선 사행단의 설미수라 하외다!”
처저적!! 설미수는 순간적으로 거대하게 뭉친 군기가 자신의 목을 꿰뚫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사행단의 앞을 가로막은 병사들의 창두가 순간적으로 전부 설미수를 향했기 때문이다.
“커험!!!”
파아앗-!!! 그 순간 척일이 뒤에서 크게 기침을 했다. 그러자 무형의 기파가 설미수에게로 쏘아져 들어오던 군기와 맞부딪쳐서는 공중에서 분산됐다.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 헐헐.”
척일은 허연 수염을 쓸어내리면서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설미수는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다짜고짜 적의를 드러내는 산해관의 병력들을 보면서 얼굴을 굳혔다.
“우리는 황명을 받아 연경으로 가는 길이다! 그 누가 폐하의 명을 받은 우리의 앞길을 막는다는 말인가!!!!”
설미수가 배에 힘을 주고 크게 소리쳤다. 연경에 가고자 한 것은 사행단이 아니다. 명천자가 불렀기에 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때 병사들 뒤에서 입가에 핏물 자국이 흥건한 노장군이 부장의 부축을 받아 힘겹게 걸어 나오며 소리쳤다. 거동은 불편해 보이나 안광만은 형형한 것이, 만우의 신위를 두 눈으로 목도하고도 전혀 위축되는 바가 없어 보였다. 그 까다로워 보이는 눈빛과 얼굴에 설미수는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쉽지 않을 관상이었기 때문이다.
“황상의 명을 따르라! 그대들 중 누가 죄인인가!!!!”
노장군은 허연 수염을 기르고 있었지만 기골이 장대한 것이 나이를 먹었어도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니 그런 화살을 쏘아내 볼 수 있었던 것이고. 만우는 혀를 쯧 하고 찼다.
“쯧!!”
찌르르-!! 만우는 이번에도 쯧 하고 낸 소리에 공력을 담아 퍼뜨렸다. 그러자 창두를 번쩍거리던 병사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들은 강병이었다. 자신들의 지휘관인 노장군이 만우에 의해 쓰러졌고, 만우가 이십 장이나 떨어진 곳에서 검을 휘둘러 현판을 두동강 낸 것도 모자라 고함소리 한 번으로 수십의 병사들을 쓰러뜨렸음에도 물러서지 않고 진을 이루고 창을 들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만이었다. 제 아무리 강병(强兵)이라고는 하나 상대는 만우였다.
“물러서라. 본주는 피를 보고 싶지 않다.”
만우는 병사들 뒤에 힘겹게 서 있는 노장군을 보면서 눈가를 좁혔다. 만우는 속에서 부글거리며 열이 끓어오르는 듯했다. 대체 황제라는 놈이 뭐길래, 이리도 죽을상을 하고서도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것인가 싶었기 때문이다. 노장군의 눈빛은 만우가 많이 봐와서 잘 아는 종류의 눈빛이었다. 자신이 죽는 한 있더라도 충심을 다하고 말겠다는, 그런 고집스런 충성심이 수십 년 동안 쌓여 빚어 낸 눈. 저런 상대일수록 상대하기는 몇 곱절로 까다로워지는 법이다.
“네놈이로구나.”
노장군은 안광을 형형하게 빛내면서 만우를 쳐다봤다. 황상께서 말씀하신 죄인이 바로 저놈이었다. 심양태수에게서도 파발로 알려온, 아주 위험한 놈이라는 바로 그놈.
“본주는 죄인이 아니다. 허니 압송당할 이유가 없다.”
“황상께서 죄인이라 하면 죄인인 것이다. 그에 반하겠다면 전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네놈을 결코 이곳을 통과시키지 않을 것이다.”
노장군과 만우가 첨예하게 대립했다. 만우는 그런 노장군을 보면서 이룡검의 검병을 만지작거렸다.
“황상께서는 분명 죄인을 압송해 오는 호송단을 통과시키라 명하셨다. 한데 네놈들은 호송단이 아니라 사행단이라 하였다. 그 말인즉슨 황명을 거역했다는 뜻!”
설미수와 동군영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심양태수 때와 같은 흐름이었다. 그런데 그때 만우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래서?”
“그래서…… 라니 무슨…….”
만우가 의외의 부분에서 치고 들어오자 노장군은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만우가 이어서 말했다.
“명황제가 나의 황제인가?”
“……뭐라?”
“네놈의 황제란 것은 알겠다. 한데, 그놈이 나의 황제냐 물었다.”
만우는 명천자를 ‘그놈’이라 지칭하며 노장군을 자극했다. 당연히 황제에 대한 충정이 지극한 노장군의 입에서 당장에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무엇 하느냐! 무엄한 저놈들에게 대명군의 위엄을 보여라!!!”
노장군은 아예 사행단과의 대화 대신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끼기기긱!!! 그러자 사행단의 머리 위에서 끼긱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위를 쳐다본 동군영의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 성벽 위에서 아래를 향해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궁병들의 수가 수백이 넘었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말해 보거라! 이 육시럴 놈!!!!”
노장군의 두 눈에 살기가 서렸다. 감히 명천자를 ‘그놈’이라 부르는 놈은 그의 육십 인생에 처음 겪는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일벌백계(一罰百戒). 노장군은 조선의 국왕에게 무례함의 증표로 이들의 수급을 잘라 보낼 생각을 하며 눈가가 살기로 인해 붉어졌다.
“그러는 늙은이. 네놈은!”
만우의 두 눈이 노장군의 모습을 담았다. 그 순간 노장군은 다리가 풀리면서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거검(巨劍). 그것도 보통 큰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두 동강 낼 수 있을 것 같은, 그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검이 만우의 뒤에서 순간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 커다란 검의 예기가 얼마나 날카로웠던 것인지 산해관 정도는 단숨에 두부 가르듯 두동강을 낼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거검이 만우의 뒤에서 보였다. 단언컨대 노장군이 지금껏 그 어떠한 전장에서도, 그 어떠한 적을 보면서도 느끼지 못했던 생경한 공포였다.
“본주가 누군지 아는가?”
쩌억-!!! 그 순간 만우의 뒤에 서 있던 거대한 거검이 노장군의 머리를 노리고 떨어져 내렸다. 노장군의 눈이 커지면서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으악!!!!”
“장군. 장군!!!!”
장군을 부축하고 있던 부관이 놀라서는 노장군을 불렀다. 그 순간 만우의 주변으로 하늘이 내려앉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