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9. 연경 가는 길(2)2021.11.09.
“같은 백성이라도 같은 백성이 아니게 되는 거야. 백성 안에서 또다시 양반과 상놈이 나뉘게 되는 거지.”
“음…….”
방매는 만우의 말에 담긴 무게를 무의식적으로 느낀 듯 멈칫 했다. 방매가 살아온 삶에서도 그런 것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양민들 중에서도 여유가 많은 사람과 여유가 없는 사람으로 나뉘고, 그 안에서 파락호들이 생겨나며 빌리고 갚지 않는 자들과 그런 자들을 쥐 잡듯이 잡는 이들까지.
“약육강식(弱肉强食).”
“그렇지.”
동군영이 중얼거린 말에 만우가 맞장구를 쳤다.
“그런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고 더 나은 세상으로 바꾸려는 것이 공자와 맹자의 말씀이니까.”
동군영이 만우를 보면서 빙긋 웃었다. 하지만 만우는 손사래를 치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공자 왈 맹자 왈을 내가 논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고. 단지 이 동네가 신기하다는 거야.”
중원은 조선보다 몇 배, 몇 십 배는 더 큰 땅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황제의 힘이 구석구석까지 닿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무림이라는 세계가 생겨날 수 있었고, 존속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대부분 황제의 힘이 닿지 않는 곳곳에서 생겨난 호족들이나 유지들이 집결하여 만들어진 세력들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사천당가 같은 경우만 해도 그들 자체의 폐쇄적인 성격으로 인해 커다란 장원을 만들고 당 씨 성을 쓰는 자들이 집성촌을 이룬다. 합비의 남궁세가, 연경의 하북팽가는 물론 진주언가 등 많은 세가들이 집성촌을 이뤄 그 지역을 장악하고 조정의 역할을 대신한다. 그런데 이곳, 곡산이 그러했다.
“조선의 중원 같거든.”
“음…….”
“중원에서는 조금만 황제와 조정의 힘이 닿지 않는 곳으로 나가면 지옥이지. 세가라도 없는 곳은 특히.”
지나다니는 유랑객을 유인하여 인육으로 만들어 내다파는 흑점(黑店)들이 즐비하고 산적들과 수적들이 준동하는 곳이 바로 중원이다. 명나라가 강국인 이유는 그들의 땅이 크고 머릿수가 많아 병사들이 많기 때문이지, 결코 그렇다고 하여 그곳이 살기 좋다는 이유는 아니다. 만우의 손에 그렇게 작살이 난 흑점이나 산채, 수채들이 수십 개는 넘어가니까. 만우를 만나기 전까지 그들이 죽인 무고한 생명과 빼앗은 재산은 과연 얼마나 될까?
“그래서 스스로의 몸을 지키기 위해 무공을 익히기 시작했고 사람들이 모여들어 세가를 이뤘다. 그런데 이곳은…….”
곡산의 척가가 다스리는 이 곡산 전체는 마치 조선 속 다른 세상에 들어온 것처럼 차분하고 질서가 느껴졌다. 외부에서 들어온 이방인을 주시하는 이 시선들의 역할들뿐만 아니라 이 지역 전체에 곡산척가가 내린 뿌리가 그만큼 깊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만우는 말을 한 번 끊고서는 주변을 살피면서 히죽 웃었다. 꼭 재밌는 일이 일어날 것을 간절히 기다리는 아이 같은 표정이었다.
“임금의 명을 받고 행차하는 사신단을 향한 이 적대감은 뭐지 대체?”
***** 곡산척가는 총 다섯 개의 전각이 모여 하나의 장원을 이루고 있었다. 곡산척가가 위치한 곡산 전체를 담당하는 치원각(治原閣). 곡산 인근 의주 지역의 치안을 관아와 공조하여 담당하는 망이각(網夷閣). 상왕이 자리를 잡은 함흥 지역의 관리를 담당하는 보왕각(保王閣). 동북면을 비롯한 국경 인근 여진족과 간자들의 침입을 경계하는 제근각(制根閣). 그리고 마지막으로 앞선 네 개의 전각들이 해결할 수 없거나 닿지 않는 곳의 문제를 기동타격대 형식으로 해결하는 소사각까지. 이 다섯 개의 전각들이야말로 곡산척가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다섯 개의 기둥이었다. 그중 하나, 곡산을 담당하는 치원각의 각주를 비롯한 곡산척가의 무인들은 긴장한 얼굴로 연무장에 모여 침을 꼴깍 삼켰다.
“전부 모였나?”
“예, 가주님.”
“가주님을 뵙습니다!!!”
엄밀히 말해 조선은 고려부터 내려져 오던 가병들을 보유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했다. 군사력은 오롯이 나라와 조정을 통해서만 운용이 가능하도록 바꾼 것이다. 그러나 곡산척가에서는 버젓이 무인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것이 상왕과 지금은 태상가주가 된 척일이 내놓은 합의 중 하나였다.
“한 명도 빠짐없이 모였겠지?”
치원각에 소속된 무인들은 총 백 명이었다. 그들은 삼교대로 돌아가면서 곡산을 순찰하고, 무슨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지 관찰하는 역할이었다.
“예. 전부 소집해 놨습니다.”
“오늘 번은?”
“번을 맡을 서른을 제외한 일흔 명이 모두 모였습니다.”
척도철은 자신의 팔촌 정도쯤 되는 각주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치원각의 무인들이 한 곳에 모이자 뾰족뾰족한 투기가 일어나 척도철을 자극했다.
‘그 아이가 잘못 본 것이다. 그것을 내 증명해 주면 될 터.’
척도철은 허리춤에 찬 병장기의 촉감을 느끼며 결심을 다잡았다.
“주상전하의 명을 받은 사신단이 집성촌에 들어섰다 하였지?”
“예. 가주님.”
“사신단이 곡산척가 안에 발을 들여놓는 즉시…….”
척도철의 눈이 가늘게 좁혀 떠졌다.
“한 놈도 빠짐없이 추포하여 끌고 오라.”
“예, 예????”
치원각주의 눈이 크게 뜨였다. *****
“나가실 수 없습니다.”
“소사각주.”
척준영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망이각과 보왕각, 제근각은 대부분이 출타 중이었기 때문에 하필이면 이런 난감한 임무를 떠맡게 된 것이 소사각이었다. 척준영은 차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척사영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가주님의 명이십니다.”
“치원각주와 치원각의 무인들이 움직이는 것을 봤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리 말했지만 사실 척준영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제대로 아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척사영은 아니었다.
“아버님께서 제 말을 믿지 못하셨군요.”
척사영에게는 담벼락 바깥의 움직임이 그대로 느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척사영은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혹여나 중간에 제가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는 반드시 와서 절 부르세요.”
척사영은 문을 닫고는 척준영만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게 말했다.
“미워도 아버님이고 가주님인데 최악은 면해야 할 테지요.”
“…….”
척준영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
“멈춰라!!!!!!”
설미수를 필두로 한 사신단이 집성촌을 지나 곡산척가로 향하는 중에 우렁찬 호통이 터져 나오더니 사신단 주변으로 무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은 곡산척가의 허락 없이는 그 누구도 발을 들일 수 없는 곳이다!”
애초부터 막아서는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하는 말을 들으면 사신단이 강제로 집성촌 안으로 밀고 들어온 것처럼 들렸다.
“척도철 가주!!! 이 무슨 짓이오!!!!”
설미수가 호통을 치고 있는 척도철을 보면서 당황한 얼굴로 소리쳤다. 척도철의 용모파기를 보고 출발했기 때문에 설미수는 단박에 그를 알아봤다.
“또한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요! 이 조선은 주상전하의 것이지, 척가, 그대의 것이 아니외다!!”
명색이 사신단의 정사인 설미수였다. 조천사를 위해 한성판윤 직을 반납하고 총제직을 임시직으로 받았지만 설미수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이는 반역이오! 사신단의 앞길을 막아서다니! 게다가 분명 주상전하께서 교지까지 보내셨거늘!”
임금의 말은 절대적이다. 교지까지 받은 척가에서 이리 나온다는 것은 반역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고령이신 태상가주를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보낸다는 것이 대체 어느 나라의 국법이오! 태상가주께서는 조선의 신하가 아니오!”
척도철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물론 나이로 보나 관직으로 보나 태상가주인 척일은 서장관 자리에 맞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조정에 출사한 대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종사라 불리는 태상가주를 서장관으로 부린다는 것은 주상께서 척가를 길들이려 한다는 것이 본가의 생각이오. 따라서 이전의 조약에 근거해 우리 척가는!”
쿵!! 척도철의 전신에서 삼엄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고려 최강의 무인이라는 척준경의 공부를 이은 곡산척가다. 척도철을 비롯하여 화경의 고수가 무려 넷이나 있는 것만 봐도 척가의 잠재력은 결코 무시할 만한 것이 되지 못 했다. 그 정도로 화경의 고수를 배출할 만한 곳은 중원무림에서도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사림곡과 마교 정도 밖에 없었다.
“주상의 교지를 거부하오!”
“네 이노오오오옴!!!!”
설미수의 입에서 기어코 분노 어린 일갈이 터져 나왔다. 조선의 하늘 아래 사는 이가 임금의 교지를 거부한다? 조선의 대신으로서 녹봉을 받는 설미수의 입장에서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주변의 척가 무인들은 설미수의 말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 하늘이자 조국인 것은 조선과 임금이 아닌 곡산과 척가였기 때문이다.
“허니 모두!”
척도철의 입에서 웅웅거리는 소리와 함께 창룡후가 터져 나왔다. 쌓은 공부가 적은 이들이라면 이것만으로 심맥이 꼬이고 기혈이 진탕될 정도였다.
“순순히 오라를 받으시오!”
“척도철 가주! 기어코!!!”
“주상께 이 일의 부당함에 대해서 정식으로 항의할 것이외다! 그러니 그때까지 사신단의 신병은 우리 척가에서 관리하겠소!”
척도철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는 눈으로 사신단을 쳐다봤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척도철이 쳐다보는 것은 설미수나 동군영이 아니었다. 휘적휘적. 따분한 얼굴로 귀를 파고 있는 동군영 뒤의 만우였다.
‘저 자인가.’
척도철은 만우를 보자마자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몸이 절로 긴장하는 것이다. 자신을 긴장하게 만들 정도라니, 하지만 척사영이나 아버지인 척일이 말한 것처럼 그리 대단해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만우보다는 그 뒤에 서 있는 건장한 미남자가 훨씬 더 강하게 느껴졌다.
‘화경이 둘.’
사신단에 화경의 고수가 둘이나 있다니. 이 사신단은 결코 그냥 사신단이 아니었다. 임시사행이라고는 하지만 수행원들도 턱없이 적었고, 조공품도 거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리 수상한 사행단에 아버님과 사영이를 보내라? 흥.’
척씨세가의 가주인 척도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조선이 아니라 바로 척가였다. 딱 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이 사신단에 척가의 일족을 보내는 것은 가주로서 허락할 수 없었다.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아버지와 딸이라니. 팅. 만우는 귀를 후비적거리던 손가락을 빼서는 후 하고 불었다. 긴장한 기색이 드러나 보이는 이들 사이에서 만우만이 유독 튀었다.
긴장감이 하나도 없었을 뿐더러 경박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이노오옴!!!”
척도철의 입에서 기어코 고성이 터져 나왔다. 그때, 만우가 눈을 슬쩍 돌려 척도철을 쳐다봤다. 오싹
“…….”
그 순간 척도철의 몸이 멈칫하고 굳었다. 하지만 그것은 척도철의 의지가 아니었다. 만우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어떠한 기운이 그의 몸을 절로 멈추게 만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