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6. 왜 너희가 여기 있는 거냐 (3)2021.12.04.
“둘째는?”
방매가 만우에게 물었다. 만우는 별것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아까부터 교지, 교지하는데 그게 뭐가 중합니까.”
만우가 히죽 웃었다.
“명천자가 압송해 오라 한 것은 본주인데. 기일이 중요한가? 어차피…….”
만우는 턱을 쓰다듬었다.
“거슬리면 쓸어버릴 생각인데.”
칠주야 뒤에 쓸어버리든, 백주야 뒤에 쓸어버리든 어차피 결론은 정해져 있다는 소리였다. 명에서 조선에 요구한 것은 검주 만우에 대한 압송이었으니까. 그런데 만우를 압송할 수 없으니 임시사행으로 사행단을 꾸려 보낸 것뿐이다. 이미 명에서 만우의 존재를 규정하고 있는 상황에 임금의 교지가 뭐 그리 중요하냐는 것이다.
“아, 명이 조선에 해코지를 할까 봐? 걱정 마.”
검주로 말하고 있기에 만우는 쓰나마나하던 존대는 집어치운 지 오래였다. 그것을 눈치챈 설미수와 동군영은 질린 표정을 지었다. 대체 그 누가 있어 감히 명나라의 천자를, 심기를 거슬리면 쓸어버리겠다 광오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만우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불가능할 것이다. 사실 그 둘에게는 만우의 말도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들리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누가 명천자에 대항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만우가 강하다고 하여도 그 둘에게는 일백만 대군을 손짓 하나로 움직일 수 있는 명천자가 더욱 대단해 보였기 때문이다.
“쓸어버리면 조선을 건들 생각이나 하겠어? 본주도 조선에 쭉 살 생각이니까 그런 걱정일랑은 하지 말고…….”
만우는 다시 한번 씩 웃어 보였다. 그리고는 다시 역졸로 돌아왔다.
“그러니 두 분의 논쟁이 쓸모가 없었다, 이 말입니다요.”
뒤에서 문형일을 비롯한 다른 이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어 보였다. 그것은 여포나 척사영도 마찬가지였다. 생각이 있는 듯하면서도 묘하게 무모하고, 무모하면서도 묘하게 신중한 것 같은 만우였기에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두 가지가 문제였으니, 그중 하나를 해결하면 되겠지요, 그럼?”
만우가 고개를 돌리고는 턱짓을 했다. 뒤에 선 초절정 고수 5인에게 턱짓을 한 것이다. 다들 움찔했지만 누구에게 한 것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사실 기절한 사람을 깨우는 것 정도는 혈만 짚으면 간단한 일이었지만, 그런 잡일을 하고 싶어 하는 초절정 고수가 어디 있겠는가. 여기서나 이런 취급이지 넓디넓은 중원의 어느 주(州)에 가면 그 주를 호령할 최고수로도 군림할 수 있는 자가 바로 초절정 고수였다.
“나다 하면 나와야지.”
만우가 중얼거리자 필두가 감령에게 말했다.
“졌잖아. 나가. 잡일하기로 한 거잖아.”
“이익!!!!”
감령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는 걸어 나왔다. 그리고는 쓰러진 여인의 몸을 일으켜 등에 장심을 가져다 대고는 가볍게 내공을 불어넣었다.
“허억!!!!”
내공을 전혀 익히지 않은 일반인의 몸이었기 때문에 내력의 수발이 대단히 세심해야 했다. 다행히 감령이 준 충격이 적절했던 것인지 여인이 눈을 번쩍 뜨고는 놀란 표정으로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여, 여기는…….”
“정신이 드는가?”
동군영이 여인에게 말했다. 여인의 나이는 남루한 모습 때문에 쉽사리 짐작할 수 없었지만 고생을 많이 한 흔적이 얼굴과 손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잠시 두 눈을 껌벅거리던 여인은 다급히 입을 열었다.
“조, 조선말. 혹시 조선에서 오신…….”
그렇게 말을 하던 여인의 눈이 커졌다. 동군영의 차림새가 범상치 않다 느낀 것이다. 볏짚 같은 것으로 만든 도롱이가 아니라 기름을 바른 유삼과 갈모를 쓰고 있었으니 더욱 그랬다.
“맞네. 조선에서 왔지. 한데 무슨 일인가. 이곳은 조선이 아닌데.”
동군영은 눈치를 채고는 여인이 다른데 신경을 팔지 못하게 물었다. 일단 만우가 말한 대로 여인이 정신을 차렸으니 된 일이다.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나리.”
하지만 여인은 동군영이 양반이란 것을 눈치채고는 입을 꾹 닫았다. 애초에 관아도 없는 국경 근방에 살고 있다는 것에서 눈치를 챘어야 했다. 이 여인이 살고 있는 마을은 양반에 익숙하지 않았다. 어쩌면 양반을 피해 화전을 일구며 살아가던 사람들이 만든 마을일지도 모른다. 화전민을 부모로 두었다면 그 밑에서 자란 이들이 양반에 대해서 어떤 소리를 듣고 자랐겠는가. 그러니 이 여인의 태도가 이해가 되었다. 그때 만우가 나섰다.
“혹시 큰 호랑이를 본 적이 있소?”
“큰 호랑이…….”
여인이 고개를 돌려 만우를 쳐다봤다. 만우는 누가 보더라도 일반 양민의 복장이었다. 하지만 여인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딱 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일행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양반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나 더 있었기에 여인의 경계심은 더욱 커졌다.
“백호. 하얀 털이 묻어 있는 것을 보니 꼭 그런 것 같은데.”
만우는 여인의 몸에 묻어 있던 하얀 털을 엄지와 검지로 집어 들었다. 그러자 방매의 눈이 커졌다.
“호선 언니?”
“호선이라고?”
“어?”
만우가 갑자기 여인에게 말을 건 것에 고개를 갸웃하고 있던 이들이 눈을 번쩍 떴다. 이들이 모두 큰 호랑이에 알고 있다는 것에 여인의 경계심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큰 호랑이. 갑자기 나타난 그 백호는 여인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의 생명의 은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여인이 위험을 무릅쓰고 혼자 떨어져 나온 이유는 생명의 은인을 죽게 놔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도와주세요. 호랑이가, 호랑이가 위험해요!”
***** 퍽, 퍼버벅! 크와아앙!!!! 거대한 백호의 등짝에 이쪽에서 던진 목창이 튕겨져 나왔다. 하지만 고복아알은 실망하지 않았다. 대롱대롱 대부분의 목창은 두터운 백호의 가죽을 뚫지 못하였지만 개중에는 한두 개씩 박힌 것들이 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크와아앙!!! 조금씩 입은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로 인해 작은 동산만 한 백호의 하얀 털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고복아알은 그것을 보고는 사기충천하여 수하들에게 소리쳤다.
“반은 저 호랑이를 노리고, 반은 그 뒤쪽을 노려라!”
“예!!!”
고복아알이 데려간 전사의 수는 수십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수십 중 열이 넘는 여진족의 용맹한 전사들이 저 백호에게 당했다. 저 백호는 눈 깜짝할 사이에 갑자기 나타났다. 그리고서는 여진족의 전사들을 죽이고 그들이 전리품으로 붙잡아 데려가던 조선인들을 지키려는 듯 그 앞에 버티고 선 것이다.
“이리와!!”
“아악!!”
뒤에서 끌려오던 다른 조선인들은 백호의 등장으로 인해 전사들의 손아귀에서는 벗어났다. 하지만 고복아알이 미색에 한 눈에 반해 데려가던 여인만큼은 여전히 고복아알의 손아귀에 잡혀 있었다. 크아아앙!!!! 백호는 그 여인의 입에서 비명소리가 터져 나올 때마다 포효를 내질렀다. 하지만 고복아알이나 여진족 전사들은 그런 백호의 울음소리에 겁먹지 않았다. 어차피 백호가 지금 저 자리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호랑이 주제에 사람을 지키려 하다니. 흥.”
백호는 힘없는 마을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방패 역할을 자처했다. 그러니 고복아알이나 전사들이 저 뒤에 있는 조선인들을 노리기만 하면 백호는 저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다는 말이었다. 이미 수차례 시도를 통해 확실하게 백호가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후로, 백호는 여진족의 전사를 단 하나도 죽이지 못했다. 모든 전사들이 사냥의 명수인 여진족 전사들에게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는 사냥감 따위는 백호가 아니라 설령 용이라고 할지라도 잡아 낼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눈을 노려라!”
특히 그중에서도 고복아알은 끈질기고 처절할 정도로 집요하게 백호를 괴롭혔다. 특히 말에 올라 뛰어난 기동력으로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계속 자극했기에 백호는 여진족 전사들이 무기를 날리는 것을 보면서도 몸으로 막아 내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 움직였다가는 고복아알이 말을 몰아 달려들어 사람들을 학살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크와아앙!!!! 아무리 단단한 바위라도 결국 계속해서 때리다 보면 뚫리게 되어 있다. 그것이 영성을 띈 영물인 백호일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영물이라고 해서 생명체가 아닌 것은 아니고, 계속해서 저렇게 상처를 입다 보면 결국 체력에 한계가 오게 되는 것은 마찬가지이니 말이다. 고복아알은 그 상황에서도 집요하게 백호의 얼굴을 노렸다. 목창이나 이런 것들이 서서히 먹혀들고 있었지만 가장 쉽게 무력화시키면서 체력을 크게 깎아 낼 수 있는 부위가 백호의 얼굴 부분이란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다른 공격은 그냥 몸으로 받아 내면서도 눈이나 코, 입으로 날아오는 공격은 앞발을 들어 막아 냈으니 그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사냥꾼들은 본능적으로 사냥감의 약점을 포착하고 그곳을 파고들기 때문이었다. 삐이이익-!!!!! 그렇게 백호의 공략에 집중하고 있던 와중에 저 멀리서 피리 소리가 뾰족하게 울려 퍼졌다. 고복아알과 여진족 전사들이 환한 표정을 지었다. 그 소리는 고복아알이 전사를 보내 보고한 동창의 도착을 알리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크와아앙!!!! 그 소리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백호 역시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좋을 리가 없다 눈치를 채고는 기세가 한층 더 사나워졌다. 하지만 기세가 사나워져도 백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조금만 움직이려고 하면 뒤에 있는 힘없는 이들에게로 공격이 집중되어 결국 몸을 날려 그것을 대신 막아 내야만 했기 때문이다. 푸욱! 크와아앙!!!! 목창이 다시 한 자루 날아와 호랑이의 등에 꽂혔다. 워낙 가죽 자체가 두껍고 몸이 튼튼한 백호지만, 지속적인 공격에 조금씩 상처를 입기 시작했다.
“방심하지 말고 계속해서 날려라! 창 님이 도착하신다면 저런 백호 따위는 끝장이다!!”
약점이 확실한 사냥감을 사냥하는 것에 오도리 부족의 강력한 전사인 동창과 그 전사들까지 합류하면 백호 따위는 식은 죽 먹기다. 조선인 전리품만이 아니라 영물 백호까지 전리품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온 셈이 된 것이다. 크와아아앙!!!! 백호의 포효 소리가 너른 들판 위에 구슬픈 듯 울려 퍼졌다. ***** 100살에 불과했던 시절. 영물로서는 어린 나이지만 호랑이로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늙었던 그 나이. 그 사이에 걸쳐 이곳저곳 치어 다니던 호선이 다른 호랑이가 버티고 있지 않은 곳으로 흘러들어온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변태(變態) 중인 모든 것들이 가장 연약한 때이듯, 짐승을 넘어 영물로 진화하던 중이던 백호는 힘을 다하고는 작은 고을 근처에서 결국 쓰러졌다. 그랬던 백호, 호선이 다시금 눈을 떴던 것은 그녀의 입으로 들어오던 적지만 시원한 물 몇 방울 때문이었다. 이미 그때 덩치가 작은 기와집만 하던 그녀에게 물 한 바가지 정도는 인간 기준으로 몇 방울에 불과했으니까. 그렇게 힘겹게 눈을 뜬 호선의 앞에서 겁먹은 듯하면서도 두 눈에 호기심을 가득 담고 있던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조심스럽게 호선의 이마를 만지더니, 사람 말을 하지 못하던 호선을 수시로 찾아와 간호해 주었다. 아이였기에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해야 마실 물과 과실 몇 가지를 가져다주는 것이 전부였지만. 그럼에도 그 아이가 품은 눈부실 정도로 순수한 영혼의 빛 덕에 연약해져 있던 호선의 몸은 영성을 가진 영물로서 빠르게 변태하기 시작했다. 1년. 작디작은 아이가 고사리만 한 손으로 수시로 찾아와 호선을 간호해 주고 돌봐주었던 시간이 무려 1년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호선은 그 1년 만에 짐승의 탈을 벗고 영성을 띈 영물이 된 것이다. 크와아아앙!!!!! 호선은 그 아이와 피가 이어진 여인이 고복아알의 손에 붙잡혀 있는 것을 보고는 그녀가 소리를 지를 때마다 마주 포효를 터뜨렸다. 하지만 호선은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비록 낙선이라 하나 그녀의 본질은 선한 영물이었으니까. 자신이 움직이면 이 수십의 무고한 목숨이 스러져 간다는 것에 호선은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푹!!! 그때 호선의 몸에 목창이 날아와 박혔다. 불로 지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호선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자신이 쓰러진다면 정말 이들에게는 이제 아무 것도 없는 셈이었으니까. 더불어 저 고복아알에게 붙잡힌, 자신과 연이 닿았던 그 아이의 피가 이어진 여인도 구해 낼 수 없으니까. 그래서 호선은 이를 악물었다. 피익!!!! 쐐애애애액!!!! 하지만 그것도 한계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결국 날카로운 피리 소리가 울려 퍼진 후 얼마 되지 않아 수풀 속에서 이쪽을 향해 수백 대의 화살이 날아올랐으니까. 호선은 수풀 너머에서 느껴지는 강력한 기운에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는 몸에 힘을 주며 최대한 부풀렸다. 자신의 몸이 이들을 보호할 수 있는 방패가 되기를, 그리하여 아무도 죽지 않기를 바랐다. 퍼버버버버벅!!!! 수십의 사람을 지키기 위해 몸을 돌린 호선의 등 뒤에 화살이 빽빽하게 박히면서 호선의 입에서 구슬픈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크와아아앙!!!! 두두두!!! 곧이어 수풀을 헤치며 말을 탄 여진족 전사 수백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호선은 등줄기가 갈기갈기 찢기는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면서도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등이 저릿저릿한 것이 화살에 독이라도 발라 둔 모양이었다. 호선은 네 다리로 땅을 딛고 선 채, 자신의 다리가 천년거목이 내린 뿌리가 되기를 바라며 두 눈을 부릅떴다.
[한 놈도 내 뒤로 갈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