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5. 왜 너희가 여기 있는 거냐 (2)2021.11.30.
“국경이 혼잡스럽다고 하였는데.”
패수를 건너면 명의 요녕성에 들어서게 된다. 물론 요녕성 전역에 사람이 살고 있는 것은 아니기에 사람이 살고 있는 곳까지 가려면 며칠은 이동을 해야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패수 인근이기 때문인지 척희운의 말과는 달리 국경은 제법 평온해 보였다. 명에서 들어오는 보부상들이나 상단이 들어오고 있었고 나름의 활기도 있었다. 설미수는 들어오면서 미리 지키고 있는 군졸에게 사행단에 대해서 알렸기에 수월하게 국경을 통과할 수 있었다. 임금의 교지를 펼치자마자 두 말 없이 국경을 통과시킨 것이다.
“와. 아저씨들한테 들으면 국경 하나 통과하는 게 엄청 까다롭다고 하던데.”
방매가 그것을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역시 권력이 좋다는 어울리지 않는 말까지 중얼거리면서 말이다. 그렇게 만우 일행은 국경을 통과해 북서쪽으로 방향을 잡고는 움직였다. 쿠르릉!!!!
“비인가?”
하지만 날씨가 문제였다. 아침부터 하늘이 어둡고 구름이 몰려오는가 싶더니 국경을 통과하자마자 비가 한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설미수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비구름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것을 보니 비를 피할 만한 곳이 필요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저 쪽에 큰 나무가 있습니다요, 나리.”
그때 나선 것이 만우다. 만우는 설미수나 동군영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거리의 나무를 발견했다. 설미수가 반색하면서 만우에게 말했다.
“그곳으로 이동하지요, 은공.”
“알겠습니다. 전력으로 달리셔도 됩니다요. 비가 많이 쏟아질 것 같으니.”
만우를 비롯한 노숙에 익숙한 이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만우는 물론이고 괴검, 괴권은 물론이거니와 필두와 감령도 노숙에는 이골이 나 있었다. 그러니 바람이 불고 비가 시작되는 것만 봐도 이 비가 큰 비인지 그냥 지나가는 비인지 알 수 있었다. 두둑, 두둑, 두둑! 말이 전속력으로 달렸고 그 옆을 두 발로 내달린 만우와 일행은 머지않아 만우가 말한 그곳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때쯤 되니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장대비가 되어 있었다. 쏴아아아!!! 빗줄기가 거세게 땅에 내리꽂히는 소리가 요란스레 울려 퍼졌다. 나무는 울창했고 거대했기 때문에 비를 피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거세게도 오는군.”
설미수는 비에 젖은 몸을 손바닥으로 쓸어 털어 내면서 중얼거렸다. 동군영은 그의 말에 동의해 고개를 끄덕였다. 쏴아아아!!! 말 그대로 하늘이 뚫린 것처럼 비가 오고 있었다. 먹구름이 몰려오기에 심상치 않겠다 짐작은 하였지만, 이 정도일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비를 맞은 다른 이들도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입이 댓 발 튀어나와 투덜거리는 사람이 있었다.
“어서 불 붙여.”
“에이씨…….”
“좀 빨리 달리지 그랬냐, 산강아지? 미꾸라지한테 땅 위에서 졌으니 이제 할 말도 없겠구나.”
필두가 감령을 옆에서 놀려 댔다. 내기에서 진 것은 다름 아닌 감령이었기 때문이다. 경지 자체가 차이가 난다면 모를까, 달려 나간 다섯 전부가 초절정이었기에 가장 늦게 출발한 감령이 자연스럽게 꼴지를 한 것이다. 그리고 일등을 한 것은 막상막하로 튀어나갔던 필두와 슌스케 중에서 바로 필두였다.
“날아다니는 거 보니 이제 좀 괜찮나 보다 네놈?”
필두가 한 쪽에서 웃고 있는 슌스케에게 슬쩍 말을 걸었다. 사실 일본국에서 아끼던 수하에게 배신을 당하고, 칼침을 맞았던 슌스케는 그동안 거의 폐인처럼 지냈다. 정신이 의욕을 잃으니 몸의 회복 속도조차도 대단히 더뎠던 것이다. 하지만 만우는 그런 슌스케를 재촉하지 않았다. 슌스케가 겪은 비극을 만우 역시 모두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연약하게도 다른 누군가를 믿었다는 것 자체가 칼 밥을 먹고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약점이나 다름없었지만, 만우는 그런 슌스케를 힐난하지 않았다. 대신 그가 괜찮아지기를, 그저 가만히 기다렸다. 몸이 회복된 후에도 정신이 회복되지 않은 슌스케가 이제야 기력을 차리고 이번 사행단에 함께 참여하게 된 것이다.
“그럭저럭.”
슌스케의 한 쪽 소매가 펄럭였지만 필두는 고개를 끄덕였다. 슌스케가 더욱 단단해진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애초에 출신부터가 바닥이었으니 온갖 고난과 역경을 겪으면서 성장해 온 슌스케였다. 그런 강인한 정신과 오기, 독기가 슌스케를 기어코 다시금 일어서게 만든 것이다. 타닥, 탁 파앗!!!! 부싯돌을 몇 번이나 튀겨 비로소 불씨를 만든 감령이 두 손을 번쩍 들고 괴성을 질렀다. 그러던 감령의 고개가 딱 소리와 함께 뒤로 휙 하고 넘어갔다.
“악!”
“시끄럽게 굴지 말고 우의나 내 오거라.”
“끄응…… 너무합니다, 대장.”
“한 대 더?”
만우가 손가락을 들어 올리자 감령이 찔끔했다. 그런 감령보다 늘 한 발자국 먼저 움직이는 필두가 유삼(油衫)과 갈모(─帽)를 꺼내기 위해 메고 온 짐을 뒤적거렸다. 그 두 가지는 사행단의 삼사인 설미수와 동군영, 척일을 위한 것이었고 나머지 수행원들은 삿갓과 도롱이를 입어야 했다. 신분에 따라서 입을 수 있는 우의도 정해진 셈이었다.
“으엑. 이런 거 입으면 냄새 엄청 나는데.”
감령이 도롱이를 꺼내 보고는 기겁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도롱이는 볏짚 등을 드리워서 빗물이 안으로 스며들지 않고 볏짚 등을 타고 흘러내리게 만들어진 우의다. 비 올 때도 일할 수 있게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길이는 둔부까지 내려오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니 이 도롱이를 입고 걷다 보면 다리가 흠뻑 젖는 것은 예사였다. 무엇보다도 냄새도 꿉꿉했고 말이다. 그렇게 감령이 난리를 피우고 있을 동안 슌스케는 묵묵히 도롱이와 삿갓을 입었다. 만우는 그런 슌스케를 힐끗 보고서는 지나가는 말투로 말했다.
“약해졌다.”
“……예.”
“다시 시작할 테냐?”
그것이 만우 나름의 방식으로 하는 위로란 것이 느껴졌기에 슌스케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겠습니다.”
무(武)에 대한 갈망이 더욱 커진 슌스케다. 자신이 강했더라면 일월조가 그리 무너질 일도 없었고, 수하의 기습에도 그리 헛되이 당하지 않았을 테니까. 결국 자신이 약하기 때문에 이런 모든 일들이 자신에게 벌어진 것이다.
“강함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마라.”
만우는 그런 슌스케의 눈만 보고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저런 눈을 가진 이를 본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만우가 이리 말해도, 애초에 자신보다 훨씬 더 높은 무(武)를 지닌 만우기에 그런 말을 한다면서 반발하곤 했다. 자신들처럼 약해 보지 않았기에 자신들의 마음을 모른다면서, 그렇게 엇나갔다.
“결국 그 집착이 네 놈을 잡아먹을 것이다. 그것이 주화입마이건, 누군가의 칼이건 간에.”
하지만 강함에 대한 집착은 결국 그 스스로를 잡아먹게 된다. 지나치게 강함에 목매다가 사도에 빠져 자신의 힘에 자신이 잡아먹히거나, 누군가에게 원한을 사 검하고혼이 되던가.
“뭐, 지금의 네놈 정도로는 강하다고 할 수 없으니 조금은 더 집착해도 되겠구나.”
그렇게 말을 툭 하고 던지고 휘적거리며 멀어지는 만우의 뒷모습에 슌스케가 쓰게 웃었다. 과연 만우의 눈에 자신이 강하다고 느껴질 정도면 얼마나 검을 잡아야 될까. 슌스케가 자신의 왜도를 소중하게 들어 허리춤에 차는 것을 기감만으로 느낀 만우는 순간 고개를 돌려 장대비가 쏟아지는 저쪽을 쳐다봤다.
“역시, 내 귀찮을 줄 알았어.”
“뭐가 귀찮다는 거, 어?”
혼자 중얼거리는 만우의 옆에 앉으려던 방매가 눈을 떴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들어 저 멀리를 가리켰다.
“사람 아니야 저거?”
*****
“백호? 영물이 나타났다는 말이냐?”
“예. 고복아알과 전사들만으로는 역부족이라 지원을 청하기 위해 왔습니다.”
“좋구나. 영물이라니.”
동창이 함박웃음을 지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쏴아아아아!!!! 그런 동창이 있는 막사 밖으로는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당장 보고하러 온 여진족 전사의 코끝에서도 흘러내린 빗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지휘사에 오르실 아버님을 위한 좋은 선물이 되겠다. 한데 우리가 갈 때까지 시간이 되겠느냐?”
“그 영물이 사람들을 보호하고 있다 하옵니다. 하여 그를 피해 작전을 펼치고 있습니다.”
“영물이 사람을 보호한다? 설마, 고복아알이 조선인을 건드렸단 말이냐?”
“그저 산중에 있는 작은 고을이었다 합니다. 오십 명도 되지 않는 작은 고을 말입니다.”
“흠…… 어쨌든 덕분에 산 것이로구나.”
영물 중에서도 백호라면 그야말로 사람이 한 평생을 살아가면서 한 번이라도 보기 힘든 최상위의 영물이다. 그런 영물을 사냥한다는 것은 전사로서 가장 큰 영예 중에 하나이다. 하지만 영물은 괜히 영물이라 불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냥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필요했다.
“아버님께 이 기쁜 소식을 전해드리고 전사들을 준비시켜라. 영물을 사냥할 것이다.”
장대비가 쏟아지는 아래 오도리 부족의 움직임이 부산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장대비가 만들어 낸 진창을 뚫고 한 기의 기마가 오도리 부족의 근거지를 향해 달려 나갔다. *****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우리 마을 사람들을 구해주세요…….”
허름한 옷 한 장을 입고 장대비를 뚫고 와 사행단을 보고는 그 자리에서 고꾸라져 의식을 잃은 여자의 입에서 같은 소리가 계속해서 새어 나왔다. 여자가 하는 말이 조선말이었기 때문에 다들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설미수와 동군영의 의견이 대립했다.
“사행단에게 가장 중요한 임무는 주상전하의 친서를 명천자에게 전하는 것이네. 무엇이 중요한지를 판단하시게.”
“허나 설 대감님, 조선의 백성입니다. 이들 역시 주상 전하의 백성들입니다. 한데 이들의 고초에 눈을 감으시겠다는 것이옵니까?”
“무엇이 대(大)이고 소(小)인지를 가리는 것이 어려운 일인가?”
설미수는 여인의 처지가 딱하기는 하나 그들에게는 더 중요한 과업이 있으니 도울 수 없다는 쪽이었고 동군영은 여인을 도와야 한다는 쪽이었다. 누가 옳고 누가 틀린가에 대한 논의가 아니었다. 어떤 것이 더 무겁고 중요하냐에 대한 의견 대립이었다.
“만우.”
“은공.”
설미수와 동군영이 동시에 고개를 돌려 만우를 쳐다봤다. 실질적으로 이 사행단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데 있어 가장 강력한 결정권을 발휘하는 사람은 바로 만우였기 때문이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자네는.”
“어서 명으로 넘어가는 것이 더 현명하지 않겠습니까, 은공.”
설미수와 동군영, 배울 만큼 배웠다는 사람들이 애처럼 누군가에게 꼭 이르는 듯한 모양새였다. 척일이 재밌다는 듯 옆에서 웃었지만 그는 끼어들지 않았다. 그때 척사영이 나섰다.
“설 대감께서는 나라의 녹봉을 받으시면서 조선의 백성이 처한 어려움을 그냥 흘려보내자는 말씀이십니까?”
“척 별감.”
본래 조선의 율법에 따라 조정의 일에는 여인이 참여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척사영도 방매처럼 남장을 하고 있었고, 별감이라 불렸다.
“난 주상전하의 교지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네. 그게 내게 주어진 임무이니, 내가 녹봉을 받는 것도 그 때문이겠지.”
“허나 설 대감께서 이 여인을 외면한다면, 대체 이 여인은 누구에게 기댈 수 있단 말씀이십니까.”
“여인 개인보다는 조선 전체를 봐야 하네.”
결국 이야기는 다시 제자리였다. 그러자 자연스레 사람들의 시선이 만우에게로 쏠렸다. 만우가 딱 하고 결정을 내리면 그대로 사행단의 다음 행로가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만우는 볼을 긁적였다.
“뭐야. 왜 다 날 쳐다봐.”
“자네가 이 사행단의 실질적인 주장(主將)이니 그러겠지. 헐헐.”
척일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면서 얄밉게 말했다. 만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일단 지금 설 나리와 똥구녕 나리의 논쟁이 무의미했다는 이유 두 가지를 들어드리겠습니다요.”
“두 가지?”
설미수와 동군영의 눈이 동그래졌다. 만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이 여인이 무슨 일로 이곳에 쓰러져 있는지, 무엇을 도와 달라고 했는지 제정신으로 우리에게 말한 것이 없지 않습니까?”
“……어?”
“잠꼬대입니다. 잠꼬대. 정신을 잃고 흔히 하는 횡설수설 같은 겁니다요.”
엄밀히 말해 지금 정신을 잃고 쓰러진 여인은 사행단에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았다. 사행단을 발견하자마자 정신을 잃고 쓰러졌기 때문이다.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중얼거리는 말에 설미수와 동군영은 논쟁을 벌이고 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