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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 왜 너희가 여기 있는 거냐 (1) (304/400)

304. 왜 너희가 여기 있는 거냐 (1)2021.11.27.

고복아알은 오도리 부족의 위대한 전사다. 그는 대추장인 동맹가첩목아의 아들, 동창이 이끄는 전사들 중에서도 눈에 띄게 용맹하고 무기를 잘 다뤘기 때문에 동창이 그를 총애했다. 그리하여 동창과 함께 나설 때면, 그의 부대를 나누어 지휘하는 일도 종종 일어나곤 했다. 이번 역시 마찬가지였다.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된 후, 동북면에 널리 영향력을 미치던 상왕의 뒤를 이어 삼대 국왕이 왕위에 오르자 조선의 동북면에 대한 간섭은 대단히 줄어들었다. 고려의 무신인 이성계가 동북면에 버티고 있을 때는 스물아홉이나 되는 대추장들이 그를 어르신으로 모시고 의형제로 받들었을 정도라고 하지만, 그것도 십수 년 전의 일이 된 것이다. 더군다나 이번에는 연왕에 이어 명의 천자가 된 황제의 칙서가 은밀히 오도리 부족의 대추장에게 전해졌기 때문에 고복아알은 조선을 크게 두려워하지 않고 국경을 넘나들며 분탕질을 쳤다.

16553265343568.jpg“퉷. 나라가 바뀐 줄 알았더니 몸속에 흐르는 피가 달라진 모양이로구나.”

고작 기십의 병력을 이끌고 국경선을 절묘하게 넘나들며 분탕질을 친 고복아알은 조선의 군사들이 요격을 하러 나오는 것이 아니라 굳게 문을 걸어 잠그자 침을 퉤 하고 뱉었다. 오히려 여진족들에게는 고려보다 조선이 역설적으로 더욱 활개를 치고 다닐 수 있는 나라가 된 것이다.

16553265343568.jpg“예전 같았으면 어디서 살이 날아올까 두려워 벌벌 떨었겠지만 이건 마치 우리 땅 같구나. 크하하하.”

고복아알이 저 멀리 숨은 조선의 군사들을 손가락질을 하면서 비웃었다. 그러자 왁자지껄하게 부하들이 따라서는 비웃었다.

16553265343568.jpg“돌아가자!”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고복아알은 자신의 용맹과 무위를 과신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가 부족에서 내로라하는 뛰어난 전사라고는 하나 그 때문에 만용을 부릴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지금은 저들이 문을 걸어 잠갔다고는 하나 동북면 무신이 언제 또 다시 저 안에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일이다. 그렇게 돌아가던 길에 그저 작은 마을 하나를 발견했을 뿐이다. 단지 그곳에, 고복아알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할 만큼의 미녀가 있었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불행이라면 불행일 것이다.

16553265343568.jpg“쳐라!!!!”

고복아알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한 눈에 반해 버렸다. 그런데 그게 하필이면 오도리 부족의 여자가 아니라 조선 여인이라는 것이 불행이었을 뿐이다. 고복아알은 자신과 저 여인의 위계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그 고을 주변에 변변찮은 관아 하나 없다는 것을 익히 잘 알고 있었다. 본래라면 그냥 지나쳤을 그 고을과 그 여인을, 말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 길을 틀었다가 우연하게 발견한 것도 다 운명이었다. 적어도 고복아알은 그렇게 생각했다. 두두두둑!!! 수십 명에 불과한 이들이라고 하지만 전부 말을 탄 데다가 무기를 쥐고 살아온 세월이 쥐고 살아오지 않은 세월보다 더 길었던 여진족의 전사들이다. 그런 여진족의 전사들을 끽해야 수십 명이 전부인 산골의 작은 고을에서 막아 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곳에는 장정이라고 해 봤자 나무나 해 오고 약초와 나물이나 캐고, 사냥이나 가끔 하는 이들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16553265343568.jpg“사내놈들은 전부 베어 버리고 여자와 아이들만 데려간다!”

그리고 오도리 부족에게 약탈은 너무나도 당연한 삶의 한 일부분이었다. 적을 공격하고 그들의 것을 취한다, 그렇게 살아온 여진족이다. 게다가 상대는 여진족도 아닌 조선 사람들이다. 고복아알은 여기저기서 피를 뿌리며 죽어가는 남자들 사이로 걸어 들어가 눈 여겨 본 여자의 손목을 쥐고 나왔다.

16553265343568.jpg“넌 나와 함께 간다.”

16553265343568.jpg“살려주세요. 흑흑흑. 살려주세요.”

고복아알은 자신이 한 눈에 반한 여인이 눈물을 뚝뚝 흘리자 묘한 정복감을 느끼고는 희열을 느꼈다. 하복부가 묵직해지는 것을 느낀 고복아알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두려움에 반항도 하지 못 하는 여인을 말안장 위에 올리고는 그 뒤에 앉았다.

16553265343568.jpg“흑흑흑…….”

여자는 돌아가는 길 내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런 여자의 뒤로 다치고 초췌해진 작은 고을의 여자들과 아이들이 뒤따랐다. 그들은 전리품이었다. 하늘이 개벽할 정도의 일이 벌어지지 않는 한, 그들은 이제 노예가 되어 살아갈 것이다. 고복아알은 너무나도 당연한 그 풍경을 보면서, 자신의 앞에 탄 여인의 부드러운 여체에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고을에 불을 지르고 떠났다. 그리고, 그들이 떠난 뒤 그 산골에 한 여인이 나타났다.

16553265343604.jpg“…….”

하루. 빠른 말을 타고 달려도 족히 사흘은 꼬박 걸리는 거리를 하루 만에 날아온 여인, 호선은 매캐한 냄새가 사방에서 진동하는 산골 마을에 서서 가만히 그 참상을 눈에 담았다. 근방에 모두 불이 옮겨 붙어 까맣게 탔지만, 본래가 호랑이인 호선의 예리한 감각은 인간의 그것보다 수십 배는 더 탁월하여 아주 미세한 냄새 안의 냄새까지 맡을 수 있었다. 혈향. 그리고 말의 체향까지. 더불어 절규하며 떨어진 여인과 아이들이 남긴 눈물의 흔적까지 호선의 후각에 느껴졌다. 호선은 가만히 그 흔적이 이어진 길을 바라보면서 되뇌었다.

16553265343604.jpg“끊어진 인연이다. 이미 그 아이의 후손들일 뿐이야. 허나…….”

호선은 500년을 살아온 영물이다. 그리고 등선하기 직전 다시 속세로 떨어진 낙선이기도 했다. 그렇게 호선은 인연이 가진 강력한 운명의 힘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인연의 끈은 한 번 이어지면 웬만해서는 끊어지지 않는다. 인연을 맺은 그 대상이 죽어도, 한 쪽이 살아 있는 한 그 인연의 끈은 또 다시 그 대상의 자식들에게로 이어진다. 그것은 이미 죽어서 넋이 된 자들의 소망이자 희망에 의해 남겨진 끈이었다. 그렇기에 자신과 이미 직접적으로 끊어진 인연임을 호선은 알고 있었으나, 아직 그 끈이 강하게 자신을 부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더군다나 그들은 그냥 인연이 아니었으니까. 선주(仙株). 그것을 조금이나마 증표로 나눠 준 것은 다름 아닌 어릴 때의 호선이었다. 헤어짐이 마냥 아쉬워 남겨 주었던 그것, 그것이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16553265343604.jpg“아직까지 있었구나.”

선주를 잃어 약해진 그녀였으나 한 때 그녀의 일부분이었던 그것의 흔적을 그녀가 착각할 리 없었다.

16553265343604.jpg“난 등선은 물 건너가겠구나.”

호선은 씁쓰레하게 웃었다. 그것을 깨달은 이상 호선의 등선은 이제 물 건너간 셈이다. 이제 다시 그녀는 수명과 유한이 굴레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간 쌓아 온 것이 있기 때문에 다른 유한한 것들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갈 테지만 그것은 등선이 아니었다. 장수는 등선이 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호선은 예전, 그녀가 영물이 되었음을 깨달았을 때보다 외로움을 더 많이 느끼진 않았다.

16553265343604.jpg“이미 인연은 맺어졌음인가.”

만우.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기이할 정도의 경지에 오른 사내. 그자와 연을 맺은 순간 호선은 낙선이 되지는 않았지만 동시에 등선할 운명은 멀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대신 그자의 곁에 있으면 이 세상에 홀로 남는 듯한 외로움은 느껴지지 않겠지.

16553265343604.jpg“그 인간이 나보다 먼저 죽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으니.”

호선은 빙긋 웃었다. 이것은 인연이 자신을 부른 것이다. 그녀가 사흘 걸릴 거리를 하루 만에 도착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 운명이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었음이다. 그녀는 천기는 읽을 수 없지만 짐승이기에, 영물임과 한때 등선까지 하려 했던 낙선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16553265343604.jpg“만남에도 결국 끝맺음이란 필요한 법.”

수백 년 전에 하지 못한 그 끝맺음, 지금 맺으면 된다.

16553265343604.jpg“울지 말거라. 아이야.”

호선이 눈물이 떨어진 곳의 흙을 한 움큼 집어 들고는 손가락 사이로 흘려보내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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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악!!!! 그런 호선의 주변으로 따스한 선기가 들불처럼 일어나 화마에 휩싸여 그 안에서 스러져 간 영혼들을 위무했다. *****

16553265343568.jpg“환대에 감사드리오. 척 가주.”

설미수의 말에 뼈가 있었지만 척도철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이미 과거의 일이기 때문에 척도철은 그에 개의치 않았다.

16553265343568.jpg“저 역시 아버님과 제 딸을 잘 부탁드립니다. 설 대감.”

대신 노쇠한 아버지와 딸을 임금의 명령으로 징발하여 데려가는 것이니 알아서 잘 돌려보내라는 뜻으로 척도철이 말했다. 핑! 텅!! 그런 못난 아들의 모습에 척일이 손가락을 딱 하고 튕겼다. 그러자 척도철의 이마 앞에서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척도철이 척일을 쳐다봤다.

16553265343568.jpg“아버님!”

16553265343568.jpg“가주라는 놈이, 쯧쯧.”

찰나의 순간에 막아 내긴 했지만 완벽하게 기운을 흘려보내지 못했기 때문에 척도철의 이마가 발갛게 물들었다. 결국 척도철은 척일과 척사영이 서장관과 그를 수행하는 수행원으로 따라가겠다고 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척일이 벽을 넘은 만우를 쫓아가겠다며 강력하게 주장한 덕분에 막을 만한 명분이 사라졌다는 것이 옳았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모 이기는 자식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척일 정도로 나이와 무관하게 정정하고 가주보다도 강하다면 더더욱 자식은 부모를 이길 수 없는 법이었다. 그 전에 일찍 척희운과 소가각의 척준영이 먼저 길을 나섰기 때문에 척가의 전각들이 약간 썰렁한 느낌이 들었다. 생각보다 국경의 상황이 심상치 않은지 호법인 척희운이 재촉을 해 척준영과 소사각의 무인들이 서둘러 떠난 것이다.

16553265343568.jpg“출발한다!”

이 사행단에는 다른 사행단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수행원이나 종복이라 불릴 만한 이들이 하나도 없었다. 종복 역할을 해야 하는 이들이 문형일이나 감령, 필두처럼 초절정의 범상치 않은 고수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그리 많은 준비를 할 것 없이 단출한 차림으로 설미수를 필두로 한 사행단이 곡산을 나섰다. 나서면서도 집성촌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곡산에서 벗어난 설미수가 고개를 돌려 만우를 쳐다봤다.

16553265343568.jpg“은공. 속도를 좀 높일까 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16553265401764.jpg“괜찮습니다요, 나리.”

사행단의 최소 구성이 다 갖춰졌으니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필요가 없었다. 만우도 그에 동의하자 사행단의 속도가 높아졌다. 무공을 하지 못하는 방매와 간장은 수레 위에 올라탔고, 설미수와 동군영도 말을 타고 있었다. 만우는 뒤를 따르는 이들의 면면을 한 번 살펴보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16553265401764.jpg“나리. 달리시죠. 조금 달린다고 퍼질 사람은 없는 것 같은뎁쇼.”

설미수는 뒤를 힐끗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우는 물론이거니와 이 일행의 면면 역시 자신의 상식으로 재단할 수 있는 인물들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만우가 하는 말이니 만우의 말이 당연히 맞을 것이라 설미수는 생각했다. 두 발로 뛰는 사람이 네 발로 뛰는 말의 속도를 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이들이 사용하는 무공이란 것은 애초에 설미수가 생각하는 상식 밖에 실재하는 것이다.

16553265343568.jpg“이랴!!!”

16553265401781.jpg“이랴앗!”

두둑, 두둑, 두둑! 설미수를 필두로 동군영이 속도를 높였다. 그러자 만우는 뒤를 힐끗 쳐다보고는 문형일과 마익후, 감령과 필두, 슌스케에게 말했다. 여포나 척사영이나 화경의 고수이니 그들이 뒤쳐질 생각은 하지 않아도 된다.

16553265401764.jpg“제일 늦는 사람이 노숙하고 밥 해먹을 때 잡일하기다?”

16553265401789.jpg“대장!”

16553265401792.jpg“그건 너무 불공평하지 않수!”

16553265430914.jpg“맞다. 우리 보고 하라는 거지 않나.”

16553265430919.jpg“…….”

문형일과 감령이 가장 강하게 반발했다. 과묵한 마익후마저 그리 말했다. 단지 눈치가 빠른 필두와 슌스케만 입을 다물었다. 애초에 이리 반발한다고 해서 들어먹었으면 검주는 검주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아는 필두는 내공을 끌어올리고 몸의 상태를 확인했다. 만우가 하자고 하면 하는 것이다.

16553265401764.jpg“꼬우면 화경이 되든가.”

만우는 현경이었지만 태연하게 말했다. 다른 이가 들었다면 입에 거품을 물며 달려들었을 정도로 얄미운 만우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무림인은 결국 무공의 경지로 말하는 법이다. 만우의 말대로 이게 싫으면 화경이 되었으면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16553265401792.jpg“아 놔. 더러워서 화경이 되든가 해야지.”

감령이 투덜거렸다. 그래도 나름 녹림십팔채의 대채주로 중원에서는 방귀 깨나 뀌면서 살아왔는데, 여기 오니 숫제 삼류만도 못한 취급을 받았기 때문이다. 화경의 고수가 즐비할 줄이야. 강자의 주변에는 강자만 즐비한 것인지 감령은 그렇게 투덜거리는 것 빼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16553265401764.jpg“자, 시작!!!”

파바바박!!! 만우의 말에 필두와 슌스케가 기다렸다는 듯 튀어나갔다. 처음부터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 빛을 봤다. 감령이 그런 둘의 뒤통수에다 대고 욕을 했다.

16553265401792.jpg“저런 미꾸라지 같은 놈이!!!!”

매끈한 대머리인 필두였기 때문에 감령이 소리를 쳤지만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결국 꼴찌만 피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파바박! 파박!!! 상황을 파악한 문형일과 마익후가 동시에 튀어나갔다. 그러자 마음에 급해진 감령은 더 이상 투덜대지 못하고 몸을 날렸다.

16553265401792.jpg“기다려! 이 치사한 놈들아!!!!!”

만우는 멀어지는 다섯 명을 보면서 가볍게 땅을 박찼다. 순식간에 만우의 신형이 발바닥에 땀이 날 정도로 달려가는 다섯의 머리 위를 한달음에 훌쩍 뛰어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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