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7. 왜 너희가 여기 있는 거냐 (4)2021.12.07.
“그만 자라.”
만우는 횡설수설하면서도 어떻게든 도움을 청하고자 하는 여인의 수혈을 짚었다. 그러자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있던 여인이 정신을 잃고는 그대로 쓰러졌다.
“읏차.”
방매가 조심스럽게 그 여인을 눕혔다. 수레 위에 타고 있던 간장이 내려야 했지만 간장은 고개를 돌려 만우를 쳐다봤다.
“형님. 여인의 사정이 딱하오. 도와줘도 되지 않겠소?”
“흐음.”
만우는 턱을 쓰다듬었다.
“형님이시라면 도와주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시지 않소.”
간장은 저 여인이 안쓰러운 모양이었다. 간장은 생김새와는 다르게 마음이 여렸다. 그러니 만우를 놀라게 할 만한 야장 기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내세울 줄 모르고 검계에 붙들려 있었던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과연 호선이 그걸 원할까 싶어서.”
“도움을 주고자 하는 것인데 그걸 원하지 않을 이유는 없지 않겠소?”
간장이 고개를 돌려 초절정 고수 오인방을 쳐다봤다. 그들의 동의를 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서 돌아온 것은 놀라울 정도의 무신경이었다.
“나라면 원하지 않을 거다.”
문형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슌스케를 제외한 나머지 넷은 중원무림의 그 살벌함을 익히 잘 알고 있었다. 그곳에서 이유 없는 호의와 도움은 없다. 또한 콧대 높은 고수들은 자신이 원하지 않은 남의 도움을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호의를 베풀고도 칼부림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곳이 바로 무림이다. 칼을 쥐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때로 중요한 것은 목숨이 아니라 명분과 명예인 경우가 더 잦았기 때문이다.
“어째서요. 어려움에 처한 이를 도운다는 것이…….”
“약자(弱者)가 아니니까.”
감령이 툭 내던지듯 말했다. 간장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감령은 만우를 힐끗 쳐다봤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는 강자(强者)니까. 내가 보기에 호 낭자는 강자니까.”
“…….”
“호 낭자가 어찌하여 홀로 떠났는지 모르는 거야?”
호선은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자신이 맺은 인연이기에 그것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맺은 자가 지는 것이 맞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료지 않소! 이 매몰찬 사람들아!!!”
간장이 버럭 소리를 지르고는 등을 홱 하고 돌렸다. 간장은 그런 무림인들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만우는 간장을 보면서 쓰게 웃었다. 때로 무림은 양민, 아니 평범하게 살아오는 이들에게는 도저히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은 이상한 세상이었으니까.
“은공. 여인이 딱하다고는 하나 저도 은공께서 가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설미수가 만우에게 말했다. 그가 어떤 생각으로 말했는지 만우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설미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때문이 아닙니다. 이 여인은 마적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지만 제 생각이 맞다면 그들은 한낱 마적 떼가 아니라 여진족의 전사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국경지대에서 노략질을 하는 놈들이라면 십중팔구는 여진족의 마적들이다.
“그들과 마찰을 일으켜서 사행단의 행로에 이득이 될 것이 없습니다. 저희가 행해야 할 요녕의 모용세가는 그들과 관계가 깊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득이 없다…….”
“그들은 끈질기고 사납습니다. 상왕께서 저들을 관리하셨던 영향력이 아직 남아 있어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꽤나 귀찮은 적이 되었을 것입니다.”
설미수는 자신의 의견을 정확하게 피력했다.
“호선 낭자가 어려움에 처했다면 동료로서 돕는 것이 응당 사리와 이치에 맞으나, 호선 낭자가 어디에 있는지, 그녀를 돕는 데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한지 모르는 이상 여진족과 마찰을 일으킨다는 것은 득보다는 실이 더 많을 것입니다.”
설미수의 말은 지극히 이성적이었다. 감정을 배제하고 이성에 근거한 설미수의 말은 차가웠지만 엄밀히 말해 가장 필요한 말이기도 했다. 설미수는 지금 사람이기 이전에 주상의 명을 받고 명천자를 대면하러 가는 사행단의 우두머리였기 때문이다. 우두머리는 감정보다는 이성을 중시해야 하는 것이 맞았다.
“맞습니다. 나리의 말이 맞지요. 한데 말입니다…….”
만우는 고개를 돌려 저 편을 바라봤다. 다른 사람들은 쳐다봐도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하지만 만우는 느껴졌다.
“내가 맺은 인연이 나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끈끈한 것 같아서 말입니다요.”
“……인연 말씀이십니까?”
“네. 인연.”
만우가 피식 웃으며 바지자락 끝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었다. 그리고는 설미수와 동군영을 쳐다봤다.
“나와 호선의 인연이니 비가 그치시면 나리들은 먼저 출발하십쇼. 따라갈 터이니.”
“따라오다니. 저희가 가는 방향도 모르시지 않습니까, 은공.”
설미수가 당황하여 만우에게 말했다. 하지만 만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말했지 않습니까. 내가 맺은 인연이 나리가 말씀하시는 것보다 더 강하다고. 그것은 나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요.”
만우가 이룡검을 허리춤에 잘 갈무리하고는 씩 웃었다. 팡!!!! 그리고는 만우의 신형이 장대비가 내리는 속으로 사라졌다. ***** 크와아앙!!!
“힘이 빠졌다! 계속해서 견제해!”
“뒤에 있는 것들을 노려라! 그래야 놈이 움직이지 못한다!”
호선이 포효를 터뜨렸지만 처음에 비하면 그 힘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쏟아지는 장대비 속에서 날아드는 화살과 목창을 몸으로 맞아 내는 일은 생각보다 체력을 훨씬 더 빠르게 소모시켰기 때문이다. 두두둑!!! 크왕!!! 후웅!!! 호선의 앞발이 허공을 갈랐다. 세 기, 네 기씩 소규모로 짝을 이뤄 창을 치켜든 여진족 전사들이 날파리처럼 사방에서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푸부북! 크와아아앙!!! 문제는 호선의 다리는 네 개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도술을 쓸 수도 없었다. 호선 혼자라면 모를까, 수십 명의 사람을 한 번에 지킬 수 있을 만한 도술은 현재 호선으로서는 사용이 불가능했다. 호선의 옆구리에 틀어박힌 목창이 시뻘건 피로 물들었다. 호선의 하얗던 털은 분홍빛이 되어 있었다. 그런 호선의 등줄기에만 목창이 열 개가 넘게 박혀 있었고, 몸 전체에 자잘하게 박힌 화살이 서른 대가 넘었다. 호선은 고슴도치가 된 것처럼 온몸에 상처를 입고도 사람들에게 날아오는 화살과 목창을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몸으로 받아 냈다.
“발사!!!”
피잇!!!! 호선은 날아오는 화살의 파공성을 듣고는 몸을 돌렸다. 그러자 호선의 몸에 화살들이 틀어박혔다. 그 틈을 타 기마가 달려들어 호선의 여기저기에 목창을 박아 넣고는 빠져나갔다.
“안 돼, 안 돼…….”
“하늘이시여. 저희를 버리지 말아주세요.”
호선은 공포에 떨면서 입술이 파래진 채로 비를 맞으며 하늘을 찾는 사람들을 보면서 속으로 그르렁거렸다.
[부족하다. 부족해. 내가 이리도 부족했던가.]
대체 자신은 무엇을 위해 500년이란 세월동안 존재했던 것일까. 등선을 하다가 선주(仙株)를 잃어 약해진 것은 알았지만 이리도 무력할 줄은 몰랐다. 그것이 호선의 머릿속에 변화를 일으켰다. 악의(惡意). 등선을 하다가 떨어져 낙선(落仙)이 된 이들의 최후가 악선(惡仙)이 되는 이유는 호선처럼 그들이 보낸 세월에 무력감을 느끼고 그것을 저주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보내온 세월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크와아아앙!!!!! 호선의 눈이 벌겋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렇다는 것은 선기가 낙기로 오염이 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것을 호선도 알고 있었지만, 스스로의 무력감에 그녀는 정신이 좀 먹어가고 있었다. 500년이란 세월을 수양을 하며 살아왔다고는 하지만 현실과 이상은 다른 법이었으니까. 특히나 선주를 잃고 지금처럼 무력해진 호선은 그 점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지킨다!!!]
크와아앙!!!! 호선은 이들을 지키고자 하였다. 이미 호선은 여럿의 여진족 전사를 죽였다. 본래 등선을 하기 위하여 수양을 하는 영물들은 살계를 열어서는 안 된다.
[지키겠다!]
그러니 호선의 등선은 이미 물 건너 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호선은 기꺼이 자신이 이고 있던 등선의 무게를, 그 도(道)를 내려놓고자 마음먹었다. 뻐억!!!! 키헹!!!!
“뭐하는 거야 이 호랑이가!”
갑자기 정수리가 쪼개지는 듯한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면 정말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호선은 뇌가 쪼개지는 듯한 통증과 함께 자신도 모르게 키헹 하는 소리를 내고는 당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우뚝!!! 그리고는 호선의 눈이 커졌다. 그녀의 커다란 동체를 노리고 날아오던 화살들이 무언가에 붙잡힌 것처럼 허공에 멈춰 있었기 때문이다. 서거거걱!!!! 하지만 그것은 화살들이 허공에 멈춰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잠시 후 수십 발이 넘는 화살들이 가로로 절반으로 쪼개져서는 작은 나뭇조각으로 변해서는 후두둑 떨어져 내렸으니까. 한 순간에 그 모든 화살들을 베고 지나간 검에 의해 날아오던 힘을 잃고 그 자리에 멈춰선 것처럼 보인 것이다.
“호랑이. 드디어 미쳤어?”
호선은 자신의 앞에 선 남자, 만우를 보고서는 호랑이 얼굴 한가득 기쁨을 띄고는 울부짖었다. 커허허헝!!
[대협!!!!!]
만우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자신이 도중에 끼어들었기에 망정이지, 그대로 놔두었다면 호선은 악선이 되었을 것이다. 아니, 악선이 아닌 악수(惡獸)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죽으려고 아주 용을 써라, 용을. 어?”
만우는 그런 호선을 구박했다. ‘자살을 하려면 다른 방식으로 하지.’하면서 만우는 혀를 쯧 하고 찼다. 그런 호선의 뒤에 겁먹은 표정을 짓고 선 수십 명의 사람을 본 만우는 쳇 하고 헛기침을 했다. 호선의 결정이 아예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라면 그렇게 안 하겠지만.’
자신이라면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테지만 말이다. 만우는 금방 눈물이라도 흘릴 것 같은 커다란 백호를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무리 선주를 잃었어도 고작 저런 놈들에게 고전을 하고 있다는 게 말이 돼?”
[이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그것도 모르고 들이받았다고? 너, 축지는 심심해서 하는 거지? 도움을 청하든가.”
[아…….]
호선은 정말 그것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멍청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만우는 그런 호선의 얼굴을 보고는 혀를 쯧쯧 찼다.
“낙기를 거의 다 빼놨더니, 그걸 악기로 만들고 있어요, 아주.”
진인에 오른 만우의 눈에 호선의 몸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단번에 들어왔다. 만우는 호선에게 어울리지 않게 씩 웃으며 말했다.
“또 엄청 얻어맞아야겠다?”
[……감수할 수밖에요.]
낙기를 선기로 정화하기 위해 만우에게 얻어맞으면서 독기를 빼냈던 호선이다. 그때만 떠올리면 끔찍했는데, 이제는 낙기보다 한 단계 더 오염된 기운인 악기를 빼내야 한다. 그 과정이 험난할 것임은 보지 않아도 되는 일이다. 그래도 악수가 되어 지금껏 지키던 모든 것들을 제 손으로 파괴하는 것보다는 더 나았다. 그렇게 보면 호선은 행운아였다. 만우를 만난 덕분에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던 길을 다시 찾게 되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