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 대가리 나와 (4)2022.01.04.
“도련님. 보이십니까?”
“허공답보…….”
“현경…… 현경입니다.”
화경의 고수도 공력을 사용해 허공에서 운신이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공중에서 몸을 뒤틀거나 이동 중 방향을 트는 것뿐이지, 허공에 서 있을 수는 없었다. 허공에서 산책을 하듯 유유히 걷는다는 허공답보(虛空踏步). 심검(心劍), 어검술(御劍術)과 함께 전인미답, 아니 무림의 긴 역사에서도 소림의 달마대사, 무당의 장삼봉, 그리고 천마신교의 천마만이 도달했다 알려진 경지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허공답보였다.
“진정…… 검주란 말입니까?”
“스스로 검주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보십시오.”
모용덕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릎을 꿇고 있는 이들은 정확히 오도리 부족밖에 없었다. 자신들이나 사행단의 수행원들은 그 어떠한 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크르릉……. 오히려 만우보다는 눈앞의 백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훨씬 더 강대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천하제일(天下第一)…….”
모용청의 입에서는 자연스레 천하제일이란 말이 흘러나왔다. 수백 년, 그보다도 더 오래된 무림의 역사에서 현경에 도달한 이는 그만큼이나 없었으니까.
“호선.”
만우는 오도리 부족이 말을 할 기회조차도 주지 않았다. 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만우가 본 것이 있고 호선이 겪었던 것이 있다. 스으윽 만우가 허공에서 천천히 하강해 호선 옆에 내려섰다. 호선은 오도리 부족의 전사들을 보면서 눈에서 불꽃을 토해 내는 듯 했다.
“네가 원하던 복수다. 허나, 건너면 돌아오지 못할 강이다. 정하라.”
[…….]
호선의 눈빛이 흔들렸다. 호선도 느끼고 있던 것을 만우가 정확하게 꼬집었기 때문이다. 피. 재차 등선하여 선계에 들기 위해 만우의 도움을 받아 굳이 낙기를 다시 선기로 바꿔 나가던 호선이었다. 하지만 그런 호선이 피를 보았다. 그것도 사사로이 호선의 옛 인연을 위해, 아직 끊어지지 않은 그 인연을 위해 피를 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것이 호선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피, 그리고 생명. 살계(殺戒)를 여는 것은 도를 닦아 등선하려는 호선에게는 가장 하지 말아야 할 것 중에 하나였다. 그런데 호선은 기꺼이, 자신의 의지로 그 살계를 열었다. 그리고 호선은 이제 그 끝자락에 서 있었다. 핏값을 위해 호선이 이들을 죽인다면, 이제 건너지 못할 강을 넘는다고 만우가 경고를 했기 때문이다. 호선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
“내가 너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 네 각오가 그만큼 서 있다면.”
만우는 호선을 보면서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죽여라. 그리고 네 복수를 하여라. 그렇게 되면 넌 등선의 길에 두 번 다시 오르지 못할 것이나.”
현경에 발을 내딛은 만우의 눈에는 다른 이들이 보지 못하는 많은 것들이 보였다. 선명하지는 않지만 두루뭉술하게는 보였고, 느껴졌다. 무공을 닦아 경지에 오른다는 것은 도인들이 도를 닦아 등선하는 것과 비슷한 길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너를 붙잡고 있던 인연의 고리 하나를 완전하게 끊어 내는 것이니, 또 다른 길이 열릴지도 모르는 일이지.”
[…….]
호선이 이곳에서 저들을 죽인다면 호선을 붙잡고 있던 인연의 고리 하나가 완전히 끊어지게 되는 셈이다. 호선에게 소중한 것을 포기하면서 약속을 지킨 것이니까. 호선 정도 되는 영물이 한 약속은 그냥 단순한 약속이 아니라 언령이 서리고, 말은 곧 의지가 되기 때문이다. 그 의지는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흩어져 버리는 것이 아니니, 그런 언령과 의지가 호선으로 하여금 등선로에서 떨어지게 만든 것이다.
“크으으윽…….”
동맹가첩목아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다른 이들이 무릎을 땅에 처박은 채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것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그것은 육체적인 강함이 아니라 온전한 정신력이었다. 동맹가첩목아는 앞의 백호가 자신의 아들이 자신에게 진상하기 위해 사냥한다고 했던 그 백호임을 깨달았다. 그 옆에 선 자는.
“에, 엔두리시여.”
엔두리, 신(神). 동맹가첩목아는 자신과 부족이 신의 분노를 샀다는 것에 엔두리를 외치며 땅에 머리를 처박았다. 꿍-!!
“어리석은 인간의 잘못일 뿐이니 부디 분노를 접어 두시고, 그 모든 잘못에 대한 벌은 제가 받겠나이다!!”
동맹가첩목아, 혹은 먼터무라 불리는 대추장이 간절하게 소리쳤다. 먼터무는 만우와 호선에게서 느껴지는 살기를 읽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나 엔두리께서 저 백호를 아끼신다는 것도.
‘엔두리께서 아끼시는 범을 사냥하려 하였으니 이 분노도 당연한 것일 터.’
무언가를 오해하고 있었지만 먼터무는 고개를 깊숙하게 숙였다. 엔두리의 소유물을 건드렸으니 분노를 사는 것도 당연하다. 그렇다면 그 분노가 부족 전체에 퍼지는 것을 막아야 하는 것은 대추장인 먼터무의 일이었다. 그리고 먼터무는 그런 점에서 대단히 본받을 만한 점이 많은 대추장이었다.
“모든 것은 이들을 이끄는 저로부터 잘못된 일! 엔두리께 이 못난 자의 목숨을 바치노니.”
호선의 눈이 흔들렸다. 먼터무가 하는 말이 진실이란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또한 무릎을 꿇고 고개를 들지 못하는 오도리 부족의 전사들의 뒤로 겁먹은 오도리 부족의 여인들과 아이들이 호선의 눈에 들어왔다.
“제 죽음으로 모든 죄를 사하소서. 이들은, 모든 부족민들은 엔두리의 용서를 받은 그 즉시 다른 곳으로 옮겨 새 둥지를 틀 터이니 부디 분노를 가라앉혀 주소서!”
스릉! 먼터무는 그렇게 말하면서 날이 잘 선 단검을 빼들었다. 만우는 그런 먼터무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만우의 시선은 오롯이 호선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정하라.”
[저, 저는…….]
이들을 고을 사람들을 괴롭힌 괴물, 악인으로만 생각했던 호선이다. 저들은 무던히도, 아주 지독하게도 호선과 고을 사람들을 괴롭혔으니까. 한데 이곳에 와서 보니 이들은 괴물이 아니었다. 그냥 사람이었다. 두려움에 떨고, 자기 가족들을 위해 희생할 의지가 충만한 아버지가 있는 그냥 똑같은 사람.
“대추장님!!!”
“안 됩니다! 대추장!!!”
만우에 의해 무릎을 꿇은 전사들이 피를 토하듯 소리쳤다. 먼터무는 날이 잘 선 단검을 자신의 목으로 가져갔다. 그 모습을 보는 사행단과 모용세가의 무인들은 숨소리도 내지 못했다. 특히 설미수를 비롯한 동군영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눈에 만우는 하얀 백호를 옆에 둔 진짜 신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진신을 약간이나마 드러낸 만우는 그들이 알고 있는 역졸이나 하는 싸움 잘하는 무인이 아니었다. 절대자(絶對者).
“에이씨!”
그런데 그런 사행단과 모용세가 무인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휙 하고 뛰어나왔다. 날래기 그지없는 몸놀림으로 내달려 거리를 좁힌 이가 몸을 뱅그르르 돌려 길쭉한 다리를 쭉 내뻗었다. 타악-!!!
“억!”
먼터무의 손에 들린 단검이 옆으로 휙 하고 날아갔다. 먼터무가 단검으로 자신의 목을 긋기 바로 직전이었다. 오도리 부족의 전사들은 물론 사행단과 모용세가의 무인들도 놀라 눈을 부릅떴다.
“뭐하는 짓이야! 만우! 너!!!”
방매가 먼터무의 손에 들린 단검을 발로 차서는 날린 것이다. 그리고는 화가 난 얼굴로 방매가 고개를 휙 하고 돌려 만우를 쳐다보며 어깨를 씩씩댔다.
“옹주자…… 아니. 방매!!!!!”
놀란 동군영이 그런 방매를 옹주로 부르려다가 오도리 부족과 모용세가를 의식하고는 얼른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방매는 동군영의 말 따위는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만우에게 삿대질을 하면서 소리쳤다.
“네가 뭔데 사람이 죽는 걸 그냥 보고 있어! 어? 너 그런 사람이었어?”
“…….”
만우는 그런 방매를 멍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설마하니 지금 순간에 방매가 끼어들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원! 전투준비!!!!”
방매가 끼어들면서 사방에 일렁이던 만우의 공력이 사라지자 오도리 부족의 전사들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먼터무의 앞을 가로막으면서 일제히 무기를 치켜들고는 살기를 뿜어냈다.
“어, 어어?”
방매는 그런 전사들 틈에서 휘청거렸다. 전사들이 먼터무를 향해 달려왔기 때문이다. 만우는 그런 방매를 보면서 얼굴을 마른 손으로 쓸어내렸다.
“하아…….”
만우는 방매가 끼어들어 분위기가 반전하자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본래라면 오도리 부족의 대추장 정도만 벌을 내리고 끝내려고 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딱 보아하니 호선이 핏값을 받겠다고 모든 오조리 부족의 목숨을 원하는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아무리 호선이 500년이나 도를 닦은 영물이라고 해도 그 정도의 목숨을 취하고 나면 더 이상 구제될 수 있는 구멍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구제받을 수 없는 영물의 말로는 한 가지밖에 없었다. 악수(惡獸). 선기와 이지를 잃고 세상의 악의를 받아들여 미쳐 버린 영물들. 그런 악수들이 세상에 일으킬 풍지평파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물론 지난 번 하늘재 부근에서 만났던 주작 같은 신수들이 존재한다고는 하나 혹시라도 신수가 악수를 제지하기 전에 인세에 풀려나기라도 한다면?
‘재앙이지. 재앙.’
그것이야말로 재앙이었다. 호선 정도의 도를 닦은 영물이 악수가 된다면 최소한 만우 정도가 아니면 피해 없이 제압하는 것이 불가능하니까. 또한 죄 없는 고을을 덮쳐 장정들을 다 죽이고 여인과 노인, 아이를 포로로 잡아 끌고 가는 죄를 먼저 범한 것은 오도리 부족이었다. 본래 인간이 강자존과 약육강식인 자연의 섭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는 하나 먹기 위해 맹수가 초식동물을 사냥하는 것과 제 배를 불리고 세를 과시하기 위해 인간이 다른 인간을 사냥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최초의 죄(罪)는 오도리 부족에게 있었다.
“물러서라!!!!!!”
먼터무가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전사들에게 다급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자칫 잘못하여 저 엔두리의 심기를 거스르기라도 하면 자신만으로 끝날 수 있는 이 업화(業火)가 부족 전체에게로 옮겨 붙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사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대추장을 지켜라!”
“목숨을 내놓는 한이 있더라도 대추장을 지켜라!”
우오오오오-!!! 오도리 부족의 전사들이 만우와 호선을 바라보면서 투기를 끌어올렸다. 그들의 무릎에서는 모두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미 만우의 기세에 무릎을 꿇어본 이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눈에는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불굴의 의지가 서렸다. 두웅-!!! 그런 그들에게로 만우의 공력이 용트림을 하듯 피어올랐다. 저들은 마치 자신을 악(惡)인 것처럼 쳐다보고 있었지만 전후관계가 틀렸다. 저들은 죄(罪)이고 만우 자신은 벌(罰)이었다.
“죄를 지은 자는 벌을 받아야 하는 법.”
만우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깔렸다.
“죄 없는 고을을 습격하여 수많은 장정들을 죽이고, 그들의 가족을 인탄한 너희들의 죄.”
오도리 부족 전사들의 다리가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항시 의지하고 믿어왔던 형제들이 바로 옆에 있음에도 차디 찬 설원 위에 혼자 서 있는 것 같은 한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흐른 이들의 눈물.”
만우는 고개를 들어 사행단 사이에 앉아 있는 복순을 쳐다봤다. 죽을힘을 다해 그곳에서 도망쳐 사행단까지 찾아와 도와 달라 말했던 그 복순이였다.
“정녕 그 죗값을 네놈들이 받겠다는 것이냐?”
덜덜덜
“네놈들은 아무 것도 아니다.”
만우는 오도리 부족 전사들의 전의를 찍어 눌렀다. 만우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에 오도리 부족 전사들은 이 사이로 피가 흐를 정도로 깨물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 자리에 주저앉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네놈들의 피만 무겁더냐. 네놈들의 사람만 소중하더냐. 네놈들이 죽인 사람의 피와 그들은 중하지 않더냐. 허니.”
만우가 두 손을 늘어뜨렸다.
“네놈들이 뭐 대단한 것이라도 하는 마냥 하지 말거라. 네놈들은 그저 약자를 괴롭힌 짐승일 뿐이니. 허니 나도 약자인 너희들을 사냥하는 맹수가 되어 줄 수도 있음이다.”
으르릉!!! 오도리 부족의 전사들은 동시에 자신들 따위는 가볍게 찢어발길 수 있을 것 같은 맹수의 울음소리를 듣고는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 모용청은 숨이 턱 하고 막히는 느낌이었다. 만우의 몸에서 흐르는 기운이 모용세가를 직접적으로 향하고 있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발자국 떨어져 옆에서 지키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것은 모용덕을 비롯한 다른 모용세가 무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몇몇 무인들의 눈에는 경외심까지 깃들고 있었다. 허공답보로 허공을 유영하며 오도리 부족의 전사들을 짓누르는 만우의 모습은 그야말로 무신(武神)을 보는 듯했으니까.
“쯧쯧.”
그런 모용청을 보던 감령이 혀를 끌끌 하고 찼다. 엄한 곳에 모용세가의 무인들이 와 있는 것을 보고 그들이 왜 와 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명천자는 오도리 부족에게 칙서를 보냈을 것이다. 보나마나 만우를 호송하는 것을 감시하고 도우라는 것이겠지. 그 말에 오도리 부족은 바로 요녕에 자리하고 있는 모용세가에 도움을 청한 것일 테고, 모용세가에서는 명천자의 칙서를 받았다는 오도리 부족의 말에 모용청과 팔검단을 파견한 것이리라. 그들이 호송해야 될 죄인이라는 것이 ‘검주’일 줄은 꿈에도 모르고 말이다. 모용청이 혀를 차는 감령을 쳐다봤다. 감령은 그런 모용청의 시선을 느끼고는 씩 웃었다. 방금 전까지 검과 도로 서로의 목숨을 겨누었지만, 결국 끝을 보지 못하고 끝났다. 중요한 것은 그때의 감정을 끌어가지 않는 것이었다. 굳이 비무의 살기를 끌고 가지 않아도 언제 어디서 칼 맞아 죽을지 모르는 것이 무림인의 삶이니까. 그저 서로의 무(武)를 겨루었다는 것 정도면 충분했다. 그렇기에 감령은 모용청에게 자비를 베풀기로 했다.
“저 양반을 호송해서 데려오라고 칙서를 보냈댄다. 천자께서.”
“…….”
모용청의 눈이 커졌다. 모용덕은 옆에서 침을 꿀꺽 삼켰다. 그걸 알았다면 모용청과 팔검단이 오면 안 됐다. 가주가 십검단을 모두 끌고 왔어야 했다.
“호송해서 가보던가.”
감령이 사행단을 가리키면서 씩 웃어 보였다. 모용청은 가만히 고개를 돌려 허공답보로 허공에 떠 있는 만우와 사행단을 차례대로 쳐다보고는 모용덕에게 말했다.
“돌아가시죠. 단주님.”
“……예! 도련님!”
모용청은 중원에 출도하여 이름도 알리지 못했는데 이곳에서 의미도, 명분도 없이 죽고 싶지 않았다. 마침 오도리 부족에서 죄 없는 양민을 습격하고 죽였다는 좋은 명분도 있었다.
‘가주께 알려야 한다. 그래서…….’
이들은 필히 요녕성을 지나갈 것이다. 그러니 괜한 문제가 일어나기 전에 어서 가문으로 돌아가 알려야만 했다.
‘검주, 천하제일인이 오고 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