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8. 연경 가는 길(1)2021.11.06.
“저도 가겠습니다.”
“사영아!”
“예, 가주님.”
척사영의 아비이자 곡산척가의 가주인 척도철이 고집을 부리는 딸을 보면서 인상을 썼다. 하지만 척사영은 눈썹 하나 깜박하지 않고서는 척도철의 눈빛을 받아 냈다.
“소녀, 무예의 길은 세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저 바깥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나이다. 그러니 소녀의 출가를 허락해 주십시오.”
척사영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척도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요구했다. 척도철은 유례없이 단단한 딸의 눈을 보면서 흠칫 놀랐다.
‘성장하였다.’
평생을 곡산척가가 있는 곡산에서만 지내온 척사영이었다. 바깥과의 교류가 없었음에도 눈부신 무재로 어린 나이에 꿈의 경지인 화경에 도달한 천재였다. 그런 척사영이 함주에 갔다 온다면서 나갔던 것이 근 1년이었다. 그 사이 척사영의 경지는 척도철과 비슷해졌다. 1년 사이에 놀라울 정도로 완숙한 화경의 경지에 오른 것이다.
“아버님께 네 이야기는 들었다. 허나 난 믿을 수 없다.”
“가주님. 태상가주십니다.”
“난 곡산척가의 가주다!”
척도철은 단호하게 말했다. 태상가주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현 가주로서, 곡산척가를 이끌어 나가는 척도철의 권위 역시 존중 받아야 한다. 그러니 태상가주의 권위라 해도 현 가주의 권위에는 닿지 못함을 자신의 딸에게 강하게 말한 것이다.
“화경의 고수는 저 먼 중원에도 많지 않다. 정저지와(井底之蛙)인 놈들이 무림십좌니 뭐니 하면서 줄 세우기를 하는 것도 그냥 지켜보기만 했지.”
곡산척가는 중원에서 한참 떨어진 조선에 본가를 두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교류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나마 가장 가까이 있는 모용세가를 통해 가끔씩 서신을 주고받으며 안부도 묻고, 무림의 정세 역시 정보를 받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 검주라는 조선인이 있다고는 들었다. 허나, 그자의 나이는 아직 이립도 채 되지 않았다 들었거늘.”
척도철은 태상가주인 척일과 척사영의 말을 믿지 못했다. 터무니가 없었기 때문이다. 화경에 다다르는 것이 모든 무인의 꿈이라고 할 수 있을 지언데, 그보다 더 위의 경지인 현경이라니.
“어찌 그것이 가능하겠느냐? 필히 사술일 터.”
“아버님.”
척사영의 기세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척도철은 그것을 보면서 척사영의 경지가 자신보다 결코 아래가 아님을 확실하게 깨달았다. 눈대중으로 짐작하는 것과 직접 피부로 느껴 보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저 밖에는 검주 대협을 제외하고도 소녀를 꺾은 무인이 둘이나 있었사옵니다. 한데 소녀가 겪은 것을 사술로 치부하시니, 어찌하여야 하는 것입니까.”
척사영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아니, 차분하다 못해 아무런 감정도 실려 있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척도철은 자신의 뜻을 꺾지 않았다.
“혼인을 올려야 할 나이의 과년한 처자가 어찌하여 자꾸 밖으로만 돌겠다 하는 것이냐. 내 너의 혼처를 찾아볼 터이니 그런 생각일랑 꿈도 꾸지 말거라.”
“허나 이는 주상전하께서…….”
“서장관이라니!!!!!!”
척도철의 사자후가 터져 나왔다. 그는 임금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그것도 아버님을! 주상이 미치지 않은 다음에야…….”
“아버님!!!!”
임금이 서장관으로 임명하겠다는 교지를 받은 것은 척사영이 아니라 바로 태상가주인 척일이었다. 대종사라 불리며 조선 무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척일을, 서장관으로 임명한다는 것 자체가 뜬금없는 일이었다.
“이는 임금이 우리 척가를 무시하는 처사이다. 어찌하여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우리가 지금껏 주상에게 양보해 준 것이 몇이거늘!”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까?”
척사영은 날카롭게 진실을 짚었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양측에서 한 발자국씩 물러나 양보를 한 것은 맞았다. 하지만 결국 끝을 보고자 했다면 무너진 것은 조선이 아니라 바로 곡산척가였을 것이다. 함주에 있는 상왕은 필요 없는 피를 흘리지 않고 싶어 했고, 당시 가주였던 태상가주 역시도 의미 없는 희생을 원치 않았다. 그것이 아니었더라면 새로운 왕조가 열리는 이 땅에서 곡산척가 같은 강력한 무가(武家)를 가만히 두지 않았을 것이다.
“이번 일로 소녀, 절실하게 느꼈사옵니다.”
척사영은 척도철의 말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소녀의 길은 아버지의 뜻과는 다르옵니다. 소녀의 길은 세가의 밖에 있사옵니다.”
“……그러면 내 너를 내칠 수밖에 없다.”
여인은 결혼을 하여 가정을 꾸리는 것이 인간의 완성이라 생각하는 척도철이다. 그러니 딸인 척사영의 재능을 안타까워하면서도 그녀를 아들 대신 가주로 세울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은 것이다. 그 누구보다도, 그 어떤 남자보다도 무재가 뛰어난 척사영의 재능을 외면해 버린 것이다. 척사영은 그런 척도철의 말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제가 가는 곳에 곧 척가가 있을 지언데, 어찌 저를 내치실 수 있겠사옵니까.”
“…….”
척도철과 호법인 척희운, 그리고 태상가주인 척일은 모두 장강의 앞 물이다. 아니, 적어도 척사영이 그들을 모두 밀어 낼 척가의 미래란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니 척사영은 당당했다. 그녀가 만우와 함께 다니면서 감복하고 감탄한 것은 만우의 무위만이 아니었다. 당당함과 자신감. 그동안 높은 경지를 이룩하고도 척 씨 성을 쓴다는 이유만으로, 여인의 몸이란 이유만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살았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니 척사영의 길은 곡산척가가 아니라 척가 바깥에 있는 것이다.
“내치셔도 좋습니다. 한데.”
척도철이 일어나라 하지도 않았건만 척사영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과연 나중에도 척가를 위해 소녀를 찾지 않으실 수 있겠사옵니까?”
쿠웅-!!!!
“그럼 소녀, 떠날 채비를 하겠사옵니다.”
척사영의 주변으로 묵직한 기운이 내려앉았다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리고는 목례를 하고 뒤돌아 나가는 척사영을 보는 척도철이 헛웃음을 지었다.
척사영이 선 곳, 그 주변으로 방바닥에 실금이 거미줄처럼 가있었다. *****
“서장관으로 노인네를 데려가는 건 너무 인력 낭비가 아닌가 싶은데.”
만우는 혼잣말로 이해가 가지 않는 듯 중얼거렸다. 서장관으로 임금이 교지를 보낸 곳이 곡산척가라는 것을 안 다음부터였다.
“까놓고 말해서 조선제일검 양반보다 그 노인네가 더 강한데.”
“허허헛.”
설미수가 만우의 투덜거림을 들으면서 웃었다. 본래 그런 생각을 잘 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만우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은 설미수도 생각이 같았다.
‘대종사께서 서장관이라.’
설미수는 빙긋 웃어 보였다. 이 길이 어떤 길인지 설미수는 잘 알고 있었다. 명천자의 말이 해석의 여지가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죄인을 호송해야 될 일이 임시사행으로 둔갑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서장관의 합류가 더욱 든든했다.
‘은공께서 하시는 말씀대로라면, 전하께서 그만큼 무사귀환을 바란다는 말씀이시겠지.’
만우의 죄명은 명의 황실을 농락했다는 것이었다. 조선인인 만우가 명의 황실을 농락했으니 그 죄인을 붙잡아 호송하라는 것인데, 이게 미묘하게 조선과 명나라 간의 자존심 싸움 비슷하게 된 셈이다.
‘대종사께서 정말 제일검보다 강하시다면.’
곡산척가의 무인들은 세간에 알려진 기준과는 다르게 놓고 평가를 해야 한다는 말이 있었다. 하지만 조선이 건국되면서 곡산척가의 정계 진출이 막혔기 때문에 그들의 많은 것은 사실 비밀에 쌓여 있었다.
“이제 곧 곡산에 도착합니다.”
“만우. 제발 부탁인데 곡산척가에 가거들랑 그 말조심 좀…….”
“아이고 부사 나리. 알아서 잘 할 터이니 걱정하지 마십쇼. 거참 아직도 그 소심한 성격은…….”
“만우!!!”
“내가 가르쳐준 무공은 잘 익히고 계십니까?”
동군영이 만우에게 간곡하게 호소하면서 만담하듯 이야기하는 둘을 보는 설미수가 빙긋 웃어 보였다. 목숨을 내놓고 하는 임시사행이나 다름없었지만, 왠지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늘 명나라에 갈 때마다 허리가 닳아 없어지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설설 기어야 했던 설미수다. 그런데 왠지 이번에는, 그럴 필요가 없을 것만 같은 막연한 느낌이 들었다. 땅덩어리가 크다는 이유만으로 늘 조선의 상국임을 자처했던 명나라였다. 그 명나라에만 가면 코가 땅에 닿을 정도로 납작 엎드렸어야 했던 설미수다. 그러면서 수도 없이 상상하곤 했었다.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명천자에게 큰 소리를 칠 수 있는 그런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그런 부질없는 생각을 말이다.
‘과연 부질없는가?’
설미수는 곡산척가가 있는 곡산의 집성촌이 저 멀리 보이는 곳에서 서로 투덕대는 동군영과 만우를 보면서 부드럽게 웃었다. *****
“재밌네.”
만우는 집성촌에 들어온 직후부터 자신들을 신기하게 쳐다보는 척 씨 성을 쓰는 사람들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
방매가 그런 만우를 보고는 고개를 갸웃해하며 물었다.
“작은 마을이지만 놀랍도록 평화롭잖아?”
“작은 고을이면 당연한 거 아니야?”
사람이 적으면 당연히 평화롭다. 방매는 그게 당연했기 때문에 만우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만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대개는 그렇지 않거든.”
“마을이 작으면 평화롭지가 않다고? 에이. 사는 사람이 적으면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도 적어지는 거잖아.”
거기다 여기는 집성촌이었다. 모두 척 씨 성을 쓰는 사람들이 모여 있으니, 핏줄로 다들 얽혀 있는 셈이었다. 물론 외부인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집성촌이라고는 하지만 근친혼을 올리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니 대부분은 주로 여인들이 이 마을에서 척 씨 성을 쓰지 않는 유일한 사람들인 셈이다.
“대부분 고을의 크기가 작고, 사는 사람들의 수가 적으면 말이야.”
만우는 한양이나 개경처럼 사람들로 인해 북적거려서 활기가 넘치지는 않지만 고요하면서도 질서 잡힌 집성촌의 풍경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누군가 한 명이 절대권력을 가지게 되거든.”
“절대권력?”
“촌장 같은 사람들 말이야.”
이곳 집성촌에 사는 사람들은 대략 120여 가구, 약 500명 정도였다. 곡산척가를 중심으로 마을이 만들어진 형태이기 때문에 집성촌 어느 곳이든 곡산척가의 장원이 보였다.
“음…… 그런데?”
방매는 여전히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만우는 그런 방매를 보면서 피식 웃었다. 세상의 험한 면을 굳이 모든 사람이 다 눈으로 보고 직접 확인해 가면서 살 필요는 없었다. 방매도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하지만 만우의 그것과는 절대적인 깊이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의 욕심이란 본래 끝이 없거든. 그래서 그런 절대권력을 쥐게 되면 이런 작은 고을이라고 해도 그 안에서 위계질서가 나뉘고 계급이 나뉘게 되지.”
촌장 옆에서 콩고물을 주워 먹기 위해 아첨을 하는 자들이 세력을 이루게 되고, 그렇게 영악한 자들이 제 배를 불릴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되면 사는 사람이 백도 안 되는 작은 고을 안에서도 나은 사람과 못난 사람이 나뉘게 된다.