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9. 사냥꾼과 사냥감 (2)2021.12.14.
사행단은 그 자리에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다는 설미수의 주장 하에 만우와 호선을 기다리지 않고 움직였다.
“은공을 기다려야 한다는 말인가? 그분이 걱정돼서?”
설미수는 이들 문형일과 마익후를 제외하면 만우를 가장 처음 만났던 사람이다. 그 자리에서 만우를 기다려야 하지 않느냐는 동군영의 말에 설미수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리고 동군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너무 노파심이 컸나 봅니다.”
“헐.”
설미수와 동군영이 대화하는 것을 보면서 방매는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옹주자가. 왜 그러십니까.”
“아니, 두 분이 이야기하는 게 웃겨서요. 아무리 만우가 세다고 해도 그렇지, 그렇게 보내고 아무 걱정도 안 하는 게 맞아요?”
아무리 강하다고 해서 검을 휘두르면 베이지 않는 것도 아니고 배가 고프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런데 강하다는 것 하나 믿고 아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듯한 둘의 태도에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요 아저씨들?”
방매는 고개를 휙 하고 돌려 다른 이들을 쳐다봤다. 하지만 방매의 질문에 돌아오는 것은 어색한 침묵뿐이었다.
“와. 이 아저씨들 진짜.”
강하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걱정해 주지 말란 법이 어디에 있기라도 한단 말인가? 방매는 당연한 듯 만우의 걱정을 하나도 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서 콧방귀를 흥 하고 뀌었다.
“넌 어떻게 생각하니?”
방매는 이 가운데 가장 보통 사람 같아 보이는 여인에게 물었다. 사행단 앞에서 쓰러졌던 여인이었다. 그녀는 방매보다 한 살이 어렸기에 특유의 넉살로 언니 동생으로 부르자며 호칭까지 정리한 것이다.
“저, 전 잘…….”
자신의 이름을 복순이라 한 여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가 본 여진족의 전사만 수십 명이 넘었다. 그런데 도와주러 간 것이 고작 한 명이었다. 도와주겠다고 사람을 보낸 것인지 아닌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이 걱정 되는구나?”
방매의 말에 복순은 고개를 푹 숙였다. 솔직한 말로 복순은 혼자 간 그 만우란 남자보다는 마을 사람들이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자신은 무사히 그곳에서 빠져나왔다고는 하지만 만약 마을 사람들이 그곳에서 다시 붙잡혔다면 그들이 겪을 고초는 그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괜찮을 거야. 만우가 갔으니까.”
방매는 결국 복순에게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혼자 가셨는데…… 더 가신 것도 아니고 딱 한 분이 가셨는걸요.”
만우가 강하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는다고 말한 사행단의 일행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발끈한 방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만우가 강하다는 것, 그것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그녀 입으로 설명해야 됐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 만우라는 애가…….”
방매가 복순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고 있던 감령이 문형일의 허리를 툭 하고 찔렀다.
“왜?”
“우리 대장이 원래 여자한테 약해?”
“여자?”
문형일은 콧방귀를 뀌었다. 어디 만우가 누구에게 약하고 누구에게 강한 사람이던가. 만우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다 강한 사람이었다. 특히나 그를 찍어 누르려는 이들에게는 더더욱 말이다.
“대장처럼 강한 사람도 없을걸. 여자?”
본래 무림에서는 아이와 노인을 가장 조심하라고 한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조심해야 할 것이 바로 여인이다.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남자고, 그런 남자를 지배하는 것이 여자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특히 무림은 독가시를 잔뜩 품은 꽃들과 틈만 보이면 남자 간을 빼먹는 그런 요물들이 가득한 곳이다. 미인계야말로 영웅호색을 자처하며 거드름을 피우는 남자들에게 정확하게 먹혀드는 고전적이지만 확실한 수법 중 하나였으니까.
“우리 대장이 제일 싫어하는 것 중에 하나가 미인계거든.”
몸을 팔아 사람의 빈틈을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미인계다. 하지만 그렇게 숨겨진 비수를 만우가 찾아낸 적은 문형일이 기억하는 것만 해도 백 번이 넘는다. 만우는 무림십좌 중에서도 가장 접근이 쉬운 절대고수 중 한 명이었고, 그를 손에 넣거나 죽이고자 하는 이들은 넘쳐났으니 말이다.
“미인계 걸다가 걸린 여자의 팔다리를 꺾는 걸 네가 봤어야 해.”
무림오화(武林五花)라 불리는 이들을 제외하고서라도, 무림에는 아름다운 여인들이 많았다. 더군다나 무공 중에는 여인의 미모와 관련된 무공까지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만우는 그렇게 걸린 여자들의 팔다리를 가차 없이 꺾어놓았다. 꽃처럼 아리따운 처자들이 팔다리가 꺾여 바닥에서 부들거리고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문형일은 장담하건데 그처럼 가슴 아프고 참담한 현장이 없을 것이라 자부했다. 꽃다운 여인들이란 본래 남정네들의 마음을 그리 뒤흔드는 법이기 때문이었다. 만우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는 자신에게 미인계를 걸게 한 이들을 찾아가 아예 그곳을 뒤집어 버렸다. 쳐들어온 만우를 향해 살수를 휘두르는 이들의 단전을 폐했고 미인계를 입안한 책임자는 팔다리의 근맥을 끊어 놓아 폐인으로 만들었다.
“으으으…….”
그중에서도 가장 심했던 것이 여인들로만 이뤄진 사파의 화화궁(花花宮)이었다.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한 검주에 대한 미인계를 자신들이 성공시켜 노예로 만들겠다며 나선 화화궁은 말 그대로 궁의 문을 닫아야만 했다. 백 명이 넘는 주안공을 익혀 극상의 미모를 지닌 여인들의 팔다리가 끊어지고 단전이 폐해졌다. 사파의 맹주라는 사림곡이 나서기도 전에 만우에 의해 화화궁이 갈기갈기 찢어진 것이다. 물론 나중에 그 화화궁에서 남자를 홀리는 방중술 등의 갖가지 기예를 익힌 궁도들이 중원 전역에서 납치되어 끌려와 비인간적인 성적 학대를 당하며 키워지며 세뇌 당한 이들이란 것이 밝혀지면서 검주의 과한 손속이 해명이 되긴 했다.
“진짜 예쁜 여인들이었는데.”
“안 통한다 이거지.”
감령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얼마간 지켜본 대장인 만우는 상대가 누구든 간에 절대로 봐주거나 하는 일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예외가 딱 둘 있었다. 방매와 김향. 김향이야 만우와 얽힌 인연이 있다고 하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방매에게 만우가 유독 약한 것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만우와 방매가 만난 것은 그녀가 상왕의 수양딸, 옹주가 되기 이전이었으니까. 그 전에도 방매는 만우에게 막 대했고 만우는 그것을 용납해 주었다.
“그런데 방매한테는 왜…….”
“쉬잇!!!”
문형일이 입에 손가락을 가져다대면서 감령의 입을 턱 하고 막았다. 그러자 감령이 팔로 허우적거리다가 문형일의 손을 치우고는 퉷퉷 하고 침을 뱉었다.
“야. 죽을래?”
“그걸 모른다고? 너, 얼굴 어디에 써먹는 거냐.”
감령의 별호는 옥면산군(玉面山君)이다. 그만큼 얼굴이 번지르르하게 생겼기 때문이다. 감령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어디에 쓰긴. 그냥 얼굴이 얼굴이지.”
“너, 여인은 만나본 적이나 있기는 해?”
“산에서 나고 자랐는데?”
문형일은 이마를 딱 하고 쳤다. 즉, 얼굴을 써먹지도 않고 낭비했다는 뜻이다. 녹림십팔채의 대채주인 옥면산군이 여인에 대한 경험이 없다니.
“너만 빼고 다 아는 거다. 대장이랑 방매가…….”
문형일이 속삭이기 시작하자 감령의 눈이 점점 더 커졌다. 이제 일행에 그것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딱 두 명 밖에 남지 않았다. 만우와 방매. 당사자만 빼고 모두 다 아는 사실이 생겨났다.
“정지!”
그런데 그때 설미수가 손을 들어서는 정지 신호를 외쳤다. 사행단이 나아가던 길 앞에 일단의 무리가 말에서 내려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진족. 요녕성으로 건너가게 되면 필히 만날 수밖에 없는 오도리 부족의 영역이었다.
“오도리 부족의 우을기내(于乙其乃)라 합니다. 대추장의 명을 받고 사행단분들을 모시기 위해 나왔습니다.”
유창한 조선말과 함께 여진족 중 하나가 설미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
“대추장. 사행단이 초입에 들었다 합니다.”
“반나절 정도 걸리겠군.”
“그럴 듯합니다.”
건주 지역은 토양이 비옥하지 못했다. 땅에 모래가 많고 돌이 많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물길을 대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농사를 아예 짓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원을 보면서 농업의 중요성을 크게 느낀 오도리 부족의 대추장인 동맹가첩목아는 농사를 장려했다. 수렵만으로는 세력을 일정 크기 이상 키우는 것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명 이전에 중원의 패권을 장악했던 원(元)은 오도리 부족처럼 유목 생활을 하던 대초원과 푸른 늑대의 후예였다. 그런 그들이 중원의 패권을 장악하면서 유목을 버리고 농사를 받아들여 대제국을 건설했다. 그것을 보면 농업이야말로 병사와 인구를 늘리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다.
“창이에게서는 연통이 없느냐?”
동범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별로 걱정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이전에도 이런 적이 여러 번 있었기 때문이다.
“혈기 넘치는 조카가 아닙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대추장. 대성(大城)이 아닌 이상 조카나 용맹한 부족의 전사들을 상대할 수 있는 조선의 병졸은 없지 않습니까.”
“……세상은 넓다. 강자는 많고.”
동맹가첩목아는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한 얼굴을 한 채 중얼거렸다. 동범찰이 그런 대추장의 얼굴을 보면서 말했다.
“무신을 생각하십니까.”
“조선은 기이한 곳이니까.”
그 넓은 건주를 마다하고 삼면이 대해로 막혀 나올 길이 없는 고려로 돌아가 조선을 세운 무신이다. 건주만 해도 조선보다 훨씬 땅덩어리가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작은 나라에서 태어난 무신을 막을 수 있는 전사는 그 너른 건주 어디에도 없었다.
“걱정 마십시오. 게다가 이번에는 커다란 백호를 사냥하기 위해 나선다 하지 않았습니까. 대추장의 위엄을 한층 돋보여줄 수 있는 영물이라 하였습니다. 허헛.”
동범찰은 일부러 더 크게 웃었다. 대추장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함이었다. 동맹가첩목아는 피식 웃었다. 그런데 그때 바깥에서 소란이 일더니 헐레벌떡 누군가 뛰어 들어왔다. 뛰어 들어온 자를 발견한 동맹가첩목아와 동범찰의 눈이 커졌다.
“고복아알이 아니더냐.”
고복아알은 아들인 동창이 이끄는 전사들 중에서도 눈 여겨 보는 재목이었기에 동맹가첩목아와 동범찰이 모두 알아봤다.
“지원…… 지원을…….”
그런 고복아알의 상태가 엉망이었다. 얼마나 급히 달려온 것인지 쏟아지는 비를 그대로 맞아 몸의 여기저기가 젖어 있었고, 말을 갈아타면서 달려온 듯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체력이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달리는 것은 말이 한다고 하지만 그 위에 올라있는 사람도 지속해서 체력이 소모되기 때문이었다.
“지원? 창이는, 창이는 어찌 되었느냐.”
동범찰이 목소리를 높였다. 동창은 차기 오도리 부족의 대추장이 되어야 할 적장자였다. 고복아알은 쓰러질 듯 말 듯 하면서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적…… 엔두리, 엔두리…….”
“엔두리? 대체 무슨 소리냐. 정신을 차리거라!”
고복아알이 엔두리란 말만 남긴 채 정신을 잃었다. 자리에 함께 하고 있었던 모용청과 모용덕 중 모용청이 동맹가첩목아에게 물었다.
“엔두리? 그게 무엇입니까?”
“여진말로.”
동맹가첩목아가 한 차례 호흡을 크게 하면서 표정을 달리한 채로 모용청을 쳐다봤다.
“신(神)이라 하오.”
“신……?”
“대추장. 전사들의 출격을 허락해 주십시오.”
엔두리가 나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동범찰은 동맹가첩목아 앞에 부복한 채로 외쳤다. 적장자이자 대전사인 동창의 행방을 알 수 없고, 그가 위험해 처했을 수도 있으니 일단 행방을 찾아 지원하는 것이 최우선이었기 때문이다.
“허락한다.”
동맹가첩목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동범찰이 급히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이내 요란한 뿔나팔 소리가 울려 퍼짐과 동시에 사방이 소란스러워졌다.
“두 분께도 부탁드려도 되겠소?”
동맹가첩목아가 모용청과 모용덕에게 말했다. 모용덕이 모용청을 쳐다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드립니다. 단주님.”
“팔검단의 절반을 남겨 놓겠습니다. 허니 조선의 호송단이 도착을 한다면…….”
“제가 맡도록 하겠습니다.”
모용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도리 부족에게 빚을 씌워 둬서 나쁠 것이 없었다. 애초에 이곳에 온 것 자체가 그들에게 빚을 씌워 두기 위해서였다. 만에 하나 오도리 부족의 동맹가첩목아가 건주위지휘사가 된다면 건주와 바로 맞닿아 있는 요녕의 패주인 모용세가 입장에서는 손해 볼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엔두리…….”
동맹가첩목아는 계속해서 엔두리란 말을 되뇌었다. 모용청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그에게 물었다.
“신(神)이라.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동맹가첩목아가 ‘엔두리’를 듣고는 무언가를 떠올린 듯한 표정이었다. 그것을 눈치챈 모용청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동맹가첩목아는 모용청을 힐끗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있소.”
“신(神)을 말씀이십니까?”
신(神). 감히 중원의 무림십좌들도 자신의 칭호에 쓸 엄두를 내지 못하는 광오하기 그지없는 단어였다. 그런 신을 봤다는 것에 모용청은 속으로 고소를 숨기고는 동맹가첩목아를 지그시 쳐다봤다.
“봤지. 어찌 아니 볼 수가 있겠소.”
동맹가첩목아는 모용청이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자신도 눈으로 직접 보기 전까지는 믿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는 신을 봤기에, 기꺼이 그 신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는 그 신의 의형제가 될 수 있었다.
‘무신(武神), 이성계.’
그런데 하필이면 바로 이 때, 조선의 호송단이 도착했다는 것에 맞춰 동창의 충복인 고복아알이 엔두리란 말을 남기고 정신을 잃었다?
‘불안하구나.’
동맹가첩목아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