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1. 심양소동(1)2022.01.25.
“언제부터 호랑이가 겨울잠을 자게 된 거지?”
눈을 뜬 채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호선에게 만우는 퉁명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호선은 폭포수처럼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면서 멍한 눈으로 만우의 얼굴을 한참이나 쳐다봤다.
“안 일어나?”
“아.”
막 잠에서 깨어난 호선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그럴 법도 한 것이, 기본적으로 인간이 아니라 둔갑한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제 아무리 경국지색의 미모를 가진 여자라고 해도, 인간이라면 저렇듯 기절하듯 쓰러져 있다가 일어날 때는 저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다. 만우는 그런 호선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선주는?”
“청령단은 여기에…….”
“청령단? 영성을 가진 영단이었다고?”
정확히 말하면 선주였지만 선주와 영단의 차이는 인간인 만우가 아니라 반선(半仙)인 호선 정도만 정확하게 구분해낼 수 있는 차이였다. 하지만 만우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차라리 네가 가지게 된 것이 다행이었어.”
“네. 인간이 복용했다면…….”
호선도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주와 영단은 인간에게는 비슷한 성질을 가진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영단이나 내단 따위의 영약들이 인간의 기운을 북돋아 주는데 그친다면, 선주는 그 이상의 효과를 불러온다. 과유불급. 선주에 담긴 영성을 인간이 복용했다가는 십 할의 확률로 인간은 미친다. 선주의 안에 담긴 세월과 같이 자라온 영성을 견디지 못해 광인(狂人)이 되는 것이다.
“무인이 복용하면 혈겁을 일으킬 것이고, 범인(凡人)이 섭취한다 하여도 살인마가 되었을 터.”
다행히 그 영성을 제대로 받아들이고 체화시킬 수 있는 영물인 호선이 그 선주를 취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청령단은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는 마력 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것이 담겨 있던 목함에 주술이 걸려 있던 것일 테고. 그게 아니었다면 오도리 부족의 대추장이 그리 얌전히 보관만 하고 있었을 리 없다.
“이제 좀 쓸 만해졌겠군.”
만우는 호선의 기운을 가늠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영성을 가진 선주를 가지게 되었지만 호선의 전성기에 비하면 미치지 못하는 힘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강해졌다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완숙한 화경 정도.”
진인에 오르기 전의 만우라면 정확하게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진인의 경지에 발을 내딛은 만우는 호선의 기운을 가늠할 수 있었다.
‘척일 정도.’
잃었던 선주를 대체할 새로운 선주를 찾은 것만 해도 호선은 단숨에 척일 정도의 경지를 회복했다. 그렇다면 그 선주를 유형화할 정도의 선기를 쌓는다면 원래 호선의 경지를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나와 동률.’
만우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호선을 쳐다봤다. 미물로 태어나 영성을 가지게 되고, 그 이후로도 500년이나 선기를 쌓으며 수행을 한 호선의 저력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뒤쳐지면 안 되겠네.’
만우는 피식 웃었다. 발전 없이 세월이 지나면 만우가 호선보다 약해질 수도 있다. 호선은 원래 자신이 잃었던 것을 되찾아가는 길이니 당연히 그 속도는 빠를 것이다. 그 사이에 만우도 강해져야 한다. 누군가에게 추월을 당한다는 것은 그리 유쾌한 경험이 아니니 말이다.
“한데 제가 깨어나는 것은 어찌 아시고…….”
호선은 미몽에서 깨어나 정신을 수습하고 나자 만우에게 그제야 물었다. 만우가 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인지 궁금해진 것이다.
“선주를 찾았으니 네 영성이 한층 강해졌을 터. 별의 기운을 감당할 수 있겠어?”
“별의 기운이라면…….”
“운명의 기운이라고도 하지.”
운명이란 말에 호선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곰곰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선계에 발을 한 번 담갔던 호선이 만우의 말을 이해하지 못할 리 없다. 인간은 때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운명의 기운, 별의 기운을 갖고 태어나는 이들이 종종 있어 왔기 때문이다.
“그 여인입니까?”
“아는구나.”
“느껴지니까요. 전율스러운 별의 기운이.”
호선은 만우에게 별의 기운이 누구냐고 묻지도 않았다. 선주를 찾은 호선은 가까이 있는 별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운은 호선에게도 익숙한 기운이었다.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해 볼 수 있는 데까지는 해. 이번에는…….”
만우의 눈빛이 한 차례 차가워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네가 못 한다면 내가 깔끔하게 그 비참한 인생을 거둬줄 생각이니.”
“……그러시다면.”
만우가 그런 마음을 먹었다면 호선도 주저할 필요는 없다. 일이 잘못 되어도 가장 든든한 이가 뒤에 버티고 서겠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일이 잘 해결되면 좋겠지. 그 계집의 주군이 아주 쓸 만한 호구거든.”
“호, 호구요?”
“응. 호구.”
천마신교의 차기 교주를 간단히 ‘호구’라 칭한 만우가 씩 웃어 보였다. *****
“저곳입니다.”
“저기? 으리으리해 보이는데?”
“대채주. 저 물쟁입니다. 석가상단의 꼬리행수, 수중!”
“그래그래. 너 잘났다. 잘났어!”
감령이 수중을 타박했지만 감령의 표정은 즐거워 보였다. 간만에 타지에서 의도치 않게 만난 과거의 인연이 그만큼 반갑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게 물질을 잘해요?”
“그럼요! 제가 녹림 수적들 중에서도 물질은 최고였습니다!”
“그것만 잘해서 문제였지. 다른 건 못 했거든. 그리고 그럴 거면 장강을 가던가. 이름도 수중이야 왜. 산중, 그런 거 좋잖아.”
“남의 물건을 뺏는 건 제 체질이 아닙니다, 대채주. 무기 들고 다니는 것두요.”
방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봐도 수중은 그런 험악한 인상의 산적들과는 도통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천성 자체가 무던하고 밝았다. 하지만 눈은 반짝거리는 것이 영악함이 언뜻언뜻 보였기에 방매도 호감을 가지고는 수중과 금세 친해졌다.
“나중에 석가장에 한 번 들리십쇼. 제가 아주 거하게 한 턱 내겠습니다.”
수중은 그리 말하면서 심양 시내에 위치한 객잔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객잔이지만 대개 객잔들이 1, 2층은 요릿집과 주루를 겸하는 경우가 많았다.
“우와! 진짜 크다!”
“심양에서 가장 크고 좋은 객잔입니다! 여기 음식도 맛있고 그리고…… 점소이!”
수중이 점소이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점소이가 수중을 보고는 쪼르르 달려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수 행수님. 부르셨어요?”
“귀하신 손님이 오셨다. 그러니 방 하나 내어 주거라.”
“그럽고 말죠!!”
점소이는 수중에게 대단히 예의가 발랐다. 석가상단의 행수가 얼마나 대단한 위치인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수중은 점소이의 손아귀에 몇 푼을 찔러주었다.
“감사합니다, 행수님!”
수중이 쥐여 준 몇 푼이 점소이의 얼굴에 활짝 미소를 짓게 만들었다. 감령은 피식 웃고서는 공손해진 점소이가 안내해 주는 곳으로 방매와 함께 들어갔다. 스윽 그렇게 콧노래를 부르던 점소이의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고개를 갸웃한 점소이가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고는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무, 무림인.’
모용세가의 영향권에 심양 전체가 들어 있었기 때문에 무림인들을 보지 못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점소이는 자신의 앞에 선 이의 얼굴을 보고서는 벌벌 떨었다. 딱 보더라도 심상치 않아 보이는 것이, 까딱 뭐라도 하나 잘못 했다가는 목이 날아갈 수도 있겠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그건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일종의 육감이자 생존본능이었다.
“어, 어…….”
“비워라.”
“예. 예?”
“객잔을 비우라 하였다.”
당중약은 싸늘한 눈으로 점소이에게 차갑게 말했다. 그가 공명심에 앞서 있다고는 하나 그래도 무림맹 주작단의 단주로서 지켜야 할 최소의 선은 잘 알고 있었다. 거기에 모용세가에 뒷일을 부탁하였으니 눈치를 볼 것도 없었다. 적어도 심양 내에서 모용세가의 행보에 딴지를 걸 수 있는 방파나 문파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 아, 주인 나리께 고하겠습니다.”
“주인 나리께 고하지 말고 먼저 비우라 하지 않았느냐!!!!”
당중약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점소이가 어깨를 찔끔했다. 갑자기 왜 자신 앞에 무림인이 나타나 이 사달을 벌이는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꾸물대다가 죽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점소이는 벌벌 떨리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겠습니다.”
점소이가 객잔에 앉은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뭐라고 말하자 손님들이 조용히 일어났다. 그들도 당중약의 흉흉한 기세를 보자 군말 없이 일어선 것이다. 그중에는 깨나 힘 좀 쓴다는 것을 자랑으로 삼고 다니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들도 최소한의 눈치는 있었다. 당중약과 함께 그 뒤에 선 주작단의 무인들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볼 정도의 눈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당중약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객잔 밖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누구냐!”
당중약이 뾰족한 목소리로 소리치자 객잔의 문이 끼익 하고 열리더니 모용중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당중약의 날카로운 시선에 긴장한 듯 목이 뻣뻣해지는 것을 느꼈지만 이내 긴장을 떨쳐 냈다. 주작단은 적이 아니라 아군이었다. 더군다나 자신은 요녕의 패자인 모용세가의 장자였고. 비록 중원무림에서 중원의 끝자락에 위치한 요녕과 모용세가를 무시한다고는 하나 자신을 무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는 당중약에게 다가가 포권을 했다.
“후배가 대선배께 인사드립니다. 모용중이라 합니다.”
“모용중…… 유성검의 아드님이셨군. 정암협이라 했던가?”
“알아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독절 대협.”
당중약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사냥감이 바로 코앞에 있었기 때문에 당중약은 길게 말하지 않았다.
“유성검께 말을 드리고 나왔거늘. 어찌하여 온 것인가?”
당중약은 후배란 것을 알자 곧바로 말을 낮췄다. 모용중은 그런 당중약의 무례한 태도에 불쾌했지만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는 당중약에게 말했다.
“심양에서 일어난 일에 어찌 모용이 빠질 수 있겠습니까.”
“주작단을 믿지 못한다는 말인가?”
당중약은 모용중이 눈치도 없이 끼어들려고 하자 곱지 않은 눈으로 쳐다봤다. 옥면산군 감령을 생포하는 공을 모용세가와 나누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용세가의 가주도 아니고, 그의 아들이란 놈이 모용세가의 무인들을 우르르 끌고 왔다는 것이 당중약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곳은 우리 주작단에게 맡겨도 되네.”
“심양은 모용의 땅입니다. 독절 대협.”
당중약의 불쾌함을 모용중도 느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모용의 명예를 실추하지 않기 위해 모용재가 막는 것을 뿌리치고 나온 모용중이다. 당중약이 몇 마디 한 정도에 물러날 생각이었다면 이곳까지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허니 대협꼐서 양보를 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놈!”
당중약은 자신보다 한참 어린 모용중이 하는 말에 분노를 터뜨렸다. 그러자 소름 끼치는 기운이 모용중을 찍어 눌렀다. 모용중은 이를 악 물고는 흘러나올 뻔한 신음을 가까스로 삼켰다.
“주작단, 아니 감히 당가의 행사에 끼어들겠다는 것이냐.”
“이…… 심양은…… 당가의 땅이 아니라…… 모용의 땅입니다.”
주륵. 모용중의 입가에서 한 줄기 피가 흘러나왔다. 그 피를 본 당중약은 분노를 가라앉히며 기운을 거둬들였다. 당중약이 아무리 생각이 없다고 해도 심양에서 모용중의 입가에 피가 흐르는 것을 보고도 손을 쓸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당가와 원한을 지고 밤에 편히 자기를 바라는가.”
당중약은 차가운 목소리로 모용중에게 말했다. 모용중은 모골이 송연해졌지만 표정을 바꾸지 않고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어찌 당가와 원한을 지려 한다 생각하십니까. 심양무림의 일에 모용이 나서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데 말입니다.”
“……좋다. 모용 후배와 모용의 무인들은 외곽을 맡아라.”
“예, 대협.”
“그 누구도 도주를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당중약은 으름장을 놓듯 모용중에게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표정이 안 좋은 것은 모용중도 마찬가지였다. 외곽을 맡으라는 소리는 의도적으로 이번 행사에서 모용을 배제하겠다는 뜻이다. 더군다나 제 아무리 당가의 주작단주라고 해도 당중약이 모용의 심장인 심양에 들어와 무례를 범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더 나아간다면 정말 손을 쓸지도 모르니.’
모용중이 원한 것은 모용세가의 명예가 실추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이 정도만 해도 됐다. 세간의 눈에 심양에서 벌어진 일에 모용이 개입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이대로 검주까지 간다.’
모용중은 굳게 다짐했다. 둘째인 모용청이 보고 온 것을 아버지이자 가주인 모용수가 필요 이상으로 신뢰한다는 것에 반항심을 느낀 모용중이다. 모용청은 어리다. 무공에 대한 재능은 뛰어날지라도 어리고 경험이 부족했다. 그러니 모용청이 보고 온 것이 사실일 리 없다.
‘사실이라 하여도 십검단과 주작단이 함께 한다면, 못 잡을 것도 없다.’
모용중은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 그런 결론에 이른 것이다. 그때 당중약이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 악기 연주를 하듯 손가락을 놀리는 것이 모용중의 눈에 보였다.
‘독공(毒功).’
천하일절이라는 당가의 독공이다. 당중약은 그 독공으로 독절이라는 별호까지 얻었다. 알고도 못 막는다는 당가의 독공을 바로 눈앞에서 견식할 수 있다는 것은 큰 기회다.
‘무향, 무취, 무미.’
당중약의 하독은 은밀하고 신속했다. 동시에 모용중이 감각을 활짝 열고 있어도 느껴지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그만큼 당중약의 독공이 뛰어나다는 것의 반증이다. 상대가 아무리 녹림을 주름잡은 대채주라고 할지라도 독공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하나, 둘, 셋.’
당중약의 손가락이 하나씩 접혔다. 독이 충분히 퍼지고, 효과를 발휘할 때까지 시간을 재는 것이다. 그리고 당중약의 마지막 손가락이 접혔을 때, 주작단의 무인들이 은밀하게 객잔 전체를 포위했다. 까닥 당중약이 고개를 끄덕이자 주작단 무인들의 손에 암기가 들렸다.
“쳐라!”
그리고 당중약의 입에서 날카로운 고함소리가 터져 나옴과 동시에 객잔의 내원을 포위하듯 둘러싼 주작단 무인들의 손에서 암기가 발출됐다. 쌔애애애액!!! 수백 발의 암기가 내원을 노리고는 쏘아져 나갔다. *****
“후우.”
스르륵 바닥에서 한 치 정도 떠올라 있던 호선이 사륵거리는 옷자락과 함께 바닥에 착지했다. 그리고는 눈을 살며시 뜨자 정순한 선기가 호선의 눈에서 뿜어져 나왔다가 금세 사그라들었다.
“옥 낭자는 괜찮은 것이오?”
눈을 반개한 채 사륵거리며 나풀거린 하얀 옷자락에 투귀대 고수들이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정말 선계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른한 듯 처진 눈꼬리와 가만히 있어도 농염해 보이는 호선의 얼굴은 남심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그들 중에서는 여포만이 옥령에게 푹 빠져 있어 그런 호선의 미모에도 흔들리지 않았을 뿐이다.
“어이구. 달린 놈들이라고 아주 침까지 흘리겠다?”
슌스케와 마익후까지 호선의 미모에 순간적으로 홀려 버렸기 때문에 만우가 피식 웃으며 목소리에 내공을 담아 그들의 정신을 일깨웠다.
“헉!”
“허억!”
“후우.”
그제야 정신을 차린 고수들이 민망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만우는 그들을 보면서 비웃었지만 사실은 속으로는 적지 않게 놀란 상태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냥 고수들도 아니고 무려 초절정의 고수들이다. 개중에는 화경에 오른 주창까지 껴 있었다. 그런데 호선이 순간적으로 그 모두를 홀려 버린 것이다. 만우는 볼을 긁적였다. 오도리 부족의 전사들을 상대로 살계를 열면서 그녀의 영성을 침범한 악기(惡氣)가 청령단의 정순한 선기와 섞이면서 묘하게 변한 듯했다.
‘구미호(九尾狐)도 아니고.’
악기가 영물의 영성을 침범했다는 것은 타락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대량의 청령단과 뒤섞이면서 묘한 색기로 변해 초절정이나 되는 고수들을 한순간에 사로잡았다. 그 마력은 거의 전설 속 구미호의 마력에 가깝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정신은 차릴 수 있을 거예요.”
호선은 반개했던 눈을 완전히 떴다. 옥령의 몸에 녹아 있는 혈성의 잔재를 녹여 내는 데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만우는 호선의 기운이 한층 더 강성해진 것을 느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혈성이 폭주한 것이 다행이네.”
“네, 맞아요. 혈성이 폭주하지 않았더라면 저도 건드리기 힘들었을 거예요.”
청령단으로 원래의 경지를 조금이나마 회복한 호선은 놀랍게도 혈성을 흡수할 수 있었다. 물론 옥령의 몸에서 한 번 크게 폭주한 혈성이 부서져 있는 상태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강력한 운명을 지닌 혈성이기에 만약 단단했다면 호선이라고 해도 무리였을 것이라 호선은 말했다. 이전에 한 번 보았던 주작 정도는 되어야 가능할 것이라고. 하지만 한 번 폭주를 일으킨 혈성이 약화되어 부서진 상태이기 때문에 호선이 파편을 흡수해 그것을 그녀의 기운으로 삼는 것이 가능했다.
‘선주가 있으니 시간은 걸리지만 악기도 알아서 정화가 될 테고.’
호선이 청령단을 얻기 전까지는 만우가 직접 호선의 영성을 침범한 기운을 빼내 주어야 했다. 추궁과혈의 형태를 띠어야 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눈에는 무자비하게 두드려 패는 것처럼 보인 것이 바로 그 과정이었다. 하지만 청령단, 선주가 생겼으니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 영물의 선주는 그 자체가 정화의 성질을 띤다. 허니 살계를 열며 호선의 영성이 오염된 것도, 혈성을 흡수하며 그녀의 몸에 남을 잔재도 선주가 알아서 해결을 해 줄 것이다.
“그럼 이제 급한 불은 다 끈 거지?”
만우는 여포와 주창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말했다. 그러자 정신을 차린 주창이 만우와 호선에게 포권을 했다.
“도움에 감사드리오.”
“감사드리오, 검주!”
주창의 선창에 투귀대 고수들이 만우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만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예의를 아는 놈들이라 다행이었다.
“감사드립니다. 천하제일검.”
그중에서도 마일은 만우를 천하제일검이라 부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다른 투귀대의 고수들이 검주라 부른 것과는 확연하게 다른 자세였다.
“네 동료들이 썩 유쾌해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전 무인이 아니라 군사입니다, 천하제일검.”
“흐흐. 머리 쓰는 놈들이 난 그래서 싫어.”
만우의 말에 마일의 얼굴이 설핏 굳었다. 하지만 이내 다시 부드럽게 풀렸다. 만우의 말에 뼈가 있었지만 자신들에게 적대적이지 않다는 것에 만족해야 할 때였기 때문이다.
“에구구. 나이도 먹으니까 역졸 노릇하는 것도 힘드네. 난 들어가서 잔다?”
가장 어린 만우가 허리를 두드리면서 노인네라도 된 것 마냥 하는 말에 다들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무공 경지로만 따지면 이백 살을 먹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데, 아직 이립(30세)도 되지 않았다는 것을 자각하니 뭔가 뻘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우는 쉬러 갈 수 없었다.
“검주 대협. 검주 대협!!!”
누군가 만우를 애타게 찾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목소리가 바로 얼마 전에 들었던 목소리였다. 만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저게 미쳤나. 여길 왜 와?”
분명 그때 놈들은 만우를 두 번 다시 안 볼 것처럼 오도리 부족에서 도망쳤다. 왕창 깨졌으니 창피하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랬던 놈이 돌아와 자신을 찾고 있었으니 만우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덜컹! 슌스케가 만우의 눈치를 살피고는 문을 열자 문 밖에 서있던 익숙한 얼굴, 모용청이 만우를 향해 포권을 취해 보였다.
“다신 안 볼 것처럼 도망가더니?”
만우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모용청을 쳐다봤다. 모용청은 잔뜩 어두운 얼굴로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드릴 말씀이 있어 왔습니다.”
“그건 알아. 그러니까 왔지. 뭐, 혼자 온 것을 보니 앙심을 품고 온 것 같지는 않고.”
생각해 보니 심양에 들어온 이후 모용은 머리카락도 보지 못했다. 그걸 보면 자신이 한 말을 제대로 알아들은 것은 맞았다. 하지만 과연 모든 모용들이 그랬을까?
“집안 문제냐?”
“…….”
날카롭게 찌르고 들어오는 만우의 한 마디에 모용청은 입을 조개처럼 꾹 다물었다. 무공은 천하제일, 아니 고금제일(古今第一)을 논하는 수준에 저런 머리까지 가지고 있다니. 자신과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순간적으로 질투심이 확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모용청은 빠르게 자신의 감정을 다스렸다.
“대협의 수하인 옥면산군, 그자가 위험에 처했습니다.”
“위험? 감령이?”
갑작스레 감령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만우의 눈이 커졌다. 모용청은 잠시 우물거리다가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겠다 생각하여 입을 열었다.
“무림맹에서…….”
*****
[꺄아아악!]
당미령의 표정이 굳었다. 그리고 그것은 어색하게 찻잔을 쳐다보고 있던 간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미령의 유모가 고개를 돌려 밖을 쳐다봤다.
[싸, 싸움이야!]
[어디!?]
[저기, 저기 있는 객잔!]
그 순간 당미령의 머릿속에 당중약이 스쳐지나갔다. 왜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건 당미령만의 일종의 육감이었다.
‘숙부가!’
그녀는 당중약에 대해서 잘 알았다. 명예욕과 공명심이 하늘을 뚫을 것처럼 커다란 사람이다. 욕심이 가득하고 욕망에 충실했지만 그나마 당미령의 말을 잘 듣는다는 것이 장점이 사람이었다.
‘너무 오랫동안 나와 있었구나!’
당미령은 잠시 볼 일을 보기 위해 나왔지만 그 시간이 생각보다 길어졌다. 그리고 그 시간이라면 당중약에게 이상한 바람이 들게 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미령아.”
그런데 그때 유모가 일어나 당미령의 어깨를 짚었다. 당미령의 눈이 커졌다. 어느새 그녀의 주변에 무기를 꼬나쥔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개개인의 실력은 별로지만, 그들이 입고 있는 옷에 써진 커다란 글자를 본 당미령은 앓는 소리를 냈다. 석(石).
“석가장…….”
대륙제일상단인 석가상단의 등장이었다. *****
“이, 이 빌어먹을 마인 놈들이!!!!!”
사림곡의 대표 고수 중 하나인 옥면산군 감령을 손쉽게 생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던 당중약의 얼굴이 바람 빠진 돼지오줌보처럼 변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투두둑! 수백 개의 암기가 공간을 까맣게 물들이며 발출됐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감령이 들어간 내원은 멀쩡했기 때문이다. 대신 내원 주변의 초목들에 빼곡하게 각종 암기들이 모조리 박혀 있었다. 무엇인가에 튕겨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검절귀!!!!!”
“위선자들답구나. 사파의 삼류도 쓰지 않을 것 같은 이런 조잡한 기습이라니.”
모습을 감추고 사라졌다 생각한 천마대가 내원을 보호하고 나선 것이다. 이제 보니 천마대의 무인들이 여장을 푼 곳이 바로 이 객잔인 모양이었다. 검절귀 도겸은 차가운 눈으로 당중약을 보면서 비웃음을 뿌렸다. 대놓고 비웃음을 당한 당중약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죽여 버리겠다!!!”
“어떻게. 주작단 전부도 아니고 고작 네놈들만으로?”
처억!! 주작단의 무인들이 멈칫거렸다. 도겸의 말대로 주작단 무인 전체가 객잔에 온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 저들은 온전한 전력이었다. 천마대주인 검절귀 도겸과 오마장, 그리고 나머지 아흔 네 명의 천마대의 고수들. 밖에 모용세가가 있다고는 하지만 정파에게는 사신이라 불리는 천마대의 고수들에는 손색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당중약은 개의치 않았다.
“내가 왜 독절이라 불리는지 알려주겠다!”
당중약은 눈이 훼까닥 돌아가서는 소매 안에서 양 손을 곧추세웠다. 그러자 독 때문에 손끝이 보라색으로 물든 당중약의 손에 공력이 모여들었다.
“이건 또 뭔 난리야!”
밖에서 이 난리가 나는데 내원에 들어간 감령이 눈치를 채지 못할 리 없다. 그 때문에 나와 본 감령은 웬 무림인들이 서로 대치하고 있자 고개를 갸웃했다.
“이거…… 뭐야. 설마, 여기로 던진 거냐?”
감령의 눈에 내원의 정원을 빼곡하게 덮은 암기들이 들어왔다. 그 암기들이 향한 곳이 어딘지 뻔했기 때문에 감령의 두 눈이 싸늘해졌다. 하지만 동시에 모골이 송연해지기도 했다.
“사천당가로구나!”
사천당가. 사천당가에서만 사용한다는 매의 깃털 모양을 한 응우침을 감령이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것은 저 놈들이 사천당가의 무인들이란 뜻이다. 만약 대치를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