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 주작단이라고 (3)2022.01.22.
당미령은 자신의 수신호위이자 시비 역할을 하는 여인과 함께 심양의 저잣거리를 거닐었다.
“요녕에서 가장 큰 성 중 하나라고 해서 기대했는데.”
“사천에 비하면 어쩔 수 없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사천의 중심인 성도에 비하면 요녕은 뒤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지역이 척박하고 외적과 마주하고 있는 국경으로부터 멀지 않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사천보다 훨씬 더 관군들이 많이 보였고 또 겨울은 혹독하기로 유명했기에 사천에서 나고 자란 당미령의 눈에는 모든 것이 잿빛 풍경처럼 보였다.
“그래도 사람 사는 냄새는 나지 않나요?”
시비 겸 유모이기도 한 수신호위가 당미령을 보면서 웃어 보였다. 당미령은 무공보다는 머리가 더 좋았기에 주작단의 군사 역할을 했다. 물론 당가의 여식이기 때문에 그 무위가 낮지는 않으나 일류 초입 정도로 대부분 일류의 끝인 다른 주작단의 수준에 비해 뒤쳐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때문에 당가주는 늘 당미령의 곁에 수신호위를 붙였다. 그만큼 애지중지하는 금지옥엽이 바로 당미령이었다.
“응. 저자는 가장 활기 넘치는 곳이니까.”
잿빛 풍경인 심양이어도 저자만큼은 사람 사는 분위기가 났다. 사천에 비해 발전도가 뒤쳐진다는 것이지, 요녕성의 주도인 심양은 유동 인구가 상당히 많은 편이었다.
“대장간이 어디 없을까? 응우침(鷹羽針)이랑 철질려(鐵蒺藜)가 부족한데.”
“음…… 암기를 만들 줄 아는 대장장이가 있을지 모르겠어요.”
“찾아봐야지. 개방에 가면 되려나?”
당가의 철칙 중 하나가 바로 유비무환(有備無患)이다. 돈 주머니는 비어도 독주머니와 암기 주머니는 비면 안 된다는 가르침을 어려서부터 받아왔다. 독과 암기가 준비되지 않은 당가의 무인은 그냥 쭉정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독과 암기야말로 무림의 모든 이들이 당가를 두려워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게다가 당가의 무인들이 쓰는 암기를 만드는 것은 일반 대장장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늘 당가의 무인들은 암기 주머니가 든든해야만 했다.
“없네.”
“그러게요. 거지가 없어요.”
“어딘가 있을 거야. 찾아…….”
때문에 그런 실력을 가진 대장장이를 수배하기 위해 당미령은 개방의 거지를 찾으려 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심양의 길거리에는 거지 하나가 보이지 않았다. 성도에도 길만 조금 걸어가도 바로 보이는 그 거지들이, 세상천하에 거지가 없는 곳이 없다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 그 개방의 거지들이 없었다.
“응?”
당미령이 대장간 주변에서 기웃거리는 수염 거뭇한 남자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당미령의 눈이 가늘어졌다. 팔뚝은 사람의 것인가 의심이 갈 정도로 두꺼웠고, 무거운 것을 수없이 휘두른 듯 숭모가 불룩 솟아 있고 어깨와 가슴이 발달되어 있었다. 그런 체형은 옷으로 가린다고 하여 가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당미령의 눈썰미를 피해 갈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얼굴이 시커멓고, 손끝이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스윽 당미령은 고개를 돌려 주변의 대장간을 훑어봤다. 그런 당미령은 대장간 안에 있는 야장들의 손을 유심히 살폈다. 그런데 그 누구도 저 남자처럼 손끝이 까맣게 물들어 있지 않았다.
‘야장이네. 그것도 실력 있는.’
당미령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내공이 느껴지지 않으니 그녀보다 월등한 고수이거나, 아니면 야장이었다. 이런 길거리에 그 정도의 고수가 돌아다닐 리 없으니 당미령은 남자, 간장을 보면서 두 눈을 빛냈다. 암기에 지극히 까다로운 당가의 구미를 맞추기 위해서는 보통 실력을 가진 야장으로는 불가능했다. 하지만 당미령은 기억하고 있었다. 가문에 속한 야장들의 손끝이 자신의 눈앞에 짠하고 나타난 저 남자와 똑같이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유모.”
“응?”
“따라와.”
“어맛?”
당미령이 성큼성큼 앞장서자 놀란 시비 겸 유모가 얼른 그녀의 곁에 따라붙었다. 유모는 당미령이 일직선으로 주변 한 번 보지 않고 누군가에로 걸어가는 것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웬 산적 같은 남자에게로 당미령이 곧장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장간에 있는 야장이 아니라?”
“저 야장이 진짜 실력자야.”
“너도 원…… 아니. 미령이 네가 가장 잘 알겠지.”
당미령이 손해를 보는 일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니 당가에서 당미령을 당중약의 보조이자 실질적인 주작단의 우두머리로 보낸 것이다. 톡톡.
“어느 지역에서 오신 야장이십니까?”
당미령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간장에게 다가가 어깨를 톡톡 하며 두드렸다. 대장간을 돌아다니면서 명의 주조 방식과 사용하는 철의 품질 같은 것을 비교하고 있던 간장이 힐끗 쳐다봤다. 멍-. 그런데 당미령을 본 순간 간장의 이목구비가 확 하고 풀렸다. 눈에 확 띨 정도의 미녀가 말을 걸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걸어 다닐 때부터 망치와 모루를 가지고 놀았던 간장이다. 인생의 대부분을 대장간에서 보낸 간장은 여자에 대한 면역력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 찰나에 갑자기 당미령 정도 되는 미녀가 불쑥 말을 걸었으니 바락 긴장한 것이 당연했다.
“저기…….”
당미령은 잠시 이 야장을 뭐라 불러야 하나 고민했다. 무림인이 아니니 소협이니 대협이라 부를 수도 없었고, 이놈 저놈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사천 당가면 지역의 호족이자 유지였지만 전문 기술을 보유한 야장들은 그 신분이 평민이라 하여도 대우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보시오.”
당미령은 딱히 부를 말이 없어 대충 간장을 불렀다. 이름이라도 알면 성 뒤에 씨를 붙여 부를 텐데 그것도 아니었다.
“아, 아.”
간장의 얼굴 홍조는 덥수룩한 수염 안에 묻혔다. 그런 간장을 당미령의 유모가 미심쩍은 듯 쳐다봤지만 경계를 하지는 않았다. 간장이 내공 한 줌 익히지 않은 일반인이란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야장 맞습니다. 네, 야장 맞구 말고요.”
간장은 서둘러 대답했다. 간장은 겉모습과 다르게 약관이 갓 지났다. 수염 아래 어떤 얼굴이 있는지 상상할 수 없었지만 스스로 밝힌 나이가 그랬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혼인을 올리고도 남았을 나이지만 간장은 그런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만우를 만나지 않았다면 검계에게 붙잡혀 쓰레기 같은 검이나 만들어 대는 그런 놈으로 남았을 터였기 때문이다. 그런 인생에서 미래를 꿈 꿨을 리 없다.
“내 삯은 후하게 쳐 드릴 터이니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습니까?”
당미령은 간장에게 웃으며 말했다. 당미령의 꽃 같은 얼굴에 한 줄기 미소가 깃들자 말 그대로 꽃이 만개한 것 같은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물론 간장에게만 유독 그게 심하긴 했다. 멍-. 간장의 심장이 쿵쾅거리면서 심상치 않게 뛰기 시작했다.
*****
[그럼 뒤처리를 부탁드립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오는 둘째, 모용청의 영민한 목소리를 우두커니 앉아 듣고 있던 모용수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허어.”
주작단의 무인 중 하나가 심양의 저자에서 공적 중 하나인 옥면산군 감령을 봤다며 주작단주인 당중약이 그를 추포하러 가겠다며 공조를 요청해 왔다. 모용청은 그런 주작단의 요청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옥면산군 감령이 누구의 수하인지 모용청이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검주와 옥면산군이라. 필수교어도 있었고, 괴검과 괴권까지 합한다면…….”
모용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정도만 되어도 모용세가와 백중지세를 겨룰 수 있는 고수들이었다. 고작 다섯 명. 그 다섯의 전력이 모용세가 전체의 힘과 맞먹었다. 화경의 고수가 있고 없고가 그렇게 크게 차이가 났다. 그 때문에 모용세가에서는 화경의 고수를 배출하는 것에 아주 열을 올리고 있었다. 허나 화경의 고수가 그렇게 뚝딱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었기에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고 있었지만 말이다. 화경의 고수 하나와 초절정의 고수가 넷. 모용세가의 가주이자 유성검이라 불리는 모용수가 초절정 고수였다. 모용세가가 이상한 것이 아니다. 검주와 그 일행들에 이상할 정도로 고수들의 비율이 높은 것뿐이다. 이제는 그 검주의 일행에 화경의 고수만 척사영과 척일, 여포, 셋이 더 늘어났다는 것을 그가 알면 대체 무슨 표정을 지을까. 아마 무림의 기둥이자 태산북두라 불리는 소림과 무당에 가야 그 정도 화경의 고수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단일세력으로는 단연 마교 정도는 되어야 했고. 끼익
“가주님.”
“들어오너라.”
모용청이 인기척을 내자 모용수가 불러들였다. 모용청이 모용수에게 주작단의 무인이 한 말을 그대로 읊었다. 모용수가 문 뒤에서 그것을 전부 들었지만 다시 한번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용청이 그런 모용수에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가주님. 제 말을 믿어주셔서.”
“네 말을 믿은 것이 아니다.”
모용청의 말에 모용수는 단호하게 말했다. 모용청이 고개를 들어 쳐다보자 모용수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가문에 해가 될 이유를 만약이라도 만들고 싶지 않은 것뿐이다.”
“만약 제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검주 그자가 진정으로 천하제일인이라면 어찌하시겠습니까.”
모용청은 당돌하게도 가주를 빤히 쳐다보면서 그리 물었다. 모용수는 그런 모용청의 눈빛에 만족스럽게 웃었다. 자신이 가주라고는 하나 그 권위에 짓눌리지 않고 당돌하게 물어오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천하제일인이라 불린 것은 무림의 역사상 셋뿐이다.”
“천마와 달마대사, 그리고 장삼봉 말씀이십니까?”
하늘은 얄궂게도 언제나 천하제일인을 나게 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천마와 달마대사, 장삼봉은 무림의 역사에 기념비적인 인물들일 수밖에 없었다. 허나 그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천하제일인이다. 그 이후에 나온 무림인들은 언제나 숙명처럼 강력한 호적수가 존재해 천하제일이란 별호를 붙이지 못했다. 한데 그것이 이립도 되지 않은, 동이에서 온 새파랗게 어린놈에게 가 붙었다.
“그리고 그들은 마교와 소림사, 무당파를 세웠지.”
소림사는 그 전부터 있어 왔다. 허나 달마대사를 기점으로 무승(武僧)들이 나오면서 문파로서의 색채를 띠기 시작했다.
“우리 모용의 힘만으로 천하제일세가를 세울 수 없다면, 천하제일인이라도 품어야 하지 않겠느냐.”
“가주님.”
모용수의 결단에 모용청이 눈을 크게 떠 보였다. 모용수는 껄껄 웃었다.
“그러리란 보장은 없다. 네 말을 나도 믿을 수 없고, 무림 동도들도 마찬가지일 테니. 허나 만약 의심의 싹이 조금이라도 튼다면, 내 그를 잡을 것이다.”
“…….”
모용수의 두 눈이 이글거렸다. 척박한 요녕에서 힘을 비축하며 화경의 고수를 기다린 것은 바로 그 야망 때문이다. 천하제일(天下第一) 모용세가.
“자리를 마련하거라.”
“자리라 하시면…….”
“검주 만우. 주작단으로 인해 불쾌해 할 그 고수를 달랠 자리를 말이다.”
“예, 가주님.”
모용청이 꾸벅하고 고개를 숙였다. 한 세가를 이끌어가는 가주가 이런 결정을 내리는 것은 쉽지 않은 법이다. 모용청은 그것을 이해했기 때문에 진심으로 모용수의 결단에 감탄했다. *****
“삼검단주!”
단야검 모용재가 얼마나 급했는지 경공으로 흙먼지를 휘날리며 삼검단주인 모용중과 십검단의 무인들을 붙잡았다.
“지금 이게 무엇 하는 겐가!”
“숙부라면 이해하리라 생각했습니다.”
모용중의 뒤로는 삼검단의 무인들만 따르는 것이 아니었다. 모용중이 지모에서는 모용청에 비해 부족할지라도 세가를 위하고 수하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인덕은 더 높았기에 많은 십검단의 무인들이 그를 따랐다. 그런 모용중의 호출에 그에게 도움을 받은 십검단의 무인은 주저하지 않고 발 벗고 나섰다. 그렇게 모용중의 뒤를 따르는 십검단 무인들의 수만 이백이 넘었다.
“분명 가주께서 경거망동하지 말라 이르셨거늘!”
“주작단에서 찾아왔다 들었습니다. 한데 그냥 보내셨지요. 뒤처리나 하시겠다면서.”
모용중은 무겁게 말했다. 모용재가 그런 모용중의 말에 멈칫했다. 하지만 가주가 그런 결정을 내린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가주의 말은 곧 하늘이다. 정녕 그것을 모르는 겐가!”
“허나 모용세가의 명예와 자존심이 걸린 일입니다.”
세가에서 가주의 말은 곧 법이다. 적어도 세가 내에서는 황제보다 가주의 권위가 더 강했다. 그런데 모용중은 지금 그런 가주의 권위를 정면에서 부정하고 있었다. 다른 이였다면 모용재가 검을 들어 베었을 것이나, 모용중은 차기 모용세가의 가주다. 그렇기에 모용재는 목소리를 높였다.
“그 명예와 자존심이 가주의 말을 거역하면서까지 지킬 정도란 말인가!”
“스스로 이름을 낮춘 것입니다. 제 모용세가에서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습니다.”
“삼검단주는 아직 가주가 아니다!!”
“허나 제가 물려받을 세가이기도 합니다.”
모용중은 두 눈을 차갑게 빛냈다. 모용재가 쉽게 비키지 않을 것임을 느꼈는지 모용중이 기세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실력으로 들어가자면 모용재가 모용중에 비해 한 수 정도 뒤쳐진다. 모용재는 절정인 반면 모용중은 초절정의 초입이었기 때문이다. 절정의 극에 달한 모용재와 모용중이지만 그 경지의 벽 앞에서 평생을 넘지 못하고 무릎을 꿇는 이들이 수두룩하다. 그렇기에 모용재는 모용중의 기세가 자신을 죄여오는 것을 느끼면서 이를 악물었다. 생사결이라면 수많은 경험을 쌓은 모용재를 모용중이 쉽게 이길 수는 없었다. 제 아무리 경지의 벽을 넘지 못했다고는 하나 모용재가 쌓은 경륜이란 그리 쉽게 볼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허나 생사결이 아닌 내력의 싸움이라면 모용재는 모용중을 이길 수 없다.
“뒤처리라니. 우리 모용이 어찌하여 당가 따위의 뒤처리를 담당해야 한다는 겁니까. 당가 놈들이 우리 모용의 뒤처리를 한다면 모를까.”
“청이의 말을 듣지 못한 겐가!”
“들었소. 검주가 현경이라지? 하. 말도 안 되는 소리.”
“조심해서 나쁠 것이 없는 상대네. 현경이 아니더라도 검주는 무림십좌의 일좌를 차지한 화경의 고수가 아닌가! 주작단이 먼저 나선 다음에…….”
“그래서 주작단이 검주를 제압하는 데 성공을 한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
모용재는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만약 모용중의 말대로 일이 그렇게 된다면 결국 요녕의 패자라 자부하는 모용세가는 결국 손가락만 빨며 구경을 하게 되는 셈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세간에서는 또 다시 모용세가를 놓고 왈가왈부를 하면서 떠들어댈 것이다. 안방에서 주작단에게 작전권을 줘 놓고 그냥 구경만 하는 무능한 세가로. 그렇게 되어 실추될 모용세가의 명예를 다시 회복하려면 얼마만의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모용중은 그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허나 가주의 명을 어기는 것은 반역이다!”
“달게 벌을 받겠습니다. 모용의 기치를 드높인 후에.”
모용재는 할 말을 잃었다. 모용중은 말로 한다고 해서 쉽게 뜻을 꺾을 것 같지 않았다. 게다가 벌을 받을 각오를 하고 나가는 모용중을 무슨 수로 붙잡는단 말인가. 모용중이 한 말 역시도 세가를 위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
“…….”
모용중은 결국 모용재를 스쳐지나갔다. 그런 모용중을 위해 모여든 십검단의 무인들이 뒤따랐다. 이번 사건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가주의 행동에 실망을 한 젊고 혈기왕성한 무인들이 대부분이었다.
“가주께 알려야겠군.”
모용재는 침중한 얼굴로 멀어져 가는 모용중과 모용세가의 무인들을 보면서 몸을 돌렸다. ***** 호선은 꿈을 꿨다. 그 꿈 안에서 호선은 등선을 하고 있었다. 그런 호선의 품 안에는 그녀가 오백 년 동안 참선을 하면서 목숨만큼이나 중히 여기고 귀하게 여기던 그녀의 선주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꿈, 인가.]
호선은 스스로가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하지만 등선로를 걷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스스로 무언가를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꿈 안에서 그녀는 철저한 방관자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내 선주.’
호선의 선주는 용(龍)의 여의주(如意珠)처럼 둥근 구슬이었다. 여의주와 다른 점이라면 그녀의 털빛만큼이나 새하얗다는 것이었다. 등선로를 걷는 호선은 그 하얀 구슬을 품에 꼭 끌어안고 그것을 쓰다듬었다. 호선은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긴장하긴.]
그렇게 염원하던 등선로를 걷고 있었지만 호선은 스스로가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게 아니고서야 저렇게 미친 듯이 선주를 쓰다듬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선주를 늘 분신처럼 여기던 호선이 가지고 있던 버릇 중 하나였다. 비록 지금은 선주가 없어 저렇게 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제 떨어지겠지.]
호선은 이 꿈에 개입할 수 없는 방관자이나 그녀는 미래를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고 있는지도 깨달았다.
[청옥. 아니, 청령단이라는 아이 때문이구나.]
검주가 그녀를 위해 선뜻 건넨 무가지보(無價之寶)와 교감을 하면서 호선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허나 그녀의 정신은 잠들지 않았다. 그녀의 육체는 행동을 멈추고 잠들었지만 그녀의 정신은 청령단과 교감을 했다.
[무엇인가의 조각, 혹은 파편.]
호선은 조심스럽게 교감을 하면서 청령단에 대해서 알아갔다. 모든 선주가 그렇듯 희미한 영성을 띄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니 푸른 청옥은 스스로를 청령단이라 불러 달라 하였고, 호선은 그리 불렀다. 그리고 이름에 담긴 언령이 호선과 청령단을 하나로 묶었다.
“아!”
그런데 바로 그때 등선로를 걷던 호선, 과거의 호선이 고꾸라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호선은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쓰게 웃었다. 그런데 그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 호선의 눈에 들어왔다.
[홍실.]
그녀에게 지상으로부터 이어진 기다란 홍실이 호선의 허리를 묶어 놓고 있었다. 그때 호선은 보지 못했지만 지금의 호선의 눈에는 보였다. 그 홍실은 그녀가 미처 정리하지 못한 인연을 뜻한다. 약속의 힘. 그리고 호선은 어느새 자신의 몸에 홍실이 묶여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홍실의 끝에 홍실의 주인이 서 있었다.
[아…….]
호선은 입을 벌렸다. 그 홍실의 주인을 보자 쿡 하고 가슴팍이 쑤셨기 때문이다.
[잊고 살았다 생각하였거늘.]
볼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잊었다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호선은 자신이 잊지 못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그렇게 지지부진하게 남겨 놓은 미련이 아직까지 남아 있었던 것이다. 호선을 돌봐주고 달래주었던, 더 나아가서 가족으로 받아들여주었던 그 사람.
[분아.]
화전민 마을에서 태어나 배를 곪고 자라던 이의 이름은 분이였다. 그리고 분이는 호선을 보면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잘 가.]
[어디를 가란 말이냐.]
[약속은 끝이 났으니까.]
[그러니까 어디로.]
분이는 호선에게 말을 했고 호선은 되물었지만 분이는 그저 웃어만 보였다. 스르륵
그렇게 웃기만 하던 분이가 당기자 호선의 허리에 묶여 있던 홍실이 스르륵하고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제야 비로소 호선은 분이, 더 나아가 화전민 마을과의 인연이 모두 끝났음을 깨달았다.
[끝에는 늘 새로운 것이 있대. 그러니까 호선아.]
분이는 호선을 보면서 환하게 웃어 보였다.
[꼭 하늘로 올라가 신선이 되지 않아도 돼. 복잡하고 괴로운 인세에도 신선이 되는 방법이 있을 거야.]
[등선의 길이라…….]
[네 앞의 인연을 소중히 해. 그러면…… 또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지.]
[내 앞의 인연?]
호선은 의문을 표했지만 분이는 수상스러운 미소만 지어 보일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순간, 호선은 강한 인력(引力)이 자신을 끌어당기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항거할 수 없는 힘이었다. 호선은 멀어지는 분이를 보면서 눈을 크게 떴다.
[난 분이가 아니야.]
분이 모습을 한 그것은 멀어지는 호선에게 환하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호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눈치는 채고 있었다.
[네가 앞으로 만나게 될 수많은 인연들을 묶어 줄 실의 주인.]
호선은 눈앞이 빛으로 물드는 것을 느끼면서 입술을 달싹였다. 홍실의 주인. 홍실과 청실을 엮어 연인을 만들어 준다는 이야기 속의 인물.
“월하노인(月下老人).”
번쩍! 호선이 두 눈을 번쩍 뜨면서 중얼거렸다. 그렇게 번쩍하고 두 눈을 뜬 호선의 눈 바로 앞에 만우의 뾰로통한 얼굴이 가득 들어왔다.
“뭐라는 거야. 정신 차렸으면 일어나 인마!”
만우의 퉁명스런 목소리가 호선의 고막을 뒤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