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 연경 가는 길(3)2021.11.13.
‘무슨…….’
척도철의 몸에서는 늘 도도하게 흐르는 패수처럼 내기가 끊임없이 흘렀다. 그리고 그 내기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척도철의 의지에 반해 움직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척도철이 태어나 무예를 익힌 지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그 내기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분명히 멈췄다.’
마치 피가 멎고 심장이 멎는 듯한 느낌이 이러할까. 척도철은 순간적으로 느꼈던 그 공포심에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느낌이 너무 찰나였기 때문에 척도철은 자신이 느낀 것을 부정했다.
‘착각이다. 착각일 것이다.’
태상가주이자 대종사 소리를 듣는 그 척일조차도 자신에게 이런 느낌을 받게 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동군영이 조금씩 좁혀 오는 곡산척가의 무인들을 보면서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설미수에게 말했다. 설미수는 그런 척가의 무인들을 싸늘한 눈으로 쳐다보면서 동군영에게 말했다.
“저들도 생각이 있다면 우리를 해하지는 못할 터. 그리 오래 있지는 않을 터이니 저들이 하라는 대로 하는 것이 어떤가?”
설미수는 동군영에게 차분하게 말했다. 이미 저 쪽에서는 말로 해서 설득이 될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이 왔다. 무슨 연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척가 쪽에서 저리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리들, 그런 거 아닙니다요.”
만우는 감령과 필두는 물론이고 호선까지 바짝 긴장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화경의 고수가 뿜어내는 기운 때문에 그랬다. 사신단에서는 여포만이 유일하게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아마 만우가 말만 하면 등에 있는 방천화극을 조립해 뛰쳐나갈 것처럼 그의 눈치를 슬슬 살피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척 가주가 저리 군다는 말씀이십니까?”
설미수가 만우에게 물었다. 만우는 곡산척가의 본가가 있는 곳에서 느껴지는 척사영의 강렬한 기운을 느꼈다. 척사영이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기파를 통해 알리고 있었던 것이다.
“딸은 외유를 나가고자 하고, 아비되는 자는 생각이 꽉 막혀 그런 딸을 내보내고 싶어 하지 않으니.”
저런 비슷한 눈을 만우는 숱하게 봐 왔었다. 그리고 대부분 저런 눈을 한 자들의 말로는 별로 좋지 않았다. 만우의 강함에 매료된 수많은 여인들이 중원에 있었더랬다. 특히나 좋은 집안의 여식일수록 만우의 고강함과 무신경함에 특이한 매력을 느끼고는 쫓아오곤 했다. 개중에는 진실로 매료되어 강자를 따르기 위해 나선 여식들도 있었다. 그러면 꼭 그 집안 여식들의 아비라는 자들이 뛰쳐나왔다. 만우를 마치 특이한 사술로 딸들을 꾀어 낸 색적처럼 쳐다보고 대했다. 그런 자들의 말로는 뻔했다. 만우를 악적 취급하면서 달려들었다가 모조리 두들겨 맞았다. 그것도 아주 늘씬하게 말이다. 부성애를 이상한 쪽으로 가진 아비들의 눈이 꼭 저 척도철의 눈과 똑같았다. 꾸욱, 꾸욱. 만우는 과거를 떠올리면서 주먹을 쥐었다 펴기 반복했다. 저런 눈도 결국은 부성애의 결과물이다. 선만 넘지 않으면, 만우는 저 부성애를 똑바로 돌려 놓는 방법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게 무슨…….”
“척 무사님을 말하는 건가 자네?”
설미수는 척사영을 잘 모른다. 척가의 태상가주인 척일이라면 알겠지만 척사영을 설미수가 알 리 없었다. 하지만 동군영이 알기 때문에 그리 묻자 만우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겐가?”
설미수가 만우가 아닌 동군영에게 물었다. 그러자 동군영이 볼을 긁적이며 척도철의 딸인 척사영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자 설미수가 허,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척 가주. 사실이오?”
동군영이 하는 소리를 고수인 척도철이 듣지 못할 리 없었다. 설미수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묻자 척도철이 크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여아요. 그것도 우리 척가의 금지옥엽. 그런 아이가 외간 남자를 따라나서겠다고 하니 어찌 보낼 수 있겠소. 그것도 근본도 모르는 자를 따라가겠다니!”
“태상가주께서 보증하셨다 들었소. 그것조차도 부정하실 생각이오?”
설미수는 척도철을 달래듯 말했다. 아직 사신단은 조선을 벗어나지도 못했다. 그런데 조선에서부터 이런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지면 곤란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사신단의 위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만우가 있으니까. 그래도 귀찮은 일은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그게 아니라면 괜히 귀찮은 일이라고 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두 나리는 제게 맡겨 주시지요. 삐뚤어진 애비를 고치는 즉효약을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요.”
동군영이 흠칫 했다. 만우가 그리 말하면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동군영은 고개를 열심히 흔들었다.
“만우. 소란을 피울 필요는…….”
“부정한다? 태상가주께서는 말 그대로 전대의 가주. 물러나신 분이니 현재 척가를 이끄는 것은 나, 척도철이외다. 태상가주를 공경하지만, 이는 척가의 일이오!”
척도철은 절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부라렸다. 그 순간 만우가 척도철의 뒤를 보면서 목소리에 내공을 담아 말했다.
“보고만 있을 건가 노인네? 아들이 저렇다는데.”
척도철이 아미를 찌푸렸다. 누구에게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우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드러난 기척에 척도철이 고개를 돌렸다.
“아버님.”
“흘흘흘.”
척일이 그곳에 서 있었다. 척일은 만우를 보면서 감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우리 사영이의 짝으로 딱이야. 척가의 사위가 되는 것이 어떠한가, 자네?”
“아, 아버님!”
척일의 말에 척도철의 입이 벌어졌다. 근본도 모르는 놈에게 사위를 운운하다니, 그게 말이 되는 일인가? 곡산척가 정도라면 한양에 있는 그 콧대 높은 사대부 집안에서도 서로 모셔 가려 애를 쓸 것이다. 저깟 놈에게 넘겨주기 위해 애써 키운 딸이 아니었다.
“뭐라는 거야 저 할아방구!!!”
“이미 한 번 거절한 것으로 아는데.”
방매가 발끈하고 그 뒤를 만우가 이어서 말했다. 하늘재의 여객에서 이미 척사영의 마음을 한 번 밀어냈던 만우였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할애비란 작자가 저러고 있으니 제 아무리 얼굴에 철판을 깐 만우라고 해도 불편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노옴!!!! 무슨 사술을 부린 것이냐!”
척도철은 일어나는 일을 수용할 수 없게 되자 마침내 부정하기 시작했다. 만우가 사술로 척일과 척사영의 눈을 가리고 무언가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만우는 분노하는 척도철을 보면서 감탄했다. 어쩌면 저리도 모든 아비란 작자들이 같은 모습을 보일까.
“태상가주를 안으로 뫼셔라!!!!”
척도철이 치원각의 무인들에게 눈을 부라리며 외쳤다. 척일을 안으로 들여보내겠다는 소리였다. 척일은 혀를 쯧쯧 하고 찼다.
“내가 온 줄도 모르고 있던 놈이 쯧쯧.”
“척가의 일은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아버님.”
척도철은 혀를 쯧쯧 차는 척일에게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척일은 도통 말귀를 알아들어먹지도 못하고, 사람을 보는 눈도 없는 척도철을 보면서 혀를 쯧쯧 하고 찼다.
“네놈도 검이라면 꽤나 휘둘러보았을 텐데, 대체 언제 그런 아집에 사로잡혀 눈이 닫혔다는 말이냐. 쯧쯧…… 똘똘하다 생각했건만.”
“아버님!!!”
척도철은 척일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척일도 더 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가주의 체면이란 것이 있는 법이기 때문이었다. 대신 척일은 만우에게 말했다.
“말리고자 나왔는데, 어째 내가 더 화를 돋운 것 같구먼.”
“여기저기 끼기 좋아하는 그 성미는 여전하군. 노인네.”
만우는 대종사인 척일에게 거침없이 말했다. 그럴 때마다 척도철의 이마에 불끈거리며 혈관이 돋는 것처럼 보였지만 만우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살살해 주시게.”
“사람을 고쳐 쓰려면 손을 좀 독하게 써야하는 터라.”
“죽이지만 않으면 되네.”
“그럴 생각은 없어. 그래도 척사영 그 아이의 얼굴을 보려면 그런 짓은 하지 말아야겠지.”
“이, 이노오오오옴!!!!”
쿠르릉!!!!! 척도철은 자신을 없는 사람 취급하는 척일과 만우의 대화에 노성을 터뜨렸다. 봐주다니, 대체 누구를 봐주고 누구를 살려 준다는 말인가.
“누구 맘대로 우리 사영이를 그 아이라 부른다는 말이냐!!!!”
척도철의 주변에서 대기가 우르릉거리며 부르르 떨어 댔다.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시무시한 기세가 대기 자체를 진동하게 만든 것이다.
“크음…….”
“끄응…….”
설미수와 동군영은 기어코 상황이 이렇게 되었다는 것에 불편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척도철의 얼굴을 보니 더 이상 대화로 풀 수 없는 상황인 듯했다.
“큰 사고는 치지 말고. 응? 만우 자네, 내 말 들었나?”
“아아. 걱정하지 마십쇼, 나리.”
만우가 손을 대충 휘저으면서 동군영에게 말했다. 동군영은 끄응 하는 소리를 냈다. 만우는 사신단의 맨 선두로 터덜거리며 걸어가서는 두 팔을 늘어뜨렸다.
“검을 들어라 놈!!!!”
치원각의 무인들도 뒤로 물러났다. 그들의 임무는 사신단이 도망가지 못하게 포위망을 형성하고 추포하는 역할이었다. 척도철은 맨 손으로 나온 만우를 보면서 크게 소리쳤다. 만우는 그런 척도철을 보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굳이 필요한가?”
“노오오오옴!!!!!”
척도철의 이가 갈리는 소리가 섬찟하게 울려 퍼졌다. 동시에 척도철의 기가 사납게 주변을 휩쓸기 시작했다. 비록 비뚤어지고 모자라 보이기는 해도 그는 화경의 고수에 곡산검법을 이은 후계자다. 조선의 산세와 하해(河海)를 담은 곡산의 무공은 당장 중원에 가져다 놓아도 구파일방의 그것에 필적할 정도의 심득을 담고 있었다. 그러니 척도철의 무위는 진짜배기였다. 평화에 물들어 우물 속에 갇힌 개구리도 아니었고 조선의 민초들을 도와 그들의 검이 필요한 곳에서 검을 뽑았던 자다.
“허나 결국.”
만우는 피식 웃으면서 늘어뜨렸던 손을 말아 쥐었다.
주먹을 쥔 것이다.
“약한 놈들만 상대했다는 뜻이겠지.”
쿠릉!!!! 척도철의 검이 구불거리며 만우의 목젖을 노리고는 짓쳐들었다. *****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고 했다. 하지만 마교, 아니 천마신교는 새 술을 새 부대에 담고 싶지 않아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신교의 전력 중 사 할을 차지한다 알려졌던 천마대와 진혼대가 교주와 함께 일본국으로 건너갔다가 몰살당했다. 원 황실의 부흥을 꿈꾸며 신교에 투신한 최강의 기마대, 살풍대 역시 조선에 제 주군의 복수를 위해 들어갔다가 흔적조차 찾지 못하고 몰살당했다. 거기에 마교의 소교주가 대주로 있고 후기지수들이 모인 투귀대 역시 머나 먼 조선에서 날아온 전서응으로만 생사를 알고 있었을 뿐이다. 물론 마교는 일만 마인이 버티고 선 강호무림 최강의 단일 세력이기 때문에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전력의 사 할이라는 천마대와 진혼대가 날아갔지만 여전히 육 할이라는 세력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교주와 군사가 부재 중이기에 좌호법인 생사마의 조근이 임시직으로 교주 대리를 수행하며 모든 전투단을 재편했다. 그렇게 신교가 급격하게 전투단을 새로 만드는 와중에 그중 하나를 급히 조선에 파견했다. 천마대(天魔代). 검주 만우에 의해 궤멸당했지만 천마대는 신교의 교주를 호위하는 친위대의 이름이었다. 그 때문에 다른 새로운 전투단들이 편성이 되었지만 천마대의 이름만은 그대로 유지했다. 천마대의 새로운 대주가 된 검절귀(劍絶鬼) 도겸은 새로운 오마장(五魔將)들과 함께 연경에 도달했다.
“대주. 쉬었다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말들이 지쳤습니다.”
오마장 중 하나인 창마(創魔)가 도겸에게 말했다. 교주를 호위해야 하는 천마대는 백 명으로 소수였지만 하나 하나가 최소한 절정이었기에 새로운 천마대를 만들기 위해 다른 전투단의 전력이 하락했다. 하지만 중원도 아니고, 조선에서부터 중원을 거쳐 십만대산까지 돌아오기 위해서는 실력 있는 자들로만 구성되어야 했기 때문에 좌호법이 머리를 쥐어짜내며 백 명의 고수로 채운 천마대였다. 이전 천마대주였던 남요명은 무림십좌 중 일인이었지만 검절귀 도겸은 초절정에 불과했다. 제 아무리 마교라고 해도 화경의 고수가 찍어 내듯이 만들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