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 연경 가는 길(5)2021.11.20.
“이것이 다인가?”
“노옴…… 쿨럭!”
다시 한번 더 기혈이 꼬인 것인지 만우를 올려다보는 척도철의 입에서 새빨간 선혈이 한 움큼 튀어나왔다. 타다닥!!!! 턱, 터덕!
“아버님…….”
“어리석은 놈.”
그러자 뒤에서 바람소리가 일어나더니 척일이 불쑥 끼어들어서는 척도철의 혈도를 짚으며 내상이 심해지는 것을 막았다. 척일은 어리석은 아들의 모습에 혀를 쯧 하고 찼다.
“이길 수 있다 생각하였느냐?”
“허나 아버님. 저희는 곡산…….”
“나조차도 감히 상대가 되지 않았는데, 너라고 될 성 싶었더냐?”
척일의 말에 척도철이 두 눈을 부릅떴다. 곡산척가의 현재 가주는 척도철이라고 하지만 최고수는 다름 아닌 척일이었다. 같은 화경이라고는 하나 척도철은 척일과 비무를 하면 열 번 중 열 번은 패배했다. 그런 척일이 상대가 되지 않는다 자인하다니.
“대를 이을 아들이라 하여 내가 너무 오냐오냐 키웠던 듯하이.”
척일은 척도철에게서 시선을 떼어서는 만우를 쳐다봤다. 만우는 도중에 척일이 끼어들었지만 별반 반응을 보이지 않고 뒷짐을 진 채 지그시 쳐다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확실히.”
만우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자 척일은 피식 웃었다. 대를 이을 아들, 곡산이라는 이름이 너무나도 중요하기에 안으로 끼고 돌았던 아들이다. 다행히 척도철도 그런 척일을 이해하였기 때문에 눈부신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안전과 안정을 추구했다. 허나 만우를 보니 알 수 있었다. 척도철은 반쪽짜리 무인이었다.
“차라리 척사영 그 아이가 무인이라는 말에 어울리겠구나.”
“그럴지도 모르지.”
척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우는 자신의 말을 듣고도 화를 내지 않는 척도철을 보면서 혀를 쯧 하고 찼다. 본래 자신의 노력으로 이룬 무공이 욕을 먹으면 그 누구도 가만히 참고만 있지 않는다. 그런데 척도철은 그런 소리를 바로 코앞에서 들었으면서도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무공보다는 가문을 건사하는 데 더 관심이 많다는 뜻이다.
“한데 혹시 그대는 벽을 넘은 것인가?”
척일이 간절한 눈으로 만우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만우는 그런 척일의 눈을 보고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만우가 만약 진인의 경지에 도달하지 않았더라면 척일과는 좋은 상대가 되었을지 모른다. 척일은 완숙한 화경을 넘어 화경의 절정으로 나아가고 있었으니까. 물론 그래도 만우와는 차이가 있었겠지만, 적어도 혈세천마보다 반수나 한 수 정도 뒤쳐지는 수준이니 좋은 상대가 되었을 것이다. 허나 그렇기 때문에 척일은 만우를 더욱더 간절하게 쳐다보았다. 평생을 걸고 걸어온 길이고 벽에 막힌 지 벌써 수십 년이 지나가 거의 반쯤 포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데 눈앞에 그 벽을 뛰어넘은 이가 나타났으니, 척일로서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만우가 원한다면 만우의 종이 기꺼이 될 수 있다 생각할 정도였다.
“글쎄. 노인네도 느낀 것 같은데.”
만우는 두루뭉술하게 말을 했다. 확답은 주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척일의 표정이 변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서장관. 내 기쁘게 받아들이지.”
“척사영, 그 아이는?”
“더 큰 세상을 보여줘야 하지 않겠는가?”
척일의 말에 만우는 피식 웃었다.
“그곳도 그리 크지는 않아. 단지 다양할 뿐이지.”
“그것만으로 되었네.”
“아, 아버님.”
내상을 대충 눌러만 둔 척도철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척일은 그런 척도철을 안쓰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더 증명할 것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내일 출발하시지요. 석별의 정을 나누고 싶습니다.”
“석별이라니. 누가 보면 죽으러 가는 것인 줄 알겠군.”
만우가 어이가 없다는 듯 픽 하고 웃었다. 척도철은 그런 만우에게 패배했기 때문에 무인으로서는 할 말이 없었지만 척사영의 아비이자 곡산척가의 가주로서는 할 말이 많았다.
“지금 그대가 가고자 하는 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르지 않은가.”
“무슨 일?”
만우는 이 임시사행이 말로만 사행이지, 사실은 명천자가 자신을 압송해 오라고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그건 전부 명천자와 명나라 조정이 벌이는 짓이다.
“여진족. 그중에서도 특히 오도리 부족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으니까.”
명나라가 아닌 여진족의 등장에 만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만우를 척도철이 빤히 쳐다봤다. 어서 결정하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흠…… 뭐. 하루 정도는 묵고 가도 상관없겠지. 그렇지 않습니까요 나리?”
만우가 고개를 돌려 설미수와 동군영에게 물었다. 척도철은 자신에게는 반말을 찍찍 내뱉으면서 설미수와 동군영에게는 형식적으로라도 존대를 하는 것에 찝찝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정보를 미리 얻고 갈 수 있다면 거부할 만한 일이 아니지. 초대에 감사하오, 척 가주.”
“……드시지요.”
치원각의 무인들에게 추포령을 내렸던 것이 바로 척도철이다. 하지만 설미수의 응대로 이제 이들은 척가의 손님이 되었다. 속이 불편하기 때문에 느릿하게 움직이는 척도철의 뒤를 사신단이 천천히 뒤따랐다. *****
“경비를 지금보다 네 배, 아니 다섯 배는 늘리셔야 합니다.”
“그 정도란 말이오?”
“그렇습니다.”
모용청의 단호함에 오도리 부족의 대추장인 동맹가첩목아의 동생, 동범찰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만이나 되는 마인들이 이곳으로 몰려오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말이오.”
“이, 일만.”
오도리 부족의 모든 전사들을 합해도 천이 될까 말까 했다. 물론 말에 올라타 너른 벌판을 내달리는 일천의 오도리 부족 전사들은 말을 타지 못하는 일만의 보병쯤은 가볍게 처리할 수 있었다. 허나 그런 일만이나 되는 이들이 모용세가에서도 경계를 할 정도라면 말이 다르다.
“모용과 비교하면 어떻소?”
“흐으. 쉽게 당하지는 않을 거요.”
모용청의 뒤를 따르던 팔검단의 단주 모용덕이 흐릿하게 웃었다. 연경보다 더 북방에 있는 요녕의 패자인 모용덕에게는 다가가기만 해도 베일 것 같은 살기가 느껴졌다. 수많은 마적과 도적들을 베고 요녕을 안정시킨 십검단은 그 근방에서는 공포의 대명사였다. 하지만 동범찰은 모용덕의 말에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삼교대를 이교대로 줄인다. 그리고 지금보다 인력을 더 늘려.”
“예!”
모용덕이 ‘쉽게 당하지 않는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것은 모용세가조차도 이길 수 없는 이들이란 소리다. 요녕성을 손아귀에 틀어 쥔 모용세가는 동범찰이 아는 이들 중 국가의 군대를 제외하고 가장 강한 자들이 모인 곳이었기 때문이다.
“마교라니.”
모용청은 다른 이들도 아니고 여진족의 손에 붙잡힌 이들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되도록이면 그냥 풀어주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모용청은 동범찰에게 말했다.
“저들이 마교의 어떤 이들인지는 모르겠으나.”
느껴지는 기도나 면면으로 봤을 때 결코 보통의 마교 고수 같지는 않았다. 그러니 저들을 구하기 위해 마교에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마교와 얽혀서 좋을 것이 없습니다.”
마교와 얽혀서 좋을 것이 없다. 정파든 사파건 그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종의 진리였고 명언이었다. 마교는 정파의 무림맹과 사파의 사림곡 전부 가장 첫 번째로 경계하고 늘 의심의 눈을 늦추지 않는 곳이었으니까. 지니고 있는 잠재력과 그 강함을 상기해 본다면 마교가 멀쩡히 천마신교로 존재하는 이상 그 누구도 경계와 의심의 끈을 내려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 때문에 모용청과 모용덕도 그 쪽에는 신경을 끄기로 했다. 어차피 모용세가야 멀리 변방에 있어 그 중화에 대한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져 있는 무림인들은 무림의 일부로 쳐주지도 않지 않던가. 그렇기 때문에 모용세가는 늘 중원무림의 일에서 한 발자국 떨어진 방관자적인 위치를 고수했다. 그렇게 모두의 시선에 벗어난 모용세가가 지금까지 축적하고 이룩한 힘은 마교와 일대일로 맞서 싸우더라도 쉽게 지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품게 할 정도였다. 모용세가가 세워진 이래 지금처럼 모용세가의 힘이 지금처럼 강대했던 적은 없었으니까.
“그나저나 조선에서 한 죄인을 압송해 연경까지 보내야 한다는 게 무슨 소리입니까?”
모용청은 동맹가첩목아를 접견한 후 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동맹가첩목아는 오도리 부족의 대추장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용세가의 둘째인 모용청보다 높은 위치는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그들은 동등한 관계였고, 지금 이 자리도 오도리 부족에서 청해서 이뤄진 자리였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모르오. 허나 연경에서 그 죄수를 압송하는 일만 무사히 처리한다면 내게 건주지휘사를 제수한다는 것뿐.”
“지휘사라…….”
사실상 요녕 밖의 건주라 불리는 이 지역은 너르지만 황량한 곳이었다. 그 때문에 사실상 명의 일부라 하기에는 뭐했고 명과 조선의 영향력이 발휘하고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이곳을 명이 야금야금 욕심을 내면서 삼키려 하고 있었다. 실질적인 지배자이자 호족 세력이나 다름없는 오도리 부족의 대추장에게 명나라의 관직을 제수한다는 것 자체가 이곳을 명의 영토로 편입하겠다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보통 죄인은 아니겠군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한데 누군지를 알 수가 없으니…….”
마치 눈앞을 가려 놓고 길을 찾으라고 하는 것 같은 답답함만 밀려 왔다. 오도리 부족은 간 크게도 조선의 국경을 툭툭 건드리고 있었는데 잘못 건드렸다가는 곡산척가에서 튀어나올 수 있어 지금은 잠시 소강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여진족도 곡산척가 무서운 줄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데 어찌하여 여진족의 전사들이 조선의 국경에서 분쟁을 벌이는 것입니까?”
모용세가의 눈은 과연 이곳까지 닿아 있었다. 모용청의 물음에 동맹가첩목아는 미미하게 웃어 보였다.
“그 어느 쪽도 우리는 믿을 수 없으니까.”
“믿을 수가 없다?”
어느 쪽이란 명나라와 조선을 말하는 것임이 분명했다. 오도리 부족을 비롯한 이곳 건주의 여진족들은 조선의 상왕과 깊은 관계로 맺어져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허나 그것도 상왕이 아닌 새로운 임금이 들어서면서 애매하게 변해 버린 것이 작금의 건주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 죄인이란 자를 호송하는 것이 아니라 습격하여 빼앗아 오려 하는 것이오.”
“습격? 빼앗아?”
모용청은 중얼거리다가 눈을 크게 뜨고는 동맹가첩목아를 쳐다봤다. 오도리 부족에서 무엇을 노리고 있는 것인지 눈치챈 것이다. 모용청은 동맹가첩목아의 배짱에 감탄했다.
“오도리 부족을 지키려 하는 것입니까?”
“난 오도리 부족의 대추장이오. 내가 지키지 않으면 우리 부족을 누가 지킬까.”
모용청은 빙긋 웃었다. 동맹가첩목아란 사내의 비범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비록 여진족의 대추장이었지만 동시에 뛰어난 지략가이기도 했다.
“압송해 오려는 자가 대단한 자라면 일부러 놓아 보낼 것이 아니오? 그러면 오도리 부족이 다칠 일도 없고, 명에도 할 말이 있는 셈이니. 조선에는 아랫것들이 뭘 모르고 한 짓이라 둘러대면 되는 일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