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8. 사냥꾼과 사냥감 (1)2021.12.11.
[감사합니다 대협.]
호선은 진심을 담아 만우에게 말했다. 만우는 그런 호선의 진심에 코밑을 슥 훑었다. 머쓱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만우가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고는 해도 이런 순수한 진심에는 머쓱해질 수밖에 없었다.
“뒤에서 네 몸 회복하면서 사람들이나 지켜.”
[네, 대협.]
호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우가 이곳에 나타난 이상, 이들에게는 더 이상 위협이 될 것이 없었다.
“호랑이님. 저 분은…… 신선이신가요?”
[신선?]
호선의 보호를 받고 있던 이들 중 하나가 물었다. 호선은 고개를 돌려 만우를 쳐다봤다. 자신에 비하면 까마득하게 작은 인간이고, 짧은 세월을 살아온 인간이다. 허나 저 인간을 그런 덩치의 크기와 세월로만 판단할 수 있을까?
[확실한 것은 저 분은.]
호선은 이룡검을 늘어뜨린 채 여진족 전사들에게 손짓을 하는 만우를 보며 대답했다.
[선한 분이시다.]
무신, 천하제일인. 그런 것보다 호선에게 더 크게 다가오는 것은 바로 만우의 선함이다.
‘인정하지 않으시겠지만.’
호선은 피식 웃고는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쏴아아아!!! 아까부터 미친 듯이 퍼붓는 장대비는 그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털이 비에 홀딱 젖어 볼품없는 꼴이 되었지만 호선은 개의치 않았다. 목숨을 구했다. 산 것이 어디던가. 죽음보다는 삶이 나으니, 호선은 저 멀리 여진족 전사의 뒤에 잡혀 있는 여인을 보면서 빙긋 웃었다.
[너와 나의 인연은 끝이구나.]
호선은 수백 년 전 그녀를 구해 줬던 그 여아를 보고 있었다. 그 여아의 후손, 이어진 혈연의 향기가 짙게 이어진 여인을 보면서 호선은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
[나의 인연이 너에게도 이어졌고, 네가 바란 것도 이루어졌으니.]
신선이 된다는 것은 속세와의 인연을 하나씩 끊어 간다는 소리다. 호선은 자신이 왜 등선을 하지 못하고 낙선이 되었는지 그제야 깨달았다. 그녀가 500년이란 긴 세월을 살아오면서 맺은 인연, 그 수많은 인연의 끈이 그녀를 붙잡아놓은 것이다. 호선은 그중 하나가 끊어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크르릉 호선의 목울대 넘어 나지막한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
“…….”
“창 님. 어떻게 할까요.”
고복아알은 동창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동창의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에 고복아알이 돌아보자 동창의 창백해진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창 님! 어디 편찮으신 겁니까? 어디 다치신 곳이라도.”
고복아알이 놀라 동창에게 말했다. 그때 동창이 힘겹게 입을 열어서는 고복아알에게 말했다.
“그대는 보았는가.”
“무,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보지 못했구나.”
고복아알은 보지 못했지만 동창은 보았다. 장대비 속에서 날아오는 화살 수십 대를 일 수에 베어 버린 검의 궤적을. 그리고 그 검이, 갑자기 백호를 막아선 남자의 손에 들려 있다는 것을 말이다.
‘무림인!’
그것도 보통의 무림인이 아니었다. 누구보다도 눈이 뛰어나다고 자부한 동창의 눈에 대체 저 자가 어떻게 날아들던 화살들을 모두 베어 버렸는지 전혀 눈에 보이지 않았다. 하늘을 날아가는 새도 볼 수 있다고 자부한 동창이었다. 더군다나 모용세가에서 보낸 무인들의 검도 견식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들의 검조차도 동창의 눈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그 때문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게 깨진 것이다.
‘보이지 않았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동창은 갑자기 나타난 남자, 만우를 보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대는 누구기에 오도리 부족의 사냥을 막아선 것인가!”
동창의 목소리가 너른 들판 위로 울려 퍼졌다. 그 소리를 들은 호선이 뒤에서 포효를 터뜨렸다.
[사냥이라니!!!!]
호선은 분노를 터뜨렸다. 그런 호선의 분노에 여진족 전사들의 활과 창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지만 그들은 함부로 손에 들린 것을 던질 수 없었다. 그들의 본능이 위험신호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작은 동산만 한 크기의 백호가 아닌, 새로이 나타난 남자를 조심하라고 말이다.
“사냥이라. 재밌는 소리를 하는구나.”
만우의 옷은 장대비가 쏟아지는 가운데도 바짝 말라 있었다. 만우의 몸 주변으로 얇은 막이 쳐져 있어 빗줄기를 모두 튕겨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우는 늘어뜨린 이룡검의 위를 두드리는 빗방울을 느끼면서 재미있다는 듯 웃어 보였다.
“사냥이라. 저기 저, 백호를 말인가, 아니면 그 뒤의 조선인들을 말하는 것인가.”
“저 조선인들은 우리가 노획한 전리품이다. 그것이 바로 이곳의 율법이니 타인은 관여하지 말라!”
동창은 만우를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즉, 지나가는 길이고 관련이 없으면 그냥 지나가란 소리였다. 고복아알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동창을 쳐다봤다.
“창님. 그냥 저 인간도 쓸어버리시죠. 저 범에게 시간을 줄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동창은 검을 늘어뜨린 만우를 보면서 후, 하고 심호흡을 했다. 만우가 보여 준 것이라고는 날아오는 화살을 쳐낸 것 밖에는 없었다.
‘후퇴?’
동창의 머릿속에서는 후퇴가 떠올랐지만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떤 적인지도 모른 채 후퇴를 했다가는 전사들의 신임을 잃을 것이다. 적에게 꼬리를 만 차기 추장을 그 어떤 전사가 신뢰할까.
“전리품? 그것 역시 재밌는 말이로구나.”
만우는 동창이 한 말을 하나씩 곱씹으면서 재미있다는 듯 웃어 보였다.
“네놈들에게는 저 생명이 사냥감이고, 저 사람들이 전리품이구나. 그래, 그래 내 잘 알았다.”
만우가 이룡검을 치켜들었다. 이룡검의 검극이 여진족 전사들에게로 향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우두머리임이 도드라져 보이는 동창에게로 향했다.
“그러니 도망가 보거라. 본주가 사냥꾼을 할 테니 말이다.”
“무슨 개소리를!!”
고복아알이 발끈하면서 창을 꼬나 쥐고는 말을 몰아 달려 나갔다.
“고복아알!”
동창이 고복아알을 잡기 위해 뒤늦게 손을 들었지만 그는 이미 분기탱천하여 만우를 향해 창극을 들어 올리고는 말의 배를 찼다. 히이잉!!! 태어나면서부터 말과 가까이 사는 이들이 바로 여진족의 전사들이다. 고복아알은 능숙하게 말을 몰아서는 그대로 만우를 창에 꿰고 말발굽으로 짓밟기 위해 거칠게 말을 몰았다. 그런 기수의 기마술에 말 역시 동조하면서 발을 요란하게 굴렀다. 만우가 달리는 고복아알을 그 자리에 고고하게 선 채로 유심히 쳐다봤다.
‘저 눈은.’
동창은 만우의 눈을 보는 순간 찬물을 뒤집어 쓴 것 같은 서늘함을 느꼈다. 인간보다 월등하게 커다란 기마가 달려들면 아무리 숙련된 전사라고 해도 긴장하기 마련이다. 괜히 기마병이 보병에게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우의 눈에는 그런 감정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일말의 긴장감은 물론이거니와 전투를 앞둔 자 특유의 살기나 투기 자체도 전혀 흐르지 않았다.
“노옴!”
고복아알은 그것을 보고 만우가 겁먹어서 움직이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말에 더욱 박차를 가하자 달려 나가는 속도가 빨라졌다.
“죽어라!”
고복아알이 만우를 향해 창을 내뻗었다. 말이 달리는 속도에 고복아알의 근력까지 더해진 창이 마치 화살처럼 만우를 노리고 쏘아졌다. 그렇게 고복아알의 창이 이미 쏘아졌을 때, 만우의 검극이 흔들렸다. 아주 살짝. 봄에 부는 미풍처럼, 깃털 하나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할 정도로 아주 살짝 움직였다. 눈이 좋은 동창이 간신히 그 검이 움직였다는 것을 봤을 정도로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움직이지 않은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푸화아악!!! 털썩 고복아알의 창이 만우를 꿰뚫고 지나갔다. 하지만 피를 쏟아 내면서 머리를 잃은 몸뚱어리가 말 위에서 떨어진 것은 만우가 아니라 고복아알이었다.
텅! 만우는 겨드랑이로 잡았던 창을 떨궜다. 땅에 떨어진 고복아알의 시체에서 나온 피가 빗물에 희석되면서 싸늘하게 식어 갔다. 피식 만우는 바짝 긴장한 동창을 피식 웃으며 쳐다봤다. 이 중에서 자신의 검을 유일하게 따라온 사람이 동창이란 것을 만우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분노하는 다른 여진족 전사와는 달리 긴장한 표정을 짓는 동창이었고 말이다.
“사냥감이 도망가지 않으면 이런 꼴이 나는 법.”
만우는 땅에 떨어진 고복아알의 창을 허공섭물로 들어올렸다. 고복아알의 죽음에 분노하고 있던 여진족 전사들의 눈이 커졌다. 아무도 붙잡지 않았는데 고복아알의 창이 허공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쉬이익!!!
“크하악!!!!”
그리고 허공으로 떠오른 창이 한줄기 빛살이 되어서는 날아가 여진족 전사의 가슴 한 복판에 박혔다. 만우를 향해 몰래 활의 시위를 당기던 여진족의 전사였다. 그렇게 꿰뚫린 여진족의 전사는 거의 뒤로 삼 장을 날아가고 나서야 땅에 떨어져서는 다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충격적인 광경에 여진족 전사들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제야 그들의 머리는 이전부터 본능이 보내오고 있던 신호를 감지해 냈다.
“본주는 전리품 따위는 필요하지 않아.”
만우는 이룡검의 검극을 틀어 동창을 겨눴다. 동창은 거대한 검이 자신의 목 줄기를 겨누고 있는 듯한 아찔함에 말 위에서 비틀거렸다.
‘괴물.’
동창은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만우는 그런 여진족 전사들을 보면서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만우의 주변으로 떨어져 내리던 빗방울들이 부채꼴로 변해서는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러니 모두 죽일 것이다. 도망가 보거라. 네놈들의 두 발로.”
히이이잉!!!! 여진족 전사들이 타고 있던 말들이 고개를 꺾고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룡검에 맞고 튕겨져 나간 빗방울들에 모두 만우의 내공이 담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빗방울들은 정확하게 말들의 목숨을 한 번에 끊었다. 여진족 전사들이 쓰러지는 말 위에서 몸을 날려서는 땅에 착지했다. 까닥
“어서.”
“……산개! 전원 산개하여 후퇴하라!!!!”
동창 역시 자신의 반쪽이나 다름없는 말을 잃었다. 하지만 분노가 차오르진 않았다. 그것보다는 지금 당장 죽을 수도 있다는 서늘함에 살아야겠다는 생각밖에는 없었다. 수백 명이나 되는 여진족의 전사들이 동창의 말에 따라 개미떼처럼 장대비 너머로 사방으로 흩어졌다. 둥실! 만우가 고복아알에 의해 붙잡혀 있던 여인을 허공섭물로 끌어당겼다. 만우는 그 여인을 호선에게로 보낸 후 고개를 끄덕였다.
“이 여인이냐.”
[예. 대협.]
“대협은 무슨. 그나저나 어쩔 셈이냐.”
만우는 사방으로 멀어지는 여진족 전사들의 기척을 느끼면서 호선에게 물었다. 그 사이 호선의 몸에 꽂혀 있던 목창이나 화살들은 밀려나왔지만 독이 스며든 상처에서는 계속해서 핏물이 흐르고 있었다.
[후환을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핏값을 받고 싶은 것이냐.”
[제 피가 아닙니다.]
호선은 커다란 고개를 숙여 보였다. 만우는 호선의 뒤에 옹기종기 모여 만우를 보고 신선이라고 수군대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저들도 돌아가려면 빈손으로 갈 수는 없겠구나.”
[도와주실 겁니까?]
“안 도와줄 거면 이곳까지 오지도 않았다.”
만우는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