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4. 맹주 보고 오라고 해(2)2022.02.05.
그가 자랑하던 독공(毒功)이 힘 한 번 쓰지 못하고 파훼됐다는 것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듯했다. 울컥!
“얼씨구. 피까지 토하고 앉았네.”
그 충격이 적지 않은 것인지 당중약은 입에서 피까지 토해 냈다. 내부가 진탕되었다는 뜻이다. 그만큼 만우에게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못하고 당했다는 충격이 큰 것이다.
“……알겠습니다.”
“호오. 알았다고?”
만우는 얌전하게 알았다고 대답하는 당미령의 태도에 재미있다는 듯 씩 웃었다. 당미령은 만우의 눈을 피하지 않고서는 말했다.
“검주 대협께서 한 명도 죽이지 않고 살려두신 것은 일이 커지지 않기를 바라시기 때문이겠죠.”
“그래. 주작단 하나 죽인다고 해서 무림맹에서 포기할 것 같으냐?”
만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을 죽여 없애는 것은 여반장(如反掌)과 마찬가지지만, 그런다고 해서 이번 단발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들을 죽이면 무림맹에서도 독이 올라 계속해서 만우를 귀찮게 할 것이 분명했다.
“더 많은 이들을 보낼 겁니다.”
“그러니까. 한 놈도 죽이지 않고 똑똑히 보게 한 거다.”
고오오-! 만우의 전신에서 태산과도 같은 기세가 다시 한번 더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석중을 비롯한 석가상단 표사들의 얼굴색이 변했다. 멀리서 볼 때와는 달랐다. 코앞에서 만우가 슬쩍 드러낸 기세는 무공이 떨어지는 석가상단의 표사들도 얼굴이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 그마저도 만우가 세심하게 기운을 조절해 그들에게는 피해가 가지 않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본주가 누구인지 똑똑히 보고 가서 말하라고.”
천하제일인. 이미 중원에서 오년 간 유랑을 하면서 그 땅에 사는 놈들이 얼마나 꽉 막히고 폐쇄적인지 지겹도록 경험을 해 본 만우다. 변변한 문파도, 세가도 없는 만우가 중원을 유람하면서 받았던 수많은 괄시와 편견들. 정정당당하게 무공을 겨루어 패배했음에도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며 사술이니 뭐니 불복하지 않던 속 좁고 어리석은 놈들. 그랬기에 만우는 자신에 대한 소문이 퍼지더라도 중원무림의 꽉 막힌 놈들이라면 당연히 믿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중원이 세상의 중심이요, 중원무림이야 말로 모든 무공의 발원지라 믿는 그 꽉 막힌 놈들이 중원 출신이 아닌 동이족 출신의 만우가 그들의 머리 위에 섰다는 것을 인정할 리 없으니까. 그래서 보여주었다.
“네 눈으로 본 것. 돌아가면 똑똑히 전하거라.”
만우는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휙 하고 돌렸다.
“귀찮게 굴지 말라고. 본주의 발을 무림맹으로 돌리지 말게 하라고.”
“…….”
서슬 퍼런 경고를 남긴 만우는 감령과 함께 객잔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런 만우의 뒤를 천마대주인 도겸이 바짝 뒤따랐다. 그 외의 천마대의 고수들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지는 것을 보면서 석중은 침을 꼴깍 삼켰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멀어지는 만우를 보면서 두 눈을 반짝였다.
“멋있지 않느냐.”
“예. 예?”
수중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석중을 쳐다봤다.
“강한 사내다. 그리고 승리하였음에도 전리품을 취하지 않는구나.”
칼을 든 자는 그 칼에 의해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무림의 율법이고 법도다. 그런 점에서 당중약을 비롯한 당가의 무인들은 눈을 달고 다님에도 그 눈으로 인해 화를 자초했고, 승리자인 만우가 모든 것을 취해도 아무런 할 말도 없었다. 물론 그 전리품에는 당미령도 포함이 됐다. 한데 만우는 그 전리품을 취하는 것보다 다른 쪽으로 자신의 이득을 챙겼다. 석중은 그런 만우를 보다가 수중을 쳐다봤다.
“강하니 저럴 수 있는 것이겠지. 우리 석가장이 가야 할 궁극적인 목표가 저 사내다.”
“예. 예…….”
기껏해야 꼬리 행수인 수중은 석중이 무엇 때문에 저러는지 이해하지 못하고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석중은 표사를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검주 대협께서 보내드리라고 하니 보내드리겠소. 허나 그것은 검주 대협의 일일 뿐.”
석중은 당장에라도 검주를 쫓아가고 싶었지만 그래도 해야 할 것은 해야만 했다. 서걱!! 표사는 당미령과 유모의 팔 다리를 묶었던 포승줄을 끊어 냈다. 석중은 이제 손발이 자유로워진 당미령을 보면서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
“오늘 일을 석가장은 잊지 않을 것이오. 가자.”
석중은 당미령에게 말을 한 후 당중약과 당가의 무인들을 넘어 객잔 밖으로 나간 만우의 뒤를 쫓아갔다. 당미령은 피가 돌기 시작한 팔다리를 주무르면서 입술을 씹었다.
“가시지요. 형님.”
모용청은 그런 당미령과 당가를 쳐다보고 있다가 그 자리에 얼음처럼 굳은 모용중의 어깨를 툭 하고 쳤다. 모용중은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모용청을 쳐다봤다.
“내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형님.”
모용청은 상황에 전혀 맞지 않았지만 놀라 넋이 나간 모용중의 얼굴을 보자 웃음이 나올 것 같은 것을 꾹 참으며 말했다.
“이 아우의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
“…….”
결국 모용중은 뭐라 반박하지 못한 채 어깨가 축 쳐져서는 모용청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
“만우 자네!!!”
“왜, 왜!”
만우는 성큼성큼 걸어온 동군영이 갑자기 자신을 와락 하고 껴안자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동군영의 몸통을 손바닥으로 팍 하고 밀었다.
“우어어억!!!”
휘청휘청! 그러자 동군영이 휘청거리면서 뒤로 물러났다. 가볍게 밀어 친 것 같았지만 만우의 그 간단한 일수에 담긴 거력 때문이었다. 그래도 그나마 동군영이 다치지 않게 만우가 배려를 해서 그랬지, 그게 아니었다면 큰 고초를 겪었을 것이다.
“이게 무슨 짓이야! 사내놈이!!”
만우가 징그럽다는 듯 도끼눈을 뜨고 동군영을 쳐다봤다. 하지만 동군영은 감격한 눈으로 만우를 쳐다봤다.
“객잔에 소란이 있다 들어 가 봤네만, 만우 자네도 이제는 자제할 줄 알게 되었어!!!”
“자제? 내가 뭘?”
만우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 모르는 겐가?”
“아니, 내가 뭘!!!”
동군영은 그런 만우를 눈을 가늘게 좁혀 뜨고 쳐다봤다. 그리고는 하나씩 만우가 벌였던 수많은 사건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상왕전하부터 시작해 주상전하는 물론이고…… 더 할까?”
“……그걸 다 기억하고 있었단 말이야?”
“내 태어나서 그런 경험들은 처음인지라 잊으려도 잊을 수가 없던데.”
동군영이 씨익 하고 웃어 보였다. 그러자 할 말이 없었지만 만우는 끄응 하고 고개를 휙 돌렸다.
“으, 으음…….”
그때 만우가 짚었던 수혈이 자연적으로 풀리며 누워 있던 방매가 눈을 떴다. 그리고는 잠시 눈을 껌뻑거리더니 몸을 확 하고 일으켰다.
“맞다 만우!”
“어. 나 여기 있다.”
만우가 손을 슥 하고 들어 보였다. 그러자 방매가 주변을 휘휘 둘러보고는 달려와 만우의 앞뒤를 살폈다.
“뭐, 뭐하는 거야!”
“가만 있어봐!”
동군영에 이어 방매까지. 만우의 몸이 무공이라고는 1도 모르는 이들의 손에 이리저리 움직이며 앞으로 돌았다 뒤로 돌기를 반복했다.
“어, 어어?”
“스읍! 가만히!!!”
만우는 방매의 손가락이 파고들자 기겁하며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방매가 그런 만우에게 바짝 따라붙어서는 두 눈을 크게 뜨고는 엄한 표정을 지었다. 꼬물꼬물
“어, 어딜 만져, 이 계집애가!!!!!”
“멀쩡한 것 같네. 휴우.”
방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만우에게서 떨어졌다. 하지만 그 순간 동군영은 봤다. 방매의 입가에 스치는 미소를 말이다.
‘과감한데.’
양반집 자제인 동군영은 상상도 하지 못할 과감한 행동이었지만 그게 썩 나빠 보이진 않았다. 둘이 묘하게 잘 어울렸으니 말이다.
“멀쩡하지! 내가 그깟 놈들에게 뭐, 한 대 맞기라도 했을까봐?”
만우는 민망함에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성을 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늘 같은 걸 빼곡하게 날리는데! 아무리 너라고 해도 맞을 수도 있지 그걸 어떻게 다 막고 피하냐!”
방매는 되레 만우에게 뺴액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만우가 또 다시 끄응 하는 소리를 내면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걱정해서 그랬다니 더 이상 화를 내는 것도 무언가 우스웠기 때문이다.
“대장. 마교 애들이 대장 찾고 있는뎁쇼.”
만우에 대한 감령의 감동은 몇 시진 가지 않았다. 다시 건들건들해진 감령이 문을 열고는 만우에게 말하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엥? 대장. 왜 얼굴이 그렇게 붉은 거요? 어디 고뿔…….”
빠악-! 감령의 고개가 휙 하고 뒤로 젖혀졌다. 그런 감령의 눈에 흰자가 희번덕거렸다. 그리고는 그대로 감령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우당탕!
“나, 나갔다가 온다.”
만우는 쓰러진 감령을 넘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 밖으로 나갔다. 무려 초절정 고수인 감령의 정신을 지풍 한 방에 날려 보낸 것이다. 그 소리가 얼마나 찰졌는지 동군영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붉어진 만우의 얼굴에 막 장난기가 오르려던 것은 동군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 역시 안 건드리는 게 좋아. 만우는.’
동군영은 설령 장난기가 치솟더라도 만우 앞에서는 꾹 참아야겠다고 생각하며 방매를 쳐다봤다가 흠칫하고 놀랬다.
‘쟤는 또 왜 저런담.’
방매가 무언가를 떠올리려는 것인지 두 손을 꼭 말아 쥔 채 음흉하게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쓰러진 감령과 음흉하게 웃고 있는 방매를 보면서 참 혼란스런 사람들이라고 생각한 동군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
“감사했습니다, 대협.”
옥령은 파리한 얼굴로 만우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그런 만우를 주창을 비롯한 투귀대의 고수들과 천마대의 고수들이 쳐다보고 있었다. 한시가 바빴기 때문에 요녕성에 머무르기 보다는 이동을 선택한 마교의 고수들이었다. 옥령은 몸 상태가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급히 구한 가마 안에 탔다. 특이한 점이라면 가마꾼 중에 하나가 여포라는 것이었다.
“호선에게나 고마워해야지. 나한테 고마워해 봤자.”
만우는 피식 웃었다. 그러자 옥령은 미미하게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만우에게 말했다.
“이미 호선 언니에게도 감사하다고 말씀드렸어요.”
“언니 동생 하기로 한 거야?”
만우는 고개를 돌려 지붕 위를 쳐다봤다. 어느새 그 위에는 호선이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있었다. 그 모습에 천마대 고수들이 얼굴을 붉혔다. 인간으로 둔갑한 호선은 예의 그 속이 보일 듯 말 듯한 나풀거리는 하얀 장삼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상태로 올려다보는 자리에 앉아 있으니 제 아무리 고수들이라고 해도 남자들인 만큼 엄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위치요 자세였다.
“네. 뭐, 제 허벅지에 상처를 입힌 건 괘씸하지만.”
옥령은 호선의 허벅지에 손톱자국을 내놓았다. 그 자국은 호선이 인간의 모습으로 둔갑을 해도 사라지지 않았다.
“동생이 나쁜 것이 아니라 그 혈성이란 놈이 나쁜 것이니까.”
“그 덕에 강해진 것이기도 한데 말이지.”
만우는 옥령의 상태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청령단으로 선주의 기운을 벌충한 호선은 옥령의 혈성의 절반 정도를 흡수했다. 하지만 그 이상은 흡수할 수 없었는데 운명의 힘인 혈성을 너무 과도하게 옥령으로부터 빼앗아 버리면 그것이 곧 그녀의 운명과도 직결이 되었기 때문이다. 즉, 과도하게 혈성을 제거했다가는 옥령의 수명이 줄어든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호선은 과도하게 커진 혈성의 기운만을 흡수했다. 그것만으로도 호선은 선주의 크기가 커졌다면서 좋아했다. 운명의 힘이 그만큼 정순하고 커다란 기운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작용이 없을 수는 없었다. 그 때문에 지금 옥령의 수준은 절정의 초입정도. 완숙한 초절정이던 옥령의 무위가 절정 수준으로 떨어진 것이다. 혈성 덕분에 올라갔던 무위인 만큼, 혈성의 크기가 작아지자 옥령의 무위도 자연스레 낮아졌다. 하지만 옥령은 아쉬워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언제 혈성이 튀어나올까 마음 졸이면서 사는 것보다는 지금이 훨씬 더 낫답니다.”
옥령은 만우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단박에 눈치챘다. 만우는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이 괜찮다는데 타인이 무어라 더 말을 하겠는가.
“대협의 소문을 온 중원에 퍼뜨리고 다니겠습니다.”
“……저놈의 생각이겠구나.”
만우는 마일을 힐끗 쳐다봤다. 그러자 마일이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마일에게 있어 만우는 은인이나 다름없는 인물이다.
“마교에 빚을 하나 지워 놓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만우는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휙 하고 돌렸다. 그러다 만우의 눈이 여포와 마주쳤다.
“넌 마교에 갈 셈이냐?”
여포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포는 고개를 돌려 옥령을 쳐다봤다. 그러자 옥령이 입술을 달싹였다.
“과분하게도 저희를 도와주시겠다고 하셨어요.”
“빈객(賓客)이라.”
만우는 피식 웃었다. 빈객이라 함은 각 문파나 세가에서 자신의 세를 널리 알리기 위해 거마비와 체류비를 주고 따로 보수를 약속하여 초빙하는 명숙들이다. 그렇게 문파와 세가의 초빙을 받아 온 명숙들이 얼마나 많은가에 따라 때로는 문파와 세가의 위세가 설명되기도 한다. 하지만 만우는 단 한 번도 마교에서 빈객을 들였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 역시도 저 머리 쓰는 놈의 계략일 터.”
“신교에는 많은 고수들이 필요합니다. 천하제일검.”
마일은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며 말했다. 만우는 옥령을 통해 여포를 빈객으로 들인 것이 마일이란 것을 알아챘지만 뭐라 오지랖을 늘어놓지는 않았다. 여포가 애도 아니고, 화경의 고수에게 무슨 오지랖을 늘어놓는단 말인가.
“활빈당은 어쩌고?”
“내가 두목이 되기 전에도 원래 있던 활빈당이다. 한 가지 부탁이라면…….”
여포는 고개를 돌려 필두를 쳐다봤다. 필두는 여포의 강렬한 눈빛을 받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할 말이 있으시오?”
필두와 여포 사이에는 별 친분이 없었다. 아니, 그것은 만우와 여포 사이에도 마찬가지다. 동업을 하기는 했어도 그리 친분을 쌓을 정도로 담을 허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수적들의 왕이었다 들었다.”
“왕은 무슨. 그냥 두목이지.”
필두는 피식 웃었다. 역수교어라 불리는 필두는 장강에 더 이상의 미련을 두지 않기로 했다. 애초에 삶이 팍팍해 내몰리듯 수적이 되었던 것이라 자신의 선택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곳에 생사고락을 함께 한 수하들이 있다고는 하나 원래 수적의 의리란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관아에 잡혀가거나 해서 동료들의 위치를 발고하지 않는, 딱 그 정도만의 의리. 뭐 부하들의 생각은 다를지도 모르지만 필두의 생각이 일단은 그러했다.
“설마, 지금 나보고 가서 애보기나 하라는 건 아니겠지?”
필두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여포가 존중받아야 할 화경의 고수란 것은 분명했으나, 그렇다 하여 필두는 여포의 수하가 아니었다. 여포는 그런 필두에게 손을 내저었다.
“바라지 않는다. 또한 필요도 없고. 나 없이도 나 이전부터 활빈당은 있어 왔으니.”
“허면?”
필두는 아니라는 소리에 감정을 가라앉히고는 여포에게 되물었다. 여포는 볼을 한 번 긁적이고는 필두에게 말했다.
“수적이면 재물을 좋아하지 않나?”
필두는 그것은 왜 물어보냐는 듯 여포를 빤히 쳐다봤다. 하지만 재물이란 소리에 눈이 번쩍 뜨이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재물? 재물은 왜?”
방매가 불쑥 끼어들자 필두와 여포가 동시에 부담스런 표정을 지었다. 방매의 뒤에는 항상 만우가 있다는 것을 둘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부탁을 들어주면 내가 모은 재물을 주겠다.”
“헉. 활빈당이라면서 모아놓은 재물도 있어요?”
방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손을 모아 쥐며 간절한 표정으로 여포를 쳐다봤다. 여포는 그런 방매의 기이한 기세에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 그렇다.”
“필두 아저씨. 들어줘요. 그리고 재물 필요 없으면 그거 나 주고.”
“…….”
필두는 힐끗 곁눈질로 만우를 쳐다봤다. 만우는 그런 필두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필두는 만우의 시선을 느끼고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이건 이미 답이 나와 있는 문제였다.
“가면 가동과 사임이라는 아이가 있다. 그 아이들에게 아무거나, 삼류라도 좋으니 그 무공이란 걸 한가락씩만 알려다오.”
“……뭐?”
필두의 눈이 고리눈이 됐다. 무림인에게 있어 무공을 타인에게 알려주라는 것은 밑천을 다 내어 놓으라는 뜻이나 마찬가지다. 그러자 여포가 무슨 오해를 한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독문무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가동과 사임에게도 내 무공을 가르치지 못한 이유가 일인전승(一人傳乘)이란 것 때문이었으니.”
“말을 하려면 좀 한 번에 하시오.”
필두가 여포를 째려보면서 말하자 여포가 큼큼하는 소리를 냈다. 그럴 때마다 등에 맨 방천화극이 분해되어 들어간 커다란 궤짝이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난 내 스승에게서 내가 익힌 것 외에는 배운 적이 없다. 허나 무림인들은 독문무공이 아니더라도 몇 가지를 익힌 듯한데. 내가 틀렸나?”
여포는 만우를 쳐다봤다. 만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만우가 익히고 있는 공부라고 해 봤자 기천뿐인 것은 만우 역시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나도 몰라. 나 보지 마.”
“맞소.”
필두가 또 괜히 화제가 다른 곳으로 돌아가자 얼른 대답했다. 그런 필두의 대답에 여포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무공들, 삼류라도 좋으니 한 가락이라도 부탁한다.”
“그 대신 모아 놓은 재물이라…….”
필두는 미심쩍다는 얼굴로 여포를 쳐다봤다. 여포는 누가 보더라도 돈이 많아 보이는 관상은 아니었다. 거기에 활빈당(活貧堂)이라는 이름의 조직만 봐도 딱 감이 왔다.
“믿어도 되겠소?”
필두의 미심쩍은 듯한 말투에 여포가 심통이 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말이 거짓 취급을 당하니 기분이 나쁜 것이다. 하지만 이내 여포는 쓰게 웃었다.
“저희가 대신 합당한 보상을 해드리지요.”
그때 옥령이 나서서는 여포를 두둔했다. 혈세천마와 곡왕, 마존의 죽음으로 인해 공백에 큰 손실이 발생한 마교다. 그런 점에서 여포라는 출중한 실력의 고수를 영입할 수 있으면 그것은 천만금으로도 헤아릴 수 없는 가치인 것이다. 하지만 여포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되었소. 낭자는 나서지 마시오. 이건 내 일이니.”
옥령은 자존심이 상한 듯한 여포의 표정을 보고서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여포에게 한 마디를 더 한다면 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일이란 것을 눈치챈 것이다. 만우는 그 모습을 뒤에서 잘들 논다 하는 표정으로 쳐다봤지만 여포와 필두는 나름 진지했다.
“삼류 무공이라고는 하나 나 정도 되는 고수를 선생으로 들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실 것이라 믿소.”
‘그러니 제대로 된 보상을 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필두를 보며 여포는 훅 하고 뜨거운 숨을 뱉어 냈다.
“좋아.”
여포는 결심을 한 듯 눈을 빛내며 필두를 쳐다봤다.
“그곳에는 반짝거리는 재물은 없다. 허나…….”
반짝거리는 재물이 없다는 말에 방매가 흥미를 잃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여포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스승님께서 그러시더군. 스승님께서 오신 중원에 그런 보물이 풀리게 되면 혈겁을 일으킬 것이라고.”
“…….”
필두의 눈이 커졌다. 필두뿐만이 아니었다. 그곳에 있는 모든 고수들의 귀가 쫑긋하고 섰다. 보물이란 말에 다들 저절로 반응을 한 것이다. 거기다 여포의 스승이란 세공도인은 신선이 되어 우화등선을 했을지도 모르는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런 인물이 허튼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란 믿음도 있었다.
“혈겁이라……. 무공이요?”
세공도인이라는 기인이 여포란 무명의 화경의 고수를 만들어 냈다. 그렇다는 것은 그만큼 혈겁을 일으킬 정도의 무공이 있을 수도 있다는 소리다. 하지만 여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공은 일인전승이니 그런 곳에 있을 리 없지. 허나 스승님께서는 그곳에 귀한 것을 가져다 놓았다고 하셨다.”
“그러니 그게 뭐요.”
필두는 답답하다는 듯 여포를 쳐다봤다. 그때 여포의 입술이 달싹였다. 다른 사람들이 귀를 쫑긋했지만 여포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전음. 사람들의 궁금증을 잔뜩 자극해 놓고 정작 중요한 것은 전음으로 필두에게 말을 한 것이다. 하지만 여포의 말을 들은 필두의 두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
“폐가 많았습니다, 태수님.”
“흠, 흠…….”
심양태수는 설미수의 공손한 인사를 받으며 유쾌하지 못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직도 어제의 앙금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설미수는 그런 심양태수를 보면서 쓰게 웃었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각자 서로 다른 황제와 왕을 모시고 있었으니까. 제 아무리 명의 황제라고 해서 주상전하께서 보낸 사행단을 함부로 구금하고 죄인 다루듯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설미수는 주상전하로부터 조선을 대행하는 역을 맡은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가는 길 편하지만은 않을 것이오.”
심양태수는 설미수를 곱지 않은 눈으로 쳐다봤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심양태수는 군을 동원하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설미수와는 인간적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으니, 그가 보일 수 있는 마지막 자비이자 배려였다. 하나 조선의 사행단이 요녕을 빠져나가는 순간 태수는 군사를 보내어 그들을 추격할 것이다.
‘석가장에서 나설 줄이야.’
어제 심양의 객잔에서 일어난 일을 보고 받은 심양태수였다. 요녕무림의 패자인 모용세가와 중원무림의 무림맹에서 보낸 무림인들이 단 한 명에게 패배했다는 믿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무림인이란 족속이 대체 어떤 족속이던가. 물론 대명군(大明軍) 앞에서는 하늘을 날고 손에서 바람을 쏘아 보낸다는 그들도 추풍낙엽처럼 쓸려나갈 것이다. 허나 대명군을 움직이는 데는 막대한 비용이 든다. 또한 대명군은 각 외지와 내부의 준동을 감시하고 막아 내야 하기 때문에 모든 곳에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런 대명군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각 지역의 터줏대감 노릇을 하는 것이 바로 그 무림인들이다. 그들의 기예는 기기묘묘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홀로 백을 상대하기도 하며 그들 중 최고라 불리는 이들은 천, 만을 상대하기도 한다는 소문이 돌곤 했다. 그중에서도 최고로 치는 것이 무림맹과 마교인데, 무림맹에서 나온 자들이 고작 한 명에게 패퇴했다는 것이다. 단 한 명에게. 백 명을 너끈히 상대한다는 무림맹의 무림인 수십이 단 일 인에게 당했다. 그렇다면 대체 그 일 인(一人)은 얼마나 강하다는 소리일까. 모용세가는 미리 심양태수에게 말한 대로 사행단의 눈에 띄려고 하지도 않았다. 거기에 황명을 받아 심양에 들어왔다는 무림맹의 무림인은 연기처럼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
‘그리고 석가장.’
거기에 석가장이 합세했다. 석가장은 심양태수도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무림에서 먼 심양태수에게는 강호무림보다는 오히려 석가장이 더 크게 느껴졌다. 황금(黃金). 귀신조차도 부릴 수 있다는 그 황금을 산처럼 쌓아 놓고 대륙의 모든 물류와 경제를 한 손에 넣고 주무른다는 돈귀신들이 모인 그곳. 그곳의 심기를 거스르려는 관리는 단 하나도 없다고 심양태수는 장담할 수 있었다. 그들이 손에 쥔 금력은 얼마든지 그들의 모가지를 단숨에 날릴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석가장이 하필이면 저들에게 관심을 보였다. 정확히는 석가상단에 속한 한 행수였지만, 요녕처럼 중원의 중심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석가상단의 일개 행수라고 해도 태수와 독대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석가장의 위세는 대단했다. 제 아무리 황명을 받아 부임한 관리라고 해도 황금으로부터는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황상을 보러 가는 길인데 그 정도 역경은 늘 있어 왔습니다.”
설미수는 사람 좋은 얼굴로 웃어 보였다. 대놓고 앞에서 심양태수가 한 말이 협박임을 알면서도 설미수는 눈 한 번 찡그리지 않았다.
“흠.”
심양태수는 그리 말하면서 사행단의 면면을 자세하게 살폈다. 그러자 확실히 심양태수의 눈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이들만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강호의 그 잡배들을 겁을 먹고 물러나게 할 정도의 고수들이라.’
심양태수는 그런 그들의 면면을 자세하게 훑어본 후 고개를 돌렸다. 축객령이었다. 설미수는 인사를 꾸벅하고는 만우가 고삐를 잡고 있는 말 위에 올라탔다. 다각, 다각, 다각 심양에 한 바탕 폭풍을 일으킨 사행단이 심양에서 빠져나갔다. 심양태수는 그 모습을 한참동안 보다가 휘하의 장수를 불러 일렀다.
“한나절 이후 추격대를 편성하여 출진하시게.”
“예, 태수.”
“단, 하는 척만 하시게. 괜히 얽혀서 좋을 일이 없을 것 같으니…….”
“예?”
장수는 고개를 들어 의뭉 섞인 눈으로 심양태수를 쳐다봤다. 추격을 하라는 것인지 아닌지 그 기준이 모호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산해관에서 막힐 터이니.”
호송단, 아니 사행단이 연경으로 향할 것임은 이미 떠나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