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6. 모용세가(1)2022.01.08.
“괜찮겠지요?”
“괜찮고 말고. 저 정도면 아주 싸게 먹힌 셈이지. 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는 척일을 보면서 동군영은 혀를 내둘렀다. 그 역시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무인이란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동군영은 고개를 돌려 뒤에서 뒷짐을 진 채로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만우를 쳐다봤다. 만우는 주변에서 그를 두렵게 쳐다보는 시선을 즐기는 것처럼 오도리 부족의 전사들 사이를 거닐었다. 그런 오도리 부족의 뒤로는 빈 어깨에 붕대를 감고 창백한 안색을 한 먼터무, 대추장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 그와 눈이 마주치자 동군영은 눈을 돌렸다.
‘결국 팔을 내놓다니.’
만우는 오도리 부족의 전사들이 죄를 저질러 놓고 무슨 숭고하게 대추장을 위해 희생하는 듯 구는 것을 대단히 못마땅해 했다. 만우 정도의 고수가 못마땅해 하는 것은 사실상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이들에게는 재앙이나 마찬가지다. 그것을 가장 먼저 눈치챈 사람이 대추장이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라고 할 수도 있을 듯했다.
[내가 전부 이들을 잘못 이끈 탓이오. 허니 일단 그 죄로 팔 하나를 내놓겠습니다, 엔두리시여.]
먼터무는 그리 외치면서 옆에 선 수하의 검을 손에 뺏어들고는 자신의 팔을 베어 냈다. 그러자 새빨간 피가 후두둑 하면서 땅바닥에 떨어져서는 고인 빗물 위로 번졌다. 먼터무의 팔이 땅에 떨어지자 만우의 눈가가 누그러졌다. 그리고는 그 모습을 본 호선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됐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끝이 났다.
‘싱겁게.’
정말로, 싱겁게도 말이다. 학살이라도 일어날까 노심초사했던 설미수는 다리가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만우의 기세 때문에 도저히 끼어들어 말릴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방매는 그런 만우에게 달려가 몇 번 엉덩이를 발로 찼다. 만우는 그런 방매의 발에 웃으면서 그냥 엉덩이를 맞아 주었다.
“돌아오는 길에 들릴 때까지 쾌차하시길 바라오.”
설미수는 어색한 얼굴로 대추장에게 말했다. 대추장은 창백한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팔 한 쪽을 내놓아야 했지만 대추장의 얼굴은 크게 어둡지 않았다. 전사 몇을 잃어버리고 또 몇이 상하기는 했지만 자신의 아들과 아우가 살았고, 부족이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무운을 빌겠소.”
대추장은 말에 오른 설미수와 인사를 한 뒤 일행의 가장 뒤에 선 만우를 조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어제의 그 거대한 백호는 놀랍게도 사람으로 둔갑하여 수레에 타고 있었다. 정확히는 수레를 탄 채로 혼절해 있었다.
“엔두리시여.”
“왜.”
만우에게서는 어제의 그 두려운 기세를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대추장으로 하여금 더욱 긴장하게 만들었다. 자기 자신을 완벽하게 다스리고 있다는 증거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것은 어제 보였던 그 무시무시한 기세와 신위가 감정이 격해졌기에 나온 것이 아니라는 소리다. 지극히 냉정하게 판단하고 생각하여 오도리 부족을 정말로 쓸어버릴 생각이었다는 뜻이다.
“떠나시는 엔두리를 위하여 부족의 보물을 준비하였는데…….”
“보물?”
만우가 흥미를 보였다. 그러자 안색이 하얗던 대추장이 화색을 띄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한 번 꼬인 만우와의 관계, 혹은 그의 감정을 풀기 위해 부족의 보물을 내놓을 생각까지 하고 있었던 것이다. 움찔 부족의 보물이라는 소리에 주변의 전사들이 움찔했다. 하지만 그들은 어제처럼 함부로 나서지 않았다. 어제 하마터면 오도리 부족이 사라질 뻔했다는 것을 모두가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추장이 절대로 자신의 명령이 있기 전까지는 나서지 말라며 신신당부를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여기 있습니다.”
달그락. 대추장은 만우에게 작은 목함 하나를 내밀었다. 만우는 자신의 손바닥 위에 놓인 목함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목함?”
“열어보시면 알 수 있으실 것입니다. 중원 어느 상단의 대행수의 목숨을 구해 주고 그 보답으로 얻은 것이옵니다.”
“흐음…….”
중원에서 나온 물건이란 말이었다. 만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겉으로 봐서는 그냥 평범한 목함이고, 별다른 특별한 것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난 검이 좋은데 말이야.”
“저, 저희 부족에는 엔두리꼐서 좋아하실 만한 좋은 검이 없어…… 송구합니다.”
“아니야. 그냥 해 본 말이야.”
만우는 쩔쩔 매는 대추장을 보면서 피식 웃고는 목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목함을 열려는 순간 만우의 눈이 커졌다. 찌릿!
“음…….”
만우는 손가락 끝에서 느껴지는 찌릿한 느낌에 손가락을 잠시 뗐다. 목함의 기운이 평범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무언가가 목함을 봉해 놓았기 때문이다.
“대추장은 열어보았나?”
“예. 열어보았습니다.”
“열어보았다고?”
만우가 손가락에 반탄력을 느끼고 손가락을 뗄 정도의 봉인 주술이 걸려 있었다. 그런데 내공 한 줌 없는 대추장이 열었다?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소리.’
만우는 손가락에 공력을 끌어올렸다. 그리고는 목함 위에 손을 올리자 만우의 손을 목함이 밀어내는 것이 느껴졌다. 만우는 피식 웃으며 손가락에 힘을 주어 봉인을 강제로 파괴했다. 그러자 목함에서 번쩍하는 빛이 터져 나왔다.
“헛?”
그 현상에 오히려 더 놀란 것은 대추장이었다. 만우는 약간 그슬린 목함을 열면서 대추장을 쳐다봤다.
“두말하기 없기다?”
“그…….”
대추장은 눈을 질끈 감았다. 빛이 한 번 번쩍이더니 목함 안에서 흘러나오는 신비한 기운이 내공 한 줌 없는 대추장에게까지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만우가 아니었으면 대추장이 평생 알지 못했을 목함의 숨겨진 비밀이었다.
‘나와의 인연이 아니었구나.’
특별한 물건은 본래 인연인 자를 찾아간다고 하였다. 그렇기에 대추장은 그 물건에 미련을 두지 않기로 했다. 오히려 이 물건으로 만우의 호감을 살 수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대추장과 오도리 부족에게는이득이었다.
‘명나라 황제가 우리 부족을 멸망시킬 작정이었단 말인가!’
어제 그 일이 있은 이후 설미수에게 들어 명나라의 황제가 죄인을 압송하여 연경으로 데려오는 호송단에게 도움을 주라고 했던 것의 진의를 알게 된 대추장이었다. 그 죄인이 바로 검주였던 것이다.
‘호송단이 아닌 사행단으로 온 이유가 있었구나. 그 조선에서도 감히 손을 댈 엄두를 내지 못한 엔두리이시니.’
하마터면 정말 어제 명나라 황제만 믿었다가 건주위지휘사는 커녕 부족 전체가 날아갈 뻔했다.
“그러시지요, 엔두리시여.”
만우는 피식 웃고는 목함의 뚜껑을 완전히 열었다. 그러자 그 안에서 청량한 기운이 흘러나오더니 주변에까지 퍼져 나갔다.
“흐읍.”
“어?”
“오오.”
그에 가장 민감한 것은 공력을 다루는 무림인들이었다. 목함 안에는 손가락만 한 푸른 청옥이 덩그라니 놓여 있었다.
“대장님. 영약(靈藥) 아닙니까?”
문형일이 눈을 반짝이면서 만우가 연 목함 안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쳐다봤다. 만우는 그런 문형일을 보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영약 따위가 아니다.”
만년화린의 내단이나 만년하수오, 인형설삼이나 공청석유, 만년석균처럼 자연에 존재하는 아주 영험하고 오래된 약초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약효를 지니고 있다. 그런 것들 중 한 가지만 먹어도 단숨에 갑자에 달하는 내공을 얻으며 천하고수의 반열에 발을 올려놓을 수 있다는 기연에 관한 이야기들이 무림인들 사이에서는 전설처럼 내려왔다. 그런 자연의 보물은 선조가 몇 대에 걸쳐 덕을 쌓는다 하여도 인연이 닿아야만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다. 사실상 그 확률이 벼락에 연달아 맞을 확률보다 낮았다. 하지만 무림인들은 그런 자연의 보물에 대한 욕심으로 끊임없이 그를 모방할 수 있는 길을 찾아왔다. 그래서 그 결과로, 복잡한 약초와 약재, 가끔은 독초까지 배합하여 자연의 보물과 최대한 비슷한 약효를 지닌 것들을 만들어 내었고 그것들까지 영약이라 불렀다. 개중에는 정말로 그런 전설 속의 영약들 수준의 약효를 지닌 것들이 나오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소림의 대환단이나 소환단, 무림의 태청단 같은 것들이 바로 그런 영약이었다. 하지만 만우는 목함에 든 이 청옥이 영약 따위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영약 따위. 그 어떤 무림인도 영약을 ‘따위’라고 부르지는 못할 테지만 만우의 손에 들린 것은 그런 영약들을 따위라고 부르기에 충분한 물건이었다.
“선기(仙氣)가 느껴지는 것이 어찌하여 영약 따위와 비교될 수가 있겠느냐.”
“선기라 하면…… 선천지기 말씀이십니까?”
문형일의 말에 모든 무림인들의 눈이 커졌다. 아쉽게도 모용세가의 무인들은 날이 밝자마자 도망가듯 떠났기 때문에 목함을 보지 못했다. 신선들이 수양하여 쌓는 선기(仙氣)는 자연의 가장 순수한 기운이며 동시에 생명의 기운이었다. 그것이 바로 모든 인간들이 태어날 때 생명체로서 품고 태어난다는 선천지기다. 그 어떤 내공보다도 깨끗하고 정순한 생명의 기둥이 바로 선기다.
“이걸 어디서 얻었다고?”
만우도 선기가 압축에 압축을 거쳐 만들어진 이런 결정체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이 안에 담긴 선기의 크기는 족히 사람 수백 명의 기운과 비슷했다. 인간은 태어날 때 가장 강성한 선천지기를 가지고 태어나며 이 선천지기가 소진되면 죽는다. 즉, 수명이 다했다는 것은 곧 이 선천지기, 선기를 모두 소모했다는 뜻인 것이다. 이 선천진기는 인간의 육신으로는 소모되는 것을 축적하거나 그 양을 더 늘릴 수가 없었다.무공이 높은 무인이 오래 사는 이유는 그들의 경지가 오를수록 육신이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결국 무공이 극에 달하면 도달하는 것이 바로 우화등선, 신선의 경지다. 선기를 마음껏 축적하고 사용할 수 있는, 속세에서 한 발 빗겨나간 신선의 경지.
“상단의 대행수가…….”
“무슨 상단?”
중원의 상단이라면 모두 유명한 황금충(黃金蟲)들이다. 은자 몇 개에 목숨을 걸고 살인청부를 하는 그런 작자들이 전부 상단을 운영한다.
“그건 말을…….”
“말을 안 해 줬다고? 목숨을 구해 줬는데?”
“그, 그렇습니다.”
대추장의 얼굴을 보니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만우는 눈을 가늘게 좁혀 뜨고는 목함을 쳐다봤다. 무언가 수상쩍은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대추장에게 보상이 아니라 골칫덩어리를 넘겨주고 간 것일 수도 있겠군.”
“골칫덩어리…….”
“이게 누군가가 탐내는 보물이라면 어떨 것 같은가? 그래서 그 대행수가 쫓기고 있었다면? 그래서 이곳에 물건을 숨겨둔 것이라면?”
찌익! 만우가 손가락으로 목함의 바닥을 긁자 부적 같은 것이 찌익 하고 뜯겨져 나왔다.
“그것도 이런 주술까지 걸어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모르게 위장하여 숨겨 놓을 정도라면?”
“…….”
대추장의 얼굴색이 변했다. 안 그래도 하얗던 것이 더 충격을 받은 듯했다. 자신이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였던 저 목함 하나가 위험을 초래할 것이라고는 단 1도 생각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쯧. 중원의 너구리같은 늙은이들을 상대하긴 백 년도 이르군. 백 년도 일러.”
만우는 혀를 쯧쯧 하고 찼다. 중원에서 오가는 온갖 더러운 권모술수에는 이골이 났다. 그런 권모술수를 전부 무공 하나로 때려 부수고 독보한 것이 바로 만우였다. 그런 만우에게는 이 목함의 가치가 눈에 훤히 보이는 듯했다.
“잘 됐네. 어차피 대추장이나 부족이 감당할 수 있을 만한 보물이 아니니.”
만우는 청옥을 담고 있던 목함을 탕 하고 덮었다. 그러자 대추장이 몸을 움찔거렸다.
“선주(仙珠)가 어찌하여 이곳까지 흘러들어왔는지는 모르겠으나 본주의 손에 맡긴 것을 행운으로 알도록.”
영약을 한낱 따위라 칭할 수 있는 것, 선기가 가득한 결정체라면 그것을 지칭하는 말은 딱 하나 밖에 없었다. 선주. 이무기에게 여의주가 있어 용이 되어 승천할 수 있고, 호선에게 선주가 있어 등선로를 걸을 수 있었던 것처럼 등선을 위해 수양을 닦는 모든 이들에게 목숨과도 같은 가치가 있는 것이 바로 선주였다. 그 선주에 수양을 하는 모든 등선 지망생들은 자신이 가진 힘과 세월을 모두 불어넣는다. 그 때문에 선주를 잃은 호선의 500년이 고작해야 초절정밖에 되지 않는 이유기도 했다.
“아참. 그리고.”
만우는 피식 웃으면서 오도리 부족들의 터전 너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대추장에게 말했다.
“선물도 받았으니 알려주는데. 저 뒤에 옥사에 가둬 놓은 애들. 그냥 풀어주는 게 나을 거야. 본주는 친절하게 알려줬다 분명히?”
“옥사…….”
“그래. 거기 붙잡힌 애들 말이야.”
“그게 느껴지시는…….”
“본주가 더 이상 무엇을 보여주든 더 놀랄 것이 남아 있나?”
만우가 대추장에게 웃으면서 말하자 대추장이 고개를 조아렸다.
“아, 아니옵니다, 엔두리시여.”
“본주가 대추장이라면…….”
만우는 팔 하나를 잃은 대추장에게 선심을 쓰듯 말했다.
“당장 짐 싸서 여기 뜬다. 그게 부족이 살고 네가 살 길이니까.”
꿀꺽 대추장이자 먼터무, 혹은 동맹가첩목아라 불리는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만우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 몇 가지 사실만 추려도 자신과 부족들의 큰 위험에 대비도 못 한 채 노출될 뻔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저 엔두리는 부족의 명맥을 끊기 위해 도래한 학살자라 생각했지만 이제 보니 부족의 구원자였다.
“그, 그 목함을 건네 준 대행수. 그 대행수의 이름이…… 석…… 무슨 이름이었습니다.”
“석 씨?”
“예. 엔두리시여.”
대추장은 그리 말하고는 만우에게 허리를 깊숙하게 숙였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서는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그런 대추장의 뒤로 여진족 전사들이 질서정연하게 만우와 사행단을 경계하면서 물러났다.
“석 씨면, 석가장 아닙니까, 대장님?”
“그렇겠지. 그런데 석가장의 대행수가 이곳까지 와서는 이걸 맡겼다고?”
만우는 목함을 가리키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만우가 아는 석가장이라면 대행수가 이곳까지 쫓겨 와야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석가장. 천하제일황금가(天下第一黃金家). 중원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중원의 모든 것은 변하지만 석가장의 황금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중원의 주인이 뒤바뀌고, 구시대가 가고 새로운 시대가 열려도 석가장의 황금만큼은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만큼 석가장의 금력(金力)은 천하제일이라 불려도 하등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황실조차도 석가장의 금력을 따라갈 수 없다는 말이 낭설처럼 떠돌고 있을 정도인데, 그런 석가장의, 무려 대행수가 건주까지 쫓겨 와 죽을 뻔하던 것을 오도리 부족에서 구해 주었다?
“이것을 숨겨야 할 필요가 있었던 모양이군. 아니면 그 대행수란 자가 석가장에서 이것을 탈취한 것이거나.”
“만약 이곳에 숨겨야 할 이유가 있었다면 대체 누구기에 석가장에 그랬던 것일까요?”
“모르지. 허나…….”
만우는 수레에 혼절해 있던 호선이 선주의 기운을 느끼고는 부스스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어꺠를 으쓱했다.
“선주는 주인을 찾았으니, 그 후가 문제로구나. 그 후가.”
***** 석가장(石家莊)은 하북성에 자리했다. 석가장의 서쪽으로는 태항산맥이 푸르름을 자랑했고 동쪽으로는 하북평원으로 너른 곡창지대가 위치하고 있었다. 석가장은 연경에서 남쪽으로 치우쳐져 명나라의 중심에서 떨어져 있었지만, 석가장의 금원보(金元寶)와 은원보(銀元寶)는 그 모든 것을 충당하고도 남았기 때문에 석가장 앞은 늘 사람들로 인해 붐볐다. 석가장의 석가상단(石家商團)은 중원십대상단 중 하나로 나머지 아홉 개의 대상단을 합친 것보다 더 컸으며 성(省)과 주(州)를 너머 중원 전역에 석가장의 분원이 세워져 있었다. 또한 석가상단을 위해 석가장에서 비싼 돈을 주고 고용한 빈객들로 이뤄진 제일표국(第一鏢局)은 물론이거니와 표사만 해도 삼천 명 규모의 인해표국(人海鏢局)이 산하에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일천 명의 낭인들로 구성된 독랑단(獨狼團)을 부리고 있었다. 그 독랑단의 단주로 낭황 우결지를 돈으로 사려고 했으나 그가 마교에 먼저 넘어가는 바람에 석가장에서 크게 아쉬워했다고 한다. 그런 우결지를 데려오기 위해 석가장에서는 마교에 금원보 50냥짜리를 특별히 만들어 일만 개를 보냈다고는 하나 마교는 그것을 거절했다고 한다. 사람 하나를 고용하기 위해 금원보 만 개를 보냈다는 것 자체가 석가장의 배포를 보여주는 일화 중 하나였다. 석가장은 그 규모가 일개 성(城)에 준할 정도로 거대했다. 말이 장(莊)이라고 불렸지, 사실상 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석 씨 집성촌인 내원이 있었고, 내원 주변으로는 석가장에서 황금을 주고 초청한 빈객들과 삼천의 표사들, 그리고 석가장의 일을 하는 일 만의 쟁자수들이 생활하는 외원이 열 개가 넘었다. 석가장 안에만 객잔이 열 개가 넘게 있었고 크고 작은 시장이 여덟 개가 있었다. 하루에 석가장에 드나드는 사람만 삼만이 넘을 정도였으니, 그 성세가 가히 연경에 뒤쳐지지 않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오죽하면 사람들 사이에서는 명나라에는 수도(首都)가 연경과 석가장, 두 개라는 말까지 떠돌 정도였다. 그런 석가장은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채 무림맹과 사림곡, 마교와 황실 모두에 막대한 황금으로 철저한 자치권을 보장 받았기에 무소불위의 금력을 자랑했다. 감히 어떠한 사람도, 세력도 석가장과는 척을 지려 하지 않았다. 단 한 명만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촤악! 후두둑 그런 석가장에서도 가장 깊은 곳, 석가장의 가주전은 허락 받은 몇몇만 드나드는 것이 허락된 곳이었다. 심지어 가주전은 석가장주의 부인과 자식들도 미리 허락을 받지 않으면 들어올 수 없었다.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금력을 가졌다는 석가장주의 가주전답게 최고의 기관진식과 어마어마한 황금을 써서 고용한 고수들이 돌아가면서 철통 같이 지키는 곳이었다. 특히 가주전의 경비를 위해 석가장은 몇 만 냥이나 되는 황금을 써 제갈세가와 주술로 유명한 모산파에서 기관진식과 진법에 가장 능통하다는 이들을 불러 만들었다는 석허전불출진(石許前不出陳)은 현존하는 진(陳) 중 유일하게 단 한 번도 파훼된 적이 없는 무적(無敵)의 진법이었다. 오죽하면 석가장에서 일 년에 한 번씩 그 진을 파훼하는 자에게 막대한 황금을 주겠다며 이름난 고수들을 초대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 세상에 모르는 무공이 없다는 만박자(萬博子)와 모르는 정보가 없다는 개방의 천이개(千耳丐) 같은 기인들도 그 진 앞에서는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역시 석가장이다!’
이런 감탄사 하나만을 놓고 그들조차도 물러났다는 소문이 퍼지자 석가장의 위명은 날로만 커져갔다.
“개안(開眼)을 축하드립니다. 주군.”
그런 석가장 가주전의 가장 깊은 곳, 비원(祕園)이라 불리는 그 안에는 딱 두 사람만이 들어올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음.”
황금을 녹인 황금수(黃金水)에서 몸을 일으킨 나이 지긋한 중년인은 몸을 닦을 비단을 건넨 자신의 호위를 쳐다봤다.
“아직 너에 비하면 멀었구나. 온소.”
호위는 발목까지 늘어지는 적포를 입고 있었다. 그런 그는 두 개의 쌍검을 패용하고 있었는데, 무림인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남자였다. 적포쌍검(赤布双劍) 온소. 15년 전 무림에 출두한 그는 곤륜파의 속가제자 출신이지만 무(武)에 대한 재능 하나만큼은 정식제자들보다 월등하게 뛰어나다고 알려졌던 후기지수였다. 초절정 고수인 온소는 무림의 다양한 분쟁에 가리지 않고 끼어들었는데 그는 주로 문파나 세가의 빈객이 되어 명성을 떨쳤다. 그런 그의 무위에 반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에서는 그를 가문의 고수로 초빙하고자 하였지만, 그런 그가 선택한 것은 바로 석가장이었다. 황금(黃金). 적포쌍검 온소가 무림의 많은 분쟁에 등장했던 이유 자체가 바로 황금 때문이었다. 그에게는 하나 밖에 없는 여동생이 있었는데 절맥(切脈)을 가지고 태어난 탓에 치료를 위해서는 막대한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석가장에서 제안한 어마어마한 황금은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석가장에서 보수로 준 그 재물로 여동생의 절맥을 치료한 온소는 석가장주의 충성스러운 호위가 되었다.
“허나 금세 저를 따라잡으실 수 있을 듯합니다. 이 무공은 오롯이 가주님만을 위해 탄생한 무공인 듯하니 말입니다.”
온소는 황금 천 냥을 녹여 가득 채웠던 욕조통 안의 황금이 거의 투명해진 것을 보고는 석가장주인 석소군을 쳐다봤다. 석소군. 그는 당대 석가장주로서 공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하여 지금의 성세를 이룬 자였다. 거의 모든 것을 다 이뤘지만, 그가 딱 하나 이루지 못한 것이 있었다. 바로 무공. 석가장의 핏줄들은 대대로 절망적일 정도의 무공에 대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들에게 허락된 재능은 사업에 대한 재능인 것처럼 말이다. 때문에 항상 그들은 막대한 금력으로 무력(武力)을 샀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석가장은 대대로 그것 때문에 무(武)에 대한 갈증을 느껴왔다. 만금(萬金)을 준다고 해도 모든 사람들이 넘어오는 것도 아니었고, 돈으로 산 무(武)는 결정적인 순간에 배신을 하거나 제 목숨이 경각에 달하면 도망가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또한 결정적으로 석소군은 자신의 대(代)에 금력으로도 꺾을 수 없는 무(武)를 조우하여 후대에 새겨질 수모와 치욕을 겪었다.
‘검주!’
검주. 무림십좌 중 그 누구도, 심지어 마교주인 일패(一覇) 혈세천마라 하여도 석소군을 괄시할 수는 없었다. 무림인이라고 하여 무공 하나만으로 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무림십좌라 불리는 이들일수록 책임져야 할 것이 더 많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석소군 앞에서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손가락 하나만 까딱여도 죽일 수 있는 것이 석소군임에도 불구하고 석가장의 금력은 그들의 무(武)를 찍어 누를 정도의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검주(劍主)는 석가장의 금력이 하나도 통하지 않았다. 검주에게는 책임져야 할 사람들도, 그렇다고 재물이 없어 먹고 살기 힘든 것도 아니었으니까. 석가장의 전부이자 가장 강력한 힘인 금력이 검주에게는 그 어느 것도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앞에 석가장은 꺾였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구차하게 그의 앞에 무릎을 꿇어야만 했으니까.
“검주를 생각하십니까.”
파박! 팍! 온수는 불안정하게 날뛰는 석소군의 내공을 가라앉히기 위해 혈자리를 짚으며 말했다. 온수는 그 당시 석소군의 호위가 아니었기 때문에 풍문으로만 들어 알고 있었다.
“내 어찌 그날을 잊을까.”
석소군의 두 눈에서 황금빛 안광이 일렁였다. 그런 석소군의 육체가 황금빛으로 미약하게 반짝거렸다. 온소는 그런 석소군을 보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만약 다시금 그를 만난다면 그때처럼 쉽게 당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그래야지. 내 그러기 위해 만금을 주고 황금신공(黃金神功)을 손에 넣은 것이니.”
석소군은 황금빛이 일렁이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면서 중얼거렸다. 황금신공(黃金神功)은 알려진 바가 없는 신비(神祕)신공 중 하나였다. 황금신공을 대성(大成)하기 위해서는 태산(泰山)만 한 크기의 황금이 필요하다고 했다. 애초에 그 무공에 입문하기 위해서는 문자 그대로의 황금이 수레 하나만 한 크기로 필요했다. 황금의 기운을 몸에 받아들여 신체의 안과 밖을 금강불괴로 만들고 막대한 내공을 받아들이는 것이 황금신공의 요체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세상에 석가장의 가주를 제외하고는 익히고 싶어도 익힐 수가 없는 무공이었다. 황금신공은 익힐 때마다 엄청난 양의 황금을 필요로 했으니, 제 아무리 대문파, 아니 황실의 황제라 하더라도 익히는 것이 불가능했다. 석가장을 제외하고는. 황금신공은 말 그대로 석가장을 위해 태어난 무공이었다. 석가장의 무한한 금력이 아니라면 황금신공의 대성은 불가능했으니 말이다. 1년, 석소군이 장년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황금을 쏟아부어 불과 1년 만에 황금신공의 6성을 이루었다. 절정 고수. 불과 1년이란 시간 만에 누군가는 평생을 쏟아부어도 되지 못하는 절정고수가 된 것이다.
“정녕 그럴 수 있다 생각하는가?”
석소군은 온소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적포쌍검 온소는 자타가 공인하는 초절정 고수였다. 석소군은 자신이 무공을 익히자 그런 온소의 대단함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온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검주가 일본국에서 혈세천마와 곡왕 그리고 마존을 베었다. 홀로 진혼대와 천마대를 몰살시켰고 그리하여 천하제일인이 되었다.”
세간에 떠돌고 있는 검주와 마교 사이에 얽힌 소문이었다. 어디서부터 시작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사실관계를 파악할 수 없는 소문이 중원에 은밀히 떠돌기 시작했다. 금과 은이 존재하는 곳이라면 닿지 않는 곳이 없다는 석가장의 귀에도 그 소문이 들려오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같은 무림십좌라고는 하나 일패와 검주의 차이는 분명합니다. 헌데 혈세천마뿐 아니라 검주 혼자 무림십좌의 삼인을 베었다?”
온소는 그 소문이 거짓이라 확신했다. 그건 불가능했다.
“불가능합니다.”
“난.”
석소군은 온소가 입혀 주는 옷을 걸치면서 말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일들이 이 넓은 중원에서 수도 없이 벌어지는 것을 직접 목격하고 들어왔네.”
“…….”
세상의 기인이사는 모래알갱이처럼 많은 법이다. 그 때문에 상식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중원에서는, 세상에는 심심치 않게 벌어졌다.
“그러니까.”
석소군의 눈이 번들거렸다.
“확실하게 해야지. 아니 그런가?”
“확실하게라 하심은…….”
온소는 말끝을 흐렸다. 석소군은 온소를 보면서 감탄했지만, 석가장의 일처리 방식을 보면서 정작 항상 감탄했던 것은 바로 온소였다. 석가장의 사람들은 생각하는 바가 마치 다른 세상에서 온 것처럼 달랐으니까. 온소가 항상 생각하던 것 이상의, 최소한 백 배 이상의 돈을 석가장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썼다. 황금의 힘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곳, 석가장. 그곳의 정점에 올라 있는 석소군이 온소에게 말했다.
“황상께서 조선으로 간 검주를 압송해 오라 조선의 조정에 알렸다는군.”
석가장의 상단은 당연히 조선에도 들어간다. 석가상단이 조선의 조정에 뿌리는 황금만 해도 보통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석소군은 석가장에 앉아 명나라 황제와 오도리 부족, 모용세가밖에 모르는 일을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압송…… 화경의 고수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화경의 고수를 붙잡아 압송한다는 것이 가능키나 한 일인가? 그리고 상대는 중원에서 그토록 이를 가는 이들이 많아도 단 한 번도 공략하는 데 성공하지 못한 무림십좌의 일원인 검주였다.
“조선의 국왕이 압송이 아니라 사행으로 바꾼 것을 보면 실패한 것이겠지. 허나 황상께서는 여진족과 무림맹에도 기별을 보내어 검주를 압송하라 황명을 내리셨네.”
“압송…… 압송이라…….”
“황실에서 겪었던 수모를 황상대에 와 수복하고 싶으신 것이 아니겠는가.”
석소군의 눈에는 그런다 하여 황금 하나 굴러들어오지 않는 일이었다. 허나 때로 황제란 것은 그런 쓸데없어 보이는 명예에도 생목숨을 걸어야 할 때가 있는 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